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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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Songs and Singers of Jinju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강병주 |
[정의]
진주의 소리는 진주지역의 교방을 중심으로 전승되던 가곡, 시조 등 소리와 동편제를 중심으로 한 판소리.
[진주소리의 산실 진주 교방(敎坊)과 권번(券番)]
진주는 일찍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토착부호들이 많아 전통문화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문화가 성행했다. 또한 진주는 역사적으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여서 일찍부터 교방이 설치되어 관 주도의 문화가 전파되었고, 가무가 발달하여 많은 명창이 배출되었다.
진주는 신라시대부터 서부경상남도의 중심지로서, 문무왕 5년(685)에 거열주로 자리 잡은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인 1925년까지 오늘날의 도청격인 기구(예를 들면 감영, 선화당 등)가 설치된 기간이 500년이 넘었다.
진주교방에 관한 기록은 진주목사를 지냈던 정현석(鄭顯奭)[재임기간 1867~1870]이 찬한 『교방가요(敎坊歌謠)』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총목(總目)과 무(舞)로 나누었는데, 총목은 우조(羽調)·계면(界面)·잡가(雜歌)·시조(時調) 부분으로 되어 있고, 무는 육화대(六花隊)·연화대(蓮花臺)·헌선도(獻仙桃)·고무(鼓舞)·포구락(抱毬樂)·검무(劍舞)·선락(船樂)·항장무(項莊舞)·의암가무(義巖歌舞)·아박무(牙拍舞)·향발무(響鈸舞)·황창무(黃昌舞)·처용무(處容舞)·승무(僧舞)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각 지방의 감영에 설치되었던 교방과 관기(官妓)에 관한 제도는 1905년 제도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진주에도 교방과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진주의 관기들은 생업을 위하여 기생조합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나 경영이 부실하여 해산된 것을 당시 경찰서 경부인 최지환(崔志煥)이 주도하여 기생학교인 권번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다가 1939년에는 자본금 5만원으로 주식회사 예기권번의 창립을 하여 초대 사장에 최지환이 취임하였으며, 1940년 당시에 기생 100여명과 견습생 5~60명으로 가무·음곡·산수·국어·예법·고전시조·가야금·유행가·수신·산수 등을 3년간 교육시킨 후 기생 자격을 부여하였다. 1939년도의 총수입이 13만여 원에 달하였다 하는데, 이로써 당시 기생들의 활동규모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판소리는 19세기에 성행하였는데, 기록에 의해 전해지는 판소리는 장끼타령·변강쇠타령·무숙이타령·배비장타령·심청전·흥보전(박타령)·토별가(수궁가, 토끼타령, 별주부타령)·춘향전·적벽가(화용도)·강릉매화전·숙영낭자전·옹고집전 등의 12마당이며, 현재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토별가·적벽가의 5마당이 완창 되고 있다.
이러한 소리에는 가락의 성향에 따라서 동편제·서편제·중고제·호궐제가 있으나, 주로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뉜다. 동편제는 우조 계통으로 굵은 소리인 호령조가 많고, 초성이 진중하고 끝은 된소리로 마무리하는 것이 많아 웅건청담(雄健淸淡)하여 남성적인 성향이 강하다. 주로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순창·곡성·구례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서, 가왕으로 일컬어지는 운봉 출신의 송흥록(宋興祿)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반면, 서편제는 계면조 계통으로 끝마침에 있어서 늘어지는 특징이 있고, 장단은 엇붙임이라 하여 기교적인 리듬을 사용하고, 발림이 매우 발달하였다. 주로 섬진강 서쪽 지역인 광주·나주·담양·화순·보성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 순창 출신이며 보성에서 말년을 보낸 박유전(朴裕全)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소리의 전승과 명창 배출]
일찍부터 진주에 설치되었던 교방에서는 판소리보다는 가곡·시조창·가사·잡요·단가 등 주로 상류층에서 즐기던 소리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오늘날의 판소리창은 교방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소리광대들이 전국 각지를 돌면서 공연을 함으로써 활성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진주는 동편제소리의 주 활동 무대였는데, 조선 후기에 병영이 있던 진주에서의 판소리에 관한 기록은 정노식(鄭魯湜) 저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의 송흥록(宋興祿)[1800~?]에 관한 기록 중 맹렬(孟烈)에 관한 연애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송씨가 대구감영에 불려가서 소리를 하는데, 명창이란 칭찬이 만좌에 넘쳤으되, 인물과 가무의 일등명기로 당시 수청으로 있는 맹렬의 입에서는 한마디 잘잘못의 평이 없었다. 송씨가 그 곡절을 알지 못하여 그 이튿날 맹렬의 집을 찾아가서 그 모에게 맹렬을 좀 보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여 무슨 핑계로 맹렬을 불러 나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송씨는 맹렬에게, 어젯밤 소리판에서 한마디의 평이 없은 것을 물으니, 맹렬은 웃고 그대의 소리가 명창은 명창이나 아직도 미진한 대목이 있으니 피를 세 동이는 더 토하여야 비로소 참 명창이 되리라고 한다. 송씨는 그 길로 자기 고향인 비전으로 돌아와 그곳 폭포 밑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목을 얻으려고 소리를 지르는데, 며칠을 지난즉 목이 아주 잠겨서 당최 터지지 아니한다. 그렇게 석 달을 고생하다가 하루는 목구멍이 섬섬거리며 검붉은 선지피를 토한 것이 거의 서너 동이 폭이나 되었다. 따라 목이 터지기 시작하여 필경 폭포 밖으로 소리가 튀어나게 되었다. 그 뒤에 다시 대구에 가서 선화당에서 소리를 하는데, 소리도 소리려니와 일단 정신은 맹렬의 동정을 살피는 데 집중이 되었다. 맹렬은 넋을 잃은 사람같이 좌중안석하면서 송씨의 입만 쳐다보고는 무엇이라고 하여 옳을지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맹렬은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소리판이 끝나기를 기다려 감사에게 무슨 핑계를 하였던지 몸을 빼어 송씨의 처소로 나와서 그 밤으로 행장을 차려가지고 대구를 탈출하여 송씨의 고향인 운봉으로 왔다. 맹렬은 본래 여자의 본능인 투기성이 강하여 송씨가 어디든지 불려가게 되면 반드시 회환할 일자를 확정하여 만일 하루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집안은 풍파의 와중에 휩쓸리고야 마는 것이 별로 진기한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진주 병영에 불려가게 되었는데, 왕환 이십일 작정한 것이 여러 가지 사고로 이삼 일간을 더 지체하게 되었다. 송씨는 곧 그리된 사연을 세세히 적어 사람을 시켜 전언을 하였다. 맹렬은 그 편지를 떼어보지도 아니하고 그 전인에게 송씨의 내(來)·불래(不來)를 묻고 하는 말이, 내가 이 편지를 떼어볼 것도 없으니 송광대에게 가서, 가더라고 말하라 하고 곧 봇짐을 싸가지고 나선다. 전인이 하도 어이가 없어 그 길로 돌아와서 송씨에게 그 광경을 말하니, 송씨는 정신이 없어 열 일을 다 제치고 돌아와 본즉, 오직 빈 집뿐이다. 송씨는 침식을 전폐하고 천신만고 맹렬의 행방을 수탐하다가 진주로 가서 병사 이경하의 수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진주로 들어섰다. 이때 맹렬이는 송씨가 왔단 말을 듣고 병사에게 말하여 송씨를 불러 소리를 시키되, 분부하시기를, 너는 본래 명창이니 네가 소리를 하는데 능히 나를 한 번 웃게 하고 또 한 번 울게 하면 상급을 후히 하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숨을 바치리라 하시고, 소리는 바싹 마른 「토별가」를 시키라고 하였다. 병사는 그 말대로 분부하였다. 송씨가 생각한즉 이것은 분명 맹렬의 주촉(嗾囑 : 남을 꾀어 시킴)이지만 병사의 분부라 거역할 수도 없어 그대로 소리를 하는데, 아무리 웃기려고 온갖 어릿광대짓을 다하여도 웃기는 고사하고 병사의 얼굴에서는 점점 독살만 피어오르는 듯 한다. 송씨는 느닷없이 병사의 앞으로 달려들면서, 아저씨! 왜 아니 웃으시오? 나를 죽이고 싶어서 그러시오 하였더니, 병사가 픽! 하고 웃었다. 송씨는 그것을 보고 물러서서 우리 아저씨가 웃기는 하였다마는 또 어떻게 우는 꼴을 보나 하고 토끼 배 타는 대목에 가서 애원성으로 어떻게 슬프게 하였던지 만좌가 눈물바다를 이루었는데 병사도 돌아앉아서 한번 슬쩍 수건을 눈에 대었다. 그리하여 소리판을 마친 뒤에 맹렬이는 병사에게 송씨와의 전일 관계를 숨김없이 말하고 병사의 양해를 얻어가지고 다시 송씨와 깨어진 거울을 맞추었다. (중략) 어느 때 진주 촉석루에서 판소리를 하는데, 만좌는 모두들 느껴서 눈물을 금치 못하였고, 또는 사면이 숙연한 깊은 밤인데 「춘향가」 중 옥중가의 귀성을 발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창거창래(唱去唱來) 소리가 진경에 들어가매, 음풍이 슬슬 돌면서 수십 대의 촛불이 일시에 탁 꺼지고 반공에서 귀곡성이 은은히 나는 듯하였다. 청중은 모두들 아울러 그 신기에 무불감탄(無不感歎)하였다고 전한다.”고 적고 있는데 당시 진주에서 활동하는 소리꾼들의 활동상이나 공연하는 모습을 능히 상상할 수가 있다.
교방이 해체되고 기생조합 권번이 결성된 진주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소리광대로 이름을 날리던 이선유(李善有)와 유성준(劉成俊)이 연이어 진주에 머물며 권번장을 지내면서 진주의 소리는 그 명성을 드날렸다. 특히 풍광 좋은 촉석루와 진주좌[이후 진주극장이었다가 현재는 몰에이지 복합상가가 되었음]는 이름난 공연장이었다. 이름난 공연장과 많은 청중으로 인하여 전국의 이름난 소리광대들이 이곳 진주에서 공연을 하였던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 이선유 : 이선유에 관한 자료와 연구는 『조선창극사』와 『오가전집(五歌全集)』, 「판소리명창 이선유」(신나라음반), 「동편제 판소리」(서울음반), 「이선유의 음반에 대한 연구」(노재명), 「이선유의 판소리 음악어법」(강예원), 「이선유 명창론」(최난경) 등이 있다.
이선유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진주 또는 하동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고, 출생연도에 대하여도 1872년과 1873년의 두 가지 견해가 있으며, 사망연도에 대해서도 1940년 또는 1949년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조선창극사』에서는 이선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선유는 거금 67전에 경상도 진주군에서 출생하였다. 10여세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하여 15세시에 송우룡(宋雨龍) 문하에 이르러 3년간 훈도를 받은 후 독공으로 계속하다가 김세종의 지침을 받아서 차차 방향을 알게 되었으니 그때 나이는 30고개를 바라볼 시기였었다. 이리하여 김창환(金昌煥)·박기홍(朴基洪) 등 선배를 종유하여 실제 견문을 넓혀 소리는 완역에 달하게 되었다. 그 후 경향 간을 다니면서 명성을 떨쳤고 기량은 더욱 숙달하여졌다. 지금은 고향 진주에서 후진을 양성하기에 힘을 쓰고 있다 한다. 그 소장(所長)은 토별가라 한다.”
이로 보면, 이선유는 송우룡과 김세종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조선창극사』가 발간된 시기인 1933년경에는 진주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선유에게 소리를 전해준 송우룡과 김세종은 동편제의 대가들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선유의 판소리가 송흥록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동편제 소리의 고법(古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난경의 「이선유론」에 의하면, 이선유는 소리를 배우고 나서 ‘송만갑 협률사’에서 1910년까지 활동하다가 협률사가 해체되자 주로 하동과 진주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진주에서 결성되었던 진주권번의 권번장이 되어 소리를 가르치며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1939년까지 진주권번의 권번장으로 있었는데, 이때 이선유에게서 소리를 배운 사람은 신숙·박봉술·김수악·이윤례·오비취 등이었다. 1910년 이후에는 하동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21년부터 1933~4년까지 진주의 영정으로 이사와 살다 장대동으로 옮겨 1949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선유의 가족도 모두 국악과 예술에 종사하였는데, 동생인 이선직은 그림, 막내동생인 이인자는 춤, 이선유의 네 딸(맹상·판딸·모상·계상)은 모두 진주권번 출신이었다. 외조카인 이윤례도 진주권번에 입학하여 기예를 배웠으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인 진주검무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였고, 김수악도 진주검무 예능보유자로,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인 진주교방굿거리춤 예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택수(金澤洙)는 『오가전집(五歌全集)』이라는 이름으로 이선유의 판소리 사설집을 냈는데(오가 : 춘향가·심쳥가·화용도·수궁가·박타령), 여기에는 소리와 아니리가 구분되어 있고 장단도 표기되어 있으며, 특히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점에서 창본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유성준 : 유성준[1874?~1949]은 근대 5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임방울, 김연수, 정광수, 박동진)으로 이어지는 동편제소리의 계보를 잇고 있다. 『조선창극사』에서는 유성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유성준은 전라북도 남원 출생이다. 송우룡의 제자로서 김창환(金昌煥)·박기홍(朴基洪)의 후배요, 김창룡(金昌龍)·신명학(申明鶴)과는 동배이다. 고종시대에 정춘풍(鄭春風)·김세종(金世宗)의 지침을 받아서 견문이 매우 높은 명창이다. 실제보다 이론이 승(勝)하거니와 이론으로 전도성(全道成)과는 각기 주장을 달리하여 호유장단이로되 아울러 현하쌍벽의 평론가이다. 지금 70노령으로 오히려 건재하여 진주에서 군소배의 교도에 힘을 쓰고 있으니 ‘학불염 교불권(배움을 싫어하지 않고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學不厭 敎不倦)’이 그의 일생의 책무인가 한다. 토별가에 장하고……”
이에 의하면, 유성준은 이론에 매우 밝은 평론가였으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매우 열성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성준은 이선유가 진주권번의 권번장을 그만둔 1939년부터 그 뒤를 이어 1949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 진주에서 활동하였는데, 유성준이 이렇게 진주에서 머물 수 있었던 것은 하동의 권력가인 이은우(李恩雨)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종기(李鍾琦) : 이종기(예명 : 동백)는 김성옥-김정근-이종기-강창원으로 이어지는 중고제소리의 명창이다.
『조선창극사』의 기록에 의하면, “74년 전에 충청남도 비인군 도만리에서 출생하였다. (중략) 김정근(金定根) 문하에 가서 판소리 공부하기를 시작하였다. 약 1개월간 수학한 후에 김세종(金世宗) 문장(門墻)에 이르러 얼마 동안 도야를 받아서 비로소 방향을 알게 되었다. (중략) 후에 진주 이곡사에 가서 3년간 연마하였다. 35, 6세경에 창원읍내로 가서 이후 9년간 거주하였는데 성명이 원근에 쟁쟁하게 되었다.(후략)”
[현황]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진주에는 이름난 소리광대들이 공연을 하고 또 머물면서 소리공부를 하고 가르치는 활동의 주 무대였으나 일제강점 말기에 들어서면서 사회변화와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인하여 전통소리는 점차 그 흥미를 잃어가게 되고 마침내 국가적인 차원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쇠퇴하여졌다. 진주지역은 진주권번을 통하여 배우고 익혔던 기생들이 소리보다는 무용에 뜻을 두어 2011년 현재 10개의 무형문화재 중 4종목이 춤이다. 당시 진주권번 출신인 김수악만이 구음을 구사하여, 판소리는 아니지만 근근히 소리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근년에는 진주 출신의 고춘자가 전주대사습에서 판소리로 대상을 차지하여 이곳 경상남도의 소리고장인 진주에서 그 맥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