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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102
한자 鄭誠謹
영어음역 Jeong Seonggeun
이칭/별칭 이신(而信),충절(忠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장경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아버지 정척(鄭陟)
성별
몰년 1504년연표보기
본관 진주(晋州)
이신(而信)
시호 충절(忠節)
추증 이조참판
제향 구암서원(龜巖書院)[경기도 광주]
대표관직 승지(承旨)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이신(而信). 대제학을 지낸 정척(鄭陟)의 아들이다.

[생애]

출생년은 미상이다. 1474년(성종 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1475년(성종 6)에는 홍문관부응교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폈다. 1479년 수찬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그 뒤 해주목사와 경기도경차관,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이때 해주목사로 재직할 때의 부정 사실로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1481년 부교리로서 승지의 업무를 맡을 만한 인물로 추천된 바 있었고, 경차관(敬差官)으로 경기도에 파견되어 교동현의 유민(流民)을 진휼하였다. 148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어 역시 민심을 두루 살폈다. 그 뒤 홍문관전한을 거쳐 대마도선위사(對馬島宣慰使)로 파견되다. 이 때 대마도주가 주는 화선·호초(胡椒) 등을 모두 되돌려주자, 그 뒤에 도주가 그 물건을 또 특별히 보내와서 나누어주게 하였으나, 그가 완강히 사양하므로 왕은 그 물건을 도로 대마도에 돌려보냈다. 1487년 시강관으로 경연에서 용인(用人)의 법도를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으며, 이해에 직제학이 되었다. 1494년 성종이 죽자 3년간 수묘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부모가 돌아가자 여묘살이하며 상기를 마치고 애통해하며 예법을 다하였다. 1495년(연산군 1) 행호군으로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1497년에 다시 서용되었으나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수되었다.

[학문과 사상]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90년 반우형(潘佑亨)·표연말(表沿沫)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중종 즉위 후에 신원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아들 역시 녹용(錄用)되었다. 1507년(중종 2)에는 정문이 내려졌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경기도 광주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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