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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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씨(鄭氏) : 승지(承旨) 조지서(趙之瑞)의 아내니 포은(圃隱) 선생 정몽주(鄭夢周)의 증손이다. 연산군(燕山君) 을축년에 조지서가 해를 만나 죽고 재물과 집이 모두 몰수되고 못을 파게 되었다. 정씨는 그 곁에 여막을 짓고 남편의 입던 옷을 걸어놓고 제사를 올리면서 3년을 마쳤다. 중종(中宗) 2년에 정려(旌閭)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안씨(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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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경휘(河鏡輝) : 자는 공곽(公廓)이요, 호는 매헌(梅軒)이며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기축년(선조 22년, 1589)에 사마시에 올랐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어기지 않았다. 임진란 때 환성공(喚醒公)이 상주성(尙州城)으로 달려가는데 겨우 북문에 이르러 적병이 갑자기 닥쳤다. “여기가 나의 죽을 곳이다. 너는 빨리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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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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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최운개(崔云凱)의 딸이요, 승사랑(承仕郞) 진양(晉陽)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임진년에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항상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써 죽음을 결단할 것”이라고 했다. 해를 넘겨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과연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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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에 있는 김해김씨의 효행과 열행(烈行)을 기리는 비. 김해김씨의 손자 김위중(金渭中)이 할머니의 효행과 열행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마을 동쪽 입구 지방도변에 남향하여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에 높이 145㎝, 폭 50㎝, 두께 18㎝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문은 풍화로 인하여 몇 글자는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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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형지(詗之). 아버지는 승지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강자평(姜子平)이다.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그 해에 정언으로 등용되고 이듬해 지평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장령이 되고 그 뒤 승진을 계속하여 1504년에는 대사간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일어난 갑자사화 때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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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의 친일파. 1887년 8월 5일 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 독산리에서 태어나 대부호인 정부인 김씨의 손자로 입양,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380만원에 달하는 자산을 소유한 대지주로서 서울 이부자[李鳳來], 경주 최부자[崔浚]와 더불어 진주 김부자[김기태]로 일컬어지는 남한의 3대 갑부 중 한사람이었다. 진양군 문산면 삼곡리에서 사업을 하다가 지병 악화로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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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효자리에 있는 광산김씨의 효행을 기리는 비. 광산김씨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박종래(朴宗來)가 주도하여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효자리로 들어가는 효자교 부근 진주~합천간 지방도 옆에 남향으로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에 높이 153㎝, 폭 55㎝, 두께 37㎝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의 제목은 “효부광산김씨지려(孝婦光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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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변립(卞岦)의 아내이다. 임진왜란 때 남편 변립이 그의 아버지 변연수(卞延壽)가 일으킨 의병을 따라 이순신 장군의 진으로 가서 군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당포싸움에서 부자가 모두 전사하자, 이를 안 김씨는 그 날로 자결하여 남편을 따랐다. 고종 때 이 일이 알려져 정려를 세우게 하고, 숙부인을 추증하였다. 아버지는 나라에 죽고, 아들은 아버지에 죽고, 아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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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의 효부 및 열녀. 달성서씨(達成徐氏) 서상재(徐相載)의 아내이며, 김해김씨 후손인 김응현(金應炫)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곧고 따뜻하며 부모에게 매우 효성스러웠다. 서상재에게 출가해서는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남편을 대할 때는 예를 어김이 없었다. 또한 자녀들을 기를 때에는 자녀들이 반듯한 길로 나아가는 데 모범이 되었다. 1909년 남편 서상재(徐相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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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가 높은 여자. 열녀는 일반적으로 위난을 당하여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하거나 남편을 위해 헌신한 여인을 일컬으며, 열부(烈婦)나 절부(節婦)를 통칭한다. 열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과부가 되면 마땅히 수절을 하여야 하고, 위난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키는 것이 부녀자의 도리로서 정착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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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김해김씨 부인을 기리는 효열비. 김해김씨의 아들 홍영대가 어머니의 열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1862년에 세웠다. 옛 비석이 풍화되어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자 1996년에 김해김씨의 후손인 홍학석이 그 옆에 새로운 비를 만들어 현재 나란히 서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 천곡마을 앞산 기슭에 동북향하여 서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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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신씨는 16세의 나이에 시집을 갔는데, 다음해에 남편 이충엽이 요절하자, 염습의 준비와 장례 음식을 몸소 다하였다. 어느 날, 부실(副室) 김씨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고 자식도 없는데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라 하고 눈물을 흘리니 듣는 사람 역시 또한 슬퍼했다. 부실 김씨는 이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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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장한우(張翰佑)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나이 18세 되던 해에 결혼하였는데 시댁에 가기도 전에 남편이 요절하였다. 김씨는 머리를 풀고 달려가서 애통해 하더니 성복하는 날에 칼을 물고 엎드려 남편의 뒤를 따르니, 고을 인사들이 비를 세워 김해김씨의 열행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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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와 성씨들이 대성을 이루어 모여 사는 마을. 진주는 신라시대 구주의 하나로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항상 영남의 계수관으로 그 위치를 지켜왔으며 토성세력도 강성하였다. 진주의 성씨는 정(鄭), 하(河), 강(姜), 류(柳), 소(蘇), 임(任), 강(康), 김(金), 박(朴)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진주목(晉州牧) 조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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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운천리에 있는 순흥안씨의 효행과 열행을 기린 효열비(孝烈碑). 효열부 순흥안씨를 기리는 비로 1898년(무술년)에 지방의 유림과 최찬호·최종락 등 집안사람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운천리 운천부락 포실 소류지 길 옆 언덕에 남향으로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27㎝, 폭 50㎝,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