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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78
한자 婚禮
영어음역 hollye
영어의미역 marriage ceremony
이칭/별칭 결혼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심상교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행해진 혼인하기 전의 처녀와 총각이 선을 보는 일에서부터, 혼인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까지의 관련 의례.

[개설]

혼례는 예나 지금이나 남녀가 부부가 되는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의례이다. 전통적인 예법에 따르면, 친척이나 이웃을 통해서 중매가 이루어지고, 신랑집에서 신랑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이 적힌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신부집에 보내며, 이를 받은 신부집에서 혼인날을 택일한다. 혼인 전에 신랑집에서는 혼인서와 각종 물건이 든 납폐를 신부집에 보낸다. 혼례는 주로 신부집에서 행했다.

[진주지역의 혼례]

경상남도 진주지역의 혼례와 관련된 의식이나 형식절차는 다른 지방의 혼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유교적 뿌리가 깊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과거의 결혼관련 금기나 풍속 등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약간의 지역차가 반영될 뿐이다. 혼례의 가장 큰 특징은 전국적으로 비교적 통일된 방식에 따라 행해진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혼인하고자 하는 두 사람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이거나, 이성동본(異性同本)이라고 하더라도 한 조상의 후손인 경우, 또는 특별한 관계일 때에는 결혼을 불허한다. 전국적으로 김해허씨(金海許氏)김해김씨(金海金氏), 인천이씨(仁川李氏)의 경우가 이에 해당하며, 특히 진주지방에서는 진주강씨(晋州姜氏)진양하씨(晋陽河氏), 진양정씨(晋陽鄭氏)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을 하지 않았다.

진주지방의 대표적인 성씨인 강(姜)·하(河)·정(鄭)의 혼인금지는 근래 들어 많이 완화되었으나 완고한 집안에서는 여전히 허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혼례절차]

진주시 집현면 지역에서 행해진 혼례절차는 의혼(議婚), 납채(納采), 연길(涓吉), 의양(衣樣), 봉채(封采), 친영(親迎), 신행(新行)으로 이루어졌다.

의혼은 혼담이라고도 하는데 적령기의 남자와 여자를 둔 두 집안 사이에 혼인의 의사를 소통하여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납채는 성혼이 합의되어 신랑집에서 신랑의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적은 사주단자를 신부집에 보내는 절차이다.

연길은 신부집에서 신랑과 신부의 사주, 궁합으로 혼인날을 정하여 택일단자를 신랑집에 보내는 절차이다.

의양은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신랑의 한복 치수를 적은 의양서를 보내는 절차이다. 신부집에서는 신랑의 의양에 따라 두루마기, 바지, 저고리 등을 짓는다.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보내는 예물을 봉채 또는 납폐(納幣)라 하고, 예물을 담은 그릇을 함(函)이라 한다. 함에는 신부가 혼인날 입을 치마저고리를 만들 옷감과 이불감, 솜, 반지와 같은 패물이 들어있다. 그리고 예장지(禮狀紙) 또는 혼서(婚書)를 함께 넣고 ‘앞돈’이라 하여 혼례일에 쓸 돈을 보낸다.

봉채함을 지고 가는 사람을 ‘함진애비’라 부르는데, 궂은 일이 없거나 첫 아들을 둔 사람을 우선해서 선정하였다. 신부집에서는 혼인 전날 시부모의 요, 이불과 옷, 집안사람들의 옷 등을 해 보내는데 여기에 갖가지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함께 넣기도 한다. 이를 ‘상 보낸다.’고 하며, 신랑집에서는 음식을 비운 그 바구니에 쌀, 콩, 참깨 등 곡식을 담고 상값이라는 명목으로 ‘뒷돈’ 약간을 신부집에 보내기도 한다.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신부집으로 가는 절차이다. 신랑의 초행(初行)에 따가 가는 사람을 상객 또는 요객이라 하는데 주로 신랑의 조부, 백부, 아버지 중에서 가는 것이 통례였다. 그리고 상객 이외에도 전안함을 진 기럭아비가 동행하였다.

신랑이 마을에 도착하면 신부측에서 대반(안내자)이 나와 이를 맞이하여 정방에 안내한다. 정방은 신랑 일행이 머물러 여장을 풀고 예복으로 갈아입는 곳이다. 보통 신부집을 지나가지 않는 곳에 정하고 간단한 음식을 대접한다. 이 상을 정방상이라 한다.

신부집에서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대례상을 놓은 다음, 차일을 치고 병풍을 둘러 대례청을 만든다. 대례상에는 오곡을 담은 그릇을 한 가운데 놓고 그 양쪽에 암탉과 수탉, 송죽(송죽) 가지를 꺾어 청색과 홍색의 걸쳐 꽂아 놓은 백자병, 촛대, 가래떡으로 만든 용떡을 얹어 놓는다,

대례상 앞에는 두 개의 간단한 술상을 차려 놓고 세수할 물대야와 수건을 준비한다. 행례가 시작되면 신랑은 사모관대와 묵화로 예장을 갖추고 나무기러기를 안고 대례청에 들어온다. 신랑은 나무기러기를 전안상에 올려놓고 재배한다. 이것은 정절과 절서를 알고, 짝지어 사는 기러기를 신물로 바침으로써 인생의 신성한 서약을 하는 의미가 있다.

활옷 또는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쓴 신부가 대례청에 나오면, 지금의 주례격인 ‘홀재비’ 노인이 홀기창으로 신랑, 신부의 거동을 지시하며 ‘교배례’와 ‘근배례’를 행하게 한다. 근배는 표주박을 쪼개어 만든 술잔으로 부부의 일심동체를 맹세하는 것을 상징한다.

혼례 후 날을 받아 신부가 신랑집으로 가는 것을 우귀 또는 신행이라고 한다. 신부는 정든 집을 떠나기 전에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을 세 번 들썩거려 소리 내어 하직을 고하고 양친과 존속에게 하직 절을 올린다.

신부가 신랑집에 도착하면 별실에서 잠깐 쉬었다가 예복으로 정장하고 시부모께 절을 하고 술잔을 드린다. 그리고 시가의 친족과 차례로 상견례를 행한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진주지역의 풍속으로 ‘길틔우기’라는 습속이 있다. 이는 이웃집 처녀·총각끼리 혼례를 했을 때, 특히 신부집의 어른이 연로(年老)해서 여자의 일손이 꼭 필요한 경우에 이런 풍속을 따랐다.

구체적으로,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올리는 절차를 끝내면 곧바로 신랑집으로 신행을 갔다가 식이 끝나고 다시 신랑·신부가 신부집에 와서 첫날밤을 보내는 것이다. 신부집 잔치와 신랑집 잔치가 같은 날 한꺼번에 치러지는 것으로 그 절차를 최대한 간소하게 치렀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는 각자의 집에서 살게 되는데 주로 신랑은 신부집으로 옮겨와 잠을 자는 것이 예사였다. 이후 신부가 신랑을 따라 시집으로 가게 될 때에는, 신부가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의 손잡이를 만지거나 솥뚜껑을 세 번 달싹거린 후에 떠난다. 이것은 자기가 살았던 집에 마지막으로 하직을 고하는 뜻에서였다.

요즘에는 결혼식이 끝나면 폐백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갔다 온 후, 신부집과 신랑집을 차례로 들려 인사를 올린다. 신혼여행을 마친 신혼부부가 신랑집에 오면 잡귀를 쫓고 부정을 태우며 조상과 터주 신에게 예를 갖추곤 하였는데, 이는 요즘도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한편, 바가지를 밟아 깨도록 하거나, 작은 불을 놓고 그것을 신부가 뛰어 넘게 하기도 한다. 신부가 집안에 들어오면 미리 차려진 간단한 의례상에 절을 하고 잔을 올리며 한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왔음을 고한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야 비로소 집안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린다.

진주지방에서 전래되는 신행풍속 중에서 신랑이 상처(喪妻)를 하고 새장가를 들었을 경우, 빈소(殯所)가 아직 있으면 신부는 남자 갓을 쓰고 빈소에서 절을 올렸다. 그것이 끝나면 빈소도 철거되었다.

[현황]

맞선과정, 혼인의례, 혼인 후 의례 등에서 전통적 방식을 따르는 경우는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1950년대 후반부터 결혼식 복장, 음식 종류, 신행방법 등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고, 이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혼례 형태로 정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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