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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18
한자 晋州-名品-晋州緋緞
영어공식명칭 Jinju's luxury goods, Jinju silk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황경규

[정의]

진주의 특산품으로서 삼한시대부터 시작된 진주지역의 전통산업인 견직양잠산업의 생산품.

[진주 견직(絹織)의 역사]

진주지역의 견직공업은 이 지역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진주의 전통산업이다.

비단의 역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비단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에서 찾아볼 수 있다.「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마한은 그 민족이 토착하여 농사를 지었고, 잠상(蠶桑)을 알고 면포(비단)를 지었다(馬韓 其民土着 種植 知蠶桑 作綿布)”라는 기록과 함께 “변한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좋고 잠상을 알았으며 견포를 지었다. 변진과 진한 역시 폭이 넓고 올이 가는베를 지었다(弁韓 土地肥美 宜種 五穀及稻 曉蠶桑作絹布 弁辰與辰韓 亦作廣幅細布)”라는 기록이 전해져, 일찍부터 잠상과 작포(作布)가 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일찍부터 중국 당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비단교역을 했고, 직조기술도 받아들였다. 이어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층 발달된 견직기술로 찬란한 비단문화를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농업기술을 장려하기 위하여 세종 때『농상집요(農桑輯要)』, 중종 때『잠서언해(蠶書諺解)』 등을 편찬하여 잠상을 장려했다.

진주지역 잠상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삼한시대부터 견직물을 생산했는데, 이때부터 진주지방에서도 뽕밭을 조성하고 견직물을 생산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삼한의 부족국가들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변한(弁韓)의 12국이 김해를 중심으로 6가야 연맹으로 발전했는데, 그 중 진주는 고령가야의 고도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진주지역에는 일찍부터 잠상과 견직물 생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근세에 들어서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견직공업은『경남진주안내(慶南晋州案內)』(일본어판, 1912년 발간)에는 진주지역을 토질과 기후가 좋아 양잠의 적지로 소개하고 있고,『보진주안내(補晋州案內)』(일본어판, 1913년 발간)에서는“진주 비단공장들의 기계가 낙후하여 비단의 품질이 낮기 때문에 일본에서 직기를 들여와 생산한다. 원료가 풍부한 이곳의 양잠은 미곡에 버금가는 재원이 되고 있다”고 한 것과 조선 말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양잠이 성행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1900년대 초에 이미 진주에서는 근대식 견직공장이 들어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주지역 최초의 견직공장은 1920년대에 추겸호(秋兼鎬)가 대구에서 진주로 내려와 설립한 동양염직소(東洋染織所)[현 대안동 우리은행 자리]이다. 당시 동양염직소는 일본에서 역직기를 수입해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근대식 견직공장의 시작을 열었다. 이처럼 진주의 비단공장에 근대화된 직물기계가 도입된 이유는 산청·함양의 질 좋은 누에고치와 풍부한 노동력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진주의 남강물로 염색하면 비단의 색깔이 고와질 뿐 아니라 변색이 되지 않아 비단 생산지로 진주가 최적지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1935년 9월 15일자 『영남춘추(嶺南春秋)』에 인견을 직조하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시대 후반에 들어서는 비단은 물론 값싼 인견도 직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일본인 오다나카가 오다나카직물공장(현 망경동 92-1[망경남길66번길 11] 동명유치원 자리)을 설립하여 종업원 50명의 대규모 직물공장을 운영하였다.

1940년에 승전이조(勝田伊助)가 펴낸 『진주대관(晋州大觀)』에 기록된 잠업과 견직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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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 잠업취체소 : 잠업취체소는 1919년 4월 조선잠업령이 발포되고, 집행기관으로서 진주면 천전리에 사무실을 준공하였다(1920). 1925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길 때까지 있었으며, 이후에는 지소를 두었다. 당시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잠종제조 : 제조자 4명, 잠아사육장소 30개소, 제조매수 8655매(춘잠 5069매, 추잠 3586매)

잠취수량 : 생고치 53292관, 마른고치 1246섬

상묘생산 : 생산자 33명, 반별 956반, 생산본 1,271,760본

위탁제사 : 업자 57명, 제사가마(釜) 102개, 기직(機織)대수 117대

경상남도 원잠종제조소 : 1914년 4월 ‘진주잠업전습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어 잠종의 배부, 상묘 육성과 배부, 견습생을 양성했다. 1918년 ‘원잠종제조소’라고 고치고, 1919년 조선총독부령으로‘경상남도원잠종제조소’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원잠종의 제조와 배부, 잠상의 시험조사 및 강습, 실지지도, 중견인물의 양성, 기타 잠업에 관한 사항을 전담했다.

이상의 내용으로 살펴보면, 진주는 경상남도의 견직과 양잠의 중심도시로서 일찍부터 견직과 양잠이 진주 산업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의 진주견직]

진주의 견직공업은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시기까지 경남견직공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나, 해방 이후 전국적으로 견직과 양잠의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는 그동안 일제의 강제적인 양잠육성정책에 대한 반발로 농민들이 양잠 자체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곡가의 폭등으로 곡물 경작이 수익 면에서 유리한 측면도 한몫을 했지만, 양잠의 기술체계와 경제적 환경이 혼란에 빠졌고 일제의 관권이 일시에 사라진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의 대표적 공장이었던 동양염직은 시설을 현대화하고 역직기로 문양을 넣는 문직도 했다. 1946년에는 성재조가 인사동에 조일견직(현 인사동 3번지[진양호로 477] E마트 자리)을 창업하여 견직공업발달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당시 진주에서 생산한 ‘진주뉴똥’은 생사로 베를 짜서 물에 삶아 염색을 하는 후염처리공정을 거친 것으로 물세탁이 가능한 견직물이었다. 뉴똥생산을 시작하면서 진주의 견직공업은 활성화의 발판을 마련했고, 생산된 제품은 전국적으로 판매되었다. 그리고 1946년에 최병두가 진주의 강남동에 해동제사주식회사를 설립해 명주실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진주지역 최초의 제사공장이었다.해동제사 설립 이전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이 경영했던 밀양의 동양제사가 유일한 견직공장이었다.

1948년에는 망경동에 해동직물이 설립되어 당시 진주 제일의 공장이었던 조일견직과 더불어 뉴똥을 생산하면서 호황을 맞았고, 더불어 전국 제일의 규모를 확고히 하였다. 이처럼 진주의 견직공업이 호황을 누리게 된 것은 1953년부터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일시적으로 소비량이 급증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어 19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는 과정에서 견직산업에 대한 정부 주도의 중점투자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섬유수출 붐이 일어났고 저렴한 노동력을 대가로 섬유산업은 호황을 누렸다. 1960년대는 우리나라 전반적으로 섬유공업이 호황을 누렸고, 진주지역도 견직공업이 가장 대표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당시에는 서울, 부산 등 외지상인들이 여관·여인숙에서 숙박을 하면서 진주비단을 구입하려 할 정도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한 것이다.

이 시기에 진주에서는‘신화직물’을 비롯한 많은 직물공장이 최신기계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생산체제도 수출 중심으로 전환하게 된다. 뉴똥에서 실을 삶아 염색하고 직조를 하는 양단으로 생산체제를 바꾸어 기술의 발달을 주도하였다. 양단가격은 뉴똥보다 가격은 비쌌지만 수요는 매우 많았다.

이후 1970년대까지 진주에는 강남동·칠암동·망경동을 중심으로 수많은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들 지역은 모두 남강의 물을 이용하기 가까운 입지적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1960년대 전국견직공장 및 시설현황을 살펴보면, 당시 진주지역의 산업 가운데 견직산업의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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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진주의 견직산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은 1978년 진주에 상평공단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1970년대 말까지 진주시내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견직 관련 공장들이 상평공단에 입주, 넓은 부지에 대량생산체제를 갖추면서 명실상부한 진주의 대표산업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진주지역의 입지여건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섬유산업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내수량의 70%를, 수출량의 10%를 차지하는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진주의 섬유산업은 견직산업이 주종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공장체제로 발전하지 못했다. 따라서 영세공장들로 전락하면서 섬유 수출의 국가적 정책에 부응하지 못하고,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진주지역의 견직산업이 비록 섬유산업 전체에 있어서 그 비중은 미미하였으나 견직산업만 분리해서 본다면 전국적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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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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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4]

[진주견직공업의 현황]

진주의 견직산업은 지역적인 여건으로 볼 때 남강의 물을 이용한 전통적 비단의 명산지로 오늘날에도 세계 5대 실크명산지로, 국내 실크업체의 70%, 생산량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 견직업체 현황

○ 생산품목

○ 경남직물진주실크공업협동조합

1962. 2. 28 : 경상남도 진주지구 직물공업협동조합으로 창립

1962. 8. 28 : 경상남도지사 인가(강남동 130번지[망경로296번길 5])

1989. 1. 11 : 상대동 314-106으로 이전

1996. 7. 18 : 경남직물공업협동조합으로 인가

1998. 8. 5 : 공동브랜드 판매법인 (주)실키안 설립

2003.11. 1 : 하대동 75-43번지[상대로143번길 4]로 이전

한국실크연구원(구 한국견직연구원)

설립목적 : 생산기술의 연구, 생산기술의 지도보급, 기능인력 양성, 시제품 개발 및 지원

시설현황 : 부지 6,952㎡, 건물 4,780㎡

1988. 2. 24 : 사단법인 한국견직연구원 설립 허가

1990. 2. 22 : 민간생산기술연구원으로 개편

2000. 11. 20 : 상평동 267-3번지[공단로 46]로 이전

2007. 05 : 한국실크연구원으로 명칭 변경

○ 공동브랜드 : 실키안(Silkian), 진주기라

특허청 상표등록 : 98. 10.

실키안(수출용) : Silk + Civilion의 합성어로 미래지향적인 면을 강조하고 세계화 개념에서 ‘실크시민’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실키안’은 복합사 제조공정 기술, 경편직물 제조 기술, 극세섬도 실크기술 등을 토대로 생산된 패션소재에다 다양한 문양과 디자인, 천연염료를 이용한 고감성 하이패션이 접목된 고품질 실크브랜드를 지향한다.

진주기라(내수용) : ‘최고의 비단’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발음상 ‘진주의 것’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음.

[새로운 도약]

실크하면 진주를 연상케 할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진주의 실크산업은 한마디로 별다른 투자 없이도 뒷짐 지고 사업하는 호황을 누리는, 그야말로 지역경제의 중심축 내지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간편함을 추구하는 패션문화의 변화로 한복 수요 급감, 고속집기 도입으로 인한 생산량 급증, 자금력이 취약한 업계 현실상 직영점을 갖지 못해 마케팅 능력이 한계에 봉착, 진주 견직업계는 지난 1989년부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값싼 중국산 비단과 원사가 수입되는 등 중국산 저가공세에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덤핑공세, 게다가 3D업종을 기피하는 사회현상에 따라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열악한 근무여건은 젊은 층의 외면을 받기 시작하면서 체계적인 직수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질 좋은 견직물의 생산과 좋은 생산품의 생산도 유럽과 선진국에 밀리고, 3차가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견직제품의 브랜드 역시 세계 각국의 고급화와 세련된 디자인을 통한 명품브랜드화에 밀려 날로 인지도가 떨어지면서 값싼 제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1962년 설립된 경남직물진주실크공업협동조합과 1988년에 설립된 한국견직연구원(현 한국실크연구원)이 생산과 기술 발전을 병행하여 견직산업의 발전기반을 축적하였고, 1998년에는 고급화와 명품화를 목적으로 공동브랜드인 실키안(Silkian)과 진주기라를 개발, 생산에서 상품판매로의 전환을 꾀하여, 매년 실크페스티발을 개최하고 2005년에는 세계의상축제를 개최하여 세계 5대 실크 생산지의 명성에 걸 맞는 지역으로서의 변화 발전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진주 실크산업은 2005년 1월 농림부로부터 실크전문농공단지 조성이 확정되어 문산읍 삼곡리 일원에 총면적 13만2589㎡규모에 총사업비 225억원을 들여 2010년 3월 완공하였고, 정부의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지역혁신특성화사업(RIS)으로 최종 선정돼 진주 실크산업의 획기적인 중흥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청신호가 되었다. 이에 따라 3년간 국비 36억 원을 지원받는 등 총 47억5,000만원의 사업비가 투자돼 진주 실크산업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6.26 [새로운 도약] 수정 실크전문농공단지 조성 완료됨에 따른 내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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