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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정에 올라‘팔경’을 그리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B020103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석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배상현

동산정(東山亭) 은 김명윤(金命胤)의 생전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비록 수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온전한 원래 모습은 아니지만, 동산정과 관련해 지은 시와 글이 전하고 있어 문사(文士)로서의 그의 풍모를 음미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오늘의 동산정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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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정

동산정은 석산마을회관 뒤쪽으로 펼쳐진 한옥군의 맨 아래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도봉서원의 동남방에 위치한 종가 바로 앞이다.

출입문인 유정문(幽靜門)을 지나 마루에 올라서면 여러 편액들이 눈길을 모으는데, 정면으로 김명윤 선생이 지은 「동산정기(東山亭記)」가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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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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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정기」

여기에는 상산김씨가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배경과 당시의 마을 풍경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동산(東山) 선생의 향촌 생활은 제주목사를 사직한 1604년(선조 37) 이후였다. 마침 이듬해 어머니 전의이씨가 별세하였으니, 선생의 나이 41세 이후 대부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그의 회고담이다.

“내 비록 재목이 아니나, 일찍이 목민관을 여러 번 맡았는데 나라의 운세가 좋지 못하여 불행히도 임진년에 왜란을 당하였고, 적을 토벌하는 중에 몇 번 죽을 고비도 넘겼다. 난이 평정되자 외람되이 1등공신으로 책록되어 3품의 작위를 하사받았으나 내 직분으로는 망극한 일이다. 세상의 책임을 벗어던지고 새로 지은 정자에 돌아와 누워 가만히 지난날을 돌아보니 마치 하룻밤 긴 꿈을 꾼 것만 같다.”

선생의 동산정에 머물면서 여러 편의 시와 글을 남겼다. 우선 동산정에는 유거시(幽居詩) 2수가 걸려 있다. 벼슬살이에서 벗어나 행장을 수습해 남으로 오니 산새들이 반갑게 맞이하고, 궁벽한 마을에 찾아오는 친구는 드물지만 새벽녘에도 사립문을 두드리는 늙은이가 있어 외롭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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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거시 2수

다시 「동산정기」로 돌아가 보자.

“절경은 아니지만 산이 둘러쳐져 있고 들은 넓고 평평하여 사람이 살기에는 평안하다. 돌밭에 초가집이 고요하고도 담박(淡泊)하다. 대나무 언덕과 소나무 오솔길은 적막하고도 그윽한데…… 산에서 나물 캐고 호수에서 낚시하며 강과 산의 정취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400년 전 석산마을의 풍경이 그려진다. 그러고 보니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백월산에서 나물을 뜯기도 하고 주남저수지에서 고기잡이를 하기도 한다. 돌밭에 초가집은 1970년대까지 남아 있던 풍경이었으니, 그 정취가 오랜 세월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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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마을과 백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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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저수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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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저수지 전경

기문의 말미에는 마을 주변의 풍경을 읊은 시가 있다고 적고 있다. 선대가 살아온 향리의 모습을 먼 후손들이 보도록 동산정 벽면에 붙였다고 하는 ‘팔경시(八景詩)’가 그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동산정에는 어디에도 그런 시가 보이지 않는다. 60여 년 전에 중건된 것이니 그럴 법도 하다. 시는 『동산선생실기』에 「동산정팔경(東山亭八景)」이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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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정팔경」

그렇다면 무엇이 팔경이었을까? 선생은 첫 번째 풍경으로 ‘들에 울리는 목동의 피리소리[平郊牧笛]’를 꼽았다.

봄날 긴 방뚝에 방초만 푸른데/

소치는 아이들 곳곳마다 널렸구나/

애끓는 피리소리 날은 저무는데/

보슬보슬 가랑비는 앞 시내에 내리네

봄날 긴 언덕에 녹음이 우거지고 소치는 아이들이 부르는 풀피리 소리가 정겹다는 것이다. 지금의 주남저수지가 일제강점기에 제방공사를 한 후 저수의 기능을 온전히 할 수 있었다고 보면, 이전에는 긴 늪이 있고, 늪을 둘러싼 방둑은 소치는 목동들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주변으로는 넓은 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다음으로 ‘멀리 나룻가의 고기잡이 등불[遠浦漁燈]’을 들었다.

단풍 우거진 물가에 저녁연기 사라지니/

가물대는 등불이 모랫벌에 오가누나/

아마도 오늘밤의 어부들이 봉창에서/

달 기다려 낚시 드리운 채 잠들까 하노라

지금도 그렇지만 동산정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들의 중간 즈음에는 낙동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포구는 수산이나 모산나루쯤 될까? 아니, 그것은 오늘의 상황이고 낙동강 제방이 축조되기 이전에는 훨씬 가까이서 강물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단풍이 우거진 물가에 저녁연기가 사라지면 가물거리는 등불들이 멀리 강둑을 오간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추수가 끝난 가을 밤 강가에 비치는 고기잡이 불빛을 묘사한 그림일 것이다.

또 ‘용잠의 아침 구름[龍岑朝雲]’도 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비 개이고 짙은 구름 천봉만학 가리우니/

천하 절경 주렴 걷고 바라보네/

늦은 아침 해 돋고 바람이니/

구름은 흩어지고 청산만 남았구나

용잠은 동산의 남쪽으로, 오늘의 동읍사무소가 있는 방면이다. 구름은 다호(茶戶)를 너머 전단산(栴檀山)에 걸쳐 있는 모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비가 개이고, 짙은 구름이 첩첩의 봉우리를 가리다가 아침 햇살과 함께 말갛게 쓸린 하늘은 어떤 그림이었을까? 생각만으로도 상쾌한 풍광이 아닐 수 없겠다.

그리고 팔경에는‘우암의 저녁봉화[牛巖夕烽]’도 들어 있다.

천리 먼 변방에서 봉홧불 전해 오니/

날 저무는 구름 끝에 별빛인가 의심했네/

지금은 태평성대 변방이 고요하니/

다만 바라거니 해마다 평안한 소식만 전해지길

백월산 자락의 도산에서 볼 수 있는 봉홧불은 자암산(子庵山)[또는 紫岩山으로도 쓴다]에서 오는 것이라. 자암산은 지금의 진영읍 봉화산(烽火山)에 해당한다. 유사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는데, 당시는 전란 직후라 우암에서도 간이 봉화를 올렸는가 보다. ‘우암’은 오늘날 대산면 지역인데, 그렇다면 그 빛은 남으로 분산(盆山)에 응하고 북으로는 밀양 남산이 응하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선생은 ‘동녘 고개의 개인 달[東嶺霽月]’과 ‘서산에 지는 해[西山落照]’를 꼽았다.

비 개인 동쪽 봉우리 둥근 달 떠오르니/

티끌은 모두 쓸리고 옥거울같이 밝구나/

늙은 이내 몸이 오히려 맑은 연분 있어/

밤중에 은근히 초가집을 비쳐 주네.

서산머리 걸린 햇살 유난히도 붉은데/

쉴 새 없이 동서로 달려 세월만 가노매라/

해님의 짧은 다리는 어드메서 나귀 타고 건너는고/

용면거사 흉내라도 내어 그려볼 길 없으니 부끄럽구나

비가 개인 봉우리에 둥근 달이 떠오르니 마치 티끌을 쓸어낸 옥거울 같다고 한 것이다. 백월산에서 바라보는 서산의 낙조는 지금도 장관이다. 그러고 보니 시는 동산에서의 풍광을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눈 덮인 백월산 풍경을 꼽았다. 먼저 ‘눈 덮인 산 푸른 소나무[雪嶽靑松]’를 들고 ‘눈 내린 동산의 푸른 대나무[雪園綠竹]’를 들었다. 아마도 송죽을 사랑한 시인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이제 시의 마지막 두 연을 보자.

나뭇가지에는 학이 깃들고 뿌리는 용이 서린 듯/

높은 봉우리 눈 속에 외로이 솟아 있네/

붉은 비늘 푸른 잎새 볼수록 사랑스러워/

어찌타 위언(韋偃)은 그 자태를 그리기에 고심했노

씩씩하고 곧은 줄기 하늘 높이 솟아 있고/

맑고 곧은 절개는 사철 푸르도다/

달 밝고 바람잔날 대나무 그늘에서/

노래와 한잔 술로 홀로 거니누나

이들 시로 보면 동산 선생은 이미 전화(戰禍) 속의 무인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된 초월의 시인이 아니었나 싶다. 내용들은 모두 이 마을의 오랜 정취를 그림처럼 전해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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