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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평거동 고분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051
한자 晋州平居洞古墳群
영어음역 Jinju Pyeonggeo-dong Gobungun
영어의미역 Tombs in Pyeonggeo-dong, Jinju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 산 44-2지도보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공봉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분군
건립시기/연도 고려시대/1079년~1229년연표보기
관련인물 나주정씨 집안
면적 66,645㎡
높이 1호분 기준 1.5m
지름 1호분 기준 3.3m×3m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 산 44-2
소유자 경상남도 진주시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164호
문화재 지정일 1968년 12월 19일연표보기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고분군.

[개설]

평거동 석갑산(石岬山) 남사면에 축조되어 있는 총 6기의 고려시대 방형분으로, 둘레돌에 고분의 축조시기와 피장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6기 모두 나주정씨(羅州丁氏) 집안의 무덤으로 고려시대 1079년(1호분)부터 1229년(6호분)까지 150년간에 걸쳐 축조되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내부시설은 알 수 없으나, 거창 둔마리 벽화고분이나 경기지방의 조선 초기 방형분 등의 예를 통해 상자 모양의 돌방일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진주시의 서쪽 석갑산 남사면의 중턱에 위치한다. 석갑산 주능선은 동서로 길게 자리 잡은 산으로 남사면으로 세 갈래 능선이 뻗어 있다. 고분은 서측 능선에 1호분·6호분이, 중앙 능선에 2호분·3호분이, 동측 능선에 4호분·5호분이 각각 분포하고 있다.

[형태]

진주 평거동 고분군 중 1호분은 평면 장방형으로 지대석과 둘레돌, 우주, 갑석을 갖추고 있다. 지대석은 고분의 앞에서만 확인되며 뒤쪽은 흙에 덮여 유무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전체 구조로 볼 때 4면 모두 지대석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돌은 지대석 위에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우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1매의 면석을 세운 다음 그 위를 갑석으로 덮었다. 갑석은 각 우주 위에 1매 그리고 면석 위에는 같은 크기의 판석 2매를 덮었다. 그리고 고분 정면에서 지대석 앞쪽으로 1단 낮게 판석을 달아내었다. 정면의 기단면석에 “원풍 이년시월일일 대상정열지묘(元豊 二年十月一日 大相丁悅之墓)”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풍 이년(元豊 二年)은 고려 문종(文宗) 33년으로 서기 1079년에 해당하며, 대상(大相)은 고려시대의 향직(鄕職) 제7위로 제4품에 해당된다. 6기의 고분 중 가장 빠르며, 규모는 너비 3.3m×3m, 높이 1.5m이다.

2호분은 장방형의 둘레돌을 갖춘 것으로 기본 구조는 1호분과 같다. 그러나 지대석의 가장자리에 턱을 주어 마치 지대석이 2단처럼 보이게 하였으며, 전면(前面)의 경우 지대석에 잇대어 묘의 양옆으로도 판석을 깔았다. 그리고 무덤 앞으로 판석 1단을 더 달아낸 것은 1호분과 같다. 전면 면석에 “융흥삼년을유이월 정윤화지묘(隆興三年乙酉二月 丁允樺之墓)”라고 명문이 새겨져 있다. 융흥삼년(隆興三年)은 고려 의종(毅宗) 19년으로 서기 1165년에 해당한다. 정윤화(丁允樺)는 정열(丁悅)의 4대 후손이다. 규모는 너비 3.3m×2.8m, 높이 1.3m이다.

3호분은 2호분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전체형태는 앞의 1,2호분과는 전혀 다르다. 봉토 아래 지대석(地臺石)과 둘레돌, 우주(隅柱), 갑석(甲石)을 갖추고 있지만, 봉토의 하단 전체를 돌린 것이 아니고 앞쪽의 절반가량만을 둘렀다. 뒤쪽은 지표면에서 바로 봉토를 쌓아 올렸다. 즉, 무덤의 전면(前面) 및 측면 앞쪽에만 둘레돌을 둘렀는데, 그 평면형태가 마치 육각형에 가까우며 앞쪽 3면만을 석제기단으로 둘러주고 끝나는 부분에는 잘 다듬은 장방형의 돌 1매를 세워 마감하였다. 기단의 구조는 앞의 것들과 대체로 같은 형태이나, 갑석의 모서리를 마치 탑의 지붕돌[옥개석]처럼 끝이 약간 들리도록 능각을 주어 처리하였고 삼엽화문(三葉花文)을 음각하였다. 묘 앞에는 “정공윤종지묘(丁公允宗之墓)”라 새긴 비석을 세웠다. 정윤종은 2호분의 주인공인 정윤화(丁允樺)의 아우이며, 무덤의 연대도 1165년보다 약 20년 정도 뒤인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너비 6m×6m, 높이 1.5m이다.

4호분의 기본 구조는 3호분과 같으며, 명문은 “가정팔년 정언진묘(嘉定八年 丁彦眞墓)” 외에는 판독할 수 없다. 가정팔년(嘉靖八年)은 고려 고종(高宗) 2년으로 서기 1215년에 해당한다. 정언진(丁彦眞)은 대장군이었으며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역임하였다. 고분의 전방에 축대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규모는 너비 2.7m×2.7m, 높이 1.5m이다.

5호분은 이곳 고분들 중에서 가장 특이하고 화려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묘역은 축대를 3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둘레돌에도 지대석이 없으며 우주도 갖추지 않고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올려 면석을 대신하였다. 그 위를 갑석 아래에 갑석과 같은 크기의 판석을 1매씩 끼워 넣어 갑석 받침과 같은 효과를 주었다. 둘레돌의 사면을 돌아가며 각종 명문과 문양 등이 눈에 띄는데 범어와 같은 형태도 확인된다. 묘의 정면에 “영부인 정씨묘(令夫人 鄭氏墓)”라 새겨져 있고, 동쪽 면에는 “정해십이월십일 대상정육장(丁亥十二月十日 大相丁堉葬)”이란 명문이 확인된다. 부부 합장묘일 가능성이 크다. 규모는 너비 3m×4.8m, 높이 2m이다.

6호분은 1호분과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다. “소정원년 정량묘(紹定元年 丁良墓)”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소정원년(紹定元年)은 고려 고종 15년(1228년)이다. 고분군 중에 가장 늦게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규모는 너비 3m×3.8m, 높이 1.27m이다.

[현황]

1968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진주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2006년 5월경에 1호분이 도굴된 바 있다.

[의의와 평가]

진주 평거동 고분군은 고려 중·후기 나주정씨(羅州丁氏)의 가족 공동묘지로 둘레돌에 명문을 새겨 축조연대와 피장자를 알 수 있는 진주 지방 호족의 묘로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이들 고분군의 둘레돌 형태는 경주 구정동 방형분과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무덤과 고려시대에는 거창 둔마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후기의 여러 고분, 그리고 조선 초기의 명신들의 고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신라 이후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형식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5.04.09 항목명 수정 진주 평거동 고려고분군을 진주 평거동 고분군으로 수정(2015.4.9)
2011.11.04 내용 수정 1) “가정팔년 정언진묘(嘉靖八年 丁彦鎭墓)” 외에는 판독할 수 없다. 가정팔년(嘉靖八年)은 고려 고종(高宗) 2년으로 서기 1215년에 해당한다. ->“가정팔년 정언진묘(嘉定八年 丁彦眞墓)” 외에는 판독할 수 없다. 가정팔년(嘉定八年)은 고려 고종(高宗) 2년으로 서기 1215년에 해당한다. 2) 정언진(丁彦鎭)은 대장군이었으며 ->정언진(丁彦眞)은 대장군이었으며 3) “정해십이월십일 대상정육장(丁亥十二月十日 大相鄭堉葬)”이란 명문이 확인된다. ->“정해십이월십일 대상정육장(丁亥十二月十日 大相丁堉葬)”이란 명문이 확인된다.
2011.07.01 2011년 한자(문) 재검토 작업 “가정팔년 정언진묘(嘉定八年 丁彦鎭墓)” 외에는 판독할 수 없다. 가정팔년(嘉定八年)은 ->“가정팔년 정언진묘(嘉靖八年 丁彦鎭墓)” 외에는 판독할 수 없다. 가정팔년(嘉靖八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