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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26
한자 晋州-土-姓氏-集姓村
영어의미역 Native Families and Single-clan Villages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신기철

[정의]

진주지역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와 성씨들이 대성을 이루어 모여 사는 마을.

[개관]

진주는 신라시대 구주의 하나로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항상 영남의 계수관으로 그 위치를 지켜왔으며 토성세력도 강성하였다.

진주의 성씨는 정(鄭), 하(河), 강(姜), 류(柳), 소(蘇), 임(任), 강(康), 김(金), 박(朴)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진주목(晉州牧) 조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엄밀히 보아 입주후성(立州後姓)인 류(柳), 임(任), 강(康)을 구분한다면 진주의 토성은 정(鄭), 하(河), 강(姜), 소(蘇)라 할 것이다. 이들 토성들은 진주 각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까지 집성촌으로 남아있다.

[진주강(姜)씨]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의 병마도원수이다. 영양왕 9년 5만 군사를 이끌고 요서지방에 출정해 공을 세우고, 뒤이어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임유관 싸움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런데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진주를 관향(貫鄕)으로 한 진주강씨는 신라 말에 태중대부 판내의령을 지낸 강진(姜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강진은 정순공으로 진양후에 봉해진 분이다. 숭인전 사운과에 등제되어 앞서와 같은 벼슬을 했는데, 그 관직은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둔 뒤 평양지방의 준재를 뽑아 임명한 벼슬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진양은 진주의 옛 이름이므로 같은 본이면서도 관향을 진주와 진양으로 하는 계열이 있다. 인헌공파를 제외한 4파는 관향을 진주로, 인헌공파는 영천을 본관으로 써 왔다.

[진주류(柳)씨]

유차달(柳車達)의 후손인 유언심(柳彦沈)이 영남의 진주로 옮겨 봉해짐으로써 진주류씨가 비롯되었다. 더 자세히는 정민공(貞敏公) 유진동(柳辰仝)의 시장(謚狀)에서 “우리 류씨는 모두 문화에서 나왔다. 고려 때 대승인 유차달을 시조로 한다. 그 후에 유언심이 공로가 있어 진주에 봉작(封爵)을 받자 그 손자 유인비(柳仁庇)가 진주인이 되고 대대로 높은 벼슬과 유명한 사람이 났다. 다른 문헌에 진주류씨 시조 유인비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유언심이 진주백에 봉작된 연유로 유인비가 문화에서 관을 진주로 이적했기 때문이다.”고 적고 있다.

『진주류씨세보(晋州柳氏世譜)』에는 유색(柳穡)을 1세로 숙(叔)·진부(振阜)·무선(茂先)·보림(普林)에 이어 차달로 계세(繼世)했고, 그 큰아들 효전(孝全)은 연안백(延安伯)이 되어 구성인 차씨(車氏)를 회복하여 연안차씨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그대로 유씨성을 이어 유차달을 시조, 효금을 2세로 세계(世系)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류씨의 관조(貫朝)는 유언심이고 유차달의 8세손이다.

[진주정(鄭)씨]

진주정씨는 동성동본이면서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8개파(진양8파)가 있다.

원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 6촌장중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의 촌장인 낙랑후(樂浪候) 지백호(智伯虎)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그의 후대에 와서 진주정씨의 본관 분파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믿을 만한 문헌은 없다.

편의상 크게 나눠,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으로 대별하는 것이 통설이다.

충장공파(忠莊公派)는 고려 문하시중을 지낸 정예를 시조로 하며 후손으로는 문영공(文英公) 정수(鄭需), 문양공(文良公) 정을보(鄭乙輔), 감정공(監正公) 정길보(鄭吉輔) 등이 유명하다.

첨정공파(僉正公波)는 고려 때 첨왕(僉王)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시조로 하며 후손으로 충의공(忠毅公) 정기룡(鄭起龍)이 유명하다.

은열공파(殷烈公派)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낸 정자우(鄭子友)를 시조로 하며 후손에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이 유명하다.

우곡공파(遇谷公派)는 고려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정온(鄭溫)이 시조이다.

어사공파(御史公派)는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낸 정택(鄭澤)을 시조로 하며 후손으로 문장공(文莊公) 대제학(大提學) 정경세(鄭經世)가 유명하다.

공재공파(恭載公派)는 고려 때 첨추(僉樞)를 지낸 정장이 시조이며 후손에 공재공(恭載公) 정보(鄭步), 충경공(忠景公) 정백형(鄭百亨)이 유명하다.

기후공파(祇候公派)는 고려 때 지후(祇候)에 오른 정신(鄭侁)을 시조로 한다.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는 고려 때 판내부사(判內府事)를 지낸 정안교(鄭安校)를 중조(中祖)로 한다

이렇듯 충장공파의 정예는 다른 분들보다 앞선 시대에 나온 분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진주 8정이 모두 정예의 후손이라는 생각 아래 『대동보(大同譜)』편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예의 후손이 8개 파로 나눠졌다는 문헌 등 자료가 없어 아직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

[진주 하(河)씨]

하씨는 삼한시대부터 있어 온 오래된 성씨였을 뿐 아니라 고려부터 성족(盛族)이었다고 『진양하씨대동보(晋陽河氏大同譜)』에 쓰여 있다.

그러나 창씨한 시조나 또는 계승적 연맥을 밝힐 만한 고증적 문헌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조 문종 1년에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신미보(辛未譜)』를 찬집하고 그 서문에 당시까지의 하씨의 연원을 정리해 둔 것에 의거할 뿐이다.

진양하씨 중에는 고려 목종 때 중랑장(中郞將)·상서좌사랑중(尙書左司郞中)으로 있으면서 거란[契丹]과의 분쟁에서 항절사(抗節使)로 목숨을 바쳐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평장사(同中書平章事)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을 시조로 삼는 시랑공파(侍郞公派)가 있다.한편 조선 세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은 고려 정종문종 양조에 걸쳐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였으니, 이른바 사직공파(司直公派)의 시조가 하진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하진보다 조금 후대의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는 동정공파(同正公派)가 있다.

진양하씨가 관향(貫鄕)을 진양으로 삼게 된 까닭은 고려 충렬왕조에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를 지낸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이 상대(上代)로부터 진주 니구산(尼丘山) 여사촌(餘沙村)[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세거하였기에 그 곳을 하씨의 발상지로 보아 진양대도호부의 지명을 딴 데 있다.

[진주 임(任)씨, 강(康)씨, 소(蘇)씨]

임씨와 강씨는 후세에 나타나지 않고 소씨는 세조 때 급제한 소우석(蘇禹錫), 소사식(蘇斯軾) 부자와 중종 때 소세양(蘇世良), 소세양(蘇世讓) 형제 등 문과급제자가 6명이나 되었으나 이족(吏族)은 찾아 볼 수 없다.

[진주의 집성촌]

○우봉(牛峰)마을

금곡면 가봉리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산의 형국이 힘센 황소의 머리 같다 하여 이름을 우봉이라고 지었다. 조선 초에 전주이씨가 정착하여 살았다고 하며 그 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에 임란공신인 전주정씨 언국공(彦國公)이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한다.

○엄정(嚴亭)마을

금곡면 검암리에 있는 마을로 엄정은 옛날 엄씨가 살았다고 하여 엄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마을 앞에 큰 정자가 엄히 서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현재 살고 있는 하씨는 영조시대 운문 큰댁에서 초계공(草溪公)이 처음으로 분가하여 살기 시작하였고 반(潘)씨가 그전부터 살았다고 한다. 류(柳)씨는 백년이 조금 넘었고 정(鄭)씨는 백년도 되지 않는다.

운문(雲門)마을

금곡면 검암리에 있는 마을로 하씨의 집성촌이며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운문은 지형이 구름가운데로 학이 나르는 형국이라 하여 운중학설(雲仲鶴說)이라는 말이 전하여 오며 여기에서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문을 훈을 따서 부르면 구름문이 되므로 통칭 발음상 줄여서 굴문으로 들리고 그렇게 부르고 있다. 학은 고래로 길조이고 부와 귀의 상징처럼 인식되어 왔는데, 운문마을에는 지금도 많은 학이 군집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운문에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격으로 느티나무가 세 곳에 심어져 있다. 마을 바로 앞에 서 있는 나무는 형으로, 마을 어귀에 있는 나무는 둘째로, 동편에 있는 나무는 막내로 일컬어진다. 또한 뒷산에 있는 서낭당과 마을 사방에 있는 목신(木神)이 모든 질병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특히 백호등(白虎嶝)을 길게 이어 모든 질병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한다는 뜻에서 느티나무를 심고 장석을 세우고 돌탑을 모았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상징으로 검암초등학교 뒷편에 약 500년의 수령으로 추정되는 백일홍이 있다. 운문의 역사는 하씨 선대 하순(河淳)이 1414년에 생원한 사실이 있고 그의 며느리 박씨부인이 1470년에 별세하고 세운 비석이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하씨가 600년 정도 살았다고 추정된다. 이 비석은 금곡면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역사적 보존 가치가 있다. 운문마을 앞에는 세 개의 큰 바위가 있다하여 삼암리라고도 한다.

○차현(車峴)마을

금곡면 검암리에 있다.

수레가 고개를 넘었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차현마을은 동쪽마을인 수레재와 서쪽마을인 서삼미로 이루어져 있다. 서삼미(西三美)란 이름은 서쪽에 삼미정(三美井)이라는 좋은 우물이 있어 붙여졌다 한다. 차현에는 진양강씨가 살았는데 임란 때 피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여 약 이백년간 마을이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진양정씨, 초계정씨, 문화유씨 삼성이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예(東禮)마을

금곡면 동예리의 마을로 일명 동네라고도 한다.

마을이 동쪽을 향해 있다하여 동네 또는 동례라 하였다는 말과 예부터 예의가 바른 동네라 하여 동방예의지국의 동자와 예자를 따서 동례로 하였다는 말이 있다.

약 300년 전에 김해김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신대마을과 더불어 두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진양강씨, 광산김씨, 김해김씨가 대성이다.

○두문(斗文)마을

금곡면 두문리에 있는 마을로 두문의 이름은 드물, 드리무, 입물, 더문, 도무리, 두무리라는 말로 책에서 전하여 온다. 영현면에서 흘러드는 도산천(都山川)과 영오면에서 흘러드는 군산천(群山川)이 합해지는 지점인 것으로 보아 도산천의 도와 군산천의 무리(群)를 합한 ‘도무리’가 두문리의 유래인 듯하다. 한편 현재 더문골이란 곳이 옛날 두문리 마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물이 잘 들어오지 않자 차차 낮은 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으로 보아서 드무리라는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책에 들입(入)자 말물(勿)자로 하여 입물이란 이름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물이 들지 말라는 뜻이 있는 듯도 하다. 또 더문이란 말은 드물다는 경상도의 방언인 것으로 보아 물이 잘 들어오는 일이 드물어서 사람 살기가 좋다는 뜻도 되므로 결국 도무리 또는 두무리로 되었다가 훗날 글을 잘하는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한자의 많다 좋다 대단하다는 뜻의 두자와 글이 좋다, 글을 잘한다는 뜻의 문자를 써서 두문리로 바꾼 것으로 추측된다. 또 두문리는 삼면이 강으로 막히어 있어 막을 두(杜)와 면할 면(免)을 써서 두면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두면은 마을을 보호한다, 액을 면하게 한다는 등의 뜻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대문이 없는 마을이다.

약 백 년 전에 학문의 열기가 높으면 선비와 벼슬 할 사람이 많이 난다고 하여 두문리라 하여 오늘에 이른다. 약 오백년 전부터 김해김씨가 정착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현재는 김해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송곡(松谷)마을

금곡면 송곡리에 있는 마을로 본래 소나무가 많아 소실 또는 송곡이라 불러졌다. 약 400년 전에 문화유씨가 정착하여 소실이라 불러왔다.

○인담(仁澹)마을

금곡면 인담리에 있는 마을로 고려 때 인담부곡(鱗澹部谷)이었다 한다.

지금부터 약 350여 년 전 길을 가던 한 선비가 목이 말라 마을 입구의 샘가에서 목을 적시고 마을을 쳐다보면서 ‘윗 골에 언젠가는 큰 못이 생길 것이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것’이라 예언하여 ‘큰 못’, ‘어진 못’이란 뜻에서 ‘인담’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인담마을은 강씨, 안씨가 주류성씨이다.

○상인담(上仁澹)마을

인담마을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인담이라 부르고 있다. 사람이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현재 13대째 살고 있는 진양강씨가 들어오기 전에 서씨가 많이 살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서씨는 단 두집뿐이고 대부분은 강씨이다. 마을에서 약 600미터 위쪽에 있는 대골에 옛 기와장과 구들장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 곳이 본시의 마을인 것으로 판단된다.

○정자(亭子)마을

금곡면 정자리의 본 마을로서 문산에서 금곡으로 오는 첫 번째 마을이고 문산면 안전리와 송곡으로 가는 입구이다. 임진왜란 때 재령이씨가 정착하였다 하나 지금은 문화유씨가 대성이다.

○장재(長財)마을

금곡면 죽곡리의 마을로서 부자마을이라는 뜻에서 장재실이라 불리어지기도 하고 지혜스러운 마을이라하여 장지(長智)라고도 불리어왔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보다 서기(瑞氣)로운 징조(徵兆)가 비친다, 선(善)하고 신비(神秘)함이 많다는 뜻이 있는 지초지(芝)로 바뀌어 불리어 왔다. 지(芝)는 난초와 비유되는 화초로서 군자나 대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1990년 마을 이름 개명 시에 장지(長芝)마을 총의에 의하여 다시 옛날 이름인 장재실(長財實)로 개명하여 부르게 되었다.

장재마을을 감싸 안은 천금산은 문자 그대로 돈이 많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산의 형상이 학이 노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대밭에 학이 모였고 부자마을로서 천석군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학은 길조로서 많이 모여드는 마을은 성하고 흥하여 번창한다는 전설이 있다. 장재 마을은 진양강씨들이 주류를 이루고 살며 다음으로 하씨, 서씨 등이 살고 있다.

○안담마을

금산면 송백리에 있는 마을로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주로 밀양박씨와 고성이씨가 살고 있다. 송백리 안쪽에 있다하여 안담 또는 내동이라 한다.

○건네담마을

금산면 송백리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즉 안담의 건너편에 있다하여 건네담 또는 외동이라 하였고 주로 김해김씨가 살고 있다.

○상의(上儀)마을

금산면 장사리에 있는 마을로서 금호의 큰들 위쪽에 있는 농사짓기 편리한 평탄한 마을이다. 본래 덕의리의 일부였고 덕평의 위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상의이다. 전하여 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관련 문헌은 없으며 대성(大姓)이 없는 집성마을이다.

○덕의(德儀)마을

금산면 장사리에 있는데 금호의 큰들 가운데 있는 새로 생긴 집단마을이다.

덕의를 상·하로 분동하면서 위쪽 덕의를 상덕의라 하고 아래쪽 덕의를 하덕의라 하였다. 남강댐 축조 이전에는 홍수피해를 입었으나 댐 준공과 금호제 완성으로 홍수피해 염려가 없는 영농 안전지대가 되어 녹색혁명 당시 통일벼 재배의 발상지이기도 하였으며 고등채소, 시설원예도 잘되는 마을이다.

창동 당시에는 농막형태의 마을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현대식 개량 농촌이며 70년대 새마을사업이 잘된 마을이다. 진양정씨가 대성을 이루며 대평면 수몰지구 이주민 창원황씨들이 이주하여있다.

사동(沙洞)마을

금산면 장사리에 있으며 조선조 후기 대여촌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산면에 편입되었다. 월아산 무제봉(일명 국사봉)에서 서북쪽으로 휘어 돌면서 못을 이룬 것이 금호지인데 그 못 북동쪽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무제봉 통사바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형국이 흡사 가래삽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삽골, 삿골로 불려지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진양정씨가 대성으로 살고 있고, 창동 때에는 경주김씨가 선주(先住)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으며 창동 때 심은 것으로 추측되는 둘레 5m가량의 모과나무가 1970년대까지 있었으나 부산으로 이식되었다 한다.

○월아(月牙)마을

금산면 용아리에 있으며 진양의 명산 월아산 아래에 자리 잡은 평화로운 마을이다. 달[月]이 돋을 때 남북으로 솟아있는 두 봉(峯)의 산이 달을 토(吐)하듯이 보이므로 일명 달내미라고도 한다. 경주김씨(慶州金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김해허씨(金海許氏)가 대성이다.

○관지(觀旨)마을

광제천(廣濟川)과 태천(台川)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명석면 관지리의 본 마을이다. 산을 등진 아늑한 한 마을로서 옛 촌명을 태동(台洞) 또는 관점(觀店)이라 하였는데, 앞산과 뒷산 송림에 황새가 많이 모여 앉아 마을의 정취를 더해주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는 본 부락 큰 마을과 옷밭, 섬말, 관음정을 통틀어 관지라 한다.

이 마을에는 진양하씨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으며, 하씨들의 선조인 하공효(河公孝)가 약 400년 전인 선조 33년(1600)에 처음 전거(奠居)하였고, 그의 아들인 台溪하진(河晋)이 벼슬에서 물러나와 시내 위에 태계정이란 정자를 짓고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오랜 세월 속에 옛 정자는 없어지고 동정거리라는 옛터 이름만 전해 왔으나 1911년에 사림들과 후손들이 협력하여 옛 자리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태계정을 중건하였다. 그의 문집 판각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도 마을 남쪽에는 임연정(臨淵亭)이란 서숙을 두어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마을 형태도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는데 동리 앞으로 활 모양을 이루며 흐르던 시냇물이 1946년에 직강되었고, 1962년에 수해를 입어 새마을 사업과 더불어 마을 안길이 지금의 정자(井字)길로 확장되었다. 본 마을 서편에 있는 옷밭에는 옷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하며, 옛날에 전의이씨(全義李氏)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한집도 없고 다른 성씨가 네댓 집 살고 있다.

시내 건너 남쪽에 있는 섬말은 큰물이 들면 강에 둘러 쌓인 섬처럼 되기 때문에 불러진 이름이다. 동남편에 있는 관음정(鸛吟亭)마을은 황새가 울며 날아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오래전부터 밀양박씨들이 살아왔고, 현재 폐교된 명석초등학교가 이곳에 있었다.

관지마을은 전후좌우로 경지면적이 넓은 편인데, 마을 앞 남쪽을 고래들(鯨坪)[큰 들이란 뜻], 동쪽을 대정들, 북쪽을 나들이들(벗어난다는 뜻), 섬말 앞들을 굼들, 서쪽을 모팅이들[隅坪, 모퉁이에 있다는 뜻]이라 부른다.

○왕지(旺旨)마을

명석면 왕지리의 본 마을인 왕지마을은 왕지골과 동성골을 함께 일컫는데, 집현산 한줄기가 집현면명석면의 경계를 이루며 십여 리를 뻗어온 중간 지점에 산을 등지고 포근하게 자리한 마을이다.

왕지라는 촌명은 마을 뒷산 중턱에 왕정승(旺政承)의 고총이 있어서 이렇게 불린 것이라 하고, 동성골[同生谷] 역시 왕정승의 동생묘가 있어 동성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왕지골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약 300년 전에 이곳에 정착하였다. 마을에는 박씨들의 입향조(入鄕祖)인 박광신(朴光新)을 우모(寓慕)하여 건립한 재실인 모수재(慕수齋)가 있다. 동성골에는 달성서씨(達成徐氏)들이 주로 살고 있으며 박씨들과 거의 동시에 입주하였다고 한다. 마을 앞에 평평한 들이 펼쳐져 있는데 농가 호수에 비하여 경지면적은 그리 넓지 못하나 경지정리와 수리시설이 잘되어 모든 농사가 잘 된다.

○남성(南星)마을

명석면 남성리는 추동을 경계로 긴 협곡(峽谷)을 이루고 있어 리(里)의 길이가 무려 십여 리나 된다. 이 좁고 긴 골에 조그마한 들이 열린 곳마다 마을이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아래에 있는 마을을 남성골, 중간에 있는 마을을 돌방[石坊], 제일 위편에 있는 마을을 장골 또는 장흥골이라 한다.

옛 촌명이 남상(南上)인 아랫마을 남성은 약 300년 전부터 경주김씨(慶州金氏)들이 살아왔으며, 그 뒤를 이어 수원백씨(水原白氏)들이 입주하여 함께 살아왔다. 동리 앞에 강대밭이라는 들이 있으며 수원이 좋고 토질이 비옥하여 곡식이 탐스럽게 열린다.

중간마을인 돌방은 앞산이 돌로 뭉쳐져 악산(惡山)이라 불러 생긴 지명이며, 주로 김녕김씨(金寧金氏)들이 살아왔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큰 저수지가 들어앉아 옛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돌방에서부터 오리가 넘는 거리에 있는 위편의 장골에는 임진왜란 시에 경주김씨(慶州金氏)가 피난 차 제일 먼저 입주하였고 그 뒤를 이어 양천허씨(陽川許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들어왔다.

남성마을은 장흥마을과의 사이 도로변에 심어진 벚나무와 남성저수지의 잉어들을 자랑거리로 간직하고 있으나 낚시꾼과 행락객들이 저지르는 오염물 투기로 몸살을 앓고 있기도 하다.

덕곡(德谷)마을

명석면 덕곡리의 본 마을이다.

광제산 정남 아래에 위치한 이 마을은 주위에 덕재[德峙]니, 덕곡(德谷)이니 하는 덕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광제산의 덕으로 널리 구제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으로 판단된다.

덕곡마을광제산 바로 아래에 있는 토담마을, 그 아래에 있는 엄목정(嚴木停)마을, 덕실재넘에 있는 소태골[小台谷] 등 세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소태골에는 인동장씨(仁同張氏)와 동래정씨(東萊鄭氏)가 약 300여 년 전부터 살아왔으며 정씨들의 재실이 있다. 엄목정은 예전에 동리어구에 몇 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인 귀목나무가 서 있어, 멀리서 보아도 나무에 가리어 마을이 보이지 않아 이런 촌명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이 나무가 예전에 전염병으로 가장 무섭게 여겼던 천연두(天然痘)가 이 마을에는 들지 않게 동리를 수호(守護)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는 일제강점기 때 그만 베어지고 말았다.

당시 일본인이 귀목나무를 베어내려고 하자 이 나무에 살고 있던 큰 지네가 온몸에 불을 켜고 나무에서 내려와 서재골로 들어갔고 그 후 나무를 벤 일본인이 며칠 만에 느닷없이 죽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전주류씨(全州柳氏)와 수원백씨(水原白氏)진양정씨(晋陽鄭氏)가 살아왔다.

토담은 제일 북쪽 마을을 구둔담(久遯潭), 건너 산 밑 마을을 굼마을이라 하였다. 밀양박씨(密陽朴氏)들이 오래 전부터 살아왔다.

토담 앞들을 영실들이라 하고 소태골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덕실이라 하며 이 아래에 골짜기를 가마실이라 하는데 옛부터 이 삼실 안에 도지괘침(桃枝掛針, 여자머리에 꽂혔던 바늘이 도화가지에 꽂인 형국)이 있다하여 감여가(堪輿家)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내율(內栗)마을

명석면 외율리의 내율마을은 진주의 끝인 산청군 단성면과 경계지점인 광제산 서북편에 자리한 산간벽촌이다.

예로부터 밤실[栗谷]이라 불렀다. 주위 산에 밤나무와 대추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하며, 5~6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가을비가 오면 그 열매가 개울바닥에 발갛게 떠 내려왔다고 한다. 내율이란 촌명은 점차 인가가 늘어 마을이 커지면서 바깥밤실, 안밤실로 구별하여 부른데서 유래된 것이며 지금도 인근에서는 내율보다는 밤실로 많이 불러지고 있다.

오래 전부터 장흥고씨(長興高氏)와 남양홍씨(南陽洪氏)들이 주로 살아왔으나 지금은 다른 성씨들도 살고 있다. 마을에서 남쪽 편으로 들이 기다랗게 열려있어 벋어져 넓어진다는 뜻의 벋어징이들이라 부르며, 토질이 비옥하고 기후가 서늘하여 옛부터 마늘 명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시목(柿木)마을

명석면 오미리의 서북쪽에 5㎞에 이르는 긴 협곡을 따라 감나무골, 오무, 살미, 새터 등 4개의 땀과 불상골, 웃마을, 개식골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구한말(舊韓末)까지는 오산면 시목촌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미리에 속하였다가 자연마을 단위로 개편되면서 분리되었다.

시목마을은 예로부터 주위 산야에 감나무가 많이 자생한다하여 감나무골이라는 지명으로 불렀다. 평산신씨(平山申氏)와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오래 전부터 살아왔고, 평산신씨의 경모재(敬慕齋)와 화순최씨(和順崔氏)의 염정재(念正齋)가 있었으나 염정재는 진주~대전간의 고속도로 개설로 인하여 오미로 이건하였다.

장수(將帥)가 탄생하였다는 오무(五武)에는 능성구씨(綾城具氏)와 진양정씨(晋陽鄭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살아왔다. 동편에 있는 살미는 화살꼬리 형국이라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며 인동장씨(仁同張氏)들이 이전부터 살아왔다. 골 어구에 있는 개식굴[狗食谷]은 앞산이 방아 형국이며 뒷산은 개의 형국으로 개가 절구공에 먹이를 먹으러 온다하여 이런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동편 오무곡(鰲舞谷)은 새우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며 그곳에 삼불암(三佛庵)이란 절이 있다. 시목은 긴 골을 따라 들판에 펼쳐져 있어 주민들의 경지면적이 상당히 넓은 편이었으나 남강댐으로 인하여 90%이상이 침수되어 오미로 이거단지(移居團地)를 조성하여 주민의 대다수가 이주하였고 현재는 십 여세대가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화(佳花)마을

명석면 가화리의 본 마을로서 옛 오산면(吾山面)의 가동(佳洞)과 화지동(花枝洞)이 지금의 가화와 서현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병행하여, 두 마을의 머릿자를 따서 가화라 하여 명석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후 자연부락으로 개편되면서 땅은 예전대로 분리되고, 부락이름은 그대로 남아온 것이다.

진주시 판문북동과 경계를 이룬 가화마을은 남강댐 건립에 따른 수몰로 마을이 축소되어 행정구역으로는 6개이지만 가구 수는 40호도 되지 않는다.

가화를 보통 갈골[葛谷]로 많이 부르는데 양편 산에 칡이 많아 이렇게 불러진 것으로 보인다. 윗마을 터앞, 중마을 삼밭골, 아랫마을 평지말과, 끝마을 늑시골 등 여러 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약 300여 년 전부터 경주김씨(慶州金氏)들이 집단으로 살아왔다.

○우수(雨水)마을

명석면 우수리의 이 마을은 원래 구한말(舊韓末)까지 성태동면(省台洞面)의 속방(屬坊)으로 우수동(雨水洞)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나불리를 우수리에 병합하여 평거면(平居面)에 편입되었다가 1838년에 평거면이 해체되면서 다시 명석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자연마을단위로 개편되면서 나불리와 분리되었다.

우수라는 지명은 마을 뒷산 형국이 소머리 모양인 우수형(牛首形)이라는 데서 비롯되었으나, 이와 음(音)이 같은 빗물을 뜻하는 ‘우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수마을 우수골을 위시하여 어리대[魚臥臺], 함박골[含芳谷] 등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편에 있는 우수골에는 경주최씨(慶州崔氏)가 오래 전부터 살아왔고, 그 뒤를 이어 달성서씨(達成徐氏)가 들어와 살고 있다. 중간에 있는 어리대는 용천골[龍川谷]의 고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붙여진 촌명이라고 하며, 예부터 능성구씨(綾城具氏)들이 살아왔다. 제일 위편에 있는 함박골은 옛날 뒷산에 함박꽃이 많이 있어 이렇게 불러졌다고 하며, 예전에 능성구씨(綾城具氏)들이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갈촌(葛村)마을

문산읍 갈곡리에 있는 김해김씨 집성촌이다.

지형이 칡[葛]형태로 생겼고 칡이 유난히 많으며 칡뿌리는 등 너머 있고 넝쿨은 산기슭에 내려와 있다고 한다. 또 옛날에는 갈화(葛花)마을이라고 불렀다.

○송정(松亭)마을

문산읍 갈곡리에 있는 밀양박씨의 집성촌이다. 웃치실[上葛]이라고도 말하며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골 마을이다.

○정동(鼎洞)마을

문산읍 옥산리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부근 지세(地勢)가 가마솟 같이 생겼다고 솥 정(鼎)자를 따서 정동마을로 이름 지었다. 정(鄭)씨가 많이 모여살고 있다.

○우곡(隅谷)마을

사봉면 우곡리의 으뜸 마을이다.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다가 1934년에 사동으로 옮겼다.

고려 대사헌 우곡 정온선생이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도 불구하고 고려조에 대한 충정을 지키기 위하여 지리산 청학동에 은거하다가 이곳에 이주하였으므로 선생의 호를 따서 우곡이라 하였다. 조선 말엽에 전주최씨가 함안에서 이주하였다.

○자매(紫梅)마을

수곡면 자매리의 마을로 월계 북쪽에 있다.

지대가 높고 사방은 높은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경치도 좋고 양지쪽 한 골짜기에 매화나무가 많이 있는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고 해서 자매실 또는 자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자매와 월계로 분류되었고 진양강씨, 진주류씨가 살고 있다.

○대우(坮牛)마을

수곡면 사곡리 최서북쪽 해발 300m의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본시 두대우(頭坮牛)라고 부르다가 대우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은 상대우와 하대로 구분하고 진양하씨, 진양강씨가 살고 있다.

○대각(大覺)마을

수곡면 사곡 동북쪽에 있는 서원 마을이다.

하각재(河覺齋) 선생의 서원이 있었던 연유와 이곳에서 공부하여 대성한 선비가 많았다 하여 대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진양하씨합천이씨가 살고 있다.

사곡(士谷)마을

수곡면 사곡리에 있으며 대천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삵괭이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씩실 또는 이하 이곡(이 下狸谷)으로 불렀다가, 우곡(隅谷) 정온(鄭溫) 선생이 동리를 사기만곡(士氣滿谷)이라 하여 사(士)자와 곡(谷)자를 따서 사곡(士谷)으로 불렀다 한다. 대우, 대각, 덕곡으로 분류하며 진양하씨(晋陽河氏)가 대성으로 살고 있다.

구태(九台)마을

수곡면 대천리에 있으며 금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천리 위 쪽에 위치한 마을로 귀퉁이(귀티)라는 뜻의 구태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진양하씨(晋陽河氏)진양정씨(晋陽鄭氏)가 살고 있다.

○사방(士芳)마을

수곡면 대천리에 있으며 금동 서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400여 년 전 사방에 서재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던 이영국(李榮國)이 사방(士芳)이라 하여 이렇게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재령이씨(載寧李氏)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다.

○대천(大泉)마을

수곡면 대천리에 있으며 금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맑고 차가운 큰 샘이 있는 마을로 샘을 따서 ‘한새미’ 또는 ‘대천’이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하며 점촌, 금동, 서성동, 직금촌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 지역 집단 거주 성씨는 창녕성씨(昌寧成氏), 진주유씨(晋州柳氏)이다.

○효동(孝洞)마을

수곡면 효자리에 있다.

선조하경휘(河鏡輝)가 이 마을에 살면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동기간에 우애가 두터웠으므로 효자동으로 동명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때는 효우봉, 쇠우봉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자연마을은 효동, 요산, 중전, 효남으로 분류하고 진양하씨, 진주유씨, 김해김씨가 살고 있다.

○중전(中田)마을

수곡면 효자리에 있다.

한양의 한 관원이 이곳을 지나며 하루를 쉬게 되자 주민들이 동명을 지어주기를 애원하여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동쪽으로는 남강(南江), 서쪽으로는 덕천강(德川江) 사이에 있다하여 중전(中田)이라 지어 불렀다 한다. 상중전, 중전, 하중전 세 땀으로 살고 있는데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많이 살고 있다.

○요산(樂山)마을

수곡면 효자리에 있다.

옛날 요미(饒米)라고 부르다가 최근 요산(樂山)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진양유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다.

○효남(孝南)마을

수곡면 효자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하촌(下村)이라 부르다가 최근에는 효남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진양강씨(晋陽姜氏)가 살고 있다.

원내(元內)마을

수곡면 원내리에 있으며 원외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원당(元堂)의 지형과 들을 중심으로 하여 내원당(內洞), 원내리(안원당)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당은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라 하고 자연 마을은 원내, 서촌, 원동으로 분류된다. 진양강씨(晋陽姜氏),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살고 있다.

○서촌(西村)마을

수곡면 원내리 서편에 있다하여 서면이라 하다가 서촌으로 바꿔 부른다. 청주한씨(淸州韓氏), 남평문씨(南平文氏), 창녕조씨(昌寧曺氏)들이 살고 있다.

○상촌(上村)마을

이반성면 가산리를 중심으로 위쪽을 상촌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주된 성씨는 진양정씨진양강씨이며 그 외 성씨들도 살고 있다.

○중촌(中村)마을

이반성면 가산리의 중앙 부분을 중촌 이라고 한다.

옛날 가수개면과 진산초등학교가 있던 마을인데 지금은 면사무소가 용암리로 이전하고 초등학교는 길성으로 이전되었으며 초등학교에는 제일산업사란 가구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의 주된 성씨는 철성이씨와 밀양손씨이다.

○하촌(下村)마을

이반성면 가산리의 제일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주된 성씨는 김해김씨이다.

○발산(鉢山)마을

이반성면 발산리의 본 마을로 외동, 내동, 시동 등으로 구분된다.

주된 성씨는 상산김씨, 진양정씨이며, 양 성이 300년 전부터 자리 잡고 살고 있다. 김씨는 우사정의 재실이 있어 조선시대 서당으로 존립하다 소실되고 그 후 맞은편에 복원하여 근방 젊은이들이 많이 배웠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창원군과 경계 지점이고 국도가 고개를 넘는 곳으로 동명을 발산이라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크게 발대를 막고 승패를 짓는 곳이라고 하여 인위적으로는 대단위 호수를 막고 살아야만 지명과 전설이 일치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맞은 산과 산 사이를 높게 제방을 쌓아 대단위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용수 및 항구적인 한해 대책으로 인근 길성, 가산, 대천, 반성, 사봉, 진성면에 이르기까지 큰 혜택을 보고 있다

용암(龍岩)마을

이반성면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용암리에 있으며 마을 뒷산이 영봉산이다. 영봉산 줄기가 용암을 에워싸고, 주변의 산세와 암석의 형태가 용과 같은 형세라 하여 용암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에는 해주정씨가 집단으로 거주한다.

○모곡(茅谷)마을

이반성면 용암리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부터 마을 앞에 조그마한 못이 있었다 하여 동명을 모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을 모곡, 밤실, 면소땀 등으로 분류하는데 면소땀에는 이반성면 중앙지로서 면사무소, 중학교, 농협, 지서, 중대본부, 우체국, 보건소, 복지회관 등 관청이 밀집되어 있다. 주된 성씨는 밀양박씨이고 그 외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진안(鎭安)마을[사령]

이반성면 장안리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사령(使令)이라 칭하여 왔다.

그러나 마을명이 천한 명칭이라 하여 1990년 8월부터 마을명을 진안이라 개칭하게 되었는데 그 뜻은 김해김씨가 임진왜란 때 충청북도 진천에서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하여 마을명을 진천의 ‘진’자와 장안의 ‘안’자를 따서 ‘진안’이라고 부른다.

○장안(長案)마을

이반성면 장안리에 있는 이 마을을 뻔덕이라고 하고 마을 위쪽은 장안이라고 부르던 중 그 후 마을 전체 이름을 장안이라고 불렀다. 한때 반덕(反德)이라고도 하였으나 1990년에 본래의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이 마을에는 광양이씨와 밀양박씨가 대성을 이룬다.

○검정(檢正)마을

이반성면 장안리에 있는 이 마을은 인조가 왕래한 마을로 검아문 또는 군문이라 하였는데 후에 검아가 변하여 검정으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의 집단 거주 성씨는 강양(江陽)이씨와 청송(靑松)심씨이다.

○송죽(松竹)[솔대베기] 마을

이반성면 평촌리에 있는 이마을은 예부터 솔과 대나무가 많다하여 솔대베게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마을에는 청주한씨청송심씨가 살고 있다.

○중도(中島)마을

이반성면 평촌리의 마을로 옛 정수개면이 소재했던 곳이다. 마을 앞뒤로 내가 있어 중섬 또는 중도라 하고 이 마을에는 청주한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죽산(竹山)마을[대미마을]

이반성면 평촌리의 마을로 이 마을 뒤쪽 골짜기를 뱀실이라 하고 그 뱀의 꼬리가 마을 뒤로 뻗어있다 하여 대미라고 한다. 집단 거주 성씨는 청송심씨로 “겸와정사(謙窩精舍)”에는 문화적 가치가 높은 목판을 대량으로 소장하고 있고 마을 중앙에 위치한 수령 250년을 추정하는 느티나무가 군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삼거(三巨)마을

이반성면 평촌리의 마을로 150년 전 대미에서 분가한 청송심씨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마을 자체가 벌판에 위치하여 대로와 접하고 있기 때문에 삼거라고 한다.

○지화(池花)마을

이반성면 평촌리의 이 마을에는 옛날 어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씨가 살고 있는 곳에는 물이 없으면 성하지 못한다는 전설에 따라 못(저수지)이 없어 동명을 지(池)운(雲)이라고 불렀고 후에 지화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주된 성씨는 진양하씨, 진양정씨 등과 기타 여러 성씨가 살고 있고 마을 입구에 진양하씨의 재실인 지화재(池華齋)와 함안조씨의 지운재(池雲齋)가 있다.

○동촌(東村)마을

이반성면 하곡리의 마을로 메실의 동쪽에 있다는 뜻이다. 주된 성씨는 은진송씨이다.

○서촌(西村)마을

이반성면 하곡리의 마을로 메실의 서쪽에 있다는 뜻이다. 주된 성씨는 해주 정씨이다.

○봉전(鳳田)마을

정촌면 관봉리에 있으며 진양강씨가 대성이다.

무선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학이 밭에 내리는 형태인 뒷산 때문에 봉전마을로 불린다. 우백호 등은 학등이고 좌청룡은 무선산이다. 우백호등 밑에 용청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있다. 좌청룡인 무선산 중턱은 진터라고 전해왔는데 지금은 성터만 남아있다. 무선산 밑 중턱에 용바위가 있는데, 용이 등천했다고 하는 굴이 남아있다. 무선산 밑의 정자나무는 약 400년 정도 되었다는데 나무 밑에 우물이 있다.

○삼웅(三雄)마을

정촌면 소곡리에 있으며 김해김씨 집성촌이다.

예부터 소곡리 섭동으로 이어 내려왔으나, 1979년도에 독립하여 마을 이름을 삼웅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산마을

정촌면 예상리에 있으며 산이 거북과 같은 형태로 생겼다고 하여 구산(龜山)이라고 한다. 살고 있는 성씨는 경주이씨가 대성이다.

○매동(梅洞)마을

정촌면 화개리에 있다.

진양강씨가 약 450년 전부터 살아왔으며 25세대로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마을이 번성할 때에는 60세대까지 거주하였으나 젊은 사람 대부분이 도시로 이주하고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모심(慕心)마을

정촌면 화개리에 있으며 원래 진양강씨 집성촌을 이뤘던 곳이다. 웃어른을 섬기는 것을 제일로 여겨 심성을 좋게 기른다는 목적에서 사모할모(慕), 마음심(心)자를 따서 모심이라 하였다.

○화동(花洞)마을

정촌면 화개리에 있다. 화봉산은 지리산의 주령으로 정촌면의 주된 산인데, 예부터 “당개”라 불렀다고 하는 이 산은 자생하고 있는 진달래, 연지, 들란초, 복숭아꽃, 살구꽃, 백일홍 등이 만발하였던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꽃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씨족은 시초에 화산천씨, 김해김씨, 그 다음에 광산김씨가 입주하였으나 문산면 옥산리로 이주하였고, 다음으로 진양강씨가 이주하여 약 400년 동안 거주하고 있으며, 신안주씨가 약 300년 전에 입주하였다. 현재 약 70호가 살고 있으며 그 중 신안주씨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청담마을

지수면 청담리의 3개 마을 중의 하나이다. 마을 앞에는 남해안고속도로가 통과하며 인구는 235명이고 가구 수는 87여 가구이다. 동으로는 함안군, 북으로는 의령군을 잇는 경계지점이며 본래 이름은 청담이었으나 일제강점기 토지구획정리를 하면서 평촌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90년 5월경 주민들의 옛 이름 되찾기 운동에 의해 현재는 본래의 청담마을로 개칭되었다. 김해허씨와 능주구씨의 집성촌이며 마을 한복판에 큰 못이 있어 맑을 청(淸) 못 담(潭)을 써서 청담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남평문씨와 선산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마을 뒤편에는 해발 530m의 방어산이 있고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미맥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10여 가구가 고추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고 있다.

○아랫땀마을

지수면 청원리 하촌부락이다. 청원리는 본래 진주군 상봉면에 속해 있었는데 1906년 9월부터 1914년 2월까지 함안군에 이속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부로 진주군으로 편입되어 진주군 지수면 6리 중 한 리가 되었다. 청원리라고 이름이 불리어진 것은 지수천의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행정구역상 청원리는 상촌부락과 하촌부락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상촌부락은 지철, 새터, 절골, 대밭골, 음달땀으로 형성되어 있고, 하촌부락은 아랫땀 100여 세대로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진동(津洞)마을

진성면 가진리 남쪽지역이다.

남강과 목계천(木溪川)이 합류하는 곳으로 비옥한 평야를 낀 집단마을이며 김령김씨(金寧金氏)의 세거장이기도 하다. 1500년대에는 남강이 마을 앞 용두산 밑으로 흘렀으나 지금은 대곡면 마진리 앞으로 변천이 되었으며, 성종·연산군 시대에는 파산이씨촌 이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동(院洞)마을

집현면 봉강리(鳳降里)에서 행정리로 분리된 자연마을로 진주경찰서 집현파출소 소재지이다. 원동(院洞)은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이름으로 집현과 명석면의 경계이다. 봉강리 산 140번지에 서재가 있었는데 명석, 미천, 집현 등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고을 원님이 이 서재에 다녀갔다고 해서 원동(院洞)이라 했다. 진양화씨(晋陽化氏)의 본산이다. 2002년 6월 30일 현재 원동의 세대수는 69세대이며 인구는 229명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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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9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고려 때 대사간(大司鍊)을 지낸 대사간 ->고려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대사간
2011.07.12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1) 신증동국여지승람진주목조에 나타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진주목(晉州牧) 조에 나타나 있다. 2)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의 병마도원사이다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의 병마도원수이다 3) 유진동(柳辰仝)의 익상(謚狀)에서 “우리 류씨는 모두 문화에서 나왔다 ->유진동(柳辰仝)의 시장(謚狀)에서 “우리 류씨는 모두 문화에서 나왔다 4) 진주류씨세보(晋州柳氏世譜)에는 유색(柳穡)을 1세로 ->『진주류씨세보(晋州柳氏世譜)』에는 유색(柳穡)을 1세로 5)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6촌장중 원조는『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 6촌장 중 6) 고려 때 대사련(大司鍊)을 지낸 ->고려 때 대사간(大司鍊)을 지낸 7) 고려 때 기후(祇候)에 오른 정신(鄭侁)을 시조로 한다. ->고려 때 지후(祇候)에 오른 정신(鄭侁)을 시조로 한다. 8) 《대동보(大同譜)》편수를 주장하고 있다 ->『대동보(大同譜)』편수를 주장하고 있다 9) 《진양하씨대동보(晋陽河氏大同譜)》에 쓰여 있다. ->『진양하씨대동보(晋陽河氏大同譜)』에 쓰여 있다. 10) 하연(河演)이 《신미보(辛未譜)》를 찬집하고 ->하연(河演)이『신미보(辛未譜)』를 찬집하고 11) 계단(契丹)과의 분쟁에서 항절사(抗節使)로 목숨을 바쳐 ->거란(契丹)과의 분쟁에서 항절사(抗節使)로 목숨을 바쳐 〇 지명 태깅하였음 12) 아들 하진(河晋)[號 台溪]이 벼슬에서 물러나와 ->아들인 태계(台溪) 하진(河晋)이 벼슬에서 물러나와 13)있다하여 람여가(覽與家)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있다하여 감여가(堪輿家)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2011.07.12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14) 한자항목명 晋州의 土박이 姓氏와 集性村 ->한자항목명 晋州의 土박이 姓氏와 集姓村
2011.07.12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15) 기후공파(祇候公派)는 고려 때 기후(祇候)에 오른 정신(鄭侁)을 ->지후공파(祇候公派)는 고려 때 지후(祇候)에 오른 정신(鄭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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