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전기의 장군 강민첨(姜民瞻)[963~1021]을 그린 초상화. 강민첨 장군은 본관이 진주이며,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지기(志氣)가 있는데다가 굳세고 결단력이 있어 주로 전공을 세워 입신하였다. 「강민첨 영정」은 조선 후기의 화가 박춘빈(朴春彬)이 18세기에 그린 반신상의 초상화이다. 「강민첨 초상」의 상단에 있는 찬문(贊文)과 그 옆의 기록에 의하면, 이 영정은 고려시...
-
경상남도 진주의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지방통치구역. 강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 3년(663) 2월에 빼앗겨 신라 영토가 되었다. 이후 신문왕 5년(685)에 거열주를 뽑아내어 청주(菁州)를 설치하고 총관(摠管)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에는 다시 전국의 지방조직을 9주, 5경으로 정비하고 명칭을 고쳤는데, 이때 청주를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경상도 지방에서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의 영역이었으며 이것은 서부 경상남도에서 거창, 산청, 진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4세기경으로 편년되는 평면 타원형의 주거지의 분포 상황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야의 영역이었던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 후기에 이르러 영역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지방 통지조직 중 삼국통일...
-
918년 왕건(王建)의 건국 이래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에 멸망할 때까지 34대 474년 간 존속한 왕조. 진주는 통일신라 말부터 후백제를 거치면서 강주(康州)로 불리다가 940년(태조 23)에 진주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진주목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종 때에는 진주향교가 창설되어 진주의 학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고려...
-
1200년(신종 3)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발생했던 사건. 1200년에 진주의 아전 정방의가 그의 동생 정창대와 함께 폭동을 일으켜 사람들을 마구 죽이자, 진주 사람들이 의거(義擧)하여 정방의를 죽이고 난을 1년 만에 평정한 사건이다. 고려 중기인 12~13세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 이후, 민란이 집중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원인은 귀족 사회의 상층구조가 붕괴되고 중앙 집권력이 이완...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호는 면재(勉齋). 평장사를 지낸 정연(鄭椽)의 아들이다. 1320년(충숙왕 7) 국자시에 합격하여 1345년(충목왕 1) 정당문학이 된 후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1352년(공민왕 1) 당시의 권세가 조일신(趙日新) 세력의 배경으로 찬성사가 되었으나 곧 조일신이 주살되자 그 일파가 함께 투옥되었다가 광양군수로 좌천...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있는 성. 진주성은 남강에 면한 단애상에 축조한 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란삼대첩(壬亂三大捷)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이며,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 시에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진주성은 일명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백제 때는 거열성(居列城)이었...
-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진주성의 배치도. 현존하는 「진주성도」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진주성도」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진주성도」이며, 나머지는 『여지도서』에 실린 「경상도우병영지지도(慶尙道右兵營之地圖)」이다. 영남대학교 박물관에도 「진주성도」가 있다는 기록을 보았으나 직접 보지는 못했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진주대아고등학교에서...
-
절개와 풍류를 지닌 진주 기생들의 생활 모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문화상. 진주의 논개(論介), 평양의 계월향(桂月香)으로 인해 ‘남 진주, 북 평양’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張志淵)...
-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순흥부사를 지낸 하윤린(河允潾)이다. 1347년(충목왕 3)에 태어나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한 후 1367년 감찰규정이 되어 신돈(辛旽) 문객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좌천되었고, 1388년(우왕 14)에는 최영(崔瑩)의 요동정벌을 반대하여 양주로 유...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찬성사로 치사(致仕)하고 진주군(晋州君)에 봉해진 하즙(河楫)의 아들이다. 벼슬에 나가 여러 지방에서 백성들을 돌보았으며, ‘잘못된 것을 알고서 그릇 판단한다면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다.’라는 글을 써서 걸어놓고 일을 보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별세로 3년 동안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었을 때 우왕이 ‘효를 옮겨 충으로서 삼고 그 애통함을 억제하고 부...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1344년(충혜왕 복위 5) 과거에 급제한 후 1363년(공민왕 12) 전공정랑(典工正郞)으로 있으면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랐다. 1375년(우왕 1)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에 있으면서 임의로 정원 외의 연호군(煙戶軍)과 별민군(別民軍)을 두었다하여 파면 당하였다. 이때 후임으로 온 원수 유영(柳瑩)이 채...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득제(得濟). 호는 송헌(松軒), 시호는 원정(元正).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관직은 찬성(贊成)까지 올랐다. 일찍이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관원으로 있을 때 황후의 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을 장살하였다. 후에 강회백(姜淮伯)이 그의 초상화에 대하여 평하기를 “도량이 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