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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725
한자 朴元亨
영어음역 Park Wonhyeong
이칭/별칭 지구,만절당,연성군,문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 산 48번지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변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411년연표보기
몰년 1469년연표보기
본관 죽산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 증조부는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정당문학(政堂文學) 박문보(朴文珤)이고, 할아버지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낸 박영충(朴永忠)이며, 아버지는 병조참의를 지낸 연흥군(延興君) 박고(朴翶)이다.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이한(李澣)의 따님이다. 아들은 찬성사(贊成事) 박안성(朴安性)이다.

[활동사항]

1432년(세종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1434년(세종 16)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계공랑(啓功郞)을 제수 받고, 이어서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도염서령(都染書令)·병조좌랑(兵曹佐郞)·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사복시소윤(司僕寺小尹)·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다.

1444년 사복시판관이 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사복시윤(司僕寺尹)이 되고, 이듬해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453년(단종 1)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가 되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좌부승지·우승지를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후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로서 명나라 사신 진감(陳鑑)의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이어 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함길도 도순찰사로 나가서는 부령진(富寧鎭)을 설치하여 관방(關防)을 튼튼히 하였다. 1458년(세조 4)에는 야인(野人)에게 관작을 준 데 대하여 힐책하러 나온 명나라 사신 진가유(陳嘉猷)의 원접사가 되었으며, 이어 주문 겸 사은사(奏聞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1년(세조 7) 홍문관(弘文館)이 설치되자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였으며, 1464년(세조 10)에 우찬성(右贊成)을 제수 받았고, 1466년에는 우의정(右議政)에 승진되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함길도존무사(咸吉道存撫使)가 되어 함길도에 가서 백성을 존무하고,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예조판서를 겸하였다.

1468년에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승정원(承政院)에 나가서 서무(庶務)를 의결하였으며,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에 영의정이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특히 과문(科文)에 뛰어났다. 성품이 청렴하여 집안 잔치에도 유탕한 노름이 없이 경계하고 후손에게 교훈하는 뜻이 있었다. 이러한 뜻을 아들 박안성에게 남긴 시 한 수가 『사재촬언(思齋撮言)』에 전한다.

[묘소]

묘소와 비(碑)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 산 48번지에 있으며, 1471년(성종 2) 신도비가 세워졌다. 신도비는 성종 2년 8월 20일에 세웠다는 연기(年記)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내용 판독이 어렵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헌(文憲).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행장은 이임소(李林召)가 썼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1.02 인명 한자 수정 박문요(朴文瑤) -> 박문보(朴文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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