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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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山里戰鬪勝戰報配布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 전투의 승전 소식을 실은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한 사건.
[역사적 배경]
평화적으로 진행된 1919년 3·1 운동이 일제의 강력한 무력 진압에 막혀 실패로 끝나자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의 무장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독립군 토벌을 위해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전투에서 대파하였다. 국내에 전해진 이 소식을 접한 마산의 애국 청년들이 청산리 전투 승전 소식을 실은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경과]
1921년 2월 청산리 전투 승전 소식을 접한 마산의 애국 청년 이정문을 비롯한 7명이 승전 소식을 실은 격문을 창원군 구산면 사무소에서 등사하여 수백 부를 시중 요소에 배포하였다.
[결과]
청산리 전투 승전보 배포 사건으로 마산 지역 애국 청년 7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각각 1년씩의 실형을 선고받아 마산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신경식은 미성년자여서 개성 소년 감옥으로 이송되어 복역하였다.
마산 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한 이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마산시 추산동 수도산 정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소나무에 게양하고, 그 길로 하산하여 신작로를 누비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 중 신경식을 제외한 5명은 다시 체포되어 부산 형무소에서 다시 1년씩의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3·1 운동은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군 활동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7명의 애국 청년들은 청산리 전투의 승전 소식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애국 청년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