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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324
한자 衡平運動
영어음역 hyeongpyeong undong
영어의미역 social equality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백태남

[정의]

경상남도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

[개설]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일컫는다.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들의 신분해방이었다. 이때 백정들 가운데는 일반인을 능가하는 자산가가 많았고,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분의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시대적 각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봉건적 성향이 농후한 영남지방에서 신분의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형평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차적인 목적이 ‘백정’이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 존중, 평등 대우를 주창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우는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형평운동은 우리 역사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대표적인 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진주지역의 형평운동]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거행된 형평사의 결성에서 시작되어 1935년 4월 24일 제13차 형평사 전국대회 때 단체의 이름을 대동사(大同社)로 바꿀 때까지 지속되었다. 형평사는 일제강점기 동안에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활동한 사회운동단체라는 점에서 그리고 진주는 형평운동의 발원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형평운동의 역사적 배경]

1920년 당시 진주의 인구는 2만 4천여 명이었고, 그 중에서 약 350명 정도의 백정들이 진주에 살고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봉건적 신분제도는 철폐되었으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었고,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백정들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의 예들을 몇 가지 들어보면, 1907년 진주지역 교회에서 일반교인들이 백정들과 동석 예배를 거부한 사건이나, 백정의 자제들이 학교에 입학하더라도 상민 자제들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봉건적 신분제 하에서 같은 천민 신분이었던 기생들조차 백정들 모임에 참석하기를 거부할 정도였다.

이 같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외에 형평운동이 발생한 배경에는 진주지역의 역사적·사회적 조건과 백정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 1920년대 초 진주에는 각 부문에서 직업적 운동가들이 주도한 민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진주청년회 중심의 청년운동, 진주노동공제회[진주노공]가 이끌었던 노동·농민운동, 각 종교단체와 연계되어 전개되었던 여성운동 등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로서 비교적 일찍 서구문물과 접하게 됨에 따라 근대적인 공·사립 교육기관들이 설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육기관들이 각 부문운동의 대중적 확산과 직업운동가들을 배출하는 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또한 진주는 역사적으로 1862년에 일어난 진주민중항쟁이 진주의 정치·문화적 기반의 기초가 되었고, 갑오농민전쟁 때에도 진주는 농민군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회적·역사적 조건과 함께 진주지역에서 형평운동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던 요인은 백정사회에 축적된 경제적 기반이었다. 전통적으로 백정들은 일반인들이 꺼려하던 도살업, 고기판매업, 유기제조업 등 특수한 직종에서 일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일반인들로부터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정도의 경제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는 도살업이나 고기판매업이 재물을 모으는 중요한 수단으로 바뀌어갈 정도였다. 1920년대 초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진주공설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있던 백정 상인들이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형평사를 만드는데 적극 참여하여 실무 임원진을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형평운동의 전개양상]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동적 과정을 겪어온 진주지역에서 사회운동가들과 백정사회의 부유한 지도자들은 1923년 4월 24일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 설립을 위한 발기대회를 열고 그 이튿날 창립총회를 열었다. 총회에서는 앞으로 형평운동을 이끌어갈 임원을 선출하였다. 중앙집행위원으로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장지필(張志弼)·이학찬(李學贊) 등을 선출하였다. 간사로는 하석금, 박호득을, 이사로는 하윤조, 이봉기, 이두지, 하경숙, 최명오, 유소만, 유억만을, 재무에는 정찬조를, 그리고 서기에는 장지문을 각각 선출하였다. 중앙집행위원 중에서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은 비 백정으로서 진주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 출신의 직업적 운동가들이었고, 나머지 장지필, 이학찬 등은 백정의 후예로서, 장지필은 지식인 출신이었으며, 이학찬은 진주공설시장에서 고기판매업을 통해 상당한 경제력을 갖고 백정사회를 지도하던 인물이었다.

형평사는 진주에 본사를, 각 도에 지사, 각 군과 유명 마을에는 분사(分社)를 두는 전국 조직체계를 갖추었는데, 당시 형평사측에서는 전국 백정 출신의 인구를 추정하여 회원수가 대략 40만 정도로 추계하였다. 형평운동을 감시하던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자료에 따르면, 형평사 창립 1년만에 12개 지사와 67개 분사가 생겼고, 1928년에는 단위 조직체가 162개, 활동가 수가 9688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형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형평운동에 대한 반대 움직임도 나타났으며, 형평사의 조직 확대에 따라 운동단체 내부에서도 분열·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진주의 기생조합이 형평사의 창립축하식 여흥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으며, 1923년 5월 24일에는 진주지역의 24개 동리 농청(農廳) 대표자들의 모임에서 소고기 불매운동을 결의하였다. 내부적으로도 창립 1년 뒤부터 본부를 진주에 두자는 진주파와 서울로 옮기자는 서울파의 파벌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장지필을 지도자로 하는 서울파는 1924년 4월 서울에서 형평사 혁신동맹 총본부를 발족시켜 독자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방의 백정들 사이에서 형평운동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그해 8월 “형평사 중앙총본부”라는 이름으로 일단 통합된다. 이때의 통합은 장지필, 강상호의 공식 사퇴와 함께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도 조직이 체계화되어 갔다.

또한 1926년의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장지필, 서광호 등 수명이 검거됨으로써 형평사는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단체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 내지 사상단체로서 그 성격이 명확히 전환되어 갔다. 1928년부터는 형평사 내부에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에 중점을 두는 온건파와 계급투쟁의 측면을 중시하여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급진파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후 형평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1935년에 형평사를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면서 인권운동의 본래 성격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의의와 평가]

형평사가 대동사로 이름을 바꾼 뒤 사실상 형평운동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평등한 대우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형평운동의 이념은 여전히 필요한 상황이다. 형평사가 창립된 진주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 그러한 형평운동의 정신을 존중하고 기리는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형평운동의 학술적 성과를 논의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리고, 형평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을 건립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는 문화 활동과 인권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진주에서는 인간 존엄성 실현과 인권 존중을 실천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한 형평운동의 정신을 귀중한 자산으로 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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