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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사기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707
한자 義妓祠記文
영어의미역 Record of Uigisa Shrin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고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문
관련인물 논개
소장처 진주성 관리사무소
소장처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

[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용(丁若鏞)논개 사당인 의기사에 부쳐 쓴 글.

[개설]

의기사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논개의 사당으로,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건립한 것이다.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으며, 1983년 7월 20일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 글은 1802년(순조 2) 다산 정약용이 지은 것이다.

[내용]

의기사 기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의기사기(義妓祠記)

석일(昔日) 추지함진주야(酋之陷晋州也) 유기의낭자(有妓義娘者) 인일추대무어강중지석(引日酋對舞於江中之石) 舞方合(무방합) 포지투연이사(抱之投淵而死) 차기사야(此其祠也) 嗟呼 (차호) 기불열렬현부인재(豈不烈烈賢婦人哉) 금부일추지섬(今夫一酋之殲) 부족설삼사지치(不足雪三士之恥) 수연(雖然) 성지방함야(城之方陷也) 인번옹병이불구(隣藩擁兵而不救) 조정기공이낙패(朝廷忌功而樂敗) 사금탕지고(使金湯之固) 실지궁구지수(失之窮寇之手) 충신지사지분욕에한(忠臣志士之憤欲恚恨) 미유심어형역자의(未有心於形役者矣) 이묘소일여자(而眇少一女子) 능섬적추이보국(能殲敵酋而報國) 군신지의(君臣之義) 교연어천양지간(皦然於天壤之間) 이일성지패(而一城之敗) 부족휼기불쾌재(不足恤豈不快哉)

순조 이년 임술(純祖 二年 壬戌)

다산 정약용 기(茶山 丁若鏞 記)

이를 해석하여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왜적의 우두머리가 진주를 공격하여 무너뜨렸을 때 의로운 낭자가 있어서 그 왜장을 이끌고 강 가운데 돌에 가서 마주 춤을 추다가 바야흐로 춤사위가 합쳐질 때 끌어안고 깊은 곳에 몸을 던져 죽으니 여기서 그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아, 슬프다! 어찌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 현숙한 부인이 아니더냐, 이제 무릇 한 우두머리를

죽여서 족히 세 분 씩씩한 선비의 치욕을 씻지는 못했으나, 성(城)이 바야흐로 적의 공격에

무너질 적에 이웃의 군사요지에서는 병사들을 갖추고도 웅크린 채 구원하려 하지도 않았고

조정에서도 꺼려서 기꺼이 패하여 쇠붙이를 녹여 굳어진 것만큼이나 단단한 곳을 궁한 도적

떼의 손이 잃으니 충신과 지사(志士)들의 분노와 한스러움이 심히 형용할 수 없었던 것이

다.

조그마한 한 여자가 능히 적의 우두머리를 죽여서 나라에 보답하고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환하게 되어 성 하나쯤 패한 것으로는 족히 근심할 것 없으니 어찌 통

쾌하지 아니하랴.’

순조 2년 임술에

다산 정약용

이 기문(記文)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전문이 실려 있다. 그러나 현재 의기사에 걸려 있는 현판을 보면, 그 기문의 절반 분량에 해당하는 내용의 일부가 각자되어 있다.

느낀 감회를 읊은 시 한 수(首)를 덧붙임

야만족이 사는 바다 동쪽 해가 저물어 세월 많이 흘렀는데

붉은 다락이 멀어 뵈니 산하도 어둠침침하네.

꽃핀 못에 해 비치니 가인이 춤을 추고.

그림 같은 다락에 긴 피리소리 울리니, 씩씩한 선비는 노래 불렀네.

전쟁이 휩쓴 땅에도 봄바람 불어

초목은 다시 살아나고

황폐한 성에 밤비 내려

물결이 불어난다.

지금도 남겨진 사당엔 죽은 분의 영혼들이 계실세라

촛불 켠 삼경(三更 : 밤 11시~새벽 1시 사이의 한밤중)에 잘 빚은 술로써 지샌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8.05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1) 포지투연이사(抱之投淵而死) 차기사야(此其祀也) ->포지투연이사(抱之投淵而死) 차기사야(此其祠也) 2) 嗟呼 (차호) 개불열렬현부인재(豈不烈烈賢婦人哉) ->嗟呼(차호) 기불열렬현부인재(豈不烈烈賢婦人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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