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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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敏 |
영어음역 | Park M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경준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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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생년 | 1566년(명종 21)![]() |
몰년 | 1630년(인조 8)![]() |
본관 | 태안(泰安) |
자 | 행원(行遠) |
호 | 능허(凌虛) |
추증 | 좌승지 |
제향 | 정강서원(鼎岡書院) |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행원(行遠), 호는 능허(凌虛).
1566년(명종 21)에 태어나 정구(鄭逑)에게서 『대학(大學)』과 『심경(心經)』을 배웠다. 당시의 권세가였던 정인홍(鄭仁弘)을 만나보고 스승인 정구에게 정인홍을 멀리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모두 그의 말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를 못마땅히 여기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원익(李元翼)이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였다.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되돌아가 1630년(인조 8) 별세할 때까지 학문을 익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군(州郡) 백성들이 창의(倡義)하여 그를 강우의병장(江右義兵將)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의병을 거느리고 상주에 이르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후에 기자헌(奇自獻)이 그를 찾아가 강가에서 낚시질하다가 시 한 수를 지어주었는데, “천지에 눈보라치니 모든 풀은 시들었는데, 그대의 마음은 대나무같이 푸르도다.”라고 하여 그의 철석같은 절의를 기렸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정구는 그의 기국이 충후함을 인정하여 제자들에게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을 말하고는 하였다. 그 뒤 장현광(張顯光)을 만나 역리(易理)를 의논할 때 장현광은 그의 높은 학문에 감탄하였다.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정강서원(鼎岡書院)과 정산(鼎山)의 향현사(鄕賢祀)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