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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973
한자 美術
영어의미역 art / the fine arts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김수현

[정의]

그림이나 조각처럼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며 눈으로 볼 수 있는 미를 표현하는 예술.

[개설]

진주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주민이 살아오면서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미술문화가 전개되었다. 이는 가야시대 토기류 같은 현존 유물이나 신라시대의 화성(畵聖) 솔거(率居)가 유마상(維摩像)을 그렸다는 문헌기록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 왜구의 침략, 임진왜란 등의 거듭된 전화(戰禍)로 많은 유물들이 소실되거나 약탈되어 현재 남아 있는 미술품들이 많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강희안(姜希顔)[1417~1464]·강세황(姜世晃)[1712~1791] 등 유명한 문인화가들의 활동이 진주 미술의 뛰어난 위상을 알려준다. 근현대에 들어 진주는 경상남도 서부의 문화중심지로 떠오르며 새로운 미술가, 후원자, 수집가 등의 활동에 의해 현재의 면모를 이루어냈다.

[변천]

1. 선사시대

최근까지 2차에 걸친 남강댐 건설과 관련된 수몰예정지역의 유적지 발굴로 진주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지속된 우리나라의 최대 선사유적지임이 확인되었다. 진주시 대평면 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지석묘)과 석관묘에서 홍도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남강 귀곡동유적(貴谷洞遺蹟)의 지석묘 받침돌에서는 눈과 입, 코를 새긴 듯한 석각(石刻) 그림이 10여개 정도 관찰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진주박물관과 경상대학교 박물관을 비롯한 전국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2. 가야-신라시대

진주지역에서 출토된 가야 유물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하거나 대도시 수집가들에게 반출되었다. 진주시 수정동옥봉동(玉峰洞)의 산등성이에는 7기의 가야고분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발굴되어 유물들은 도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현재 옥봉고분군(玉峰古墳群)의 유적지에는 1기의 봉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주는 한때 가야토기 수집의 중심지였다. 최규진이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한 차륜식토기(車輪飾土器)는 보물 제6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시대에는 솔거가 진주 단속사(斷俗寺)에 유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며, 단속사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2기는 당시 진주 및 인근 지역의 미술문화가 번성했음을 알려준다. 금선암에 봉안된 단성석조여래좌상은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석불이다.

3. 고려시대

진주시 평거동계원리 등지에 산재한 고려시대의 고분들은 진주지역이 당시 번성했음을 알려준다. 신라 말과 고려 초에는 진주에 자기소 3개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전한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시대의 많은 미술품들이 전화로 인해 없어졌다. 일본에 있는 연지사신라동종(蓮池寺新羅銅鐘)은 1375년(우왕 12))에 왜구가 약탈한 것이다.

진주시에 있는 고려시대 미술품으로는 진주 용암사지 승탑(晉州龍巖寺址僧塔)[보물 제 372호], 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晉州妙嚴寺址三層石塔)[보물 제379호] 등의 보물과 용암사지석불, 삼선암 고려동종(三仙庵 高麗銅鐘), 진주 평거동 석조여래좌상(晋州平居洞石造如來坐像), 진주 두방사 다층석탑(晋州杜芳寺多層石塔) 등이 전한다.

4.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진주지역 서화가로는 경재(敬齋) 하연(河演)[1376~1453], 정암(整庵) 정척(鄭陟)[1390~1477],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1395~1459] 등이 글씨로 이름 높았다. 강석덕의 아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1419~1465]은 독보적인 시·서·화 삼절(三絶)이라 불릴 정도로 예능이 높았던 인물이다. 강희안의 아우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1424~1483]도 시화가 뛰어났으며, 특히 강희맹이 그린 송죽화(松竹畵)는 일품이었다. 이외에도 서봉(西峯) 류온(柳瑥)[1473~1538]과 시·서·화 삼절이면서도 죽화를 특히 잘 그렸던 청천(菁川) 하응림(河應臨)[1536~1568]이 조선 초기의 서화가이며, 중기에는 야당(野堂) 류혁연(柳赫然)[1616-1681]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죽화에 뛰어났던 수운(峀雲) 류덕장(柳德章)[1694~1775], 풍속도와 호협도로 유명한 담졸(淡拙) 강희언(姜熙彦)[1710~1765]이 있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18세기의 대표적 문인화가로 산수·사군자·화조 등에서 명작들을 남겼다. 표암의 손자 약산(若山) 강이오(姜彛五)[1788~?]도 매화와 산수화에 능했다. 조선 후기에는 학산(學山) 류최진(柳最鎭)[1791~1869 이후], 초은(草隱) 류상룡(柳相龍), 대산(對山) 강진(姜溍)[1807~1858] 등이 서화에 능했던 진주인들이다.

조선시대의 불교미술로는 청곡사영산회괘불탱(靑谷寺靈山會掛佛幀, 국보 제302호), 진주청곡사목조제석천·대범천의상(晋州靑谷寺木造帝釋天·大梵天倚像, 보물 제1232호)이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괘불함, 금강역사상, 영산회상도가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이다. 이밖에 성전암 목조여래좌상, 응석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등도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이다.

5. 일제강점기

일제시대에는 정상진(鄭相珍)과 박재표(朴在杓)와 같은 진주의 부호들이 시인묵객들을 후원하였다. 정상진은 1930년대에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1879~?]를 10여 년간 의곡사에 머물도록 후원했는데, 추사서파의 서맥을 잇는 성파의 활동이 진주지역 서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파 이외에도 당시 서화 인물로는 매산(梅汕) 황영두(黃永斗)[1881~1957]와 동초(東梢) 황견룡(黃見龍)[1882~?]이 있다. 황영두는 제전과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의 수상작가이며 일필휘지로 매화를 잘 그려 매선(梅仙)이라 불렸다. 황견룡은 소치(小痴) 허련(許鍊)[1809~1892]에게서 그림을 사사했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6~1977]과 교우했다. 모란을 잘 그렸고, 전형적인 문인화가의 풍모를 보였다.

강신호(姜信鎬)[1904~1927]는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인 1925년에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출품하여 4등상을 받고 이어 특선을 함으로써 진주의 첫 서양화가가 되었다. 강신호는 1927년 7월에 제1회 개인전을 진주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해방 직전에 다솔사 주지 최범술[1904~1979]이 변관식(卞寬植)[1899~1976], 김범부(金凡父)[1897~1966], 김범린 등의 저명인사들을 기거하게 했다. 여기에 정대기, 허민, 유당(惟堂) 정현복(鄭鉉輻)[1909~1973], 내고(乃古) 박생광(朴生光)[1904~1985], 풍곡(豊谷) 성재휴(成在烋)[1915~1996], 이규옥, 정홍거 등이 모여들었다. 운전(芸田) 허민(許珉)[1911~1967]은 박재표의 후원으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 문하에서 사사했고, 해방 후 전통 한국화의 필법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기개를 갖는 산수화와 화조화를 그렸다.

6. 현대

광복 후 1946년에 조선미술동맹 진주지부가 결성되었으나 지나친 정치적 활동으로 대부분의 서화가들이 탈퇴하고 다시 박생광 자택(당시 청동다방)에서 문화건설대가 조직되었으며, 1948년에는 한국미술협회 진주지부가 설립되었다.

1930년대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박생광, 조영제, 홍영표 등의 화가들이 해방 후 진주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박생광은 전쟁 후에 문건다방을 경영했는데 이층에 이중섭이 기거하면서 은지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박생광은 한국화에 전념하여 말년에 불교미술과 무속화에 기초한 독창적인 채색 한국화로 세계적인 대가가 되었다. 효석(曉石) 조영제(趙榮濟)[1912~1984]는 평생 진주를 지키면서 서양화와 한국화를 넘나들며 오랜 세월 동안 촉석루의 풍광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이다. 고운(稿雲) 홍영표(洪永杓)[1917~]는 진주사범대학을 비롯한 진주의 여러 학교에서 서양화를 지도하며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 독보적인 파스텔화 작가인 그는 교육자 및 화가로서 미술교육 관련 저서들을 내기도 했다.

한편, 해방 후에는 의곡사가 진주의 문인문객들이 모여든 풍류방 구실을 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정대기, 박생광, 정현복, 성재휴 등과 정명수 같은 서화가들이 활동했다. 23년간 의곡사 주지로 있으면서 진주 예술의 창달에 기여한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1907~1991]은 촉석루 안쪽에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이라는 예서체 대액과 촉석루 뜰 안의 「의기논개의 비」 등의 유묵을 남겼다. 벽산(碧山) 정대기(鄭大基)[1886-1953]는 모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사군자와 특히 묵죽화에 능했고, 사후 의곡사 입구에 벽산추모 묵죽비를 건립했다. 정현복촉석루 현판과 해인총림 현판을 썼고, 정현복을 기려 1986년에 유당미술상이 제정되었다.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1909~ ]는 성파의 지도를 받아 추사체로 일관했으며 말년에 온후하고 덕성있는 독자 서체를 개발했다. 대표작으로는 해인사 해탈문 주련과 촉석루 남장대, 서장대, 진남루 등의 휘호가 있다. 성재휴는 의재 허백련에게 그림을 사사했으며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운필에 의한 독특한 화풍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미술관련 시설]

진주시에는 미술품이나 민예품을 애호하는 개인 수집가들이 많고 유수한 사설 박물관들이 있다. 대아고등학교(大亞高等學校) 박종한(朴鐘漢) 교장이 설립한 민속박물관은 중·고등학교 박물관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유명하다. 진양호 입구의 진주민속박물관은 1973년 최낙선(崔洛璇)이 수집한 고고, 민속 유물 및 무속화의 전시관이었는데 2천 점의 수집품들이 1984년 부산 경성대학교 박물관 민속자료실에 기증되었다. 태정(苔井) 김창문(金昌文)은 20만 점의 가구장식 등의 수집품 전시를 위해 1985년 12월에 태정민속박물관을 설립했다. 태정민속박물관의 장석(裝錫)들은 1999년 진주시에 기증되어 현재 진주문화원 건물 2층에 마련된 시립향토민속관에 전시되어 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수습된 가야토기 등의 전시를 위해 가야문화 박물관으로서 1984년 11월에 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 안에 문을 연 뒤, 국립진주박물관은 1998년부터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이후 재일동포 두암(斗庵) 김용두(金龍斗)가 일본에서 수집하여 기증한 서화·자기·공예 등의 보물급 유물 179점을 별도로 건립한 두암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6.27 [고려시대] 수정 '진양 효자리 삼층석탑'을 '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으로 수정
2013.06.26 [변천] 수정 '응석사 삼조여래좌상'을 '응석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으로 수정
2011.08.11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1) 1375년(우왕 12년))에 왜구가 약탈한 것이다. ->1375년(우왕 12)에 왜구가 약탈한 것이다. 2) 하연(河演)[1376-1453], 정암(整庵) 정척(鄭陟)[1390-1477],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1395-1459] ->하연(河演)[1376~1453], 정암(整庵) 정척(鄭陟)[1390~1477],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1395~1459] 3) 표암의 손자 약산(若山) 강이오(姜彛五)[1788-?]도 매화와 산수화에 ->표암의 손자 약산(若山) 강이오(姜彛五)[1788~?]도 매화와 산수화에 4) 강신호(姜信鎬)[1904-1927]는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인 1925년에 ->강신호(姜信鎬)[1904~1927]는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인 1925년에 〇 기외 수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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