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4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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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州鄭氏 |
영어음역 | Haeju Jeongssi |
영어의미역 | Haeju Jeong Clan |
이칭/별칭 | 수양정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학수 |
세거지 | 경상남도 진주시 귀곡동|이반성면 용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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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상남도 진주시 귀곡동|이반성면 용암리 |
입향시기/연도 | 1624년 |
성씨시조 | 정숙(鄭肅) |
입향시조 | 정문익(鄭文益)|정대영(鄭大榮)|정대륭(鄭大隆) |
[정의]
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연원]
해주정씨(海州鄭氏)는 고려 신종[1197~1204]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법정랑(典法正郞)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의 관직을 지낸 정숙(鄭肅)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선계(先系)는 문헌이 전해오지 않아 상고할 수가 없으나,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세거했던 사족(士族)으로 고려 때에 정씨로 사성(賜姓) 받았다고 전한다.
시조 이후 고려조에 관직을 지내면서 연면 혈통을 이어 왔으나 계보의 실전(失傳)으로 3,4 계대(繼代)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후 고려 말기에 정숙의 후손 정언, 정초(鄭礎) 형제를 각각 1세조로 하여 2파로 분류하고 본관을 해주로 했다.
[입향경위]
진주에 세거하고 있는 해주정씨는 주로 충의공(忠毅公)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1565~1624]의 후손이다. 정문부는 임란 때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격파하고 실지를 회복하였으나 역모라는 무고로 1624년 11월 18일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벼슬할 생각은 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 은거하며 살라는 유언을 남겼다. 진주는 정문부가 창원부사 재임 중 진주에 들러 인심이 후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유언에 따라 장남 정대영(鄭大榮), 차남 정대륭(鄭大隆)과 동생 용강공 정문익(鄭文益)은 해를 넘긴 1625년 2월 양주 송산(지금의 의정부시)의 선영하에 장사를 지내고 상복을 입은 채 가족을 데리고 진주로 남하하여 비봉산 자락인 봉곡동과 옥봉동에 터를 잡았으니 오늘날 해주정씨 농포공파와 용강공파가 진주를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집성촌현황]
진주시 귀곡동은 100여 가구가 사는 집성촌이었으나 남강댐으로 수몰되어 후손들이 각지로 흩어졌고 이반성면 용암리와 이웃한 하곡에는 정대륭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인물]
고려시대 대표적인 인물로는 무신정변을 일으켜 8년 동안 무단정치를 폈던 정중부(鄭仲夫)를 들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종·세종 때 호조판서 등을 지낸 정역(鄭易), 정역의 아들로 세종 때 형조참판을 지낸 정충경(鄭忠敬), 정충경의 손자로 단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정종(鄭悰) 등이 있다. 또 연산군 때 난세를 예견하고 종적을 감추어 버린 일화의 주인공 정희량(鄭希良)은 정역의 현손으로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도 정통했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으로 활약하고 영흥부사·길주목사 등을 역임한 정문부(鄭文孚)는 정역의 5대 손인 부사 정신(鄭愼)의 아들이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는 60명에 달했다.
[관련유적]
농포 정문부를 모신 사당은 북한에 창렬사·현충사·청암사(일명 숭렬사) 등이 있으나 후손들이 거주하는 진주의 까꼬실에는 부조묘 사당만 있었는데 1970년 가호서원을 세우면서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충의사」라는 편액을 받았다.
또한 진주성 촉석루에는 54세 때 창원부사 시절 정문부가 진주에 들렸다가 의병장으로서의 남다른 감회로 진주성 싸움을 읊은 시가 남아 있다. 그리고 정문익의 증손인 명암(明菴) 정식에 의해 1725년에 지어진 촉석루 중수기·의암사적비(義巖事跡碑) 등 많은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해주정씨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