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39
한자 韓鳳根
영어공식명칭 Han Bong Geun
이칭/별칭 금산(錦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가곡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선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한봉근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0년대 초 - 한봉근 사립 동화학교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10일 - 한봉근 의열단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한봉근 밀양·진영 폭탄 반입 사건 준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한봉근 중국으로 탈출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한봉근 상해청년동맹과 의열단의 불화를 조정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1월 - 한봉근 의열단 제2차 대표자 대회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2월 - 한봉근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투탄 의거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한봉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한봉근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가곡동 - 경상남도 밀양시 가곡동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동화학교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72[내일동 494-1]지도보기
활동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활동지 상해 - 중국 상하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의열단원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한봉근(韓鳳根)[1894~1927]의 아호는 금산(錦山)이다. 1894년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가곡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00년대 초 한봉근전홍표가 설립한 사립 동화학교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강탈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 4~5월 경 길림(吉林)에서 김원봉, 이종암, 김상윤 등과 함께 기거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9년 11월 10일 한봉근은 길림의 호림(虎林)에서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 의열단의 1차 암살 파괴 계획에서 한봉근윤세주, 신우동과 함께 폭탄을 투척하는 임무를 맡았다. 3월 곽재기가 중국 안동현에서 경상남도 밀양의 김병환에게 폭탄을 반입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경기도경찰국에 탐지되어 폭탄은 압수되고 12명이 체포되었다. 이에 한봉근은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5월 중순경 이성우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의 강원석에게 무기를 반입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폭탄 투척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돌아왔다. 하지만 또 다시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밀양·진영 폭탄 반입 사건으로 알려진 거사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압수한 폭탄을 한강에서 시험한 결과 그 위력이 대단한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한봉근은 증거불충분으로 방면되었고, 1921년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1925년 한봉근은 상해(上海)에서 의열단 간부로 활동하였는데, 상해청년동맹과 의열단의 불화가 발생하자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의 대표로 중재에 나서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1926년 11월경 광동성(廣東省) 동산(東山) 한동근의 자택에서 의열단 제2차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는 김원봉, 권준, 이영준, 최하청, 유자명, 김경수, 오성륜, 한봉근, 안유재, 이춘암, 강평국, 강세우, 김성숙, 장지락, 한반은 등 30여 명이 모여, 의열단의 진흥책과 조선 독립운동의 실행 방법 등을 결의하였다. 이에 앞서 의열단은 김창숙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열 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1926년 7월 21일 천진(天津)에서 김창숙, 유자명, 한봉근, 이승춘, 나석주가 회합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 투척을 결의하였다. 이후 한봉근 등은 김창숙이 모금한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신채호가 보관 중인 폭탄을 확보하는 등 거사를 준비한 뒤, 1926년 11월 광동성의 대표자 대회를 마치는 대로 국내로 잠입하였다. 폭탄 투척은 애초 유자명·한봉근·나석주·이승춘이 함께 실행하려 하였으나, 나석주가 단신으로 결행하게 되었다.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의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자, 한봉근도 「폭발물 취급법」 위반 혐의로 수배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한봉근은 무사히 국내를 빠져나가,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는 프랑스조계에 있는 엄항섭의 자택에 오성륜·김전 등과 함께 피신하였다. 엄항섭은 프랑스조계의 경찰에 통역인으로 고용된 것을 빌미로 독립운동가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하였다. 이후에도 한봉근은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는데, 1929년 일제의 미체포자 명단에서 한봉근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봉근은 1927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한봉근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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