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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민중이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조직하는 자위군.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외침을 많이 받아 고려·조선 시대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양란의 의병과 조선 말기의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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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 통정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며, 강희수(姜希秀)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 강희수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고 부자가 함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강희수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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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부사 강우복(姜遇福)이다. 전라도 순천 출신의 무사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강희복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전투에 참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잠시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가, 다시 의병 200여 명을 모집하여 군표(軍標)를 ‘비(飛)’자로 삼고, 남원을 공격하였다. 15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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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準峰).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의병장으로 유명한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금산(錦山)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 고인후(高因厚)를 잃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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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경주. 자는 집중(執中).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진주성전투 때 손자 김덕연(金德連)과 더불어 창의종군하였는데, ‘왕사에 죽지 못하면 어찌 신하된 도리라 하겠느냐’고 하면서 전쟁에 임하였다. 결국 전투 중에 김덕연과 함께 순절하였다. 후에 숭질(崇秩)을 증여받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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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정유재란 때의 의병. 본관은 상산(商山). 고려 두문동 은사 단구재 김후의 후손이며 임진왜란 의병대장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의 둘째 아들이다. 1593년 진주성싸움에서 아버지 김준민이 전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힘을 기르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다시 왜적이 진주를 향해 진군할 것으로 예측하고, 발치(鉢峙)에다 토석성을 쌓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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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김개(金介)의 후손이다. 1728년(영조 4) 안의(安義)의 정희량이 무신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전사했다. 1826년(순조 26)에 증직을 내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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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이 안의(安義)에서 무신란을 일으키자 삼촌인 김필만, 김필락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영장 이석복과 연합하여 인근의 수령들과 더불어 역도들을 협공하다가 모두 전사했다. 후에 양무공신에 오르고 1890년(고종 28)에는 김여삼, 김필만, 김필락의 공을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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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상주. 자는 성인(成仁). 고려 때 직제학을 지낸 김후(金後)의 후손으로 군수 김녹돈(金祿敦)의 손자이다. 아들 김봉승(金鳳承)은 정유재란 때 진주 발재[鉢峴]에서 전사하였다. 출생년은 미상으로 산청의 단성에서 살았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1583년(선조 16) 북평사 이제신(李濟臣)과 함께 군관으로 출정하여 북쪽 야인을 격퇴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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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일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고, 병법을 공부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이 인근 고을 안의에서 일어나자 진주영장 이석복의 막하에 의병으로 들어가 반도들과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양무공신 2등에 기록되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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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호(士浩).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의 후손이다. 효행이 지극하여 이름이 알려졌고 용략이 뛰어났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이 일어나자 진주영장 이석복(李碩福)과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후에도 자신의 공을 절대 앞세우지 않았고 시골에 파묻혀 여생을 보냈다. 사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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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 아버지는 진사 김언침(金彦琛)이다. 1573년(선조 6)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 받아 군기시주부가 되고, 그 뒤 용안현감과 강원도, 경상도의 도사를 지냈다. 사헌부지평의 자격으로 정치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실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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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김해 출신이다. 같이 활동했던 김필락(金弼樂)은 사촌동생이고, 김여삼(金汝三)은 그의 조카이다. 영조 무신란에 김필락, 김여삼과 더불어 의병을 모아 반군을 진압하였다. 향군(鄕軍)을 모아 남강을 건너가 이석복(李碩福)과 인근의 여러 수령을 따라 길을 나누어 공격하다가 전투 중에 순절하였다. 양무원종훈(揚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1890년(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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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희경(熙卿), 호는 규헌(葵軒)이다. 1550년(명종 5)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개와 도량이 뛰어났으며, 의지가 공명정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불러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고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사후 공조참의에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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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익경(翼卿)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전쟁의 책임자인 병사(兵使)가 겁을 먹고 난적을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칼을 뽑아들고 병사를 위협하며 진군을 재촉했다. 뒤에 경상도에 어사로 왔던 박문수가 뒷이야기를 듣고 이를 나라에 보고하였으며 그로 인해 나라에서 금위영 별군관으로 불렀으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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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병자호란 때의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여진(汝進)·득여(得汝). 선무랑(宣務郞) 문홍규(文弘逵)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터지자 의병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심연 감사가 그를 불러 임시 경상우병사로 임명하였으며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큰 공을 세웠다. 나라에서 그의 공훈을 치하하고 두 번이나 선전관 자리를 주었으나 끝내 취임을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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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때의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자신(子愼), 호는 성광(醒狂)이다. 1579년(선조 12)진사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불러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하동의 섬진강 쪽으로 출진했다가 이듬해인 1598년 진중에서 순직했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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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원량(元亮)이다. 충효청렴하였고, 타고난 힘이 빼어나 무술에 능하여 수문장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에 입성하여 힘껏 싸웠으나 1593년 진중에서 전사했다. 선무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도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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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진경(眞卿).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민(官民)이 흩어짐을 보고, 같은 고향의 뜻있는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합세하여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려 하였지만 사양하고 자신은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군무를 정돈하며,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면서 군의 사기를 높였다. 1593년(선조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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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밀양. 자는 원숙(元淑). 본명은 준옥(準玉)이며, 부인은 하서리(河舒里)[1889~1970]이다. 1872년(고종 9)에 함양군 안의에서 출생하여 15세의 나이에 임시 관례를 치르고 의병장 노응규(盧應奎) 문하에서 항일의병에 참여하였다. 노응규가 1896년 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안의를 출발할 때부터 동행하여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고향에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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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양(咸陽). 치암 박충좌(朴忠佐)의 후손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합포성(지금의 마산)까지 진격해 적과 싸웠다. 진주지역에서 활약하던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金德齡)이 모함을 당하여 구속되자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게 글을 올려서 김덕령 장군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밝혔다. 이후 의병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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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양(咸陽). 치암 박충좌(朴忠佐) 장군의 후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형 박흥주(朴興宙)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합포성(지금의 마산)까지 진격해 적과 싸우다가 형과 함께 전사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박흥주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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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수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백홍제는 성품이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나이가 아직 어려 어머니와 함께 산속에 피신해 있었는데 갑자기 적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 배에 태워져 바다를 건너려 할 때, 기지를 발휘하여 적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칼을 훔쳐내어 배 가운데 있는 적을 모두 죽이고 같이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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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초계(草溪).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병조판서에 추증된 변연수(卞延壽)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으며,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 휘하에서 왜선을 격파하여 군공을 세웠다. 이어서 당포해전(唐浦海戰)에도 참전하여 분전하였으나 아버지 변연수와 함께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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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 본명은 서관성(徐寬成)으로, 함양군 안의(安義) 장수사 용추암의 승려 출신이다. 보기 드문 힘센 장사로서 1896년 진주의진의 선봉장을 맡아 노응규의 진주성 점령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각지에 파견되어 친일분자와 단발령 호응자를 처단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부 주민들의 원한을 사 1896년 4월 20일경 거짓 향응을 제공받고 잠든 사이에 죽임을 당하였다. 일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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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밀양. 자는 화례(化禮), 호는 운암(雲菴)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으며, 자라면서 큰 뜻을 세우고 시를 지어 그의 회포를 나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막하로 진군하던 중 왜군을 만나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조정에서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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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학봉 김성일의 명으로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을 지켰다.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주부(主簿)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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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중도(中道). 정가(正嘉) 송서(宋瑞)의 후손이다. 기품이 탁월하여 언어와 행동이 법도에 벗어남이 없었고, 어버이 섬기는 그 효성이 실로 지극하였다. 임진왜란 때 송건도는 어버이의 상을 당해 여막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라의 위급함을 깨닫고는 상복을 벗어 제치고 “우리 집안이 대대로 절의를 지켜왔었는데 우리나라가 오늘같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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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일사재(一思斎) 안창렴(安昌廉)의 손자이다. 어릴 때부터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한 기상이 있었으며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은 참봉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사 이운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쳤으며 1593년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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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 기묘명현(己卯名賢)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이며, 대사성을 지낸 양응정(梁應鼎)의 아들이다. 1561(명종 16)에 태어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經書)에만 전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진주성전투에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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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양. 자는 재일(栽一). 『진양속지(晋陽續誌)』에 의하면,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진사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막하에서 왜적과 싸우다 불화살[火箭]에 맞아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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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중옥(仲玉). 아버지는 효력부위 유수창(兪壽昌)이다. 1492년(성종 23)에 태어났으며 졸년은 모른다. 진주 정촌(鼎村)에 살았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중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다. 진사에 급제한 뒤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에 뜻을 깊이 두어 후학들을 일깨우는 것으로 자기의 소임을 삼았다. 그와 함께 사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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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기계(杞溪). 진사 유백온(兪伯溫)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을 불러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계사년(1593년) 진주성이 떨어질 때 장렬히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주부(主簿)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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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파평(坡平). 윤사복(尹思復)은 첨정 벼슬에 있을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에 입성하였다가 계사년(1593년) 진주성 함락 때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현재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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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안(咸安). 매헌 이인형(李仁亨)의 증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이우춘, 아우 이성춘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우춘·이성춘과 함께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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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안(咸安). 매헌 이인형(李仁亨)의 증손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이우춘(李遇春)과 이득춘(李得春)이 형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이우춘 및 이득춘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큰 전공을 세워 판관(判官)의 벼슬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이장(李檣)도 이성춘을 따라 여러 번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 공신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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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동성(東城)이다.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서 힘껏 싸워 공을 세웠다. 후에 훈련원 첨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군공으로 선무원종 3등 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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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안(咸安). 매헌 이인형(李仁亨)의 증손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이득춘(李得春)과 이성춘(李成春)의 형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이득춘과 이성춘, 조카 이장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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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여주(驪州). 자(字)는 문재(文哉). 아버지는 이만영(李晩榮)이다. 1556년(명종 11)에 태어나 진주 반동산에 살았다. 1579년(선조 12)에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성질이 단중하고 언론이 적당하며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였다. 재주가 있었으나 뜻을 펴보지 못하고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죽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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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안(咸安). 매헌 이인형(李仁亨)의 현손이며, 판관 이성춘(李成春)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이성춘과 중부·백부인 이득춘·이우춘을 따라 의병으로 참여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우춘 등과 함께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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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동성(東城)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하여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 3등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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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홍보(弘甫), 호는 삼도(三島). 아버지는 임희중(任希重)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급제,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 현감 박광전(朴光前), 능성현령 김익복(金益福), 진사 문위세(文緯世) 등과 보성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와병중이던 박광전 대신 의병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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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산(慶山). 전준창(全准昌)의 조카이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이 일으킨 무신란에 숙부인 전준창, 아우 전덕징(全德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거창에서 반도들과 싸워 공을 세웠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전준창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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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군거(君擧)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의병을 일으켜 반도들과 거창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양무원종공신에 올랐고 함께 싸운 아들 전성징(全聖澄)과 조카 전덕징(全德澄)에게도 각각 벼슬이 내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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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석초(錫初)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그의 손자 정열(鄭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다가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다. 정열도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을 쏜살같이 떨치며 돌전(突戰)하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광윤은 판관(判官)을 증직(贈職), 부장(部將)을 추증받았으며 선무원종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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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시민(金時敏) 목사의 휘하에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용맹스러웠으며,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끝까지 왜군에 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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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옥봉(玉峰). 고려 말 충신 문충공 정몽주(鄭夢周)의 후예이다. 경상북도 영일 출신으로, 평생 충의로써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창의하여 최기필(崔琦弼)을 도와 왜적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최기필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의병의 왜적 토벌작전을 지원하다 제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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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 자는 여신(汝信). 효자 정경량(鄭慶良)의 손자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다.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으며, 선무원종 2등의 공훈을 기록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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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할아버지인 정광윤(鄭光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항전하였다. 정광윤이 1593년(선조 26) 진주성이 함락될 때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자, 그 뒤를 이어 적진으로 돌진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결국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이 인정되어 부장(部將)을 추증 받았고, 선무원종2등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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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정경량(鄭慶良)이다. 1592년에 아우 정명극(鄭明極)과 함께 의병을 불러 일으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달려가니 아버지 정경량(鄭慶良)이 훈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나는 염려하지 말고 난을 이기어 공을 세워 너 아비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아우 정명극은 차원(車院)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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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활약한 군관이자 비거(飛車) 발명가. 정평구는 전라북도 김제군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논어』와 『맹자』를 줄줄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이 되어 문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다시 무과에 응시하였고, 이후 무관 말단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라 우수사로 부임해온 당시의 명장 이억기(李億祺)가 정평구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중용함으로써 비로소 능력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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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 판결사 정유성(鄭惟誠)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공신이 되었고 주부에 제수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도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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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문신, 의병장.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一休堂). 전라남도 능주(陵州)[화순] 출신. 고려 명신 최충(崔冲)의 후손으로 최천부(崔天符)의 아들이다. 1532년(중종 27) 출생하여 1593년(선조 26)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양응정(梁應鼎)·기대승(奇大升)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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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전주. 자는 규중(圭仲), 호는 모산(茅山). 출생년은 미상이다. 천성이 어질고 품행이 발라 일찍이 지방관의 추천을 받아 봉사가 되었다. 이후 진주부관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진주 서쪽 백운동(白雲洞)에 살며, 젊은 유생들과 함께 학문과 도의를 강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지휘하여 1593년(선조 26)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성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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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하계선(河継先)은 어린 선비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계사년 진주성 함성 때 장렬하게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호조좌랑으로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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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의병. 본관은 진주. 자는 희가(希可). 호는 신당(新塘). 대사간을 지낸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 생전에 봉양을 잘 하였으며,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시묘살이를 예에 따라 행하였다. 그의 4형제가 한집에 살았으나 전혀 다툼이 없이 화목하게 살아 고을 사람들이 ‘효우군자(孝友君子)’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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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망추(望秋)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강득용, 신남과 더불어 군대를 훈련시키고 위풍을 떨치니 군율이 엄정하였다. 허물어진 진주성을 수축하고 못을 다시 깊이 파서 장차를 대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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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오(聖五)·경오(景五), 호는 신암(愼菴). 아버지는 노이선(盧以善)이며, 어머니는 팔계정씨이다. 1861년(철종 12) 거창에서 노이선의 차남으로 태어나 안의에서 성장하였다. 기호(畿湖) 유림의 거장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송근수(宋近洙) 등을 사사하였다. 1895년(고종 32)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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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장. 경상남도 양산(梁山) 출생으로, 원래 의원으로서 고향에서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양위(讓位)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진 직후인 1907년 12월 임진강·한탄강 유역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장 허위(許蔿) 휘하에 들어갔다. 1907년 12월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받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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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의 문신, 의병. 조선 1860년(철종 11) 서울에서 태어나 1889년(고종 26)부터 3년간 선전관 벼슬을 지냈다. 이 무렵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자 벼슬을 버리고 국권 회복을 꾀하던 중 1906년 고종으로부터 밀지를 받고 의병에 투신, 의병장이 되어 육남소모장(六南召募將) 칭호를 받았다. 이후 진주에 거주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다. 1907년 김동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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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 진주 출신으로, 승지 벼슬을 지내 윤승지(尹承旨)로 일컬어지던 인물이다. 일제의 기록에 전직 대관, 승지 출신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벼슬을 버리고 항일 의병투쟁으로 일생을 보냈다. 윤자승이 이끈 의병의 규모는 200명 정도였으며, 최대일 때는 600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로 진주 인근의 덕산·삼가·산청 등지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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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성숙(性叔), 호는 후은(後隱). 경상북도 영천 출신. 고려삼중대광 개국원훈 이총언을 시조로 한 벽진이씨(碧珍李氏)의 후손이며, 이정봉(李禎鳳)의 아들이다. 1907년 조선 군대의 강제해산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봉기가 확대될 무렵, 경상남도 산청에서 의병을 일으켜 박동의(朴東儀)를 의병장으로 하고 이학로는 부장(副將)이 되어 의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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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연일. 진주 출신으로 아버지가 내금위장을 지내는 등 유력한 가문의 후손이다. 일찍이 등과한 후 1896년 진주 의병장을 맡아 노응규의 진주성 점령에 큰 공을 세웠다. 의병투쟁이 끝난 후 의병이 해산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였다. 의병해산과정에서 함께 진주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 노응규를 투옥한 일로 인해, 당시 유림들에게 관군과 결탁했다는 비난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