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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의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870
한자 鄭方義-亂
영어의미역 Jeong Bangui's Rebel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문옥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란
발생(시작)연도/일시 1200년(신종 3)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201년(신종 4)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진주목
발생(시작)장소 경상남도 진주시
관련인물/단체 정방의|정창대

[정의]

1200년(신종 3)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발생했던 사건.

[개설]

1200년에 진주의 아전 정방의가 그의 동생 정창대와 함께 폭동을 일으켜 사람들을 마구 죽이자, 진주 사람들이 의거(義擧)하여 정방의를 죽이고 난을 1년 만에 평정한 사건이다.

[역사적배경]

고려 중기인 12~13세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 이후, 민란이 집중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원인은 귀족 사회의 상층구조가 붕괴되고 중앙 집권력이 이완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지방관의 착취와 억압이 격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전시과 체제가 무너지고 귀족들의 토지 사유화와 농장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농민들은 유민(流民), 천민(賤民)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제도의 붕괴는 하극상의 풍조를 일으켰고, 전통적인 봉건 신분 질서가 와해됨에 따라 피지배층의 반란이 극심하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발단]

1200년 4월, 진주의 공사노비들이 평소 주리(州吏)들의 부패에 불만을 가졌는데, 각처에서 일어나는 민란에 자극되어 주리들의 집 50여 채와 창정(倉正) 정방의의 집을 불태우는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노비들의 봉기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고 진화되었다.

그런데 정방의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니다가 사록(司錄) 전수용을 만나게 되는데, 전수용에게 반란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정방의는 혐의가 없어 풀려났으나, 태수(太守) 이순중(李淳中)이 다시 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동생 정창대가 정방의를 구출하였고, 정방의는 동생 정창대와 함께 당시 불평불만 자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경과]

정방의는 주리(州里: 동리)를 돌아다니면서 평소 원한이 있던 사람을 6,400명이나 죽였다. 그리고 읍내의 은병(銀甁: 돈)을 약탈하여 조정의 권신에게 받쳐서 죄를 면하려고 하였다. 또한 안찰부사 손공례가 조사하러 왔으나, 진주 사람들은 정방의의 행패가 무서워서 그의 죄를 말하지 못했고, 태수 이순중이 죄를 뒤집어쓰고 초도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정방의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이 합주(陜州)[현 합천] 노올부곡(奴兀部曲)의 적당(賊黨)인 광명과 계발의 지원을 받아 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노올부곡의 사람들이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결과]

정방의가 사람들을 마구 죽이자,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진주 사람들이 모두 의거하여 정방의를 죽이고 잔당을 멀리 쫓아 버림으로써 1년 만에 정방의 난은 평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무신 정권 시기에 일어난 민란은 농민을 위한 과감한 혁신 정책을 실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신 정권은 민란 평정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한편으로는 농민을 위한 과감한 혁신정책을 강구하였고, 난민을 위무하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인 권농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빼앗긴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조부(租賦)도 감면시켜 주었다.

이와 같이 농민과 천민의 반란은 신분 사회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민란은 귀족 중심의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 체제로 넘어가게 한 원동력이 되어, 고려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01 2011년 한자(문) 재검토 작업 1200년에 진주의 주이(州吏) 정방의가 ->1200년에 진주의 아전 정방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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