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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718
한자 大坪里遺跡
영어음역 Daepyeong-ri Yujeok
영어의미역 Archaeological Site in Daepyeong-r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물 산포지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공봉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생활유적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지도보기
소유자 국유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

[개설]

남강다목적댐 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이 지역 일대의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특히 대평리 일대에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을 비롯하여 집터, 가마터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대거 출토된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명칭유래]

대평면에서 정식발굴조사를 한 결과, 청동기시대의 중요한 유물이 대거 출토되어 지역이름을 따서 대평리 유적이라고 명명했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산청을 향하는 국도를 따라, 약 10㎞정도 북상하면 진주시 명석면에 도달하며, 이곳에서 서쪽으로 10㎞ 더 들어가면 대평면에 도착한다.

[발굴/조사경위]

1967년 농경지 정리 및 남강댐 건설공사로 인해 유적이 심하게 파괴되면서 그 존재가 처음 드러났고, 경희대학교와 숭실대학교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고인돌과 유물이 보고되었다. 그 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75년부터 1980년까지 4차에 걸쳐 대평리 유적지에 대한 정식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고인돌·돌널무덤·집터·한데가마[노천요(露天窯)]가 조사되어 중요한 청동기시대 유적지로 학계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

1989년부터 남강다목적댐 개량사업의 일환으로 하도(河道) 확장공사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강 가장자리 대부분의 지역이 수몰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2년과 1995년에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어은·옥방·상촌·내촌·중촌마을뿐 아니라,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묵곡리, 진주시 귀곡동, 사천시 곤명면 본촌리에 이르는 대규모의 발굴이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결과]

대평리 유적 일대의 대규모 발굴 결과 신석기시대~삼국시대까지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어 남강유역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평리 유적은 옥방과 어은이라는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옥방이 넓고 크다. 본래는 대평리 지역 전체가 하나의 큰 유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겠지만 조사의 편의상 어은과 옥방으로 구분하고, 어은은 다시 2개의 지구로, 옥방은 9개의 지구로 세분하여 조사하였다. 댐의 수몰과 관련하여 실시된 조사이므로, 조사지역은 강과 가까운 제방을 따라 길게 분포한다. 따라서 옥방 유적의 중앙부에 해당되는 부분은 조사되지 않았다.

어은·옥방 지구의 대평리에서 발굴된 신석기 유적에서는 남부 내륙지방 처음으로 빗살무늬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중기와 후기 단계의 주거취락이 확인되었는데, 비교적 그 성격이 뚜렷하고 유물도 풍부하다. 청동기시대는 어은·옥방 전 지구에서 확인되는데, 집터의 총 수는 400동 이상이다. 이 집터 중에서 대략 청동기시대 전기의 장방형 집터 20여 동, 세장방형 집터 10여 동과 중기의 방향 집터(말각방형 등 모든 방형계 집터) 350여 동, 원형 집터 20여 동이 있다.

전기와 중기 대평 지역의 취락 형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전기에는 일렬로 배치된 장방형 집터군이었으나, 중기는 4~5동의 방형의 집터군이 둥글게 중앙의 광장을 중심으로 모여 하나의 단위를 이루었다. 또한, 전기에는 취락의 경계가 없이 분산적으로 거주하였으나 중기에는 대규모의 환호로 취락을 두르는 경계시설을 마련하였다. 옥방 1지구옥방 4지구의 2곳에서 환호가 확인되었는데, 동시기에 이중환호를 설치한 2개의 취락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형태]

어은 1지구옥방 5지구의 북쪽에 위치하며,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이곳에서는 120여 기의 집터와 4,000여 평의 밭, 40여 기의 야외노지, 20여 기의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집터는 바깥 자연 제방상에 10여 기가 열을 이루고 있고, 안쪽 자연제방에 약 100여 기가 밀집해 있다. 안쪽의 자연제방은 집중주거구역으로, 북쪽에는 휴암리형 집터가 밀집되어 있고, 남쪽에는 새김돌대문토기가 출토되는 장방형 집터와 휴암리형 집터가 혼재하고 있다. 특히 북쪽에는 약 20여 기의 휴암리형 집터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내부 공지에는 20여 기의 야외노지가 집중되어 있어 한 마을의 생활패턴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집터에서는 석기나 옥을 제작, 가공한 흔적이 많으며, 주로 구멍무늬토기, 골아가리를 비롯하여 각종 석기가 출토되고 있다.

새김돌대문토기가 출토되는 장방형 집터는 유적의 남단부에 10여기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장축방향은 모두 동-서이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 주류이나 방형에 가까운 것도 보이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110호의 경우 길이 22m, 폭 9.5m이며 내부에는 단(段) 시설이 있고, 2열 6개의 주춧돌과 판돌로 만든 노지를 갖추고 있다.

밭은 두 개의 자연제방 사이 U자형 만곡부에 조성되어 있다. 밭은 4,000평 정도의 면적이 확인되었는데, 고랑이 매우 정연한 편이다. 밭 속에서는 집석유구, 구덩이 등의 부대시설이 확인되었고, 무덤은 밭의 경계구와 나란하게, 또는 집터 사이에 산발적으로 분포한다. 부장품으로서는 가지문토기[채문토기(彩文土器)], 옥, 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4호 돌널무덤에서는 유아의 뼈가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야외노지는 집터 사이에 밀집되거나 산발적으로 분포한다. U자형의 점토띠를 돌린 형태도 있고, 원형구덩이를 그대로 이용하는 예도 있는데 내부에서는 붉은간토기, 깊은바리모양토기, 돌화살촉, 돌낫, 옥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노지 내부에서는 조, 쌀 등의 곡물과 여러 가지 씨앗들이 검출되었고, 장방형 집터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곡물들이 출토되었다.

어은 2지구어은 1지구 북쪽에 위치하며,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조사되었다. 확인된 유구의 수는 모두 165기이며, 생활유구인 집터와 야외노지, 집석, 폐기장용 구덩이, 밭 유구 등과 매장유구인 돌널무덤 등이 있다. 집터는 50기 이상 확인되었으며, 모두 중·소형의 장방형 또는 방형 집터이다. 길이 5m 내외, 너비 3.5m 내외의 것으로 유적의 북쪽과 남쪽에 있다. 집터의 내부구조는 중앙에 작업구덩이로 생각되는 얕은 타원형 구덩이가 있고, 구덩이의 양단에는 기둥구멍이 2곳에 서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노지는 집터의 외부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집터의 바닥은 단단하게 불다짐 처리하였는데, 주로 작업구덩이에서 사방 50㎝~1m 정도까지 잘 관찰되고 있다. 집터는 모두 사용 후 폐기된 상태인 것으로 보이며, 유구 내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들은 대부분 석기파편과 옥(玉)편, 숫돌편, 그리고 토기편 등으로 완형의 유물은 거의 없는 상태다. 야외노지는 33개가 발견되었고 집터군의 주변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주로 소토와 목탄편이 직경 1m 내외의 원형 또는 타원형 구덩이 내에 얕게 분포되어 있고 지면(地面)도 불에 달구어져 붉은 색을 띤다. 유구 내에서는 약간의 역석과 민무늬토기편이 수 점 출토되고 있다.

집석유구는 모두 42기로 민무늬토기편과 강변에서 가져온 크고 작은 역석을 한 곳에 다량 모아 놓은 양상이나 직경 1m 내외의 얕은 구덩이 내에 있는 것과 구덩이의 흔적이 전혀 없이 약간의 역석들과 토기편이 모여 있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역석들은 주로 석기를 가공하는 데 필요한 소재로 이용하거나 석기의 재료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기를 가공하다 도중에 그만둔 미제품들이 다수 섞여서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석기를 제작하는 야외작업장이거나 석기 가공 후 불필요한 자재의 전용 폐기장으로 생각된다.

또한, 길이 1m 내외의 장방형 모양의 구덩이와 타원형 모양의 구덩이 32기가 집터군의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데 모두 민무늬토기편, 석기박편, 목탄편, 소토 등이 서로 섞여서 출토되고 있다. 유구의 상태로 보아 집터 주변에 설치된 일종의 생활 폐기장으로 추정되고 있다. 밭유구는 구(舊) 제방 내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고랑과 두둑의 간격이 넓은 편이다. 직선상의 남북방향으로 이어지고 일부분은 동서방향으로 연결되고 있어 또 다른 밭유구층과 서로 중복된 곳도 확인되고 있다.

돌널무덤 8기가 확인되었는데, 길이 1m 내외의 소형으로 두께 10㎝ 정도의 비교적 얇은 판돌 4~6매를 사용하여 각각의 장단벽을 짜맞춘 구조이다. 대부분이 완전 도굴되어 일부가 파괴되었고, 출토유물은 8호 돌널무덤의 외부에서 붉은간토기 1점이 확인되었다.

옥방 1지구는 옥방 유적의 가장 동남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국립진주박물관[1차]과 경남고고학연구소[2·3차]에 의해 조사되었다. 다중의 환호(環濠)를 비롯하여 집터, 밭유구, 무덤, 구덩이, 고상건물지, 구 등 다양한 유구가 밀집되어 있다. 환호는 1겹 또는 2겹으로 되어 있고 목책과 공반되기도 하는데, 폭 2m 깊이 1m 내외의 크기이다. 옥방 유적 전체에서 이 일대에 환호가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주거지는 60여 동이 조사되었는데, 방형계의 휴암리형과 원형의 송국리형이 주류를 이룬다.

밭은 사질성의 토양에 이랑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고랑과 두둑의 폭이 거의 일정하다. 인접한 옥방 8지구 밭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판돌로 조립한 돌널무덤이 대부분이나, 묘역시설을 갖춘 대형의 것도 있다. 내부에서는 돌검, 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된다. 구덩이는 수백 기가 밀집해서 분포하는데, 야외노지, 폐기장, 가마 등 그 성격은 다양하다. 한편, 이곳에서는 좁은 구에 의해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구획되고, 그 내부에 각 1개씩의 수혈노지를 가지는 유구가 다수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옥방 2지구는 옥방 유적의 남쪽에 위치하며,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30여 기의 집터와 60여 기의 구덩이, 무덤 31기, 그리고 대규모의 밭유구 및 그와 관련된 유구가 확인되었다. 집터는 1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말각방형의 휴암리형이고, 구덩이의 구조나 성격은 1지구와 비슷하다. 무덤은 돌널무덤이 대부분인데, 밭의 가장자리와 동쪽의 일정 범위에 밀집되어 있다. 밭은 150×40m가 한 단위를 이루는 대규모로, 고랑과 두둑은 매우 정연한 편이다.

옥방 3지구는 옥방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2지구와 길게 연결되어 있는 곳으로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10여 기의 집터와 구덩이, 구(溝), 집석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특히, 이 지구에서는 층위를 달리하는 밭이 조사되었는데, 상층이 삼국시대의 것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이 밭은 일정 크기로 구획되어 있으며 경작흔적도 비교적 잘 남아있다.

옥방 4지구는 옥방 유적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동의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였다. 1~2겹의 환호를 비롯하여 60여 동의 집터, 구덩이와 구상유구, 무덤, 밭 등이 있다. 집터 가운데 1기는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10×6.4m의 장방형이며 내부에 수혈노지가 있다. 다른 집터는 모두 휴암리형 또는 송국리형이다. 집터의 크기는 길이 4m 내외 폭 3m 내외이며, 깊이는 20~80㎝이다. 구덩유구는 야외노지나 저장의 기능인 것으로 추정된다. 밭은 2개 층에서 조사되었는데, 하층은 청동기시대이며 상층은 삼국시대의 것이다. 상·하는 서로 직교되는 방향으로 조상되어 있으며, 조사된 면적은 상층의 경우 73×35m, 하층 39×30m이다. 무덤은 돌덧널형(石槨型), 돌널형(石棺型), 토광형(土壙型) 등 다양하며, 내부에서 인골도 검출되었다.

옥방 5지구는 4지구의 북쪽에 위치하며, 어은 1지구와 경계가 되는 곳으로 선문대학교에서 조사하였다. 이곳에서는 500여 기의 집터와 밭, 구덩이,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집터는 말각방형의 휴암리형이 대부분이며, 그 가운데에는 3기의 장방형 집터와 3기의 세장방형(細長方形) 집터가 포함되어 있다. 장방형 집터는 새김돌대문토기가 출토되는 집터로 길이 11~13m, 폭 7m 내외이다. 내부에는 2열의 기둥구멍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기둥구멍 없이 주춧돌만 놓은 것도 있다. 판돌로 조립한 노지를 갖춘 점도 특징이다. 밭은 다른 지구에 비해 소규모이다.

옥방 6지구는 4지구의 남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근대에서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밭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조선시대-삼국시대-청동기시대의 밭유구층이 순서대로 중첩되어 있었다. 삼국시대의 밭은 강의 흐름과 나란히 조성되어 있으며, 조와 수수로 추정되는 곡물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밭은 지표 아래 2m 깊이에서 확인되었다. 이 유구는 삼국시대의 밭과 직교되는 방향으로 조성되었고, 어느 정도 구획되어 있다. 곳곳에서 발자국 흔적이 확인되며 보리, 수수, 팥, 녹두, 조, 피 등의 탄화곡물이 검출되었다.

옥방 7지구는 1지구의 남쪽에 위치하는 곳으로, 경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2중의 환호를 비롯하여 20여 기의 집터, 구덩이, 구상유구,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환호는 일부만 확인되었는데 옥방 1지구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집터는 말각방형 또는 원형이 주류를 이루는데, 층위상으로 보아 장방형-방형-원형으로의 변화가 상정된다. 구덩이는 90여 기가 조사되었는데, 내부에서 각종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폐기장, 가마, 석기제작지 등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구상유구는 남북 또는 동서방향으로 정연하게 설치되었으며, 길이가 25m에 달하는 것도 있다. 무덤은 5기 모두 돌널무덤이며, 내부에서 유아 또는 목이 없는 여성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옥방 8지구는 2지구의 북쪽에 위치하는 곳으로 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하였다. 주거지와 구덩유구, 집석, 야외노지, 밭, 분묘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장방형-말각방형의 순서로 중복되어 있으며, 말각방형이 주류이다. 무덤의 배치에서 고인돌과 돌널무덤은 2~3열의 규칙성이 엿보인다.

옥방 9지구는 2지구와 3지구 사이에 위치하며, 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 조사하였다. 이곳에서는 10여 기의 집터와 구덩이, 4개 층에 걸친 밭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구덩이는 30여 기가 확인되었는데, 야외노지 외에 토기가마라 판단되는 유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밭은 삼국시대 이후-삼국시대-청동기시대의 순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이랑의 형태나 방향 등에 있어서 각기 차이가 있다.

[출토유물]

신석기시대 유물은 어은 지구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전면시문의 빗살문토기를 비롯해서 붉은간토기, 겹아가리토기[二重口緣土器] 등 중기에서 후기로 편년되는 각종 토기와 그물추, 돌창, 돌화살촉, 돌도끼, 돌낫 등의 석기가 동반되어 나타나고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예상 가능케 하고 있다. 그 가운데 빗살무늬 토기는 서북구주 지방 죠몽[繩文]토기와의 관련성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유물은 전기~중기로 편년되는 새김돌대문, 구멍무늬, 가지문, 단도마연의 옹, 호, 발형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간석기는 조개날도끼, 기둥모양도끼, 홈자귀[유구석부(有溝石斧)], 반달돌칼, 삼각형돌칼, 간돌검, 간돌화살촉, 숫돌, 멧돌 등 다양하며, 굽은 옥[곡옥(曲玉)], 둥근 옥[환옥(環玉)], 대롱 옥[관옥(管玉)]과 조개껍질 그릇[패기(貝器)]을 제작한 흔적과 벼, 수수, 조, 보리, 콩 등의 탄화곡물도 확인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시기의 유물 또한 인접한 일본 구주지방의 미생시대 초기단계에 나타나는 문화내용과도 일치하는데, 장차 야요이(彌生)문화 형성과정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황]

대평리 유적은 남강댐 공사로 인해 현재 대부분 수몰되었으며, 발굴된 선사유물을 전시할 남강선사유적전시관이 현재 건립 중에 있다.

[의의와 평가]

진주시의 북동쪽에 위치한 대평리 유적지는 발굴조사 결과, 과거 선사시대에는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번창했던 곳이었다. 대평리 유적의 실제발굴은 전체 유적지의 극히 일부에서만 진행되었으나, 당초 예상과는 달이 대규모의 밭과 주거지, 환호, 야외노지, 토기 가마, 구덩이, 무덤 등 많은 구조물이 조사되었으며, 주거지역과 경작지, 매장지역으로 뚜렷이 구분된 공간 속에 유기적으로 이들 구조물은 배치되어 있었다.

이로써 청동기시대 대평리 사람들이 살았던 여러 가지 모습을 복원해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남강유역에 있어서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그 규모와 성과면에서 학계는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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