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854 |
---|---|
한자 | 李禎 |
영어음역 | Yi Jeong |
이칭/별칭 | 강이(剛而),구암(龜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덕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 이담(李湛)의 아들이다.
1536년(중종31) 진사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보임되었다. 다음해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을 거친 뒤 연로한 부모 봉양을 위해 경상도 선산부사로 나갔다가 1552년(명종7) 사성, 이듬해 청주목사를 지냈다. 이때 선정을 베풀고 효행이 뛰어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었다. 1555년 왜구가 호남성에 침입하자 이를 구원하러 갈 때는 군기가 엄정하여 그 위엄에 눌려 왜구들이 도망하였다. 1559년 우부승지·형조참의·좌부승지 등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의·대사간·호조참의·예조참의를 지내고, 경주부윤으로 나가 옛 신라의 열왕묘(列王墓)를 보수하고, 서악정사(西嶽精舍)를 세워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1563년 중앙의 요직에 잠시 있은 뒤 다시 전라도 순천부사로 나가 갑자사화 때 사사된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위해 경현당을 건립, 그를 제사하게 하였다. 1568년(선조 1)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지어 동쪽에는 거경재, 서쪽에는 명의재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어릴 때에는 송인수에게 배우고 성장한 뒤에는 이황과 교유하였다. 성리학에 밝았다.
『구암문집』『성리유편』『경현록』『논상례』『한훤보록』 등이 있다.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 118번지에 있는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 심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