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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속지 제3권/열행(烈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10030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마 죽지 못하는 것은 두 어린 아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아들이 아내를 두게 되자 곧 이르기를 “나의 뜻이 원한대로 이루어졌다.”라 하고 결국은 약을 마시고 죽었다. 갑오년(숙종 40년, 1714)에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지도보기

재령이씨(載寧李氏) : 효열부(孝烈婦). 사인(士人) 진양(晉陽) 하응림(河應霖)의 아내요, 학생 이태로(李台老)의 딸이다. 일찍 지아비를 잃고 시아버지가 늙어 의지할 데가 없었다. 남편이 자식이 없는 것을 생각하고 구차스럽게 남은 생명을 연장시켰다가 뒷날 그 남편의 제삿날에 함께 제사지내고 곡하며 슬픔을 다하다 침실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익찬(翊贊) 최흥원(崔興遠)이 도장(道狀)을 지어 이르기를 “죽음으로써 스스로 획책하지 못할 것이 아니지마는 차마 하지 못한 것은 시아버지가 세상에 계시는 날을 늘이려 한 것이니 그 효성이 어떻다고 하겠으며, 아이를 장성시켜 하씨(河氏)의 사당에 대대로 향불을 지키게 했으니 그 의로움을 어떻다고 하겠는가? 머리 허연 부녀자로서 죽지 않는다고 누가 허물하겠는가마는 부군의 제삿날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그 열행(烈行)을 또 어떻다고 하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정조(正祖)가 교서를 내리기를 “시아버지에게는 효(孝)했고 자식에게는 의(義)로웠으며 지아비에게 열(烈)했으니 무릇 한 몸으로 세 가지 행실을 함께 한다는 것은 일찍이 드물게 들리는 바”라 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고 여(閭)는 단동(丹洞)에 있다.

전주유씨(全州柳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강엄(姜曮)의 아내요, 사인(士人) 유훤(柳烜)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뜻과 행실이 단정하면서도 조심스럽더니 혼례를 오라버니 유만경(柳萬頃)의 임지에서 행했다. 그 지아비가 병에 걸려 죽으니 유씨가 달려가 곡하고 이르기를 “곧 마땅히 남편을 따를 것이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석 달만 지나면 서로 만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몸에 있는 아이가 겨우 7개월이었기 때문이다. 딸을 낳고는 그 지아비가 뒤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을 애통해 하면서 마시거나 먹지 않았다. 간혹 목구멍 사이에서 소리가 있었으니 즉 ‘석 달 뒤에 따라 죽을 것입니다.’라는 말이었다. 결국은 곧 세상을 마쳤다. 감사(監司)가 조정에 알려 정려(旌閭)를 입었다.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재령(載寧) 이덕유(李德裕)의 아내다. 기해년(숙종 45년, 1719)에 남편을 잃자 마음속으로 함께 묻히기를 맹세하고 스스로 염의(殮衣)를 입은 채 독약을 마시고 자진했다. 5년 뒤 계묘년(경종 3년, 1723)에 특별히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남평문씨(南平文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함안(咸安) 조경진(趙經鎭)의 아내다. 경인년에 그 지아비가 병에 걸려 죽으니 문씨가 돌을 품고 강물에 잠겨 세상을 마쳤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뒷사람이 강 위 돌에 ‘열녀암(烈女巖)’이라고 새겼다.

칠원윤씨(漆原尹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청주(淸州) 한석건(韓碩建)의 아내다. 일찍 남편을 잃고 슬퍼하다 죽음에 이르니 정유년(영조 53년, 1777)에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진양정씨(晉陽鄭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창녕(昌寧) 성사해(成師海)의 아내요, 사인(士人) 정사갑(鄭師甲)의 딸이다. 그 지아비가 일찍 죽으니 피로 글씨를 써서 세 번이나 영구(靈柩) 앞에 두고 갓 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암행어사의 계문(啓聞)으로 인해 병자년(순조 16년, 1816)에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함안조씨(咸安趙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해주(海州) 정상천(鄭相天)의 아내다. 홀로 된 시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을 섬김에 매우 공경히 했다. 지아비가 죽자 손수 영결을 고하는 글을 시어머니와 본가에 써서 두고 곧 조용히 따라 죽었다. 숙종(肅宗) 대에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정언(正言) 이약렬(李若烈)이 여명(閭銘)을 지었다.

안동권씨(安東權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울산(蔚山) 김유신(金有信)의 아내다. 열부로서의 행적이 탁월하고 특이했으므로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 강양이씨(江陽李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조윤(曺玧)의 아내다. 나이 18세에 처음으로 비녀를 찔렀는데 미처 시집도 가기 전에 지아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도보로 분상(奔喪)했으나 시신은 이미 염(殮)했다. 장례 치르는 범절을 몸소 점검하고 이어 말하기를 ‘살아서 집을 같이 해야 할 것’이라 하고 결국은 양식을 끊은 지 7일 만에 조용히 자진했다. 임진년(순조 32년, 1832)에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진양하씨(晉陽河氏) : 열부(烈婦). 진사 함안(咸安) 조용화(趙鏞和)의 아내이다. 지아비가 죽어서 성빈(成殯)하던 날에 따라 죽으니 고종(高宗) 대에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안동김씨(安東金氏) : 열부(烈婦). 변입(卞岦)의 아내다. 임진왜란 때 변입은 그의 아버지 변연수(卞延壽)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종군하여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진으로 달려갔다. 여러 번 군공을 세웠고 정유년(선조 30년,1597)에 당포(唐浦)의 싸움에서 부자(父子)가 군진에서 함께 죽었다. 김씨는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날 목숨을 판가름했다. 고종(高宗) 대에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명령하고 숙부인(淑夫人)을 추증했다.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죽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죽고 지어미는 남편을 위해 죽었으니 ‘변씨의 삼강려(三綱閭)’가 이것이다.

진양하씨(晉陽河氏) : 효열부(孝烈婦). 증감찰(贈監察) 진양(晉陽) 정상규(鄭翔奎)의 아내다. 지아비가 병들었을 때 겨울철 산 물고기가 이르고 산 꿩이 날아온 기이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단계(端溪) 김인섭(金麟燮)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안동권씨(安東權氏) : 효부(孝婦). 사천(泗川) 이진광(李震光)의 아내다. 그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혔는데 권씨가 크게 부르짖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구해내니 시아버지는 다행히 무사했다. 숙종(肅宗) 대에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 열부(烈婦). 연일(延日) 정연항(鄭蓮恒)의 아내다. 나이 22세에 시집갔는데 지아비는 나이 14세에 죽었다. 부모가 그의 젊은 나이를 가련하게 여겨 다시 시집을 보내고자 하니 김씨는 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 광주노씨(光州盧氏) : 효부(孝婦). 효자 김해(金海) 김언상(金彦祥)의 아내다. 시아버지가 병드니 노씨가 허벅지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그 시어머니가 또 병이 위독하자 밤낮으로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쏟아 부으니 향리가 감동하여 신복했다. 신사년(고종 18년, 1881)에 감사(監司)의 계달(啓達)로 인해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효부(孝婦). 효자 경주(慶州) 김성률(金聲律)의 아내다. 시어머니가 학질을 앓아서 고통이 심해 거의 숨이 끊어지기에 이르렀는데 강씨가 울면서 하늘에 빌고 가만히 허벅지의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니 즉시 나아서 천수를 마쳤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열부(烈婦). 김중철(金重哲)의 아내다.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김에 순종했다. 남에게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종족에게는 예(禮)로써 대접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했다. 남편이 오래도록 학질에 걸렸는데 인육(人肉)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의 허벅지를 베어 먹였다. 이로써 조금 나았다가 재발하니 또 오른쪽 허벅지를 베어 먹이고 이르기를 “병이 만약 낫지 않는다면 맹세코 같은 날에 목숨을 함께 하리라.”고 했다. 그러던 남편이 죽자 따라서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삭녕최씨(朔寧崔氏) : 효부(孝婦). 효자 김석공(金錫恭)의 아내다. 시어머니가 오래도록 병중이었는데 곁에서 조리하고 간호함이 지극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옛날이야기로 귀를 즐겁게 하고 혹은 등에 업거나 팔을 이끌어 어린아이와 같이 하여 그 병의 울적함을 잊게 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진양정씨(晉陽鄭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최태재(崔泰載)의 아내다. 그 지아비가 죽으니 집안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여자가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는데 나는 지금 키워 낼 자식이 없으니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이 옳다. 내가 죽거든 같은 무덤에 장사지내 달라.”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효부(孝烈婦). 감찰(監察) 경주(慶州) 김준섭(金俊燮)의 아내다. 효열(孝烈)로써 순종(純宗)대에 감사(監司) 황철(黃鐵)의 계달에 의지하여 돈과 비단으로 상을 주고 이어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이상은 정려(旌閭)를 입은 것이다.

재령이씨(載寧李氏) : 효부(孝婦). 증좌승지(贈左承旨) 한시회(韓時晦)의 아내요, 행정(杏亭) 이중광(李重光)의 딸이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했다. 시집가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겼다. 숙종(肅宗)대에 효성으로써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장흥고씨(長興高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전의(全義) 이광림(李光臨)의 아내요, 사인(士人) 고응추(高應樞)의 딸이다. 남편이 일찍 죽고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고씨가 이르기를 “삼종(三從)의 의리가 끊어졌으니 지아비를 지하에서 따르는 것이 옳겠다.”고 했다. 시어머니 박씨(朴氏)가 울면서 타이르고 그치게 하여 이르기를 “네가 따라서 죽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누가 어떻게 한 가닥이나마 보전하고 아들을 가려서 죽은 남편의 뒤를 잇게 하겠느냐?”라고 하니 고씨가 번연히 느껴 깨달았다.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쓴 글씨를 관 안에 넣으며 맹세하여 이르기를 “후사를 정하는 것을 기다려서 바라던 바와 같이 할 것입니다.”라 했다. 조카를 데려다가 양자를 세우고서는 말하기를 “해야 할 일을 마쳤다.”고 했다. 이러고서 7일 동안을 먹지 않다가 죽으니 이 날이 지아비의 상을 끝내는 날이었다. 정조(正祖)대에 감사(監司)의 포장하는 장계(狀啓)에 의지하여 세금과 부역을 면제했다.

진양정씨(晉陽鄭氏) : 효부(孝婦). 밀양(密陽) 손홍은(孫弘殷)의 아내다. 그의 시아버지가 병을 얻어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니 손가락을 끊어 입에 피를 쏟아 넣어 회생시켰으나 남은 증세가 아직 있었다. 이때 꿈속에서 어떤 사람의 지시가 있어 집 뒤 바위틈에서 영험스런 산삼을 캐어 바쳤더니 마침내 쾌차했다. 그 시어머니가 학질을 앓아서 여러 달이나 고통이 심하자 가만히 허벅지를 베어 먹이니 곧 나았다. 순조(純祖) 대에 조정에서 세금과 부역을 면제시키고 경신년에는 마을 사람들이 효부비(孝婦碑)를 세웠다.

전주이씨(全州李氏) : 효열부(孝烈婦). 남양(南陽) 홍경섭(洪敬燮)의 아내다. 어린아이 때부터 천성이 효순했다. 17세에 지아비가 병으로 죽었다. 이에 시어머니가 따라 죽고자 하니 열부(烈婦)가 이르기를 “지어미가 지아비를 따라서 죽는 것은 의로운 것이지만 어찌 어머니가 아들을 따라서 죽는 이치가 있겠습니까?”라 하고 백방으로 너그럽게 위로하여 마침내 그 뜻을 돌리게 했다. 장례 치르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유감이 없도록 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묘에 올라가서 곡하여 슬픔을 다했다. 시어머니를 효순으로 봉양하고 집을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다스렸다. 그리고 조카를 데려다가 남편의 뒤를 잇게 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자 상제(喪制)를 마치고서 집 식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일을 끝냈다.”라 하고 조용히 의(義)로서 처신했다.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관부(官府)에 알려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 강씨(姜氏) : 열부(烈婦). 김서룡(金瑞龍)의 아내다. 지아비가 병들어서 위태하더니 민속의 처방에 의지해 두어 되의 쌀을 가지고 가만히 산에 가서 빈(殯) 속에 두었다가 다음 날 밤에 가지고 와서 죽을 만들어 마시도록 드린 것이 세 번이었으나 효력이 없었다. 가만히 밤에 허벅지를 베어 정육(正肉)이라 속이고 구어 드렸더니 남편이 “남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열부가 이르기를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다시 베어 구워서 드리니 남편의 병이 쾌유되었다.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탄복했다.

이상은 세금과 부역을 면제한 것이다.

○ 정경부인강씨(貞敬夫人姜氏) : 열녀(烈女). 충의공(忠毅公) 정기룡(鄭起龍)의 아내요, 주의 아전 강세승(姜世昇)의 딸이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왜적을 피해 본주의 성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손가락의 피로 적삼에 써서 남편에게 죽음을 고하고는 그의 어머니 및 소고(小姑)와 더불어 촉석루(矗石樓)지도보기 아래 남강(南江)지도보기에 몸을 던져 죽었다.연표보기

진양강씨(晉陽姜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조명지(趙明智)의 아내다. 혼인을 하고서 신부가 시집에 들어가지도 전에 남편이 죽으니 강씨는 즉시 따라 죽고자 했다. 집안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이를 가졌으니 죽지 말라.”고 권했으므로 두어 달이 지난 뒤에 그것이 헛된 것임을 징험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회산황씨(檜山黃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청주(淸州) 한용임(韓用恁)의 아내다. 지아비가 죽으니 빈소에 들어가서 운명(運命)했다.

김해허씨(金海許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창녕(昌寧) 성치린(成致麟)의 아내요, 사인(士人) 허란(許鑾)의 딸이다. 평소에 지어미된 도리를 지킴에 매우 삼갔다. 남편의 죽음을 곡함에 이르러서는 따라 죽으려다가 “3년의 상기(喪期)를 정성으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고는 흐트러진 머리와 때가 낀 옷으로 그 제(祭)을 마치고 상이 끝나는 날에 조용히 목숨을 끊으니 향리의 사람들이 모두 그 아름다운 절개를 탄식하고 칭송했다.

해주정씨(海州鄭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하경위(河慶緯)의 아내요, 사인(士人) 정한현(鄭漢賢)의 딸이다. 평상시 생활에서는 지어미의 도리를 지극히 갖추었다. 지아비가 일찍 죽자 장례를 끝내고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순흥안씨(順興安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남상검(南尙儉)의 아내요, 학생 안계호(安季琥)의 딸이다. 나이 19세에 지아비의 상을 당하자 머리를 베고 귀를 끊어서 관 속에 드리고서 뒤를 이을 자식이 장성하기를 기다렸다가 결국은 음식을 끊고 따라 죽었다.

진양하씨(晉陽河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전주(全州) 최상린(崔祥鱗)의 아내다. 시어머니와 맏며느리의 초상이 함께 있어 시아버지의 명령으로 집안에서 살림살이를 바꾸어 맡고 모든 조카들을 자신의 소생과 같이 어루만지며 양육했다. 이러다가 남편이 죽자 마음속으로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면서도 밖으로는 슬퍼하는 뜻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집안사람들의 지키고 감시하는 것이 약간 풀어진 어느 날 밤에 침실에서 약을 마시고 따라 죽었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함안(咸安) 조용한(趙鏞漢)의 아내다. 집에 있을 때는 효도하고 순종한다고 일컬어졌다. 남편에게 시집가서는 부모를 섬기는 것으로써 홀시어머니를 섬겨 환심을 얻었다. 지아비가 병들자 강씨는 정성스럽게 빌어 대신하기를 원하더니 숨이 끊어질 즈음 집안사람이 부인을 불렀으나 강씨는 이미 빌던 장소에서 이미 목숨을 끊은 뒤였다.

재령이씨(載寧李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조재봉(趙在鳳)의 아내다. 혼인한 지 겨우 1년 만에 남편이 중병에 걸렸다. 이에 정성을 다해 간호했으나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이씨는 곧 따라 죽고자 했으나 친척들이 “뱃속에 있는 것을 가지고 너그러운 데로 비하라.”고 하므로 이씨가 이르기를 “천만다행으로 아들을 낳으면 망부를 이을 것이지만 만약 딸을 낳으면 처음 마음먹은 대로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다가 해산을 하니 과연 딸이었으므로 남편의 조카에게 부탁하여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남편과 함께 동혈(同穴)로 하기를 원한다.”라고 하고 이미 눈을 감고 기절했다.

의령남씨(宜寧南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허주(許柱)의 아내다. 혼인한 지 다음 해에 불행하게 남편이 죽었다. 이에 9일 동안 곡식을 끊고 먹고 마시지 않다가 동혈(同穴)의 바람을 이루었다.

재령이씨(載寧李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남평(南平) 문희순(文熙純)의 아내다. 평소에 특이한 행실이 있었다.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으로 효도의 범절을 다하다가 그 지아비가 죽자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고 장례 치르는 날에 침착하게 나아가서 동혈(同穴)의 바람을 이루었다.

해주정씨(海州鄭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하정원(河正源)의 아내다. 어려서는 효순했고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했다. 그 남편이 병에 걸리니 손가락을 찢어서 피를 내어 수일 동안 연명하게 되더니 남편이 죽자 물과 간장도 마시지 않았다. 장사를 끝내고는 남기는 글을 써서 시아버지와 아버지께 영결을 고하고 조용히 목숨을 끊으니 당시에 나이 20세였다. 도내의 선비 이진상(李震相)·박치복(朴致馥)·곽종석(郭鍾錫) 등 수백 명이 암행어사 및 감영과 감사(監司) 민정식(閔正植)에게 사실에 근거하여 조정에 알릴 것을 호소했으나 아직 정려(旌閭)를 입지 못하니 세상에서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해주정씨(海州鄭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하규원(河珪源)의 아내다. 성품이 단정하고 정숙한 규범(閨範)이 있었다. 남편이 죽자 울면서 슬퍼함이 다른 사람보다 더 깊었다. 빈(殯)과 염(斂)과 소상과 대상과 담제에 예제(禮制)를 정성되게 했다. 시부모를 섬김에 더욱 효성스러웠으며 가정을 다스림에도 오직 부지런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재물이 없으면 지아비의 제사를 받들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더니 첫 번째 제삿날에 남편의 묘에 가서 살펴보고 곡하며 이르기를 “내가 손수 음식을 올리는 것도 금년뿐입니다.”라고 하고 그날 저녁에 집안 맏며느리에게 말하기를 “시부모의 봉양은 오직 동서(同壻)에게 있습니다. 내가 남편을 따라 가는 것이 의(義)에 무엇이 상(傷)하는 것이겠습니까?”라 했다. 이어 침실로 돌아가서 자결하니 습렴(襲殮)의 도구를 일일이 갖춰 두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 효열부(孝烈婦). 사인(士人) 유달영(柳達永)의 아내다. 지아비를 섬기고 시부모를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으로써 했다. 불행하게도 일찍이 과부가 되었다. 다만 한 어린아이가 있더니 슬픔을 자제하면서 시부모를 너그럽게 위로하고 아침저녁의 문안과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조심했다. 과부로 30년을 살면서 음식도 소채로 하고 의복도 소복으로 했으며 세수하지 않고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병들자 똥을 맛보아 그 쾌차를 징험하고 나아가서는 손가락을 찢어서 피를 대어 결국은 이미 끊어졌던 목숨을 회생시켰다. 상을 당하자 송종(送終)을 꼭 예(禮)에 맞게 했다.

벽진이씨(碧珍李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전주(全州) 최동태(崔東泰)의 아내요, 사인(士人) 이승효(李承斅)의 딸이다.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더니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의 피를 입에 대었으나 효력이 없었다. 이에 칼을 꽂아 죽고자 했다. 좌우의 제지를 당하니 결국 손수 송종(送終)의 의금(衣衾)을 재단하여 유감됨이 없게 했다. 그는 멀리 갈 날을 이미 가렸던 것이니 밤에 침실에 들어가서 시집올 때의 의복을 입고 독약을 마셨다. 따로 유서를 써서 광주리에 두었는데 동서들에게 시부모를 잘 봉양할 것을 부탁하고 어린아이에게 부업(父業)을 바꾸지 말 것을 경계했다. 집안사람들이 합장(合葬)했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과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등 여러 인사 수백 명이 여러 번이나 진정했으나 감사(監司)가 들어주지 않았다.

밀양박씨(密陽朴氏) : 효열부(孝烈婦). 진양(晉陽) 하용택(河龍宅)의 아내요, 집의(執義) 박재호(朴在皥)의 손자다. 나이 7~8세 때로부터 홀로 된 어머니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나이 17세에 혼인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었다. 밤을 새워 급히 돌아가서 송종(送終)의 준비를 손수 스스로 재단하고 기약을 지켜 유감이 없게 했다. 3년의 상제(喪制)를 한결같이 오직 예(禮)로써 했다. 시부모가 이른 과부가 된 것을 민망하게 여겨 다시 시집보낼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박씨가 살펴서 알고 차분히 울면서 시부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지어미는 남편에게 비록 다만 한 번 얼굴을 대하고 한 번 더불어 가지런히 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종신토록 지어미의 도리를 고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시부모가 울면서 사과했다. 좁은 골짜기에 풍속이 눈에 아득한 것을 싫어하여 친정에 돌아가 소박하고 누추한 집을 가려 살면서 세수도 하지 않고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으며 발자국을 집 밖으로 내지 않았다. 비록 형제의 친척일지라도 함께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길쌈만 계속했다. 굶주림도 참고 저축해 50세의 나이에 이르러 집안 형세가 조금 펴지니 창고와 집을 짓고 시부모를 맞이하여 편히 봉양했다. 상(喪)을 당해서는 장례의 준비와 상제(喪制)의 예(禮)에 슬픔을 갖추니 그 효열(孝烈)의 뛰어남은 비록 옛 여사(女士)라고 하더라도 드물 것이다.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진양(晉陽) 하용도(河龍渡)의 아내요, 사인(士人) 최영순(崔永淳)의 딸이다. 시부모를 예로써 섬겼다. 남편이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자 최씨는 살아서 의지할 데가 없음을 애통히 여겨 즉시 따라 죽고자 하다가 이르기를 “자식이 없는 초상인데 내가 어찌 예(禮)를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담제(禫祭 : 초상으로부터 27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에 스스로 몸에 부칠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고 제사를 끝내고는 세상을 마쳤다.

함안이씨(咸安李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재령(載寧) 이중환(李中煥)의 아내다. 그 남편이 병에 걸려 일찍 죽으니 이씨의 나이 바야흐로 16세였다. 이를 깨물고 스스로 맹세하더니 마침내 곡식을 끊고 따라 죽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 그의 열행(烈行)을 알렸다.

○ 강씨(姜氏) : 열부(烈婦). 본관이 진주(晉州)이니 사인(士人) 하상현(河尙顯)의 아내요, 감사(監司) 강윤(姜潤)의 손자다. 시부모를 정성으로 섬기니 사람들이 중간에서 하는 말들이 없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염습(殮襲)과 궤전(饋奠)을 몸소하여 소홀함이 없게 하고 슬퍼함이 예제(禮制)를 넘었다. 시부모를 섬기는 것을 평시와 같이 하다가 대상(大祥)에 이르러 스스로 따라 죽었다.

진양정씨(晉陽鄭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재령(載寧) 이인호(李仁浩)의 아내다. 그의 남편이 나이 15세에 일찍 죽으니 정씨는 그 시부모를 위로하고 조금도 슬프고 측은한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번 따라 죽고자 하다가 집안사람들에게 발각되어 그친 지가 오래되었다. 그의 부모가 그 정상을 불쌍하게 여겨 다시 시집보내고자 하니 가만히 자기 방에 들어가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 그의 열행(烈行)을 알렸다.

전주이씨(全州李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함안(咸安) 조응규(趙應奎)의 아내요, 사인(士人) 이건주(李建柱)의 딸이다. 남편이 죽으니 약을 마시고 동시에 따라 죽었다.

○ 신씨(申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재령(載寧) 이충엽(李充曄)의 아내다. 혼인하여 시댁에 돌아갈 때에 겨우 16세였더니 다음 해에 남편이 죽었다. 빈렴(殯殮)의 준비와 장례 음식을 일일이 몸소 다했다. 어느 날에 김부실(金副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고 자식도 없는데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듣는 자도 또한 울었다. 이로부터 김(金)이 의심하여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도 함께 잤다. 얼마가 지난 뒤에 잠을 깨어 찾아보니 이미 목숨을 끊었다.

창녕조씨(昌寧曺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한진권(韓鎭權)의 아내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후손이다. 남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늘에 빌고 손가락에 피를 내어 정성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초종(初終)의 준비와 상장(喪葬)의 범절을 반드시 몸소 하여 소홀함이 없게 했다. 영연(靈筵)을 거두고서 즉시 방에 들어가서 약을 마셨다. 이때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는 지난 해 변을 당하던 달과 같은 날이었던가?”라 하고 곧 숨을 거두었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한진영(韓鎭永)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자 지극한 정성으로 구호했다. 남편이 죽자 집안사람들이 “뱃속의 아기가 있으니 너그러운 데로 비유하라.”고 했다. 얼마 후에 딸을 낳았으나 기르지 못하고 마치니 남편의 묘에 가서 살펴보고는 결국은 돌을 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 한진영은 곧 한진권(韓鎭權)의 아우니 같은 시기에 있었던 두 가지 열행이었다. 듣는 이들이 슬퍼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합천이씨(陜川李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해주(海州) 정창석(鄭昌錫)의 아내요, 사인(士人) 이시영(李時榮)의 딸이다. 남편이 병들어 죽으니 나이 서른에 가깝도록 자녀가 없는 것을 슬프게 여기지 않았다. 관(棺)에 부칠 물건들을 모두 손수 다스리고 그 남편의 형에게 부탁하여 남편의 후사(後嗣)를 정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밤에 남편의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 오래토록 나오지 않았다. 부당(夫黨)이 의심하여 불렀으나 응답이 없어 문을 열고 보니 남편의 시신과 함께 누워 자는 듯이 죽어 있었다. 원근(遠近)에 듣는 이들이 놀래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효부(孝婦). 사인(士人) 성경철(成慶喆)의 아내요, 강기섭(姜崎燮)의 딸이다. 효성으로 그 시어머니를 모시되 능히 몸과 마음의 봉양을 다했다. 시어머니에게 중한 병이 있어서 3년 동안 하늘에 빌어 마침내 신령스러운 효력을 얻었다. 나이 20여 세에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과부 시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니 보는 이들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뒤에 시어머니의 상(喪)을 당해서는 피눈물로 상제(喪制)를 마쳤고 또 자식을 가르침에 심히 엄했다. 혹 기쁘게 놀고 부지런히 글을 읽지 않으면 매질을 하고 꾸짖어 이르기를 “아비 없는 자식은 옛날부터 성취(成就)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집안 명성이 너에게 와서 땅에 떨어진다면 나는 맹세코 죽어서도 너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 효부(孝婦). 사인(士人) 진양(晉陽) 하계락(河啓洛)의 아내요, 사인(士人) 박인호(朴寅浩)의 딸이다. 천성이 순효(順孝)하여 시부모를 받들고 남편을 대접하며 어린 애들을 어루만지고 종당(宗黨)에 처신함에 예(禮)가 있고 법칙이 있어 백 가지 행실이 갖춰졌다. 그가 계모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에도 또 남이 어렵게 여기는 것이 있었으니 향리에서 모두 그 효의(孝義)에 감복했다.

진양하씨(晉陽河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김해(金海) 허정(許禎)의 아내요, 사인(士人) 하경춘(河慶春)의 딸이다. 17세에 시집가서 시부모에게 승순(承順)하더니 남편이 우연히 모진 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구호하여 아침저녁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종에 이르러서는 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입에 넣었다. 하지만 마침내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니 미음 두 그릇을 가지고 와서 후생(後生)과 본생(本生)의 두 시어머니를 위호하고 초종(初終)의 염의(斂衣)를 친히 스스로 재단했다. 가인(家人)이 보기에 탄연(坦然)하더니 갑자기 시신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한 소리로 길게 애통해 하고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온 집안사람들이 놀라 문을 열어보니 칼로 찌른 흔적이나 독약을 마신 흔적도 없이 조용히 시신 곁에서 자진했다. 분묘를 조성하는 날에는 술잔을 드리는 길이 가득 메었고 사림(士林)에서는 비(碑)를 세워 그 아름다운 절개를 알렸다.

진양하씨(晉陽河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함안(咸安) 조인제(趙鱗濟)의 아내요, 사인(士人) 하정식(河廷植)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가졌더니 10세에 그 어머니를 잃고 매우 슬퍼했다. 아버지가 넘어져 여러 달을 자리에 누우니 밤낮으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15세에 시집갔으나 다음 해에 남편이 죽었다. 하씨는 처음에는 슬퍼하는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니 시어머니가 마음으로 이상히 여기고 시할머니가 방을 함께 하면서도 노비(老婢)에게 밤낮으로 살피도록 했다. 제삿날이 이르기를 기다려 시할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결국은 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남긴 글이 있었으니 거기에는 옆에서 살피는 게 심해 일찍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을 깊이 한탄하고 또 말하기를 “반드시 따로 빈(殯)을 만들지 말고 다만 혼백(魂魄)을 망부(亡夫)의 영 곁에 두었다가 그를 철거할 때를 기다려 함께 묻어 달라.”고 했다. 이를 듣는 이들이 모두 탄식하고 조문하는 이가 매우 많았다.

재령이씨(載寧李氏) : 열부(烈婦), 진양(晉陽) 강휘준(姜彙俊)의 아내다. 지아비의 집이 매우 가난하여 그 본래의 생모(生母)를 후가(後家) 낭실(廊室)에 모시고 두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더니 이씨도 승순(承順)하여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어느 날 밤에 큰비가 오더니 강휘준이 본생모를 낭실에서 모시다가 비바람이 크게 치고 산골짝의 물이 갑자기 닥쳐서 집이 떠내려가고 모자(母子)가 함께 빠졌다.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서 이씨가 비로소 알았더니 즉시 죽을 끓여서 시어머니께 드리고 이어 울면서 고하기를 “남편이 집안에서 세상을 마쳤다면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자녀를 키워서 부자의 뜻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만 지금은 지아비가 이미 물에 빠졌으니 첩(妾)이 마땅히 물에 들어가서 시신을 찾아야겠습니다.” 하고는 치마를 고쳐 입고 물로 달려가서 죽었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서 부부의 시신을 한 곳에서 얻으니 보는 이들이 그 열행(烈行)을 기이하게 여기고 이를 슬퍼했다.

성산이씨(星山李氏) : 열부(烈婦). 사인(士人) 진양(晉陽) 정규로(鄭奎魯)의 아내다. 성품이 정숙하고 온순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남편의 병에 머리카락을 잘라 약을 대었고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원했다. 남편이 죽은 뒤에 연제(練祭)를 끝내고서 자기 방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해허씨(金海許氏) : 효열부(孝烈婦). 진양(晉陽) 정재윤(鄭在允)의 아내다. 일찍이 과부가 되었으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 또 집이 가난했으나 정성을 다해 시어머니를 모시더니 시아버지가 일찍이 병이 들어 꿩을 생각했다. 부인이 하늘에 빌고 조금 있으니 꿩이 갑자기 날아서 처마 밑으로 들어와 삶아 드리니 병이 나았다. 나중에 사촌의 아들을 취해 후사로 삼고 서숙(書塾)을 두어 가르쳤다. 뒷날 남편의 기일(忌日)에 글로써 고(告)하기를 “지금에 이르기까지 죽지 못한 것은 늙으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당(堂)에 계시고 당신의 후사가 없었던 탓이었습니다. 지금은 시부모께서 세상을 하직하셨고 사자(嗣子)가 집을 한 가닥으로 이을 것이니 당신을 따라 가더라도 다시 남은 감회가 없습니다.” 하고 결국은 자진(自盡)했다.

재령이씨(載寧李氏) : 효열부(孝烈婦). 진양(晉陽) 정운창(鄭運昌)의 아내다. 전실(前室)에 다만 네 딸이 있고 이씨도 또한 자식이 없었다. 남편이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고 하늘에 빌어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러다가 장차 죽으려 하자 시부모 봉양과 딸들 시집보내기와 후사를 세워 종가(宗家)를 이을 것을 모조리 부인에게 부탁했다. 부인은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고 늙은 시아버지를 위해 너그럽게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조카를 데려다가 후사를 삼고 딸을 시집보내며 늙은 시아버지를 봉양하다가 천수를 다 누리고 세상을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는 집안과 방을 깨끗이 쓸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금 돌아가서 남편을 보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고 침실로 들어가서 조용히 죽음에 나갔다.

청송심씨(靑松沈氏) : 열부(烈婦). 진양(晉陽) 정문혁(鄭文赫)의 아내다. 성품이 효순하더니 남편이 병에 걸려 여러 달을 조섭하며 치료하다가 마침내 임종에 이르렀다. 급히 도끼로써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대었으나 소생의 여망이 없자 열부(烈婦)는 기절했다가 곧 일어났다. 이어 그 시어머니를 위로하여 비유하기를 “자식이 연로한 어머니를 버리고 갔는데 애통하여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미음을 권해 드렸다. 이 뒤로부터 슬프고 측은해 하는 표정이 없고 오직 습렴(襲殮)의 범절에 힘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에 집안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종이돈을 만들어 상자에 두었으니 내가 죽어서 나를 염(殮)할 때에 저 가슴속에 두면 내가 장차 지하에서라도 남편의 곤란한 것을 구할 것이다.”라고 했다. 집안사람들은 그 허탄한 것을 의심하면서도 범연히 들었었다. 이날 밤에 침실에 들어가서 오래도록 숨 쉬는 소리가 없자 시어머니가 괴이하게 여겨 가서 보니 옷을 바꾸어 입고 바로 누웠는데 기운은 이미 끊어졌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열고 보니 과연 재단한 종이로 지화 모양과 같은 것이 있었다. 듣는 사람들이 흐느껴 울지 않음이 없었다.

○ 최씨(崔氏) : 의부(義婦). 정세현(鄭世鉉)의 아내다. 타고난 품성이 정숙하고 순종하여 집에 있을 때는 효녀로 일컬었다. 18세에 시집가서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남편이 병을 얻어 매우 위독하니 울면서 시어머니께 고하여 이르기를 “지아비가 죽으면 지어미는 따르는 것이 도리이니 맹세코 장차 같이 갈 것입니다.”라고 하고 손가락을 끊어 입에 대어 넣고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원했다. 하룻밤에 10여 번이나 하니 손에 완전한 손가락이 없었으되 정세현은 과연 살아났다.

청주한씨(淸州韓氏) : 열부(烈婦). 남양(南陽) 홍재형(洪在馨)의 아내다. 홍재형이 젊은 나이에 일찍 죽으니 열부는 19세의 젊은 나이로 남편이 죽던 날 저녁에 남편을 따르는 귀신이 되었다. 고을과 이웃이 듣고 그 의열(義烈)의 뛰어남을 존경하고 탄복했다.

창원황씨(昌原黃氏) : 열부(烈婦). 가선(嘉善) 강정환(姜廷煥)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을 찢어서 피를 쏟아 3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남편이 죽으니 남편의 남긴 부탁에 의지하여 즉시 따라 죽지 못했다. 자녀의 혼인을 끝내고 곧 집안 무리에게 이별을 고한 뒤에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마쳤다.

의성김씨(義城金氏) : 열부(烈婦). 유치덕(兪致德)의 아내다. 남편이 강화(江華)에서 객사하니 김씨는 천리 길을 달려가서 시신을 짊어지고 돌아와 선산에 안장(安葬)했다. 14년이 지난 뒤에 남편의 제삿날에 자녀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내가 세상을 마칠 마음이 때때로 간절하지 했으나 너희들이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내가 할 일이 끝났다.”라고 하며 제사상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 열부(烈婦). 장한우(張翰佑)의 아내다. 나이 l8세에 혼인하여 시댁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남편이 죽었다. 머리를 풀고 달려가서 성복(成服)하는 날에 이르러 즉시 칼을 물고 엎드려 세상을 마쳤다. 고을 사람들이 그 큰 절개를 슬퍼하여 조그만 빗돌을 세워 새겼다.

나주임씨(羅州林氏) : 열부(烈婦). 남양(南陽) 홍차수(洪次壽)의 아내다. 남편이 병에 걸려 약과 음식으로 낫기가 어려우니 하늘에 비는 정성을 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함께 묻힐 뜻을 시어머니께 고하고 두 아들을 세 동서에게 부탁한 다음, 남편이 죽는 날 밝은 새벽에 침실에 들어가서 세 번 ‘함께 갑시다.’를 부르고는 다시 소리가 없었다. 문을 열고 보니 홀연히 남편의 시신 곁에 누워 있었다. 그 의열(義烈)의 우뚝함에 고을과 이웃이 경탄했고 두 채의 상여가 언덕으로 향하기에 이르러서는 조문하는 이가 매우 많았다.

윤선랑(尹宣娘) : 열부(烈婦). 김차권(金且權)의 아내다. 선랑은 본래 함안(咸安)의 좋은 집의 딸이더니 병자년(고종 13년, 1876)에 큰 흉년에 흘러들다가 주(州)의 청원촌(淸源村)에 이르러 최씨(崔氏) 집에 불을 때는 종이 되었다. 주인의 어머니가 나쁜 병이 있더니 정성을 다해 곁에서 모시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편이 일찍 죽음에 그 시어머니를 잘 봉양할 것을 동서에게 부촉하고 후사를 세워 남편의 뒤를 이어줄 것을 남편의 아우에게 부탁한 다음 곡식을 끊고 따라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열행을 장하게 여겨 관청에 알리고 비석을 세워 표창했다.

○ 정부인하씨(貞夫人河氏) : 열부(烈婦). 참판(參判) 허안인(許安仁)의 아내요, 참봉(參奉) 하혼(河渾)의 딸이다. 정려(旌閭)를 그 후손이 의령(宜寧)으로부터 옮겨왔다. 와룡리(臥龍里)지도보기

○ 이씨(李氏) : 열부(烈婦). 통덕랑(通德郞) 강운(姜沄)의 아내요, 효자 이교(李郊)의 딸이다. 정려(旌閭)를 그 후손이 함안(咸安)으로부터 옮겨왔다. 동물곡(冬勿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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