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10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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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진(河溍) : 자는 진백(晉伯)이요 호는 태계(台溪)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태촌(台村) 하공효(河公孝)의 아들이다. 갑자년(인조 2년, 1624)에 진사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여러 번 맑은 요직을 거쳐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러 많은 녹봉에 뽑혔다. 병자호란 때 향병을 모아 달려가다가 상주(尙州)에 이르러 부친상을 만나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사간원(司諫院)에 있을 때에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를 부려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죄에 대하여 소(疏)를 올려 배척하니 바른 소리가 조정을 움직여 사람들이 ‘봉(鳳)이 아침 햇빛에 운다[鳳鳴朝陽]’는 말에 비유했다. 일찍이 대성(臺省)에 있을 때에 어떤 자가 그의 말안장을 도적질했는데 종자가 의심되는 자를 들어서 다스리기를 청했다. 이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잃은 것은 적지만 저 사람이 나쁜 이름을 입는 것은 클 것이니 묻지 말라.”고 하니 숨긴 자가 그 안장을 되돌렸다. 그의 임금을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종천서원(宗川書院)에 모셨다.
○ 이윤걸(李胤杰) : 자는 중진(仲振)이요 본관이 성산(星山)이며 증 참판(參判) 이분국(李芬國)의 아들이다. 힘이 뛰어나고 기상과 도량이 넓고 웅장했다. 계묘년(경종 3년, 1723)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무신년(영조 4년, 1728)에는 분무원종훈(奮武原從勳)에 참여해 금대(金帶)와 보도(寶刀)를 받았다. 나주영장(羅州營將)과 무장현감(茂長縣監)을 역임했는데 벼슬자리에서는 청렴하고 검소했다.
○ 이지용(李志容) : 자는 자옥(子玉)이요, 호는 남고(南皐)며 본관이 성산(星山)이니 참판(參判) 이분국(李芬國)의 손자다. 풍채가 깨끗하여 위엄이 있고 문장이 넉넉하고 넓었다. 나이 12세에 시율(詩律)로써 노숙한 선비들을 압도했다. 기유년(정조 13년, 1789)에 명경과(明經科)에 오르니 상국(相國) 채제공(蔡濟恭)이 그의 재주와 기량을 중히 여겨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칠서집주(七書集註)』의 구두(句讀)와 교정(校正) 보는 일에 참여시켰다. 이 일이 끝나자 임금이 서책(書冊)을 내려 총애하고 좌랑(佐郞)에 옮겼다가 장령(掌令)으로 승진시켰다. 그 뒤에는 『번암집(樊巖集)』을 교정했다. 경북 안동(安東) 봉정사(鳳停寺)에 문집(文集)이 있다.
○ 조희룡(趙熙龍) : 자는 화숙(和叔)이요, 호는 눌와(訥窩)며 본관이 함안(咸安)이니 남강(南岡) 조득우(趙得愚)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장령(掌令) 이갑룡(李甲龍)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갑술년(순조 14년, 1814)에 문과에 합격하여 전적(典籍)·정언(正言)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폐단을 구할 수천 마디의 말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와서 노년을 마쳤다. 문집(文集)이 있다.
○ 하달홍(河達弘) : 자는 윤여(潤汝)요, 호는 월촌(月村)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다. 풍모와 도량이 엄정하고 글을 짓는 솜씨가 넉넉하며 행의(行誼)가 순박하고 독실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과 물재(勿齋) 노광리(盧光履)와 남파(南坡) 이위석(李偉錫)과 더불어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그가 저술한 『태극도주해(太極圖註解)』와 『진학설(進學說)』과 『균부설(均賦說)』과 『동해송변(東海頌辨)』은 모두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었다. 문집(文集)이 있다.
○ 이우윤(李佑贇) : 자는 우이(禹爾)요 호는 월포(月浦)며 매월당(梅月堂) 이하생(李河生)의 후손이다. 총명하고도 특이한 재질이 있어 나이 5세에 능히 글자를 알았다. 임오년(순조 22년, 182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정미년(헌종 13년, 1847)에 남명(南冥) 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는 일 때문에 소(疏)를 받들고 서울에 갔는데 일이 아직 마무리되기도 전에 병사(兵使) 안극찬(安克贊)이 조정에 천거했다. 이에 공이 탄식하여 “뜬 이름은 실로 군자의 부끄러움이다.[名浮其實君子之耻之]”라고 했다. 무릇 세 번이나 천거되는 도목에 올랐으나 마침내 부임하지 않았다. 문집(文集)이 있다.
○ 최준일(崔濬一) : 이름은 용(溶)이요, 자는 기연(氣然)이며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명경과(明經科)에 올랐더니 대사성(大司成) 이휘준(李彙濬)이 사랑하여 직강(直講)이 되었다. 간원(諫院)에 있을 때에 재앙의 이변에 대한 구언교지(求言敎旨)에 의해 당시의 폐단 일곱 조목에 모두 2천 마디를 초하여 장차 글을 마치려 했는데 상국(相國) 유후조(柳厚祚)가 보고 이르기를 “도움이 되지 않고 화(禍)에 부딪칠 것”이라고 했다. 또 늙은 어버이가 있기 때문에 중지하여 올리지 못했다. 드디어 글을 대원군에게 올려서 정사를 행하는 데 누락된 것들을 개진했으나 쓰여지지 않았다. 바로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모를 봉양했다. 벼슬은 정언(正言)과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에 이르렀고 유집(遺集)이 있다.
○ 이유신(李有臣) : 자는 예경(禮卿)이요, 호는 매하(梅下)며 본관이 재령(載寧)이다. 문과에 올라 헌납(獻納)에 이르렀다. 당시의 폐단에 대한 향중의 상소로 인해 임금의 뜻에 거슬려 절도(絶島)에 귀양 갔다. 뒷날 용서받고 돌아와서는 여러 친구와 더불어 정자를 운곡(雲谷)에 세우고 만년에 쉬는 곳으로 삼았다. 유고(遺稿)가 있다.
○ 하겸락(河兼洛) : 자는 우석(禹錫)이요, 호는 두남(斗南)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주군(州郡)을 역임했더니 모두 함께 명성이 있었다. 무략(武略)과 선비의 행실로 한때 이름이 알려졌다. 강계부(江界府)에 회재(晦齋)의 서원(書院)이 있었는데 원은 헐리고 강당만 남아 있는 형편이었다. 서울의 관리가 이를 헐고자 하니 공이 의론으로 보고하기를 그치지 않아 강당이 온전하게 되었다. 후에 땅을 사서 이를 넉넉하게 했다. 때마침 그 해에 큰 흉년을 만났는데 관청의 돈과 성안의 미곡을 빌려서 구휼하니 살게 된 사람이 무릇 6,700명이었다. 문집(文集)이 있다.
○ 조성가(趙性家) : 자는 직교(直敎)요 호는 월고(月皐)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젊은 나이에 널리 백가(百家)의 글을 읽었다. 문장은 간결하고 고졸(古拙)하여 시류의 속된 말을 익히지 않았다. 기노사(奇蘆沙) 문간공(文簡公)을 스승으로 받들자 노사가 「외필(猥筆)」을 지어주니 이는 대개 유학의 도맥(道脈)을 잇자는 뜻이었다. 임인년에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서 은전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오르게 되었다.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성채규(成采奎) : 자는 천거(天擧)요, 호는 회산(悔山)이며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젊어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있었다. 또 유학을 보위함에 있어 한결같은 정성이 있었다. 범상한 일에도 남명(南冥) 선생과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에 매우 힘썼다. 일찍이 금당(琴塘)을 지나다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솜(버드나무 개아지)이 텅 빈 여울에 떨어져 고기가 듣겠으니 공연히 물결을 지어 하늘의 기미를 어긋나게 말지로다.”라고 했다. 절창의 곡조였기 때문에 세상에 회자(膾炙)되었다. 이 글귀가 중국에 흘러들어 갔는데 어떤 노숙한 선비가 칭상하고 탄복하며 이르기를 “이 사람의 가슴속에는 한 점의 티끌도 없을 것이고 하늘에 제사하고 비를 비는 뜻만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문집(文集)이 있다.
○ 정면교(鄭冕敎) : 자는 국교(國喬)요, 호는 지와(芝窩)며 본관이 해주(海州)이니 농포(農圃)의 후예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에게서 배우고 익혔는데 글을 지으니 기이하고 우뚝하여 매우 건전했다.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와 성매산(成梅山)과 더불어 이름을 가지런히 했다. 문집(文集)이 있다.
○ 최숙민(崔淑民) : 자는 원칙(元則)이요, 호는 계남(溪南)이며 본관이 전주(全州)이니 모산(茅山) 최기필(崔琦弼)의 후예다. 일찍부터 스스로 학문에 뜻을 두어 기노사(奇蘆沙) 문간공(文簡公)을 사사(師事)했다. 주리(主理)의 심법(心法)을 얻어듣고 후생을 장려하여 더욱 진보해가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문집(文集)이 있다.
○ 최정기(崔正基) : 자는 숙중(肅仲)이요, 호는 가천(可川)이며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학업을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받았는데 일찍부터 자립하다가 늦게서야 커다란 선비가 되었다. 성리학을 명쾌하게 드러내고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취지를 천명하고 발휘해 한 세상의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다. 저술한 『중용설(中庸說)』·『고증성학총요(考證聖學摠要)』 등의 글이 있고 문집(文集) 8권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 하겸진(河謙鎭) : 자는 숙형(叔亨)이요, 호는 회봉(晦峯)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후손이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배웠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기상과 도량이 온아하고 순수하여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일세에 무거웠다. 저술로서 『심위자모설(心爲子母說)』, 『주어절요(朱語節要)』, 『동유학안(東儒學案)』 및 『동시화(東詩話)』가 있고 또 유서(遺書)가 있어 세상에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