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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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節紀念祝賀大會 左右翼 衝突 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용철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7년 3월 1일 - 3·1절기념축하대회 좌우익 충돌 사건 행사 종료 직후인 오후 6시 무렵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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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47년 3월 1일 - 3·1절기념축하대회 좌우익 충돌 사건 오후 9시 무렵 경찰의 제지로 종료 |
발생|시작 장소 | 영월읍사무소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48-8[영흥리 1017-13]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엄기창|신정현|김석봉|박항택 |
[정의]
1947년 3월 1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3·1절기념축하대회 직후 좌우익이 충돌한 사건.
[개설]
3·1절기념축하대회 좌·우익 충돌 사건은 1947년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945년 광복 직후 영월 지역에서는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1946년 12월 좌우익이 충돌하였다. 그리고 약 2개월 뒤에도 3·1절기념축하대회 후 좌우익이 크게 충돌하여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역사적 배경]
1945년 광복 직후 영월에는 좌우익 세력이 각각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다. 우익은 일제 강점기부터 존재하였던 영월청년회(寧越靑年會) 인사들을 중심으로 1946년 건국청년단(建國靑年團), 1947년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이 발족하였고, 반면 좌익은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을 중심으로 농민조합(農民組合), 학생민주청년동맹(學生民主靑年同盟), 여성동맹(女性同盟) 등을 조직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1945년 말부터 1946년에 걸쳐 한국에서는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信託統治)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익이 급격히 대립하게 되었고, 이 같은 경향은 영월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1946년 3·1절 당시 좌익은 영월읍에서 인민축하대회를 개최한 뒤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6년 12월 26일에도 좌우익이 충돌하여 좌익 인사 세 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경과]
3·1절기념축하대회 좌우익 충돌 사건은 1947년 3·1절 기념 축하대회 행사를 좌우익이 별도로 개최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우익은 건국청년단의 회장 엄기창을 중심으로 약 1,000여 명이 영월읍사무소 앞 사거리에서 행사를 진행하였다. 반면 좌익은 남로당 영월군 당 간부 신정현을 비롯하여 영월군 노동조합장 김석봉, 영월탄광 특별직장세포책 박항택(朴恒澤)[1909~?]을 중심으로 2,000여 명이 영월초등학교 교정에서 행사를 개최하였다. 정오에 시작된 행사는 오후 5시쯤 종료되었는데,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우익 인사를 좌익 측이 습격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사건 직후 우익계 청년들이 궐기하면서 사태는 양측의 무력 충돌로 발전하였다.
[결과]
3·1절기념축하대회 좌우익 충돌 사건은 오후 6시경에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좌익계 간부 손희준 외 20여 명이 부상을 입고, 영월군 노동조합 사무실도 파괴되었다. 또 이 과정에서 조합장 김석봉을 비롯한 간부들도 구타를 당하였다. 오후 9시쯤 경찰이 출동하여 제지하면서 사태는 종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3·1절기념축하대회 좌우익 충돌 사건은 광복 직후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논의되면서 전국적으로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된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깊다.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좌우익의 대립은 신탁통치 찬반 여부 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영월도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3·1절기념축하대회 좌우익 충돌 사건은 광복 직후 영월 지역의 좌우익 대립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