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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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堦 |
영어음역 | Yun Gye |
이칭/별칭 | 태승(泰升),하곡(霞谷),익정(翼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편세영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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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윤면지(尹勉之) |
어머니 | 참판 경섬(慶暹)의 딸 |
생년 | 1622년 |
몰년 | 1692년 |
본관 | 해평(海平) |
자 | 태승(泰升) |
호 | 하곡(霞谷) |
시호 | 익정(翼正) |
대표관직 | 진주목사|동부승지|호조판서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태승(泰升), 호는 하곡(霞谷).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윤휘(尹暉)이고, 아버지는 첨정 윤면지(尹勉之)이다. 어머니는 참판 경섬(慶暹)의 딸이다.
[생애]
1650년(효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665년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했으며, 1669년 직강으로서 황해도도사를 겸했다가 직무 수행의 잘못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70년 사서에 제수된 뒤 세자시강원문학·지평(持平)을 지냈다. 지평으로 있을 때에는 국고미(國庫米)를 횡령한 태복제조(太僕提調) 허적(許積)을 중벌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1671년 정언(正言)이 되어 재상의 권한 비대로 야기된 시폐(時弊)를 논했으며, 장령·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중국 사신에게 선왕 효종이 신하의 견제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한 원접사(遠接使) 오시수(吳始壽)를 극론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된 뒤 영광에 유배되었다.
1680년 동부승지에 서용되었으며, 함경감사를 거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강화유수를 차례로 지냈다. 1678년(숙종 4)에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1680년까지 역임하였다. 재임 기간 동안 진주 비봉루를 세웠다.
1680년 동부승지가 되어 허견(許堅)의 역모사건을 처리할 때 국법대로 처리할 것을 주장, 마침내 처형하였다. 1682년 호조판서로서 흉년으로 세입이 감축된 국고(國庫)를 바로잡았다. 1683년 송시열(宋時烈)이 당론으로 몰리자 이를 물리쳤다.
1686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강화유수 때 가렴(苛斂)했다는 탄핵을 받아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이 되고 좌참찬·공조판서를 거쳐 비변사(備邊司)의 천거로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송시열(宋時烈) 당(黨)으로 몰려 강진에 귀양갔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저술]
『하곡집』, 『동사(東史)』, 『제의(祭儀)』, 『해평윤씨세보(海平尹氏世譜)』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94년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익정(翼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