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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513
한자 演劇
영어의미역 play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조웅대

[정의]

배우가 특정한 연희(演戱)의 장소에서 관객을 앞에 두고 극본 속의 인물로 분장하여 몸짓·동작·말로써 창출해 내는 종합예술.

[개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연극의 원류를 민속극인 가면극(假面劇, 탈놀이), 인형극(人形劇, 꼭두각시놀이)과 판소리[唱]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가면극의 문헌상 첫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최치원(崔致遠)의 절구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서 읊은 오기(五伎)로서 신라시대의 가면극인 오기[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의 탈춤을 7언4구체의 한시(漢詩) 오수(五首)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1236년(고종 23년)에 연희된 가면희(假面戲)의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처용무(處容舞)와 검무(劍舞)는 고려(高麗)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 전승되어 왔다. 특히 검무는 일명 황창무(黃昌舞)라고 하며, 그 유래는 『동경잡기 (東京雜記)』와 『증보문헌비고』에 신라의 황창랑이라는 7세 소년이 검무를 빙자하여 백제왕을 죽이고 백제인들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신라 사람들이 슬피 여겨 그 모습을 본뜬 탈을 쓰고 그의 춤을 모방하여 검무를 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황창관창(官昌)의 와전일 것이며, 실재한 소년용사 관창의 사실(史實)과 관련하여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검무는 단순한 전투모의무이나 용검술의 묘기를 보이는 등의 검무가 아니고 가면을 쓰고 좀 더 연극성을 띤 가면동자무검희(假面童子舞劍戱)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 기원을 두었다는 이 동자검무는 조선시대 김만중(金萬重)의 「관황창무(觀黃昌舞)」라는 시에 보면, 이때에는 이미 여기검무(女妓劍舞)로 탈을 쓰지 않고 추었음을 알 수 있다.

검무는 이렇게 민간에서 전승되다가 조선 순조 때 비로소 궁중정재(宮中呈才:궁중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로 되었고, 기생에 의하여 조선 말기까지 전승되었다고 한다. 궁중에 들어와서도 탈은 없고 칼도 무구화(舞具化)된 검기(劍器)를 사용하였으며, 전립(戰笠)·전복(戰服)·전대(戰帶)를 착용하고 검기를 들지만 무태(舞態)는 무무(武舞)로서의 씩씩함보다 여무의 곱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바뀌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진주검무(晋州劍舞)」가 그 좋은 예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산대놀이(山臺놀이, 가면극)를 궁에서 크게 장려하여 산대도감(山臺都監)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634년(인조 12년)에 도감이 폐지되고 그 이후로는 산대놀이가 민속으로서 연극자인 광대(廣大) 자신에 의하여 재구성되어 전래되었으므로 광대의 거주지에 따라 그 유형을 달리하여 분화되었는데, 중부지방의 양주별산대(楊洲別山臺), 황해도지방의 봉산탈춤(鳳山탈춤), 경상남도지방의 오광대(五廣大) 등으로 삼분(三分)할 수 있다.

경상남도지역에서 널리 성행한 오광대는 조선 중기에 초계(草溪)[현 합천군 초계면]에서 발상하였고, 초계에 인접한 진주에서는 오광대가 일찍이 도입되어 그 원형에 가장 가까운 진주오광대가 전승되어 왔으나 1964년에 신길용(愼吉龍) 등을 주축으로 연극된 것을 마지막으로 지금은 극본만 전해져올 뿐이다.

[변천]

1. 1950년대 이전의 현대연극

1911년 초겨울에 임성구(林聖九)가 최초의 신파극단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할 때 김소랑(金小浪)이 창단단원으로 참여하여 신극운동을 시작하였다.

진주지역에서 현대연극을 처음으로 공연한 것은 1912년 12월 24일로 경상남도 내에서는 최초로 공연된 성극(聖劇)으로서, 이 연극은 당시 진주사립광림학교 교장 박택이 쓴 작품으로 호주인 선교사 거열후가 지도하여 그 해 졸업생들이 출연한 성탄축하연극이었다.

이를 계기로 연극에 매료된 한규상과 그 일행들과 함께하게 된 김주학 등이 1913년에 같은 작품으로 서부경남일대를 순회 공연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무렵에 생긴 사리원(沙里院) 대홍수로 인한 수재민구호를 위한 자선공연을 가져 많은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1920년까지는 한규상 일행이 진주지역 연극의 맥을 이었고, 특히 한규상은 비록 남자이지만 여자 배역을 잘해 그 이름이 더욱 알려졌다. 그 뒤를 이어 이영환을 주축으로 하는 연극동호인들의 연극 활동이 있었다. 그 사이 1918년 2월에는 김소랑이 취성좌(聚星座)라는 신파극단을 직접 창단하여 1929년 해체될 때까지 여러 작품들을 공연하였으며 전국순회공연도 가졌다. 취성좌가 해체된 후에 삼천가극단(三川歌劇團)이 김소랑에 의해 유지되다가 흥행에 실패하여 해체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당시 진주천주교회에서 운영한 야간학교인 해성학교에서 1940년대 초까지 매년 성탄절에 성탄성극을 공연하였고, 1937년에는 연화사 불교청년회에서 「지옥도(地獄圖)」를 공연하는 등 종교극의 공연이 있었으나 일반 연극 활동으로는 두드러진 것을 찾을 수 없다.

1940년대에 들어 광복 까지는 뚜렷한 연극 활동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어용단체였던 조선연극협회에서 제작한 작품의 순회공연이 가끔 있었고, 각 학교 학예회 발표작으로 일본어 학생극이 있었을 뿐 우리말 연극의 맥은 끊어진 상태였다.

그 후 1945년 광복축하행사로 문화건설대가 주최하여 40여명이 출연한 설창수(薛昌洙)「젊은 계승자」를 박오종(朴午鍾) 연출로 공연하였다. 1946년에는 진주에서 처음으로 극단이 창단되었는데 하만구(河萬久) 등을 중심으로 창립된 고려예술연극회가 그것이다. 창단작품으로는 「고목(枯木)」을 제작, 순회공연을 하였다. 한편, 박두석(朴斗錫) 등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진주극작가연맹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 해 문화건설대에서는 설창수 작 「동백꽃 다시 필 때」를 박오종, 김삼성(金三星) 등이 제작하여 서부경상남도 일대를 순회 공연하였다. 학생극으로서는 진주사범학교에서 「안중근 의사」, 진주중학교에서「세 동무」가 공연되었다.

1947년에 문화건설대에서는 설창수 작, 김삼성 연출의 「회천의 북소리」를 공연하였고, 문인극회에서는 오스카 와일드 작의 「샬로메」를, 고려예술연극회에서는 하만구 작의「유성(流星)」을 공연하였다. 특히 문화건설대와 고려예술연극회에서는 그 작품들로 서부경상남도 일대를 순회 공연하였다.

1948년에 들어서 고려예술연극회는 단체명을 무대예술연구회로 개칭하고 「청산리(靑山里)의 달」을 공연하고 9월에는 진주학생연맹이 주최하여 유치진 작의 「소」를 공연하였다. 이 해 가을에는 진주문총(晋州文總)이 주최하여 정부수립기념 연극경연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진주시내의 4개 중학교(진주중학교, 진주농림중학교, 진주사범학교, 진주상업학교)에서 참가하였다.

1949년에는 진주농림중학교에서 「조국」을, 진주사범학교에서는 「혈맥」을, 진주여자중학교에서는 「바보온달」 등을 공연하였다. 이어 진주농과대학(경상대학교 전신)에서는 최인현(崔寅炫), 박상영(朴相英) 등이 출연하여 오스카 와일드 작의 「샬로메」를 공연하였는데 이는 진주지역 대학극으로서는 첫 무대였다. 이 해 음력 10월에는 제1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가 열렸는데, 연극부에서는 7개 단체가 참가하였다.

2. 1950년대 이후의 현대연극

1950년과 1951년에는 한국전쟁의 쓰라림을 치유하는 선무계몽극이 연극 활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1950년 9월에 학생연맹진주지부가 주최하고 진주시내 전중학교 연기자들이 공동 참여한 학생극으로서 조웅대(趙雄大) 작, 연출의 「새벽이 돌아오다」가 진주여자중학교 강당에서 공연되었으며, 학도의용대와 국민방위군의 합동제작으로 「동녘이 틀 때」를 하만구가 연출하여 서부경상남도 일대를 순회 공연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 제11사단 9연대 정훈공작대에 이 지역 연극인들인 최인현, 조웅대, 강명중, 이성태, 김태봉, 강종찬, 김민규, 민인설, 김석주, 김석만, 이경애, 강을순 등이 참가하여 「밤은 지나고」에 이어「발자국을 따라」 등의 계몽극으로 서부경상남도 일대를 순회 공연하였다. 음력 10월에 제2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가 열렸는데,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내에서 실내공연장으로는 유일하게 남았던 지붕이 날아간 진주극장에서 연극공연이 진행되었다. 참가단체와 작품은 진주사범학교의 「혼」, 진주시청 연극반의 「동뢰」, 진주농업고등학교의 「어느 달밤의 동구에서」, 진주고등학교의 「동려지대(東麗地帶)」, 부산고등학교의 「달 뜰 무렵」 등이었다.

1952년에는 진주지역의 연극인들이 전원 참가하여 극단 자유소극장을 창단하였고, 그 기념공연으로 유진 오닐 작의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을 정민화 역, 최순동 연출로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학생극으로서는 박두석 작품인 「진양성」과 「김시민(金時敏)」을 강명중 연출로 공연하였다. 제3회 개최되었던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서는 진주사범학교에서 「해질 무렵」을, 진주북중학교에서는 「고구려의 비애」를, 진주농림고등학교에서는 「흑막」을, 진양고등학교에서는 「흔들리는 지축」을, 삼천포고등학교에서는 「마음의 고향」 등을 공연하였고 진주사범학교가 대상을 수상하였다.

1953년에는 학생극으로 박두석 작「초가을」을 최인현 연출로 공연하였으며, 이어서 R. C. 셀리프 작의 「여로의 끝」을 박두석 역, 강명중 연출로 공연하였다. 이 해에 개최되었던 제4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서는 진주사범학교가 「파도」를, 해인대학에서 「천막촌」을, 진주농림고등학교에서 「오솔길」을, 진주농과대학에서 「인간 릿치」를, 진주고등학교에서「동남풍」을, 진주사범병설중학교에서 「해후」를, 영남고등학교에서 「익석」을, 한일고등학교에서 「논개」 등을 공연하였다.

1954년에는 하만구, 정경태, 전미혜, 김상도, 강기석, 박정균, 천영호, 김상현 등이 참가하여 청포도 극회를 창단하였고, 창단기념공연으로 유치진 작「마의태자(麻衣太子)」를 제작하여 서부경남 일대를 순회 공연하였다. 이 해에 개최되었던 제5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의 연극부문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

1955년에 청포도극회에서는 하남구 작, 연출로 「산유화」를 제작 및 순회 공연하였으며, 이 해에 개최되었던 제6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는 진주사범부속초등학교가 「꽃과 나비」를, 진주고등학교에서는 「철조망」을, 영산중학교에서는 「희생」 등을 공연하였다.

1956년에 개최되었던 제7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서는 진주고등학교에서 「병든 성좌」를, 봉래초등학교에서 「까치의 죽음」을 공연하였으며 또한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도 참가하였다.

1957년 제8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는 진주농림고등학교가 최인현 연출의 「사육신(死六臣)」으로, 진주사범학교가 박상영 연출의 「사육신」으로,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가 「청혼」으로 참가하였다.

1958년 제9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는 진주농림고등학교가 「잠들지 않는 호수」로, 진주고등학교가 「마의태자」로, 서라벌예술대학(작품미상)과 삼천포문화원(작품미상)이 참가하였다.

1960년 11월에 개최된 제11회 개천예술제에는 진주농과대학에서 「생명은 합창처럼」으로, 진주고등학교에서는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로, 진주농림고등학교에서는 「밀주」로 참가하였고, 대상인 대통령 우승기는 진주농과대학에서 수상하였다.

1961년에 하만구가 학생극회를 창단하여 「검은 손」, 「탈옥수」 등을 제작하여 지방순회 공연을 가졌고, 그 해 열린 제12회 개천예술제 연극경연에는 진주농과대학에서 「꽃과 십자가」로, 진주농림고등학교에서는 「탄갱부」로, 진주고등학교에서도 「탄갱부」로, 부산성지초등학교에서는 「동물국의 새나라」로 참가하였다.

1962년에는 한국연극협회 진주지부가 설립되었다. 당시 창립회원은 정인화, 한동열, 정석규, 이길성, 강석문, 황용길 등이었고 지부장에는 정인화가 선출되었다. 이 해에 열린 제13회 개천예술제의 연극부문에는 진주사진작가협회, 진주고등학교, 진주농과대학, 진주농림고등학교, 부산청문극회 등이 참여하였다.

1963년 제14회 개천예술제 연극경연에는 진주농과대학이 「비오는 성과」로, 진주농림고등학교가 「나는 살아야한다」로, 진주고등학교가 「장남의 권리」로, 촉석극회가 「마음의 비가」로, 한국연극협회 삼천포지부가 「불모지」로, 마산성지여자고등학교가 「청혼」으로, 진주평거초등학교가 「새싹」으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은 동극으로 참가한 진주평거초등학교에서 수상하였다.

1964년에는 한국연극협회 진주지부가 주최하여 이희재 작의 「고래」를 정석규가 연출하고 이창식, 이상훈, 김종태, 강재도, 정명숙, 이재열 등이 출연하여 막을 올렸다. 한편, 아동극단 꽃들이 조직되어 창단기념공연으로 안데르센의 「빨간 신」을 공연하였는데, 이 극단은 1978년에 해산되었다. 이 해에 열렸던 제15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에는 진주농림고등학교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로, 진주농과대학이 「밀알」로, 진주배영초등학교가 「광산골 아이들」로 참가하였으며, 진주시 외의 지역에서는 서라벌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연극반, 주례중고등학교, 한국연극협회 삼천포지부 등이 참가하였다.

1965년에는 이창식과 강재들, 김갑용 등이 주축이 되어 극단 처용랑(處容郞)을 창단하여 창단기념작으로 「어머니의 모습」(강재득 제작, 허상 작, 이창식 연출)을 공연하였다. 이 해에 개최된 제16회 개천예술제 연극경연에는 진주해인고등학교에서 「살인자」로, 진주농림고등학교에서 「탄갱부」로, 초원극회에서 「운명을 사랑하라」로, 진주대아중학교에서 「눈 먼 동생」 등 진주에서는 4개 단체만이 참가하였다.

1966년에는 한국연극협회 진주지부에서 한동렬 지부장의 주도로 한국처용연극상을 제정하여 경상남도지역 유공연극인들에게 시상하기 시작하였다. 이 상은 우리나라 연극상으로서는 처음 제정되었으며, 6년간을 계속 시상하였는데 그 수상자로는 진주 출신의 황길용, 정인화, 조한조, 허태유 등이 있으며 그 외 삼천포의 변경섭, 충무(현, 통영)의 허장언, 마산의 정진업 등이 있다. 이 무렵 처용랑에서는 한동열 연출로 「집」(이광래 작)과 「기류의 음계(氣流의 音階)」 등을 공연하였다. 이 해 11월초에 개최된 제17회 개천예술제 연극경연에는 진주교육대학이 「묘한 작란을 끝내라」로, 진주대아중학교가 「조국」으로, 진주농과대학인 「방황자들의 대화」로, 진주농업전문대학이 「멀어지는 기적」으로 진주시에서는 4개 단체만 참가하였으며, 대통령상인 대상은 진주대아중학교에서 수상하였다.

1967년에는 손창근이 극단 텔스타를 창립하여 「종점을 달리는 사람들」에 이어 「어느 날의 환상」을 공연하였다. 이 해에 열렸던 제18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대회에는 진주대아중학교가 「공양미 삼백석」으로, 진주농림고등학교가 「달이 떠오를 때」로 진주시에서는 두 학교만이 참여하였다.

1968년에는 이상훈을 중심으로 극단 신무대(新舞台)를 창립한 뒤 창립기념공연으로 「점을 칩니다」(오재오 작, 이창식 연출)를 준비하여 이 해에 열렸던 제19회 개천예술제 연극경연에 참가하여 대상을 수상하였다.

1969년에 열렸던 제20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에는 진주시 외의 지역에서 온 단체들만 참가하였다.

1970년 제21회 개천예술제 연극경연에는 진주시에서 진주대아중학교가 「문제아」로, 진주해인고등학교가 「별」로, 진주농과대학이 「운명을 사랑하라」로 참가하였으며, 그 외 인천성인중학교와 서울극단 무대, 함안여자중학교 등이 참가하였다.

1971년 극단 신무대에서 「학마을 사람들」(이재현 작, 이창식 연출)을 공연하였고, 이 해에 열렸던 제22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에는 진주시에서 진주배영초등학교만이 「들국화」로 참가하였다.

1972년에는 극단 아이들이 「원고지」를 공연하였을 뿐 다른 극단의 연극무대는 볼 수 없었다. 이 해에 열렸던 제23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에는 진주시에서 진양교육원이 「내일을 위하여」로, 경상대학교가 「토끼와 포수」로, 극단 아이들이 「위자료」로 참가하였다. 1973년에는 극단 청년들이 창단되어 싸롱드라마 「종점을 달리는 사람들」을 공연하였으며, 이 해에 열렸던 제24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에는 진주시에서 금성초등학교가 「개구장이」로, 경상대학교가 「시인의 혼」으로 참가하였다.

1974년에는 극단 신무대에서 「죽은 나무 꽃피우기」를 공연하였으며, 한국연극협회 진주지부에서는 「갈색 머리카락」에 이어 「닭이 울 때」를 공연하였으며, 극단 텔스타는 극단명을 아카데미로 개칭한 뒤 「소매치기」로 개천예술제 연극경연에 참가하였다. 한편, 현재 진주지역의 최장수 극단인 극단 현장이 이 해에 창단되었다. 또한 이 해에는 경상대학교에서 극예술연구회가 생겨 진주시의 대학연극을 지속으로 전개하는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경상대학교 극예술연구회는 매년 1회 이상의 정기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경상대학교의 외국어교육학과에서는 매년 외국어 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이 해에 열렸던 제25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에서는 진주시에서 극단 아카데미와 경상대학교가 참가하여 각각 「소매치기」와 「상방(喪房)」을 공연하였다.

1975년에는 극작품 「알 젖는 소리」가 전국새마을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였고, 연이어 서부경상남도 일대를 순회 공연하였으며, 극단 신무대에서는 「우리들 세상」을 공연하였으며, 극단 처용랑에서는 「붉은 손들 가운데서」를 공연하였다. 제26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에는 진주시에서 삼현여자중학교가 「밝아오는 새마을」로 참가하여 대상을 받았다.

1976년에는 극단 현장에서 「출발」을, 극단 청년들에서 김재호 1인극 「육교위의 유모차」를 공연하였다. 이 해에 열렸던 제27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에는 진주시에서 삼현여자중학교가 「버드나무 선 마을의 풍경」으로 참여하였다.

1977년에는 극단 현장에서 3월에 「결혼」을 공연하였으며, 8월에는 「아버지」를, 그리고 12월에는 「묵시의 계절」을 무대에 올렸다. 이 해에 열렸던 제28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대회에는 진주시에서 삼현여자중학교경상대학교 등이 참가하였다.

1978년에는 극단 현장이 3월에 「잔영」을 공연하였으며, 10월에는 「성좌의 샘물」을 공연하였고, 극단 신무대는 「붉은 손들 가운데서」를 공연하였다. 한편, 진주교육대학의 연극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진주교대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해에 열렸던 제29회 개천예술제의 연극경연에는 진주시에서 삼현여자고등학교진주초등학교, 진주배영초등학교와 청년들극회 등이 참가하였다.

1979년에는 극단 현장의 총청으로 셰익스피어 작「햄릿」이 이길재의 연출로 공연되었으며 이외에 다른 극단의 활동은 없었다. 이 해에는 개천예술제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말미암아 열리지 않았다.

1980년에 극단 현장은 「길가마귀」와 「생명은 합창처럼」과 「토끼와 포수」 등을 공연하였다. 이 해에 열렸던 제30회 개천예술제의 연극제에는 도동초등학교천전초등학교가 진주시에서 참가하였다.

1981년에는 극단 현장이 「용감한 사형수」를 공연하였으며, 제31회 개천예술제에는 진주봉원초등학교삼현여자중학교, 극단 처용랑 등이 진주시에서 참가하였다.

1982년에 극단 현장은 「이혼 파-티」와 「묵시록」, 그리고 「출발」을 공연하였다. 이 해에 열렸던 제32회 개천예술제의 연극제에는 진주시에서 삼현여자중학교가 참여하여 대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에 극단 현장이 「그믐밤을 둘이서」라는 작품을 공연하였으며, 제33회 개천예술제의 연극제에는 진주시에서 극단 현장 등이 참가하였다.

1984년 4월에 마산에서 개최되었던 제2회 전국지방연극제 경상남도대회에 극단 현장이 「상방」으로 참가하여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그 해 5월에 광주에서 개최되었던 전국지방연극제에서는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제34회 개천예술제에 진주교육대학극예술연구회가 「신화 1990」으로 참여하였고, 그 외 진주봉원초등학교가 「오르간」으로, 경상대학교극예술연구회가 「사람의 아들」(이문열 작, 조구환 연출)로, 진주실업전문대학이 「결혼」으로 참여하는 등 진주시에서는 4개 단체가 참가하였다.

1985년에는 놀이판 큰들(현 큰들문화예술센터)이 창립되어 마당극 「한 솥밥 먹기」를 제작하여 영남 지역 일대를 순회 공연하였다. 이 해에 개최되었던 제3회 전국연극제경상남도대회에 극단 현장이 「산국」(황석영 작, 이희대 연출)으로 참가하여 단체우수상과 함께 이희대가 연출상을, 문홍철이 무대미술상을 받았다. 제35회 개천예술제에는 경상대학교극예술연구회가 「메야마이다」로 참가하였으며, 진주배영초등학교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으로 참가하였다.

1986년에는 극단 현장이 「풍인(風人)」을 공연하였는데, 이 작품으로 제4회 전국연극제경남대회에 참가하여 서용수가 연기상을, 서영수가 무대미술상을 각각 받았다. 그 해 10월에는 안소니 작, 방성진 연출의 「함정」을 공연하였으며, 12월에는 R.하우드 작, 조구환 연출의 「드레스」를 공연하였다. 제36회 개천연극제에는 진주배영초등학교가 「숲속의 대장간」으로 진주시에서 참여하였다.

1987년 제5회 전국연극제경남대회에는 극단 현장이 「농토」(윤조병 작, 이희대 연출)로 참가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배비장전」을 공연하였다. 한편 놀이판 큰들(현 큰들문화예술센터)에서는 마당극 「양반 상놈 따로 없다」를 공연하였다. 이 해에 개최되었던 제37회 개천예술제의 연극부문 참가단체는 진주배영초등학교 등이 있었다.

1988년에는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이 개관되어 개관기념공연으로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무대에 올랐다. 한편 극단 현장에서는 「우리는 그래도 볍씨를 뿌린다」에 이어 「문열기타령」을 공연하였고, 놀이판 큰들(현 큰들문화예술센터)에서는 「우리 땅에 우리가 산다」를 제작하여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민족극한마당에 참가한 뒤, 진주시와 마산시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제38회 개천예술제에는 진주천전초등학교진주중안초등학교가 참가하여 각각 「우리 땅에 우리가 산다」와 「크리스마스 송가」를 공연하였으며, 진주시 외의 지역에서도 많은 단체가 참가하였으나 대상은 없었고 진주중안초등학교가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1989년에 극단 현장이 「살아서 노래하는 꽃」과 「토선생전」, 그리고 「출발」 등 세 개 작품을 공연하였다.

1990년에는 극단 현장이 박우춘 작, 황금 연출의 「손이 큰 새댁」으로 제8회 경상남도연극제에 참가하여 강정선이 연기상을 수상하였으며 그 해 9월에는 「19 그리고 80」을 공연하였다. 한편 놀이판 큰들(현 큰들문화예술센터)에서는 마당극 「황혼 바람」을 공연하였다. 이 해에 열렸던 제40회 개천예술제에 참가한 단체는 진주교육대학과 그 외 진주시 외의 지역에서 참가하였는데, 「19 그리고 80」을 공연한 진주교육대학극예술연구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1991년 제9회 경상남도연극제에는 극단 현장이 「진주성」(이상용 작, 방성진 연출)으로 참가하여 단체대상을 받았고, 더불어 개인상으로 방성진이 연출상을, 정대영이 연기상을 수상하였다. 극단 현장은 같은 작품으로 그 해 6월에 개최된 전국연극제에 경상남도 대표로 참가하여 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제9회 전국연극제는 한국연극협회가 주최하고 한국연극협회 진주지부가 주관하여 경남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전국의 도대표 극단들이 참가한 가운데 6월 13일부터 6월 27일까지 15일간 열렸다. 한편, 이 해에는 극단 신무대가 재기하여 「댈리 부인」을 공연하였고, 상설 소극장인 소극장 들소리를 개관하였다. 이 해 연말에는 진주지역의 주부들이 중심이 되어 진주어머니극회가 창립되었다. 제41회 개천예술제의 연극부문은 학생연극제로 참가범위를 한정하였고 진주시에서는 진주교대부속초등학교가 「노래하는 혹」으로 참가하였다.

1992년 제10회 경남연극제에는 극단 신무대가 「동승」으로 참가하였고, 진주어머니극회는 창단기념공연으로 「토끼와 포수」를 선보였다. 극단 들소리(현 문화예술그룹 온터)는 「검은 노을」을 창단 공연하였으며 이어서 아동극인 「마법의 동물원」을 공연하였다. 놀이판 큰들(현 큰들문화예술센터)에서는 소극장 개관기념공연으로 마당극 「팔봉아 가방은 왜 싸니」를 무대에 올렸고, 연말에는 진주어머니극회가 두 번째 작품으로 「상방」을 이희대 연출로 공연하였으며, 극단 신무대에서도 함세덕 작, 이상훈 연출의 「해연」을 공연하는 등 특히 이 해에는 많은 연극공연이 있었다. 제42회 개천예술제의 학생연극제에는 진주경해여자고등학교가 「사도세자」로, 진주선명여자상업고등학교가 「위자료」로 진주시에서는 참가하였는데 대상은 진주선명여자상업고등학교가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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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현재 대표적인 연극단체로는 진주지역 연극예술의 창달 발전을 기하는 동시에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복리증진 도모를 위하여 1962년에 창립되었던 한국연극협회 진주지부가 있다.

1991년 전국에서 최초의 주부극단으로 창립되었던 진주어머니극회는 진주지역의 대표적인 여성단체 중 하나가 되어 꾸준히 연극 활동을 해오고 있다. 진주어머니극회는 2005년 극단 아낙으로 단체명을 변경하였다.

현재 연극을 통해 진주지역의 정신을 구현하고 삶의 원리를 찾아가는 진주시의 대표적인 극단으로는 극단 현장이 있는데, 2003년에 ‘진주정신찾기’의 세 번째 시리즈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2003년 12월 19일과 20일 저녁 7시 30분에 경남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선보였다. ‘2003 무대공연 지원사업’의 지원작품이자 ‘2003 진주시 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작품으로 선정되었던 이 작품은 1862년에 일어난 진주농민항쟁을 배경으로 봉건적 사회체제가 점차 해체되던 시기에 그 해체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진주지역 농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진주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9월에 전국 최초로 소작노동자대회가 열릴 만큼 농민운동의 방향과 투쟁이 선구적이었고 이로써 진주정신의 3대 정신 중 하나로 진주농민항쟁이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극단 현장은 2001년 뮤지컬 「논개」, 2002년 「불꽃」에 이어 세 번째로 진주농민항쟁을 다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기획, 제작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6.27 [변천] 수정 '문화마을 들소리'를 '문화예술그룹 온터'로 수정
2013.06.27 [변천] 수정 '중안초등학교'를 '진주초등학교'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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