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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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運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1592년 시작되어 1598년 종결된 임진왜란 당시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서 전개된 의병의 활동.
[개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서는 전국에서 많은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창의하여 활동하였다. 밀양 지역에서도 의병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의병은 자신들이 익숙한 지형을 이용하여 매복 또는 기습 작전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의병의 활동에 힘입어 일본군의 이동이 지체되거나 병력과 군량의 보급에 차질이 발생하여 전세가 변하게 되었다.
특히 밀양 지역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주요 침략로 가운데 하나인 제1로[중로]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전쟁 초기부터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 발발 초기부터 의병이 창의하여 작원관 전투에 참전하여, 관군과 함께 항쟁함으로써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히고, 일본군의 진격을 지체시켰다. 강화 회담이 진행되던 시기에도 밀양 지역은 영남의 남부 지역에 머물렀던 일본군에 의하여 약탈을 겪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의병운동이 이어졌다. 정유재란 때도 일본군의 재침로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는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곽재우(郭再祐)의 창녕 화왕산성 전투 등에 참여하면서 활동을 이어 나갔다.
[밀양 지역 의병운동의 기반]
임진왜란 때 활발하게 전개된 의병운동은 대부분 전국적인 단위가 아니라 거주하는 군현(郡縣)이나 지역 단위로 진행되었으며, 의병운동에 필요한 기반도 생활권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주목되는 세력이 각 지역의 재지사족(在地士族)이다. 16세기 이래 사족의 지주적(地主的) 성격 강화, 사화(士禍)로 인한 낙향 관료의 증가, 재지사족의 향촌 사회 기반 확보가 진행되었는데, 이것이 향촌 사회에서 의병이 창의·기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밀양은 도호부(都護府)로서 재지사족의 형성이 다른 지역보다 앞선 선진 지역이었다. 밀양은 사족들의 토지 결수(結數)가 많았으며 농업 생산성도 높은 지역이었는데, 15~16세기의 정치적 변동을 계기로 낙향한 사림(士林) 계열이 중심이 되어 향촌 지배 질서를 구축하던 곳이었다. 더욱이 밀양 지역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관직에서 물러나 제자를 양성한 곳이어서 영남 사림파 형성에서 주요 거점이었다. 이에 일찍부터 사족들의 향사당(鄕社堂) 건립 움직임이 활발하였으며, 15세기 말 건립된 유향소(留鄕所)는 의병을 모으고 운용하는 과정에서도 활용되었는데, 전쟁 중에는 의병소(義兵所)라는 통제기구로 이용되었다.
특히 밀양박씨, 일직손씨, 광주안씨, 평산신씨, 여주이씨 등 16세기 중엽의 ‘향사당좌목(鄕社堂座目)’이나 ‘24선생안(先生案)’에 등장하는 가문들이 16세기에 밀양 향촌 사회를 주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의한 가문도 대부분 이들 가문이었다. 아울러 재지사족들은 혼맥(婚脈)으로도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호응할 수 있었다.
일찍 향교(鄕校)가 설립되었던 밀양에서는 손씨(孫氏), 박씨(朴氏), 변씨(卞氏) 등을 중심으로 유명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김종직도 향교의 질적 향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밀양향교는 향촌 사회 지배세력의 성장에 기여하였는데, 임진왜란 때는 밀양 지역의 서당(書堂)과 함께 의병의 모병과 구성에 작용하였던 학연(學緣)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향교와 서당에는 밀양 지역의 광범위한 유생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모병을 위한 통문(通文)을 돌리기에도 유리하였다. 한편 서원(書院)도 의병의 창의와 소모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서원은 16세기에 사림의 정치세력화 과정에서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 기구로서 작용하였다. 밀양 지역에서는 1567년(명종 2)이라는 이른 시기에 김종직을 배향하는 덕성서원(德城書院)이 창건되었는데, 현재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으로 남아 있다.
16세기에 재지사족들은 향촌 지배 기구를 바탕으로 향약(鄕約)을 시행하였는데. 밀양 지역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향약이 시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직접적으로 향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의병장으로 활동한 손기양(孫起陽)은 부계동에서 동헌(洞憲)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었다. 특히 의병운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재지사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재지사족들의 기여는 토지 경작자 전호(佃戶)에 대한 지주의 강한 구속력 때문에 가능하였다. 밀양 지역의 재지사족들은 거주지 주변의 전토(田土)와 노비를 거느린 지주로서 경제적인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재지사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군량 조달에 기여하였으며, 노비는 군사로 의병에 동원될 수 있었다. 한 예로 밀양의 의병장 손인갑(孫仁甲)의 사촌은 집안의 가노(家奴)와 식량을 보내 손인갑의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밀양 지역 의병운동과 의미]
임진왜란 때 밀양 지역에서는 7년 전쟁의 전개 추이에 따라서 의병운동도 전개되었다. 먼저 밀양 지역에서 임진왜란 초기부터 의병운동이 자발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향토 수호 의식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활동했던 의병은 활동 목표나 창의 동기 측면에서 크게 살펴보면 향토 중심의 지역 방위를 목표로 한 향병(鄕兵), 한성(漢城) 수복과 실지(失地) 회복과 같은 국가 방위를 목표로 한 충의군(忠義軍)으로 구분된다.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당한 밀양 지역을 포함한 영남 지방의 의병은 향병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에 임진왜란 초기부터 밀양 지역에서는 생존을 위한 지역민의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강화 회담 시기에도 밀양 지역은 남해안에 주둔한 일본군의 약탈이 지속되었으므로 지역민들은 생존을 위한 항쟁을 이어 갔다. 정유재란 때에도 밀양 지역은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면서 거쳐 간 지역이었기 때문에 의병운동이 지속되었는데, 주로 관군의 장수로 편입된 곽재우와 김응서(金應瑞)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밀양 지역의 의병도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운동의 성격 변화에 따라 변화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밀양 지역은 일본군의 진격로에 위치하여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의병을 창의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밀양 지역의 지역민들은 생존권 확보와 향촌 사회 유지를 위하여 의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표적으로 작원관 전투에서는 밀양박씨인 박수(朴守)가 의병을 이끌고 밀양부사 박진(朴晉)의 휘하에서 참전하였으며, 김유부(金有富)는 효평(孝坪)에서 매복으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작원관 전투의 패배 이후 밀양부사 박진은 석동(石洞)에 주둔하였다. 석동은 밀양 지역민들의 피난처였는데, 석동에서 밀양의 여러 재지사족들이 본격적으로 의병을 창의하였다. 이때 여주이씨, 밀성손씨, 김녕김씨 가문이 창의를 주도하였다. 세 가문의 이경홍(李慶弘)과 아우 이경승(李慶承), 손기양, 김선홍(金善洪) 등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향촌 사회를 이끌고 있던 재지사족들이었다. 석골사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인근 지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활약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밀양 지역 의병의 상층부를 형성하였던 이들은 재지사족으로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며, 사승(師承) 관계와 교유 관계로 넓은 학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운동에서 상호 유기적인 협조가 가능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밀양 지역의 의병이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의병들이 전략과 전술을 철저하게 준비하여 일본군에 대응하였기 때문이다. 의병은 중요 거점 중심의 점선 점령을 하였던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밀양 지역의 자연 지리를 이용한 유격전이나 게릴라 전법으로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더욱이 전쟁이 경과하면서 밀양 지역민들도 전공을 세우면 신분 해방, 관직 제수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의병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밀양 이외 지역의 의병운동 참여]
임진왜란 때 의병의 창의나 활동이 향촌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전개었지만, 전란의 규모가 전국적이었던 까닭에 의병운동의 범위는 차츰 도(道) 단위로 확장되기도 하였다. 이에 밀양의 의병도 다른 지역과 연계하여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으며, 전황에 대한 정보 입수를 위하여서도 다른 지역 의병들과 긴밀히 협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밀양 출신이거나 밀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인물들이 밀양 밖의 지역에서 의병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승병장으로 활약하였던 사명당 유정(惟政), 경상우도 의병장 정인홍(鄭仁弘) 휘하에서 활약하였던 손인갑(孫仁甲), 곽재우 휘하에서 활동하였던 다수의 참여자들이 있다.
밀양 출신의 사명당 유정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군(義僧軍)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승병 활동을 주도하였다. 사명당 유정은 직접적인 전투 참전, 산성의 축조 및 복구, 강화 회담 주도 등을 수행하였다. 사명당 유정은 전란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강원도로 북상하자,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궐기하고 평양성 탈환 2차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의 군량 보급로를 차단하였으며, 직접 승병들을 이끌고 선봉장으로 나서 모란봉을 공격하여 대승을 이끌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충의에 따라 의병을 창의하였던 손인갑은 주로 낙동강을 방어하였는데,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인홍과 함께 무계, 사원동, 마진 전투 등에서 활약하다 전사하였다. 손인갑의 아우 손의갑(孫義甲), 아들 손약해(孫若海)도 손인갑 휘하에 참전하였다. 손약해는 아버지 손인갑의 전사 후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을 조직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다.
곽재우 휘하에서 활동한 밀양 인물들은 대부분 정유재란 시기에 창녕 화왕산성에서 활약하였다. 곽재우의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는 초기 의병에 참여한 밀양의 조이복(曺以復), 손시약(孫諟約), 이경홍(李慶弘), 이경승(李慶承) 등이 기록되어 있다. 후기 의병에 참여한 이영(李英), 박종민(朴宗閔), 박수춘(朴守春), 손기성(孫起誠), 박인립(朴仁立), 김언량(金彦良) 등은 「화왕산동고록(火旺山同苦錄)」에 이름을 올렸다. 이 밖에 아산장씨 장형(蔣珩), 김해김씨 김천(金天), 밀양박씨 박수와 박몽룡(朴夢龍), 청도김씨 김극유(金克裕), 손계상(孫繼祥), 송응현(宋應賢)·송걸(宋傑) 부자, 안숙(安璹), 허응길(許應吉) 등도 곽재우 후기 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 밖에도 전쟁 초기 밀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울산과 경주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김태허(金太虛), 김태허 휘하에서 울산 전투에 가담하여 군비 조달에 기여한 안신(安㺬), 초기에 밀양에서 활약하다 경주·울산 진영 의병에 들어가 활동하였던 김유부(金有富), 진주성 전투에 지원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사망한 조경형(曺慶亨),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한 박취문(朴就文), 밀양에서 세거하다가 한양으로 이주한 후 강원도 삼척에서 참전하여 전사한 장경신(蔣敬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