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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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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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창원황씨는 남편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3일 동안 목숨을 연명시켰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곧 남편을 따라 자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가솔들을 부탁한다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자녀의 혼인을 끝내고는 집안 식구들에게 이별을 고한 뒤 자진하여 남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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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갈리에 있는 효행비. 지극한 효성으로 동몽교관이 된 창원황씨 황섭(黃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갈리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7㎝, 너비 58㎝, 두께 19㎝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신에 비해 머릿돌이 매우 커서 사방에 받침기둥을 마련하였다. 글자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비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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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대여촌면 가방동(加芳洞)과 사동(沙洞), 금산면 중촌동(中村洞) 각 일부를 병합하여 사동의 이름을 따서 장사리라 하였다. 사동은 무제봉 통사바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형국이 흡사 가래삽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삽골’ 또는 ‘삿골’로 불리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하여 오는 이야기로는 이 곳 상의마을에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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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판문동에 있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댐과 남강댐에 의해 생긴 인공호수. 진주를 흐르는 남강의 근원은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는데 경호강이라 부르며, 다른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덕천강으로 부른다. 이 두 강이 진주 시내 서쪽 광탄(光灘)[너우니]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 제방을 쌓고 사천만으로 방수로를 뚫어 남강 하류의 홍수를 방지하자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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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풍리에 있는 창원황씨(昌原黃氏) 재실. 동산재는 1680년에 창원황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제를 지낸다. 내부에는 황석기(黃石奇), 황상(黃裳), 황준(黃濬), 황윤의(黃允義), 황우(黃瑀), 황여필(黃汝弼)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된 재실이다. 창원황씨의 경우 시중공파·소장공파·공희공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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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와 성씨들이 대성을 이루어 모여 사는 마을. 진주는 신라시대 구주의 하나로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항상 영남의 계수관으로 그 위치를 지켜왔으며 토성세력도 강성하였다. 진주의 성씨는 정(鄭), 하(河), 강(姜), 류(柳), 소(蘇), 임(任), 강(康), 김(金), 박(朴)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진주목(晉州牧) 조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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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추성원(秋成元)의 표창을 상신하고 답을 받은 문서. 추성원은 조선 후기 순조와 고종 때의 효자이다. 12~13살 때 부친 추민중(秋敏中)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허벅지 살을 베어 드렸고, 어머니 창원황씨가 병마에 고통당하자 산중을 헤매며 약초를 캐어 탕을 지어 올리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하동과 곤양 주민들 서른 명이 천하에 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