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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05
한자 歌謠歷史-晋州
영어의미역 Jinju Seen from the History of Popular Songs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장일영

[정의]

진주 소재의 가요로 살펴보는 진주의 역사.

[개관]

진주는 도심의 한 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강(南江)이 빚은 천혜의 풍광으로 예로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멋과 풍류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찍이 교방문화(敎坊文化)가 꽃 피웠던 곳으로 예로부터“북 평양, 남 진주’라고 했다. 그 전통은 자연 현대 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쳐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가요를 만드는 등 한국가요사의 중심에서 활동한 많은 예인(藝人)을 배출하였으며, 많이 불려졌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순수한 창작가요를 발표한 김서정(金曙汀), 베레모(帽)와 아코디언으로 올드 팬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작곡가 손목인(孫牧人), 1930년대 이후 30여년 간 활약하며 가요황제로 추앙받는 가수 남인수(南仁樹), 한국 대중가요계의 슈베르트로 불린 작사·작곡가 이재호(李在鎬), 아시아의 지휘자로 칭송받은 작곡가이자 색소폰 연주자 이봉조(李鳳祚), 영화음악에서 두각을 드러낸 작곡가 정민섭(鄭民燮) 등은 대부분 방송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한 시대를 주름잡으며 한국 가요계를 이끈 음악인으로 모두 진주 출신들이다. 그들은 고향인 진주를 소재로 작곡하고, 노래했다.

이들 외에도 진주를 노랫감으로 삼아 불린 노래 또한 많다. 군부 집권 시절 민주화를 외친 젊은 층에 애창된 「진주난봉가」는 교방문화의 산물이지만, 진주의 대명사가 된 「진주라 천리길」을 비롯하여 「진양강산」·「남강의 추억」·「내 고향 진주」, 영화주제가 「진주는 천리 길」·「촉석루의 하룻밤」·「논개」 등 수십 곡에 이른다.

[최초의 창작가요]

한국 최초의 창작가요는 「강남 달」로, 이 노래는 본명이 김영환(金永煥)[1898~1936]인 진주 사람 김서정이 작사 작곡하였다. 한국의 대중가요는 서양음악의 수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찬송가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이 들어오면서 서구의 노래들이 번안되어 시작한 것이다. 이런 노래들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식 노래를 포함한 창가집이 나오면서 서양의 민요나 찬송가를 번안하거나 일본 창가의 선율에 노랫말만 우리말로 바꾸어 불렀다. 즉 창작가요가 아닌 일본 것이거나 일본을 거쳐 온 것들의 번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그가 시나리오를 직접 쓴 영화 「낙화유수」의 삽입곡으로 노랫말을 지어 곡을 붙인 것이 「강남 달」이다.

당시 이 곡은, 진주 기생의 아들이기도 한 그가 기생과 화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자서전적 성격을 띤 영화 「낙화유수」와 더불어 인기 절정이었다. 무성영화시대 변사(辯士)로도 유명하였던 그는 「꼴불견」이란 영화주제가를 가수 김선초(金仙草)와 듀엣으로 부른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김서정은 그 뒤 「세 동무」·「봄노래」·「강남제비」 등을 강석연(姜石燕) 김연실(金蓮實)의 노래로 발표하여 크게 유행시키는 등 우리나라에 비로소 창작가요시대를 열었다. 그가 태어나 자란 진주 촉석루에 앉아 강 건너 강남 위에 뜬 달과 남강을 굽어보며 지은 「강남 달」은 가수 이정숙(李貞淑)이 불렀다.

강남 달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 밤을 홀로 새울까.

진주라 천리 길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 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대사) 진주라 천리 길을 어이 왔던고, 연자방아 돌고 돌아 세월은 흘러가고,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은 늙었더라.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젊어가는 옛 추억, 아 손을 잡고 헤어지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구나.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 노래를 불러 본다.

일제가 겨레의 숨통을 조르며 이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마저 죄다 훑어가던 공출제도가 시작된 1941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고단하고 암울하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태어났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불원천리하고 고향과 조국을 등져야 하였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요원의 불길처럼 널리 애창되며 진주의 ‘대명사’가 되어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러나 노래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작사자와 작곡가 가수 모두 월북하였다는 구실로 금지곡이 되었다가 풀려났으나 노래방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곡명이 되어 있다.

이 노래는 노래도 노래려니와 ‘대사’가 더 유명하였다. 무성영화시대 변사조의 구성진 가락이 겨레의 향수를 자극하며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래가 겨레의 정서와는 무관하게 무려 반세기 가까이 묶여 있었다. 이 노래의 작사는 조명암(趙鳴岩), 작곡 이면상(李冕相), 가수 이규남이었다.

본명이 조영출(趙靈出)인 작사가 조명암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시가부문에 당선된 시인이자 희곡 작가이다. 「진주라 천리 길」은 일본 와세다대학 불문과를 졸업하던 해 발표하였다. 김운탄(金雲灘)·김다인(金茶人)·이가실(李嘉實) 등의 필명으로 희곡 「논개」를 남겼다. 그가 작사한 노래는 「알뜰한 당신」·「바다의 고향시」·「울며 헤진 부산항」·「꼬집힌 풋사랑」·「고향설」·「낙화유수」·「서귀포 칠십 리」·「꿈꾸는 백마강」·「고향초」·「선창」 등으로 모두 귀에 익은 노래들이다.

작곡가 이면상은 함남 함주 출신으로 북한정부 수립 후 평양음악대학 총장과 음악가동맹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61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1985년에는 김일성 훈장을 받은 사람으로 남북 고향악단 교류 때 그의 곡이 연주되기도 하였다.

[「세세연년」과 「남강의 추억」]

「세세연년」은 초창기 레코드 가요사에 조명암과 더불어 양대산맥으로 꼽힌 박영호(朴英鎬)의 작사에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가‘무적인(霧笛人)’이라는 필명으로 작곡하고, 마산 출신 진방남(秦芳男)[반야월]이 부른 노래이다. 이 곡이 세상에 나온 해는 1940년이었다. 이 노래 또한 작사자의 월북으로 금지곡으로 되었다가 풀렸다. 노래의 소재는 진주 기생‘산홍(山紅)’이다.

산홍아 너만 가고 나는 혼자 버리기냐.

너 없는 내 가슴은 눈 오는 벌판이다

달 없는 사막이다, 불 꺼진 항구다.

순정의 이합사로 청실홍실 한데 묶어

백년암 깊은 밤에 맹세한 사랑이다

매듭진 송죽이다, 성을 싼 행복이다.

세세연년 춘하추동 속절없는 우로 속에

한 번 간 임의 넋은 벙어리 저 달이냐

우수수 단풍이냐, 말 없는 강물이다.

노래 속의 산홍은 진주 기생이란 하찮은 신분이었지만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절의를 계승한다는 자존심으로 충만한 기녀였다. 그에 관한 기록은 1910년 나라를 강탈당한 통분을 이기지 못해 자결한 전남 구례의 선비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기술되어 있다.

진주 기녀 산홍은 모습과 예능을 갖추어 빼어났다. 이지용(李址鎔)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으로 삼고자 하니 산홍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五賊)의 우두머리라 합니다. 내가 비록 비천한 기녀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사람일진대 무엇 때문에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지용이 크게 성이 나 몽둥이질을 했다.

이지용은 1905년 을사5적 중의 한 사람으로 세도가 하늘을 찌르는 내부대신이었다. 진주에 온 그가 산홍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첩이 되어달라고 매달리자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며 밖으로 뛰쳐나와 목을 매달았다.

진주 의기사(義妓祠)에는 그의 시가 황현의 시와 함께 현액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걸려 있고, 의기사 아래 벼랑에는 그의 이름이 깊이 새겨져 천추에 한결같은‘의암(義巖)’을 굽어본다. 촉석루 벼랑에 새겨진 많은 이름 가운데 그가 유일한 여성이다.

「세세연년」에 곡을 붙인 이재호는 본명이 삼동(三童)[1919~1960]으로 진주고보를 졸업하고 어려서부터 바이올린 주자였던 형의 영향을 받아 1937년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서양 반주음악을 우리 음악에 접목하여 “한국 대중가요계 슈베르트”라 불릴 만큼 고운 선율을 표현하였다. 1938년 「항구에서 항구로」를 발표하며 데뷔한 그는 초창기 박시춘(朴是春)과 쌍벽을 이루며 당대의 최고 작곡가로 올라섰다. 진주를 노래한 곡으로는 「세세연년」을 발표한 1940년 그 스스로 작사 작곡하고 고운봉(高雲峰)이 불러 히트한 「남강의 추억」과 문예남(文藝男)이 부른 「남강은 말이 없네」 등이 있으며, 곡만 붙인 것은 손인호의 「촉석루의 하룻밤」, 남인수의 「무정열차」 등이 있다. 광복된 산하를 맞는 기쁨을 노래한 이인권의 「귀국선」, 6·25 상잔의 비극을 그린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꽃마차」, 백년설의 「복지만리」·「번지 없는 주막」·「나그네 설움」·「대지의 항구」, 금사향의 「홍콩아가씨」, 박재홍의 「물방아도는 내력」, 손인호의 「울어라 기타줄」, 현대적 감각의 발라드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 송민도의 「아네모네 탄식」, 최갑석의 「고향에 찾아 와도」 등을 발표하여 그의 천재성을 여지없이 발휘하였다. 그는 또한 작곡에만 머물지 않고 문학적 재능을 보이기도 하였다. 고향 진주의 진양호 언덕에는 그가 짓고 곡을 붙인 ‘남강의 추억 노래비’가 있다.

물소리 구슬프다 안개 내린 남강에서

너를 안고 너를 안고 아 울려주던 그날 밤이

울려주던 그날 밤이 응 파고드는 옛 노래여

촉석루 옛 성터에 가을 달만 외로이

낙엽 소리 낙엽 소리 아 처량코나

임을 안고 울었소 응 다시 못 올 꿈이여

고향에 임을 두고 타향살이 십여년에

꿈이라도 꿈이라도 아 잊을소냐 그대 모습

정들자 헤어지니 응 불러라 망향가를

한때 진주고등학교 음악교사로 교편을 잡기도 하였고, 6·25전쟁 때에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KBS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나 1960년 42세를 일기로 분망하였던 가요 인생을 접었다. 1996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가수 남인수]

진주 출신 대중음악인 대부분이 작사·작곡을 한 반면, 가수로서는 남인수가 단연 독보적이다. 본명이 강문수(姜文秀)[1918~1962]인 남인수는 진주 재난의 역사에 뺄 수 없는 이른바 ‘병자년 홍수’가 있던 1936년 열 여덟 앳된 나이로 시에론레코드사에 취입한 「눈물의 해협(海峽)」으로 데뷔한 이래 박시춘·이부풍(李扶風)과 짝을 이루어 활약하다가, 1938년 「애수의 소야곡」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타고난 미성(美聲)을 가졌던 그는 한때 성악가 송기영(宋基永)에 사사하였는데 시대감각에 맞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로 평가되며 가수 황제로 추앙받는다.

일제강점기에는 「낙화유수」·「황성옛터(재취입)」·「울며 헤진 부산항」 등을 불러 나라 잃은 겨레의 설움을 달래며 심금을 울렸고, 조국 광복의 환희는 「감격시대」로 얼싸안았으며, 국토 분단의 아픔은 「해도 하나 달도 하나」와 「가거라 삼팔선」으로 어루만졌으며, 6·25 피란민의 애절한 절규를 「이별의 부산정거장」에 실어 보낸 1세기에 하나 날까 말까한 가수로 한국가요사의 중심에 섰던 예인이다.

약 1천여곡을 취입하였는데, 그 가운데 널리 애창된 노래는 「꼬집힌 풋사랑」·「서귀포 칠십리」·「고향의 그림자」·「추억의 소야곡」·「산유화」·「청춘 고백」·「무너진 사랑탑」·「남아 일생」 등이 있다. 고향 진주를 노래한 것으로는 「내 고향 진주」와 대사가 더 유명하였던 「무정열차」 등이 있다.

내 고향 진주

삼천리 방방곡곡 아니 간 곳 없다마는

비봉산 품에 안겨 남강이 흘러가는

내 고향 진주만은 진정 못해라.

유람천리 십년 만에 고향 찾아 왔노라.

그 이름 부르면서 달려왔노라.

고향이 그 누군들 꿈에 두고 있으련만

의곡사 종소리에 논개 넋이 잠이 들은

내 고향 진주만은 정말 못 잊어

타관천리 십년 만에 고향 찾아왔노라.

그 이름 부르면서 달려왔노라.

무정열차

밤차는 가자고 소리소리 기적소리 우는데

옷소매 잡고서 그 님은 몸부림을 치는구나.

정 두고 어이 가리 애처로운 이별 길

낙동강 굽이굽이 물새만 운다. 눈물어린 경부선

(대사) 비봉산에 잠드셨나 서장대에 잠드셨나, 달 밝은 남강 물에 물새 우는데, 님은 가고 노래만이 촉석루를 휘감누나. 무정열차 차창가에 추억을 실어 진주로 가자 진주로 가자.

떠나는 가슴에 눈물 눈물 서린 눈물 고일 때

새파란 시그널 불빛도 애처로운 이 한 밤아

마지막 인사마저 목이 메어 못할 때

쌍가닥 철길 위에 밤비만 젖네. 울고 가는 경부선

한 시절 ‘제7천국과 은방울’이라는 공연단체를 운영하기도 하였던 그는 6·25전쟁 때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군 위문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61년 가수협회 회장, 1962년 사단법인 한국연예인협회 초대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부터 고향 진주에서는 해마다 ‘남인수 가요제’가 열려 유망한 신인 기대주를 발굴하고 있으며, 2002년 6월 진양호반에 동상을 세워 추모하고 있다.

[노래에 실린 .진주]

진주가 대중가요의 노랫감으로 실려 전국을 휩쓴 곡은 1927년 김서정이 작사·작곡한 한국 최초의 창작가요 「강남 달」이며, 다음으로 1939년 이재호가 작사·작곡하고 2002년 타계한 가수 고운봉이 불러 히트한 「남강의 추억」, 1940년 이재호 곡 「세세연년」, 1941년에 나온 「진주라 천리 길」의 순서다.

발표연도는 알 수 없으나 김계원 작사·작곡의 「진양 강산」과 작사·작곡은 물론 가수조차 전해지지 않는 「진주의 달밤」이 노인계층에서 애창되고 있고, 남인수의 「무정열차」와 「내 고향 진주」, 이재호 곡 손인호의 「촉석루의 하룻밤」, 영화 「진주는 천리 길」의 주제곡인 황금심의 「은주의 노래」와 손인호의 「원철의 노래」, 박지연의 「진주의 노래」와 「울어라 진주 남강」, 나훈아의 「진주 처녀」, 이미자의 「논개」, 남성봉의 「쌍가락지 논개」, 이봉조가 작사·작곡하고 노래까지 한 「향수의 내 고향」, 최희준의 「진주성」, 정동훈 작사에 김재식이 노래한 「남강은 살아 있다」, 우판용의 「논개의 노래」「달빛어린 진양성」, 작사·작곡·가수가 누군지 모르고 가사와 악보만 전하는 「황폐된 촉석루」. 이재호「남강은 말이 없네」 등 수십 곡의 노래에 진주가 실려 널리 불려졌다. 이 가운데 노인층에 널리 애창되는 신민요조의 「진양 강산」과 「진주의 달밤」을 옮겨본다.

진양 강산

비봉산 허리에 아지랑이 끼고

의곡사 골짜기에 뻐꾸기가 울면은

이 언덕 저 언덕에 삼삼오오 짝지어

나물 캐는 처녀들의 노래소리 고와라

에헤야 좋구나 얼씨구 좋구나

에헤야 좋구나 우리 진양 강산아

서장대 오르니 찾는 사람 적은데

저녁 하늘 호국사에 인경소리 쟁쟁타

비탈 아래 흐르는 맑고 푸른 저 물에

우리에의 봄꿈을 둥실 띄워 보낼까

에헤야 좋구나 얼씨구 좋구나

에헤야 좋구나 우리 진양 강산아

진주의 달밤

의곡사 우는 종이 가신 님을 불러도

강물만 출렁출렁 구곡간장 녹인다

진주의 절색가인 진주의 절색가인

몇몇이나 되는고 청치마 주름주름

청치마 주름주름 님이 그립소

남강은 잠이 들고 꿈을 꾸는 촉석루

서장대 성돌 위에 눈물이 젖소.

강 건너 모래사장 강 건너 모래사장

님이 떠난 나루터 가시고 못 오시는

가시고 못 오시는 님이 그립소

[진주 출신 작곡가들]

김서정이재호 외에 손목인이봉조(李鳳祚)·정민섭(鄭民燮) 등이 있다. 본명이 손득렬(孫得烈)[1913~1999]인 손목인은 21세 때인 1934년 금릉인(金陵人)의 가사에 곡을 붙여 고복수(高福壽)가 부른 「타향살이」가 공전에 히트를 하면서 OK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데뷔하여 이듬해 이난영(李蘭影)에게 지어준 「목포의 눈물」로 일거에 명성을 드날렸다. 일제는 1933년부터 사전 검열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거나 시국을 풍자한 노랫말을 일절 금지시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중가요는 감상적이거나 현실 도피적인 내용의 노랫말과 애수에 잠긴 노래들만이 유행되었다. 이후 가수 남인수, 작곡가 이재호의 등장으로 한국 대중음악계는 진주 출신들로 그 전성시대를 구가하였다. 손목인은 이어 1960년대까지 아직도 귀에 익은 고복수의 「짝사랑」·「사막의 한」, 김정구의 「바다의 교향시」,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 박단마의 「슈사인 보이」, 최숙자의 「모녀 기타」,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 등 1천여 곡의 가요를 발표하였으며, 가요 외에도 춘향전 등의 뮤지컬 50여 곡과 영화음악 10곡도 남겼다. 1964년 음악저작권협회를 설립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1968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1982년 영주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1999년 타계하였다.

작곡가 이봉조[1932~1987]는 테너 색소폰 연주자로서 우리나라 가요를 세계에 알린 대표주자로 꼽힌다. 진주고등학교 재학 시절 스승인 작곡가 이재호에게서 음악성을 인정받은 그는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뒤 1963년 「밤안개」로 가요계에 데뷔한 이래 「맨발의 청춘」·「보고 싶은 얼굴」·「떠날 때는 말없이」·「럭키 서울」·「팔도강산」·「사랑의 종말」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1971년 도쿄 세계가요제에서 정훈희의 「안개」로 최우수 가창상을 수상하였고, 그 뒤 여러 세계가요제에서 「너」·「무인도」·「꽃밭에서」 등으로 입상하였다. 국내 작곡가 중 가장 많은 국제가요제 입상 경력을 쌓으며 트로트가 주류이던 1960년대 가요계에서 재즈풍 노래를 개척한 작곡가로 평가받았다. MBC 관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한 그는 1972년 대한민국 예술상을 받았으며, 고향을 노래한 곡으로는 「향수의 내 고향」이 있다.

고향을 노래한 대중가요는 보이지 않으나 영화음악에서 1974년과 1978년 1979년에 걸쳐 대종상을 내리 거머쥔 작곡가 정민섭[1940~1987]을 빼놓을 수 없다. 진주사범병설중학교와 진주사범학교 재학 때부터 음악에 천재성을 보인 그는 졸업과 동시에 작곡발표회를 갖고 작곡집 「진달래」를 발간하였다. 졸업 후 제주도 근무를 지원하여 순수 예술혼을 불태운 그는 3·15 부정선거를 소재로 한 노래를 만들어 교직에서 쫓겨났으며, 이후 경희대학교 작곡과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여 1963년 「추방된 지역에서」라는 관현악곡으로 동아일보사 주최 전국 음악콩쿠르 입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하기 시작하여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였다. 직접 작사·작곡하고 부인 양미란이 부른 「당신의 뜻이라면」, 이시스터즈의 「목석 같은 사나이」를 비롯하여,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박재란의 「박달재 사연」, 김상진의 「이정표 없는 거리」, 엘리트 가수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 봉봉의 「육군 김일병」, 히식스의 「초원」·「곡예사의 첫 사랑」·「여고 졸업반」·「아니 벌써」 등이 히트하였다. 영화음악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다. 「상록수」·「화가 이중섭」·「난중일기」·「로맨스 그레이」·「황토기」·「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겨울사냥」·「산딸기」·「일송정 푸른 솔은」·「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연산군」·「돛대도 아니 달고」 등의 영화음악과 「개구리 왕눈이」·「아톰」·「그레이트 마징가」 등 추억의 만화영화 주제가들이 그가 작곡한 곳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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