항목 ID | GC06201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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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安 差使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정헌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함안 차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함안 차사(咸安差使)」는 반드시 죄인을 단죄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함안 땅으로 부임한 마지막 관리가 부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된 노아(蘆兒)의 계교에 빠져서 결국 부친의 죄를 다스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놀림감이 되었다는 기생의 지략담이고, 함안 차사라는 명칭 유래담이다. 또한 부친을 살린 자식의 관점에서 보면 「함안 차사」는 효행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채록/수집 상황]
1587년에 편찬한 경상도 함안군 읍지인 『함주지(咸州誌)』에 실려 있는 것을, 2005년 함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함안의 구전 설화』의 40쪽에 재수록하였다.
[내용]
군내에 한 흉악한 범죄로 사형에 처할 죄인이 있어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어 단죄키로 하였다. 그 흉악범에게 노아라 불리는 딸이 있었는데 기생이었다. 딸은 절세미인으로 뛰어난 문장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 아비의 죄를 다스리러 관리들이 오면 요염한 작태로 그들을 현혹하니 결국은 죄인의 죄도 다스리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마지막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과단성 있는 사람을 뽑아 보내기로 하였다. 그는 "전임자는 그 여식의 요염한 작태에 녹아 죄를 주지 못하였다. 나는 그 요물을 보지 않고 그 죄만 다스리면 된다."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노아는 형리(刑吏)가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앞질러 칠원영포역(靈浦驛)으로 갔다. 그녀는 역리(驛吏)와 공모하여 소복단장을 곱게 하고 시골 여자 모습으로 있었다. 형관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부엌 뒤에서 보일 듯 말 듯한 모습을 보이니 형관이 그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해는 이미 저물어 형관은 역졸 집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그 집 늙은이에게 오늘 역정에서 소복 단장한 여인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 늙은이는 "노파의 천한 아이인데 어디 쓸 만한 얼굴이겠습니까?"라고 넌즈시 말했다. 형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집 심부름꾼에게 그 여자와 다리를 놓게 하였다. 그날 밤 뜻을 이루고 두 사람은 강물이 말라도 정은 변치말자고 맹세했다. 옥설같은 노아의 팔에 형관의 이름을 새기고 후일을 기약하였다.
닭이 울고 날이 밝으니 노아가 먼저 일어나면서 임금의 사절이 누추한 시골 계집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것이 소문나면 좋지 않다며 후일을 기약하자 하고 남몰래 집으로 달려왔다. 형관은 그날 즉시 군에 일러 흉악범의 딸을 붙잡아 형틀에 묶어 놓고 부하에게 명하여 조금도 사정없이 국문하라고 하였다. 그때 계집아이는 "죽어 마땅하지만 잠깐 자신의 사정을 들어달라."고 울며 부르짖었다. 사령을 시켜 글을 가져오라고 명하니, 그 글 처음에는 원통한 사연을 쓰고, 이어서 "노아의 고운 팔에 이름 쓴 이 그 뉘던가, 살결에 새긴 글이 글자마다 분명한데, 차라리 낙동강이 말라 없어도, 맹세한 첩의 마음 변할 길이 있으랴[蘆兒玉臂是誰名 刻入肌膚字字明 寧見洛東江水盡 妾心終不負初盟 ]"라는 시가 한 수 있었다.
형관이 깜짝 놀라 문을 열어 보니 며칠 전 영포역 촌녀가 분명하였다. 그제서야 요망한 계교에 당한 것을 깨달았으나 후회막급이었다. 곧 복통으로 일을 못 보겠다 하고 소임을 바꾸어 갔다. 일반적으로 함흥 차사와 함안 차사가 있는데, 이른바 함안 차사는 여기서 연유한다.
[모티프 분석]
「함안 차사」의 주요 모티프는 '기녀의 관리 놀리기', '함안 차사 유래' 등이다. 즉 「함안 차사」는 '함안 차사'라는 말이 생기게 된 유래담이며, 다른 하나는 기녀가 관리를 능멸한다는 기녀 모티프이다. 「함안 차사」와 같은 종류의 기녀 모티프는 당시 시대상을 담고 있는데, 부패한 관리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회자되었다. 아울러 「함안 차사」는 잘 알려진 함흥 차사 이외에 함안 차사도 있었다는 내력을 알려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