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T0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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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谷面 雲門마을-歷史 |
이칭/별칭 | 삼암리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운문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역사]
금곡면은 진주시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면(面)으로, 고성군, 사천읍 등과 경계를 하고 있다. 금곡면 소속의 검암리는 동쪽으로는 가봉리, 서쪽으로는 차현마을, 북쪽으로는 송골리, 남쪽으로는 음정마을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4개 마을의 가운데가 운문마을이다.
1911년 금동어면(金冬於面)[현재 검암, 가봉리]과 송곡면(松谷面)[현재 송곡리, 정자리]으로 분리되어 있던 것을 금곡면으로 병합하고,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진주군(晋州郡) 금곡면(金谷面)의 행정리 21개 리(里)중의 하나로 검암리가 되었다.
검암리는 엄정, 운문, 차현, 신담 4개 마을이 있고 다시 엄정에 화박골, 나래골이 딸려 있고 운문에 오도방, 오도실, 운수동이 있다. 차현은 수레재와 서삼이로 나누어지고, 신담은 거문당과 더불어 두 마을을 이룬다.
[성씨의 연원]
운문마을에 사는 진양 하씨들은 하윤(河潤)의 후손들이다. 하윤[1452~1500]은 자는 수부(睡夫) 호는 운수당(雲水堂)이라 하였으며, 진주 하씨 사직공파의 시조 하진(河珍)의 12세손이다. 하윤은 1483년(성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봉교, 예조, 호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연산군의 난정을 보고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1498년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어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입묘추숭(立廟追崇)의 잘못을 간하다가 곧 순천군수로 나가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였으나 곧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진주의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된 인물이다.
운문마을은 하윤이 입향 시조로, 하윤 이후 약 500여 년 간 하씨들이 살아온 집성촌이다. 이곳의 하씨들은 12대에 걸쳐 연속으로 만석군을 지냈다고 할 정도로 잘 살았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하씨들의 농사를 돕던 타성받이들이 함께 살았으나 하씨들의 재산이 줄어들면서 타성받이들이 하나 둘 외지로 빠져나가, 현재는 이씨(李氏) 2가구를 제외하고 모두 하씨들로만 구성된 일족(一族)마을이다. 약 40호, 12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