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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339
한자 矗石樓記
영어의미역 Record of Chokseongnu Pavi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편세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문
관련인물 하륜(河崙)
제작연도/일시 1413년연표보기

[정의]

여말선초의 문신 하륜촉석루의 변천과정을 기록한 글.

[개설]

진주하씨하륜(河崙)[1347~1416, 충목왕 3~태종 16]이 촉석루가 지어진 연대를 고찰하고 또 중수한 동기와 과정을 상세하게 그렸으며 이 누대가 개수됨으로 미치는 영향을 순차적으로 기술하였다.

[내용]

촉석루의 명칭 유래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및 촉석루에서 바라보이는 장관을 시작으로 촉석루가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가를 시대 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촉석루하륜이 소년시절 자주 놀던 곳으로서 말년에 이곳을 돌아보며 「촉석루기」를 짓게 되었다. 기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촉석루의 규모는 매우 크고 높아서 시야가 탁 트이는 맛이 있고, 남강을 굽어보면 긴 강이 그 아래로 흐르면서 여러 봉우리가 바깥쪽에 벌려 있다. 마을의 뽕나무와 대나무가 그 사이에 은은하게 비치고 푸른 석벽에 긴 여울이 그 곁에 서로 잇닿아 있다. 이곳 사람의 기상은 맑고, 습관이 된 풍속은 온후하며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네는 그 일에 부지런하고, 효자와 어진 후손은 그 힘을 다 쏟으며, 심지어 날짐승들은 울고 날며 물고기와 자라는 헤엄치고 자맥질하여 한 구역의 만물에 이르기까지 제 자리를 얻어서 모두가 볼 만하다.

이 누대의 이름을 지은 뜻은 고려 말기의 담암(談菴) 백문보(白文寶)[?~1374] 선생이 말하기를, “강 가운데 돌이 뾰족한 까닭에 누대의 이름을 촉석(矗石)이라 하였다.” 이 누대는 진주목사였던 김중광(金仲光)이 짓기 시작하였고 상헌(常軒) 안진(安震)이 두 번째로 완성시켰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壯元)을 한 분들인 까닭에 또한 장원루(壯元樓)라는 명칭이 있기도 한다. 아름다운 제영(題泳)으로는 안진(安震) 선생의 장귀 사운(長句四韻)이 있고, 또 운은(耘隱) 설장수(薛長壽) 선생의 여섯 절귀가 있으며 이분들의 운자를 화답하여 계승한 이는 급암(及庵) 민사평(閔思平) 우곡(愚谷) 정이오(鄭以五) 선생과 이재(彛齋) 허선생(許先生) 같은 분이 있다. 모두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선배들의 풍류 문체를 추상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려 말기에 온갖 법도가 무너지므로 변방의 수비가 또한 해이해져서 왜구가 쳐들어오니 도탄에 빠졌다. 촉석루도 또한 해이해져서 왜구가 쳐들어오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며 촉석루도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계사년(癸巳年, 1413)에 판목사(判牧使) 권충(權衷)이 판관(判官) 박시결(朴施潔)과 함께 노인들의 말을 고맙게 받아들여 강둑을 수축하되 백성을 나누어 누대를 만들고 대마다 한 무더기씩 맡겨서 농촌의 여러 걱정을 덜게 하였더니 열흘이 못되어서 공역을 모두 마쳤다. 그 다음에 촉석루를 짓는 역사를 도와주고 놀고 있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그 힘을 다하게 하였더니 가을의 9월에 이르러 공역을 마쳤다. 높은 다락이 비로소 새로워져서 훌륭한 경치가 예전과 같이 되었다.

나도 장차 벼슬을 그만둘 날이 이미 가까워졌으니 필마(匹馬)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노인들과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 다락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조려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나니 고을 노인들은 기다리시오.

[의의와 평가]

진주의 관광명소로 알려진 촉석루가 예전부터 아름다웠고 유명하였다는 사실과 지어지게 된 경위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이 누대를 노래한 시인까지 밝히면서 그 아름다움이 세월을 뛰어 넘는 사실을 알려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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