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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성마을-민속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T06006
한자 寺奉面 北馬城마을-民俗
이칭/별칭 마르등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민속]

(1) 동제

북마성마을에는 오랜 전승을 가진 동제가 있었다. 동제 혹은 당산제, 산신제 등의 이름으로 부른 상당신(上堂神)을 모시는 제의(祭儀)와 마을 입구의 탑(塔)을 모시는 하당신(下堂神) 제의가 동시에 시행되었으나 지금은 마을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제사가 중단된 이유는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동제의 무용론을 내세워 지내지 말 것을 주장하던 중, 2003년의 태풍 매미가 불어올 때 마을에서 신목(神木)으로 모시던 당산나무가 뿌리채 뽑히면서 2004년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쓰러진 당산나무는 동네 주민들이 약으로 사용한다고 조금씩 베어가서 지금은 흔적도 없다고 한다. 다만 당산나무의 아들나무와 손자나무가 마을 뒷산과 마을 입구에 남아 있을 뿐이다.

2003년까지 시행하던 동제는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지냈다. 제관은 60세 이상의 동네 남자들 중 열의가 있고 능력이 있는 자를 동네 어른들이 결정하는데, 정월 초 마을어른들께 세배를 올릴 때 어른들이 제관을 결정했다고 한다. 제관은 제주(祭主) 1명, 유사(有司) 1명으로 이루어진다.

제관이 결정되면 마을에서는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나락 1섬을 제물준비 비용과 제관의 수고비로 지급하고, 제관은 그 범위 내에서 제물을 준비한다. 보통 제물은 이웃한 반성시장(班城市場)에서 구입한다. 제물은 백설기, 명태, 돼지머리, 막걸리 등이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동네 사람들이 제관의 집 대문에 큰 대나무를 세워 제관의 집임을 알리고, 산에서 황토를 채취하여 제관의 집 대문에 뿌려 부정을 방지한다. 그리고 제관은 제사 1주일 전부터 대문출입을 금지한다.

제사 전날(14일) 밤, 제사를 지내러 산에 오르기 전에 마을에서 약 1㎞ 정도 떨어진 남강에 가서 남강 물로 목욕재계한 후 산에 올라간다.

제사를 지내고 산에서 내려온 후 마을 입구의 탑에 가서 다시 간단한 제의를 올리는 것으로 동제는 끝나지만, 제관은 제의가 끝나고 난 뒤에도 2~3일 정도는 바깥 출입을 삼가면서 일반인들과 접촉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상당신 제의인 산신제를 지내고 난 후 제관은 마을 입구의 탑에 와서 다시 제의를 올리는데, 마을 입구의 탑은 새마을 운동 당시 시멘트를 발라버려서 그 원형을 찾아 볼 수가 없으며, 그때부터 탑에 대한 제의도 사라졌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탑에 제사를 올릴 때는 모든 동네 사람들이다 참석하였고, 외지에 나간 사람들도 참석하여 개인이 소지를 올리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시행하지 않는다. 다만 몇 년 전에 작고한 정윤옥(鄭允玉) 씨가 개인적으로 계속 제의를 지냈으나 사망한 이후는 그나마도 시행하지 않고 있다.

마을 뒷산과 마을 입구에 있는 나무들은 당산나무의 종자목이면서, 지금 마을사람들이 그 나무를 당산나무라 부르고는 있지만 특정한 제의는 없다고 한다.

(2) 백중제

역시 지금은 시행하지 않는 제의로, 7월 백중날에는 마을에서 고용살이 하는 사람들(머슴)을 위해 서낭나무에서 제를 올리고, 술과 고기를 주어 위로하였다고 한다.

(3) 풍물

마을에서는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집집마다 돌아가며 ‘매구’를 쳤다고 한다. ‘매구’는 ‘풍물놀이’의 방언이다.

마을에서 ‘매구패’를 조직하여 집집마다 매구를 쳐주면 그 집에서는 쌀이나 돈을 주고, ‘매구패’는 이 돈을 모아 마을기금으로 적립해서 마을을 위한 사업에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 앞의 도로도 ‘매구’를 쳐서 적립한 돈으로 아스팔트 포장을 했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공동 창고 제작, 각종 마을 경조사의 부의(부의)도 이 기금으로 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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