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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434
한자 新石器時代
영어음역 Sinseokgi Sidae
영어의미역 Neolithic Ag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선사/석기
집필자 정의도

[정의]

인류가 사용한 도구에 따라 구분한 석기시대의 최종 단계.

[개설]

우리나라에서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바닷가, 섬, 강가 등에서 150개소 이상이 발견되었고 내륙에서도 가끔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 패총유적이 많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크게 4시기로 구분된다. 조기(早期)단계는 원시 무문토기와 융기문토기를 사용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유물은 시베리아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에 걸쳐 동북아시아 전반에 걸쳐 유사한 문화가 나타나고 있다. 원시 무문토기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의 경우에서 보면 토기태토에 식물섬유 흔적이 있고, 바닥이 평평한 심발형을 하고 있으며 후기 구석기문화의 전통인 세석기와 더불어 다양한 타제석촉이 같이 출토되고 있다. 융기문토기는 주로 남부지방에서 동해안 지역에 걸쳐 많이 확인되고 있으며, 토기의 표면에 점토를 이용하여 다양한 문양을 시문(施紋)한 것이다. 문양 기법상 융기대문(隆起帶文)과 융기선문(隆起線文)으로 크게 구분되며 문양 구성요소는 평행선과 삼각집선문, 번개무늬 등 다양한 편이다. 동해안의 오산리 유적에서는 융기문토기 이후의 단계에 해당하는 자돌문이나 압인문(누름무늬) 토기의 가장 이른 연대가 7,120 B.P.로 나타나고 있어 후빙기 이후 발생한 조기 단계의 신석기문화는 대략 7,000년 이전부터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기단계]

전기단계는 동해안 오산리 유적이나 부산 영선동 유적을 중심으로 하는 압인문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것들이다.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연속적으로 누른 후 당기는 과정을 되풀이하여 연속문양을 나타내는데 영선동식 토기의 경우 어골문과 같은 문양형태를 나타낸다. 전 단계인 융기문토기의 전통이 일부 남아 있는 것도 있으나 영선동식 압인문토기의 형태는 바닥이 둥근 원저형이며, 호형토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단계의 성격은 아직 불명확한 점이 많다. 이후 단계인 서울 암사동 유적의 가장 이른 빗살무늬토기의 연대가 6,230 B.P.로 나타나고 있어 대체로 6,000 이전까지를 전기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기단계]

중기단계는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토기 문화로 일반적으로 빗살무늬토기라고 불리고 있다. 바닥이 포탄과 같이 뾰족한 첨저형으로 새김무늬를 특징으로 하는 것인데, 토기 전면에 걸쳐 문양을 시문한 것에서 점차적으로 문양의 범위가 구연부 쪽으로 축소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토기 문화는 우리나라 거의 전역에 걸쳐 확인되고 있는데 대동강 연안의 지탑리 유적이나 한강유역의 암사동, 미사리 유적, 남강유역의 상촌리 유적을 대표로 들 수 있다. 보습과 같은 각종 농경구가 수반되고 지탑리 유적에서는 토기내부에서 조나 피와 같은 곡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단계에 이르러 본격적인 농경문화가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수렵용구에 있어서도 이전 단계까지의 타제석촉에서 마제석촉으로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각종 마제석기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점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토기 문화의 하한은 남부지방 후기 단계의 대표적 유적인 합천 봉계리 유적 제9호 주거지에서 확인된 4,060 B.P.의 절대연대를 참고한다면 그 이전까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후기단계]

후기단계는 빗살무늬의 시문부위가 점차 축소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남부지방의 경우 토기 구연부에서 일정한 간격을 띄운 후 문양이 시문되는 봉계리식토기와 이 토기의 구연부의 형태에서 점차 이중으로 변하는 이중구연토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토기의 문양은 점차 퇴화하여 1~2열의 단사선문과 같이 극히 단순한 문양형태를 남기게 된다. 토기의 형태는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한 전통이 남아 있는데 합천 봉계리 유적의 경우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여전히 농경구인 타제 보습형 석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음으로 보아 농경문화의 전통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중구연토기가 나타나고 있는 하한 연대는 부산 금곡동 율리 유적에서 확인된 3,580 B.P.가 있어 그 이전까지 후기 신석기문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주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

선사시대의 진주지역에 대해서는 남강댐 수몰예정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결과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진주시 대평면 내촌리 등에서 석영제 구석기가 출토되어 늦어도 10만년 내지 3만 5천년 전부터 진주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대평면 상촌리 일대에서는 신석기 중기 내지 후기 단계의 빗살무늬토기와 16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주거지에서는 보습형 석제 농경구와 마제 석창, 석촉 등이 출토되어 이미 원시농경사회로 진입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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