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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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川海戰 |
이칭/별칭 | 웅포 해전,웅포 상륙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제장명 |
[정의]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이 1593년 2월 10일부터 1593년 3월 6일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지금의 창원[진해] 웅포 해안에 위치했던 일본군을 공격한 해전.
[개설]
1593년 1월 부산의 일본군을 무찌르라는 조정의 지시를 받은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가던 중 웅천에 주둔한 일본군을 먼저 무찔러야만 협공을 방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과 원균의 경상우수군,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이 연합하여 근 한 달 간 웅천의 일본군을 바다에서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역사적 배경]
1593년 1월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명나라 군에 패한 일본군이 부산 쪽으로 내려가니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무찌르라는 내용의 지시를 받았다. 그리하여 1593년 2월 2일 전라좌수영을 떠나 1593년 2월 7일 거제 견내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나고, 1593년 2월 8일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수군을 만나 함께 의논한 후 1593년 2월 10일 웅천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이때 웅천에 머물고 있던 적들이 포구 깊숙이 배를 감추고 입구에는 굳은 방비를 설치하고 소굴을 많이 만들어 두고 있었다. 이 긴요한 목을 지키고 있는 적을 섬멸하고 양산과 김해의 길을 막아서 배후를 공격당할 염려가 없도록 한 연후에 부산으로 진격하고자 한 것이다.
[경과]
조선 수군은 1593년 2월 10일·12일·18일·20일의 4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하고자 쾌속 전선들을 교대로 웅포 안으로 진입시켜 화포로 적선을 공격하기도 하고 고지의 적도 화포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적은 한산도 해전에서 유인당한 후 전멸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포구 밖으로 일절 나오지 않았다. 이에 조선 수군은 유인 작전을 포기하고 단독으로 상륙 작전을 실시하였다.
1593년 2월 22일을 기해 상륙 작전을 실시했는데 구체적인 진행은 다음과 같다. 이순신이 모집하여 거느린 의승병들과 삼도의 날래고 용감한 사부들을 태운 10여 척의 전선을 동으로는 안골포에, 서로는 제포에 상륙시켜 결진하였다. 삼도의 수군에서 각각 경완선 5척을 내어 모두 15척으로 번갈아 적선이 대어 있는 곳으로 돌격하면서 지자·현자총통을 쏘아 적선을 반이나 쳐부수고 수많은 적 인명을 살상하였다.
조선 수군의 상륙군을 맞이한 일본군은 수륙으로 협공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동서로 분주하며 응전했지만 의승병들이 용감히 싸워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 과정에서 조선 수군의 군졸은 한 명도 다친 자가 없었다. 완벽할 정도의 승리를 거둔 해전이자 상륙전이었다. 다만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적을 무찌르고 퇴진할 무렵에 발포의 통선 한 척과 가리포통선 한 척이 부딪쳐 발포 통선이 뒤집힘으로써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옥의 티였다.
이후 1593년 2월 28일과 3월 6일에 다시 나아가 도전하여 포환과 시석을 전보다 많이 쏘며 산기슭이 위치한 적의 진지에 비격진천뢰를 쏘아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결과]
총 7차례의 해전 중 1593년 2월 22일의 상륙전을 겸한 해전에서 가장 큰 전과를 거두었다. 당시 포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선의 절반을 깨뜨렸다고 표현할 정도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6차례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무수한 적을 살상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해전의 결과 포로로 있던 웅천 수군 1명과 양가집 딸 5명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웅천 해전은 부산 쪽으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먼저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웅천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한 해전으로 모두 7차례에 걸쳐 전투가 있었는데, 조선 수군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공격전이었다. 특히 5번째에 있었던 상륙전을 겸한 해전에서는 매우 큰 전과를 거두었고 7차례 해전 모두 다른 전술을 구사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전의 한계점은 육군의 지원을 받지 못함으로써 결국 일본군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한 점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 해전을 통해 일본군의 서진할 의지가 꺾였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