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진주읍치, 병영과 행정이 구분된 독특한 이원구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08
영어의미역 Jinju Town, a Unique Double Structure Consisting of Military and Administr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김덕현

[정의]

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가 있는 진주의 도시적 구역.

[진주읍치의 역사적 기원]

읍치(邑治)란 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治所)가 있는 도시적 구역으로, 흔히‘읍(邑)’혹은‘읍내(邑內)’라고 부르는 곳이다. 『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양지(晋陽誌)』 등에 기록된 건치연혁을 분석해보면, 진주는 처음에는 신라 신문왕 5년(685) 지금의 거창에 해당하는 거열주(居烈州) 혹은 거타로부터 분리되어 청주(菁州)라는 주(州)가 되어 총관(摠管)이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진주가 통일신라의 국토체제에 편입되어 처음으로 독립 행정구역화하면서 남해안 일대를 통제하는 군사적 거점의 성격을 가지고 출발하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진주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신라 9주의 하나로 강주(康州) 등으로 불리면서, 낙동강 서쪽과 지리산 동남, 그리고 거제에서 남해에 이르는 남해안 일대 11개 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진주가 서부 경상남도 일대의 중심지적 성격을 가진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인데, 통일신라 말 혼란기에는 중국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낼 만큼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2년(983)에 12목을 설치했는데, 진주가 그 하나이다. 이 시기 12목은 전국을 12개 행정구역으로 나눈 것이라기보다 외관이 파견된 주요한 주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즉 외관제의 성립을 의미한다. 이후 성종 14년(995년)에 10도제 12목을 설치하면서‘진주(晋州)’라는 이름을 새롭게 부여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당시 경상도지역을 3개 도로 나누었는데, 상주 관할의 영남도(嶺南道), 경주 관할의 영동도(嶺東道), 진주 관할의 산남도(山南道)가 그것이다. 이때부터 진주는 경상도의 계수관(界首官 : 큰 읍의 수령) 대읍으로 발전한 것이다. 특히 진주에 절도사를 두어‘진주정해군(晋州定海軍)’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진주에 주재하는 절도사가 남해안 쪽 바다를 지키는 것을 주요 업무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나주를 해양도에 속하는‘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로 한 것과 함께 생각해보면, 진주는 나주와 함께 한반도 남해안을 나누어 지키는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산남도를 담당한 진주절도사의 관할은 주(州)가 10, 현(縣)이 37개소이다. 고려시대 진주목은 속군 2과 속현 7을 직접 관할하고, 산남도의 계수관으로서 지방관이 주재하는 합천군과 고성현·남해현·거제현을 간접적으로 거느렸다. 고려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진주는 목(牧)의 지위를 유지해왔으며 계수관으로서 진주읍치는 서부 경상남도 내지 경상우도의 행정과 군사적 중심지였다.

조선시대 건국 초 일시 태조의 후비 강비(康妃)의 본향이라 하여 진양대도호부(晋陽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태종 때 다시 목으로 복귀되었다. 세조 때는 진(鎭)이 설치되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36년(1603) 진주성이 요해지로 다시 인식되면서 창원 합포(合浦)에 있던 경상우병영이 진주성 안으로 옮겨왔다. 병영이 진주로 오면서 일시적으로 병사가 목사를 겸임하기도 했으나, 진주 사람들이 문관인 목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에 따라, 인조 13년(1635) 진주목은 병영과 분리되었다.

진주목의 읍치는 늦어도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비봉산 아래 진주성 북쪽에 위치했다는 것은 하륜(河崙)진주객사 봉명루(鳳鳴樓) 기문과 『진양지』, 그리고 진주 고지도에서 확인된다. 다만, 1896년 경상도를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나누면서 경상남도의 도청이 진주성 안에 있다가 1925년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경상도의 거읍 진주의 형승]

진주목의 읍치인 진주는 고려시대 이후 경상도의 계수관으로서 경주·상주·안동과 함께 경상도 4대 거읍의 하나였다. 경상우도 또는 서부 경상남도, 그리고 남해안의 배후 중심지의 지위를 지켰다. 조선시대 진주가 도회지로서 번화했던 모습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실경산수화 풍의 진주 지도를 통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주읍치의 형승을“시내와 산의 경치가 영남 제일이요. 큰 산과 큰 강이 있어 인물이 많고, 물산이 영남 여러 주의 절반이다. 비봉산은 북쪽에 멈춰 있고, 망진산은 남쪽에서 공손히 절한다. 이 두 산 사이에 긴 강이 흐르는데, 동서의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러섰다.”하고 읍치를 둘러싼 산수를 통하여 읍치 영역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한다. 또 조선 중기에 편찬된 사찬 진주읍지 『진양지』에서는 진주읍 터전을 이루는 산줄기의 계통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덕유산의 한 맥이 동으로 달려 의령 자굴산이 되고, 자굴산이 서쪽으로 구부러져 집현산(集賢山)이 되었고, 진산 비봉산(飛鳳山)집현산이 남으로 내려온 것이라 하였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명산 지리산이 주 서쪽에 있다. 옥산(玉山)은 주 서쪽에 있는 성황(城隍)이다. 본주의 큰 강은 남강과 두치진(頭恥津)[섬진강을 의미]이다”라고 기술하여, 진주의 서쪽 영역 경계가 악양과 화개를 포함하는 섬진강까지 이르고 있음을 기술하였다.

진산 비봉산남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산이 망진산(望晉山)인데, 진주읍치의 비봉(飛鳳) 형국과 관련하여 망진산(網鎭山)으로도 불린다. 비봉산을 진산으로 하고, 남강이라는 큰 강을 앞에 두르며, 강 건너 망진산을 조산(朝山)으로 하며, 뒤로는 멀리 지리산을 바라보는 것이 전체적인 진주의 형승이다. 지리산과 같은 큰 산과 남해라는 큰 바다 사이에서 진주는 다시 낮은 산과 긴 강으로 둘러싸인, 이른바‘장풍득수 산하금대(藏風得水 山河襟帶)’의 승지이다. 산이 전후좌우로 둘러싸 명당을 보호하고 그 안에서 흘러내리는 명당수가 옷깃을 여미듯 하고, 밖으로는 객수(客水)가 허리띠를 두르듯이 겹겹으로 둘러싼 모습을 묘사하는‘장풍득수 산하금대’는 취락이 입지하는 풍수적 조건일 뿐 아니라 방어상에도 유리한 한국의 전통적 도시 입지의 전형적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다.

‘장풍득수 산하금대’는 고려시대 이후 도읍 자리를 선정하는 중요한 지리적 조건이 되어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북으로 진산에 의지하고, 동과 서는 용이 서리고 범이 쭈그리고 앉듯이 산이 좌우를 지키며, 남으로 개천과 강으로 앞을 겹겹이 둘러싼 ‘산하금대’의 형국은 서울과 같은 한 나라의 수도나 지방의 읍을 막론하고 가장 이상적인 도읍 입지로 여겼던 것이다. 진주 역시 비봉산을 진산으로 하고, 동편의 선학산(仙鶴山)과 서편의 당산재(堂山齋)를 좌청룡 우백호로 하며, 대사지(大寺池)나불천을 옷깃처럼 그리고 남강은 허리띠처럼 둘러 산하금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진주의 풍수적 형국과 영역을 잘 그려낸 지도는 『해동지도(海東地圖)』이다. 이 지도의 진주목 지도에 의하면, 진주는 세 겹으로 둘러싸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집현산이 중심이 되어 외곽에서 진주 읍치를 둘러싸는 산줄기는 진주목이 지리적 영역을 표현한다. 그 내측의 산출기가 진주읍치의 영역을 나타내는데, 진주읍치의 위치와 좌향(坐向)을 진산 비봉산을 중심에 두고 바라보는 남강망진산을 통하여 앞을 만들고(山河襟帶) 선학산과 당산재가 좌우를 둘려 싸는(左靑龍·右白虎) 방식으로 읍치의 영역을 형상화하였다. 세 번째 가장 안쪽에서 둘러싸인 영역이 진주성이다.

[읍치 주변의 비보 경관]

진주목의 관아는 비봉산(표고 138m) 아래에 터를 잡았는데, 비봉은 곧 봉황이 나는 모습이다. 진주의 풍수를 자세하게 기술한 『진양지』의 「관기총론(官基總論)」에는“진주의 진산은 나는 봉황의 모습이고, 안산(案山)을 금롱(金籠)으로 하고 있다. 관청의 터가 그 아래에 있고, 이 때문에 사방 배치에 모두‘봉(鳳)’이란 것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또 진주읍치를 비봉 형국으로 완성하기 위한 진압(鎭壓)과 비보(裨補)를 기술하였다. 『진양지』에 읍치를 진주성 북 1리로 기술하고, 촉석루 뒤에 용두사(龍頭寺)가 있었다고 기록하였으므로, 안산에 해당하는‘금롱’은 지금의‘임진대첩계사순의제단’자리로 비정된다. 따라서 진주읍치는 비봉산과 안산에 해당하는 촉석루 북편 언덕 사이에 위치한다. 그리고 남강 건너편에서 읍치에 고개 숙인 모습인 망진산을 조산(朝山)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강 건너에 있는 망진산(173m)을 보면서 주산 비봉산이 동과 서로 크게 날개를 벌렸다. 서쪽 날개[右白虎]는 두고개[二峴][137m]와 당산재(140m)가 되고, 동쪽 날개[左靑龍]는 말티와 선학산(134m)이 된다. 곧 진주읍치의 좌우인 동과 서는 선학산과 두고개와 당산재가 된다.

진주읍치의 형국은 봉이 활짝 날개를 편‘비봉형(飛鳳形)’이라 하여 봉을 잡아두기 위한 갖가지 비보 조성이 읍 영역에 비치된 경관의 가장 큰 특징이다. 진주목 읍치에 조성된 비보는 지명비보·사찰비보·조산비보·임수비보·못비보 등이 있다. 지명비보란 비보 목적을 위하여 건축물이나 장소 이름으로 비보하는 경우로, 진주는 비봉 형국이기 때문에 ‘봉’이란 이름이 들어간 건물과 장소가 많다. 우선 진산인 비봉산이 있으며, 안산 망진산은 봉이 날아가지 못하는 그물을 의미하는‘망진산(網鎭山)’으로 불렀다. 또 까치를 보면 봉이 날지 못한다 하여 들의 이름을 ‘작평(鵲坪)’ 혹은 ‘까칫들’로 불렀다. 객사 앞 누각의 이름을 비봉루(飛鳳樓)라 하여 봉이 우는 상서로운 일이 있도록 기원하고 그 동편 집을 조양각(朝陽閣)이라 하여 아침의 서기를 맞도록 하였다. 지명 비보를 겸하는 사찰비보는 가까운 골짜기가 봉의 조롱(鳥籠) 구실을 하도록 절 이름을 대롱사(大籠寺), 소롱사(小籠寺)로 하였다. 비봉산에서 바라보이는 마을 이름을 죽동(竹洞)이라 하고 봉의 먹이가 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진주 고을의 흥망에 관련이 깊다고 생각되었던 읍치 경계에 대한 비보는 남강과 그 지류에 조성된 임수(林藪)가 중요했다. 진주읍치의 터전을 설명한 「관기총론(官基總論)」에 “옛날 흥성하던 시대에는 숲을 잘 기르고 벌목을 엄금하여 산천의 비호와 맑은 기운이 고을에 모였고, 인재가 무성하고 재상이 배출된 것이 어찌 신령한 산 기운의 효험이 아니겠느냐. 이것들이 모두 도선(道詵)이 그 형세를 살펴 진압과 비보를 잘 배치한 것이다. 그의 말에 ‘숲이 없어지면 고을이 망하고, 누각이 높으면 고을이 망한다.’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하였다. 이는 임수가 고을의 번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잘 보호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금기(禁忌)가 해이해지고 숲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서 인물도 줄게 되었다고 개탄하고 있다.

『진양지』에는 읍 서쪽에 가정수(柯亭藪), 상류쪽 남강인 청천(菁川)에 청천수(菁川藪)와 개양수(開梁藪), 읍의 동쪽 입구인 개경원(開慶院) 앞에 가방수(佳坊藪), 그리고 하류쪽 남강 북쪽 강변에 대평수(大坪藪) 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석갑산(石甲山)이 명당을 찌르는 것을 막기 위한 읍터 비보숲으로『진양지』에 특별히 기재된 임수는 ‘가정수’이다. 가정수는 일제강점기의 조사자료인 『조선의 임수(朝鮮の林藪)』에도 비보 역할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강에 합류하는 나불천이 홍수 때 역류하여 읍내에 범람하는 것을 막아주는 보안림의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진주성 지도 참조). 비봉 형국과 관련하여 봉의 먹이가 된다는 죽실(竹實)을 키우는 대숲은 남강변을 따라서 제방처럼 길게 늘어선 사철 푸른 숲으로 옛날부터 인상적이고 독특한 진주 경치로 이름이 높았다(그림 2, 3).

[읍치 중심부의 관아 경관]

조선시대 읍치의 중심 경관은 관아 건물의 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읍치는 중세적 전통사회에 속하는 유교적 사회질서를 표상하는 것이므로 종교적 경관과 정치적·행정적·군사적 경관이 중심을 이룬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의 세계관과 사회적 가치를 도시 공간과 장소에 재현한 읍치의 관아와 제사시설의 배치는 유교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믿게 함으로써 체제를 정당화하는 일종의 텍스트 역할을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의 읍치에서 재현되는 경관의 원형은 좌묘우사(左廟右社) 등 중국식 도읍 경관 구성원리에서 도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한국에서 읍치 경관은 그곳의 자연지세를 활용하여, 진산을 등에 지고 그 발치[背山]에서 하천을 바라보는[臨水] 배치를 밑그림으로 한다. 이러한 배산임수의 형국은 지형에 따라 그 규모와 형태가 다양하여 기하학적 형태를 취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권위적 행정장소들이 진산 혹은 주산 아래에 위치하여 산에서부터 하천 방향으로 전개되는 공간 축을 따라 위계적으로 배열된다.

지방 군현의 치소가 있는 읍치는 읍성(邑城)을 두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주는 평지 산성인 진주성 안에 임진왜란 직후에 경상우병영이 들어섰고, 진주목의 치소는 고려 때부터 성 바깥인 진산인 비봉산 아래에 위치한다. 즉, 조선 후기 진주는 특이하게도 성 안의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 성 밖의 진주목 치소라는‘이원적 공간구조’를 나타내고 있었다.

읍치의 관아는 크게 객사, 동헌, 그리고 진영 등 세 개 건물 군으로 나눌 수 있다. 진주읍치의 관아 건물로는 중앙정부의 왕을 상징하는 객사(客舍)가 진산 비봉산 아래 가장 상위에 위치하였다. 객사는 읍치에서 가장 높은 권위적 장소이다. 객사는 일동의 궁실(宮室)로서 『동국여지승람』서문에 밝혀진 것처럼, 군왕과 신하 백성이라는 상하의 구분을 엄하게 하여 위엄과 무거움을 드러내도록[嚴上下 示威重] 위치를 정하고 구조를 만들었다. 객사는 읍치 공간에서 가장 ‘위풍당당(威風堂堂)’한 장소에 ‘엄숙정제(嚴肅整齊)’한 모습으로 배치된다. 객사는 보통 읍치 내부 남북을 관통하는 ‘丁’자 모양 도로망의 중심에 입지한다. 객사의 건물 구조는 전국 3백여 모든 읍치에 획일적으로 통일되어 있어 누구나 그 건물이 객사인 것을 바로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객사는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 보름에 국왕에게 망궐배(望闕拜)하는 정청(正廳),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접대하고 숙소로 사용되는 익사(翼舍)로 구성된다. 객사 건물은 형태는 서울의 종묘 건물을 연상시키는데, 건물 중앙부가 정청이고 좌우가 익사이다. 정청 지붕은 좌우의 익사보다 한 단 높이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규모에서도 객사 건물은 고을에서 가장 높고 크다.

진주의 객사 혹은 객관에 대하여 하륜(河崙)은 서문에 “고을 객사에 두 번이나 화재를 만나, 다시 짓지 못한 지가 여러 해였다. 계미년(태종 3년, 1403)에 지금 판서 광주안공(廣州安公)이 좌사간대부로 있다가 목사가 되어 나갔다. 이에 옛터를 찾아 그전보다 제도를 조금 넓혀서 신축하였는데, 지금 목사 최공과 판관 은군(殷君)이 이를 계승하여 더 수축하였다……”하였다.

진주객사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 재판소로 이용되다가 2004년까지 진주문화방송이 있었던 자리로, 진주의 주축이 되는 남북로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객사의 삼간 대문 앞에는 2층 누문인 봉명루(鳳鳴樓)가 있고, 그 동편에 조양관(朝陽館)이 있었다. 역시 하륜의 기문에, “객사 남쪽에 세 칸 규모의 옛 다락이 있고 그 아래를 텅 비게 하여 사람이 왕래할 수 있게 하여 누문이라 일렀으되 이름이 없었다. 그 곁에 고목 수십 그루가 벌려져 있어서 바람을 머금고 햇볕을 가려서 서늘한 기운이 절로 난다. 그리고 관가와 민가에 대숲과 꽃나무가 은은히 비치면서 서로 이어져 있다. 산 빛과 물빛이 그 밖을 둘러 비치어 깊숙하고 넓게 트인 사이를 실로 유람하기 알맞다 하겠다.……. 편액을 봉명(鳳鳴)이라 하였다……. 곧 봉명으로 누의 이름을 삼은 것은 대개 문왕과 무왕의 덕으로 우리 임금에게 기대하여 봉이 우는 상서로운 일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봉명루가 군왕을 상징하는 객관의 외삼문임을 밝혀 왕조의 권위를 높이려 한 것이다. 봉명루 옆의 객사 부 건물인 조양관은 임란으로 불타고 그 뒤 재건되지 못했다. 아래 지도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객사 앞에 는 이층 누각이 가로 막고, 누각의 전면에 진주성문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시작되었으므로 객사는 진주읍치에서 가장 뚜렷하고 위엄 있는 건물로 사람들에게 보였을 것이다.

객사와 그 부속 건물인 봉명루와 조양관이 임금의 권위를 대표하는 데 비하여, 고을의 행정을 담당하는 시설을 아사(衙舍)로 부른다. 아사에 해당하는 건물은 우선 고을 수령인 진주목사가 집무하는 진주목의 동헌(東軒)이 있다. 동헌은 상아(上衙)로도 불리는데, 객사의 서쪽 지금의 전화국 자리에 있었다. 객사와 동헌 앞쪽 가운데에 이아(貳衙)라고 불리는 향청(鄕廳)이 위치했다. 향청은 고을 양반층의 대의 기구로 객사와 관아 다음의 권위를 지니는 사실상의 관아이다. 동헌과 향청의 주위와 전면에 부속 건물과 실무 관아, 그리고 사마소(司馬所)와 형옥(刑獄) 등이 배치되었다. 진주 진영(鎭營)은 진주목 관아에서 좀 떨어지고 진주성의 경상우병영에 가까운 대사지 북쪽에 배치되었다.

이처럼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가 읍내에서 가장 높은 위계적 위치, 즉 주산을 배경으로 첫 번째 자리에 놓이고, 그 다음이 국왕을 대리한 수령의 공간인 고을의 관아가 배치되며, 지방 사족의 공간인 향청은 객사와 관아의 아래에 위치한다. 그 아래 위계에 아전(衙前)의 공간이 있어 행정실무를 집행하였다. 군사 기지에 속하는 진영은 다른 관아와 분리되어 입지한다. 이러한 위계적 읍치경관 구조는 대체로 조선시대 모든 군현 읍치의 규범적 배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좁은 산골짜기에 입지하고 산줄기로부터 권위의 원천을 구하는 조선시대 읍치에서 관아의 배열은 기하학적으로 정형을 나타내기보다는 다양한 변형을 보여준다. 진주의 경우는 북쪽에 진산을 두고 남쪽에 강을 바라보는 남북 방향을 따라서 권위적 장소의 위계적 배치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고, 권위적 장소의 최상부에는 객사가 입지하여 읍치를 출입하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압도하는 권위를 나타냈다.

[제사 장소]

제사시설로서 문묘(文廟)·사직단(社稷壇)·성황사(城隍社)·여제단(厲祭壇) 등과 같은 존경 경관은 읍치 중심에서 떨어져 사방에 배치되었다. 공자와 유교 성현 및 조선의 문묘 배향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는 읍치 동쪽 옥봉리 향교에 있다.

『진양지』에는, 토신과 곡신을 모신 사직단은 읍치 서쪽 대롱사(大籠寺)[현재 진주간호전문대 주변] 부근에 있으며, 성황사는 고을을 수호하는 신을 모신 곳으로 읍치 남쪽 진주성 안에, 또 여제단은 제사를 받지 못한 원귀(寃鬼)를 모시는 곳으로 읍치 북쪽 의곡사(義谷寺) 위에 위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림 4). 모든 조선시대 읍치와 마찬가지로, 진주 역시 현세적 권위와 권력을 상징하는 권위 장소는 진산인 비봉산에서 진주성문을 거쳐 남강 나루에 이르는 남북 도로 축을 따라 위계적으로 배열되었다. 한편 현세와는 거리를 두는 제사 장소는 읍치 중심에서 격리된 주변 사방의 구릉지에 분산적으로 배치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