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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속지 제3권/효행(孝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10029

하경휘(河鏡輝) : 자는 공곽(公廓)이요, 호는 매헌(梅軒)이며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기축년(선조 22년, 1589)에 사마시에 올랐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어기지 않았다. 임진란 때 환성공(喚醒公)이 상주성(尙州城)으로 달려가는데 겨우 북문에 이르러 적병이 갑자기 닥쳤다. “여기가 나의 죽을 곳이다. 너는 빨리 나가서 가족들을 보호하라.”고 하니 하경휘가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죽음을 가리려고 하는데 자식이 홀로 살아서 어데로 돌아가겠습니까?”라 하고 호곡(號哭)하면서 몸으로써 가로막았다. 적의 칼날에 좌우의 손이 일시에 함께 떨어지고 부자(父子)가 동시에 목숨을 잃으니연표보기연표보기 적이 이르기를 효자라 하고 성문 곁에 묻고 나무를 세워 표시하여 이르기를 ‘효자의 시체’라 했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임금이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그 묘비명에 이르기를 “아버지는 충(忠)에 죽고 아들은 효(孝)에서 죽었으니 오직 충이요, 오직 효일지니 이것은 영원토록 세상의 교훈이로다.”라고 했다.

강함(姜涵) : 자는 중용(仲容)이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경전과 사서에 널리 통했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나이 9세에 아버지가 싸움에서 죽으니 울면서 뛰다가 갑자기 기절했다. 상례를 집행함에는 어른처럼 했다. 겨우 12세에 어머니가 병들어서 고기를 낚아서 밤에 돌아오는데 호랑이가 길을 피하는 일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약을 달이며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했다. 어머니가 절명하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세 번을 불러 너의 정성스런 효도를 표할 것”이라 하더니 죽음에 이르러 과연 그러했다. 어머니가 꿩고기를 좋아했으므로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반드시 올리더니 어느 날에는 구하지 못했다. 걱정하면서 우니 홀연히 날던 꿩이 여막(廬幕)에 들어오므로 잡아서 바쳤다. 계묘년(경종 3년, 1723)에 임금이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하세희(河世熙) : 자는 호여(皥如)니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도하고 우애했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해 슬퍼함이 지극했으나 행동하는 것은 예법에 맞았다. 목사(牧使)가 ‘맹종의 죽순[孟宗筍]’으로 제목을 삼아 선비에게 시험을 보이니 공이 한 구절로 이르기를 “사람으로 재차 맹종(孟宗)이 없는데 누가 다시 겨울철 죽순은 울겠는가?”라고 했다. 목사가 임석하여 살펴보고 효자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일어나서 절했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를 따라 배우더니 뜻을 새겨 학업에 힘썼다. 더욱 예학(禮學)에 정통하여 유림의 두터운 성망이 있었다. 시냇가에 집을 짓고 편액을 석계정사(石溪精舍)라 하고 그 가운데서 독서했다. 어머니가 오래도록 병중이라 옷 끈을 풀지 않았다. 마시고 씹으면서도 어머니를 보살폈고 얼음을 깨어 목욕하며 하늘에 빌었다. 상을 당해서는 삼가 일을 마쳤으되 곡을 하며 울다가 기절하기에 이르렀다. 장사를 지내고서는 묘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모셨으며 산이 깊어 무서운 호랑이가 많았으나 새벽과 밤에 슬퍼하며 살피는 것을 호랑이도 이를 지켰다. 상기를 마치고서도 화려한 옷이나 부드러운 음식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제사 때마다 애통해 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이 돌아가신 뒤에 암행어사 이이만(李以晩)이 그의 행적을 나라에 올리니 경진년(영조 36년, 1760)에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정려가 옛날에는 대각서원(大覺書院)지도보기 앞에 있더니 후손되는 감역(監役) 하재곤(河載崑)이 사곡촌(士谷村) 앞으로 이건했다.

강민효(姜敏孝) :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었으며 8세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70세에 추상(追喪)하고 죽을 마셨다. 그리고 선조(宣祖) 및 대비(大妃)의 국상에는 모두 3년 동안 복(服)을 입었다. 효종조(孝宗朝)에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한명석(韓命錫) : 자는 천뢰(天賚)요, 호는 유계(柳溪)니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증손이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더니 무신역변(戊申逆變) 때에 근심과 울분으로 시를 써서 이르기를 “늙은 신하가 임금을 놀래게 했으니 적개(敵愾)한 마음에 한 몸 바치기를 원합니다.”라 하니 충효로써 정려(旌閭)되었다.

정도동(鄭道東) : 자는 행지(行之)요, 호는 모렴(慕濂)이니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타고난 품성이 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의 상중에 있을 때에 묘 곁에 여막을 짓고 3년을 마치도록 죽과 밥을 들지 않고 다만 보릿가루만을 물에 타서 마셨다. 새벽과 저녁으로 묘에서 곡(哭)한 뒤에 반드시 내를 건너 몇 리나 되는 곳에 사는 아버지를 찾아 살폈다. 비록 추운 겨울에 심한 추위일지라도 거르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해 다리를 만들고 이름을 ‘효자교(孝子橋)’라 했다. 또 검은 새가 그 여막에 들어와서 집을 짓고 살면서 새끼를 낳으니 모두 하얗게 되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임금이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승지(承旨) 신성진(愼性眞)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 한백기(韓伯琦) : 자는 자일(子一)이요, 호는 안락와(安樂窩)니 한명석(韓命錫)의 아들이다.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다.

강내운(姜來運) : 자는 위거(渭擧)요, 호는 지우당(至愚堂)이니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후손이다. 나이 겨우 다섯 살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됨에 땅을 치고 울부짖으나 슬퍼하고 사모하는 것이 이미 어른과도 같았다.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니 집이 본래부터 가난했어도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으로써 이바지했다. 어머니의 병을 낳게 하기 위해 손가락을 쪼개어 두 번이나 소생케 하니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복했다. 상을 당해서는 여묘(廬墓)살이를 3년 동안 계속했다. 임진년(고종 29년, 1892)에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입었다. 헌납(獻納) 김인섭(金麟燮)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하진태(河鎭兌) : 자는 찬언(贊彦)이요, 호는 행정(杏亭)이니 생원 하락(河洛)의 현손이다. 여섯 살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슬퍼하며 통곡하기를 어른과 같이 했다. 아홉 살에 어머니의 명령으로 조희맹(趙希孟)에게 나가 공부했다. 19세에 스승 앞에서 울면서 고하고 돌아가서는 늙은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여 50년 동안을 하루같이 했다. 어머니의 병중에는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으며 등불을 켜고 하늘에 비니 등유(燈油)가 비에 빠져도 타는 불이 꺼지지 않아 어머니의 병이 회복되었다. 사림들이 국가에 포창을 청했다. 상을 당해서는 슬픔으로 몸을 훼손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또 남은 힘으로 학문에 오로지 몰두하여 『서명집성(西銘集成)』을 저술했고, 유집(遺集)이 있다. 고종(高宗) 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되었다. 입재(立齋) 문헌공(文獻公) 송근수(宋近洙)가 여기(閭記)를 지었다.

정육(鄭堉) : 자는 후지(厚之)요, 호는 역효(亦囂)니 승지(承旨) 정대륭(鄭大隆)의 후손이다. 이학(理學)에 깊이 몰두하여 세상에서 명유(名儒)라 일컬었으며 효도로써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증직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정현의(鄭鉉毅) : 자는 옥여(玉汝)요, 호는 만성재(晩省齋)니 승지(承旨) 정대륭(鄭大隆)의 후손이다. 정성스러운 효성이 탁월했으므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정달현(鄭達賢) : 자는 공약(功若)이요, 호는 관란(觀瀾)이며 승지(承旨) 정대륭(鄭大隆)의 후손이니 효행으로써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하이범(河以範) : 송강(松岡) 하항(河恒)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겨우 7~8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모시더니 병중에는 손가락의 피를 입에 넣었고 상(喪)을 당하니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르기를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이 했다. 어머니를 모실 때는 약과 음식을 반드시 몸소 살폈다. 이러한 외에 ‘눈 속에 비둘기와 얼음 속의 잉어’ 같은 감탄할 만한 일이 있었다. 그 형을 섬기기를 엄한 아버지와 같이 하되 우애와 공경함이 돈독했다. 수직(壽職)으로 받은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 국휼(國恤)을 만나서는 사흘 동안 하얀 옷으로 행했다. 향리와 도(道)에서 그 소행을 알려 계사년(고종 30년, 1893)에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 최규환(崔奎煥) : 자는 종여(宗汝)요, 호는 미암(美巖)이다. 과거 보는 것을 일삼아 『시경(詩經)』과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했다. 여든 살이 되도록 거둬 치우지 않아 제일이 되었다. 학재(學齋)를 도산(道山)에서 일으키고 초하루마다 학문을 강(講)했다.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거상(居喪)에는 질병이 아니고는 상복의 띠를 버리지 않았다. 장례에는 오래도록 비가 오다가 흰 무지개가 집안에서 일어나서 무덤구덩이까지 뻗치고 유독 상여가 나가는 길에만 비가 오지 않았다. 반우(返虞)에도 무지개가 처음과 같았다가 집에 이르러서 또 큰 비가 왔다. 이리하여 장사에 모인 이들이 효성을 일컫는 칭찬이 자자했다. 고종(高宗) 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추증하고 정려(旌閭)했다.

○ 박형순(朴亨淳) : 자는 문숙(文叔)이니 호군(護軍) 박지봉(朴旨鳳)의 아들이다. 그의 아내 정씨(鄭氏)와 더불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양해 많은 위곡(委曲)이 있었다. 뜻에 순응하기 위해 나이 60세에 이르기까지 항상 어린아이의 장난을 만들어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고종(高宗) 때에 좌장례(左掌禮)를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하재원(河載源) : 자는 덕언(德彦)이요, 호는 도곡(道谷)이며 쌍부헌(雙負軒) 하진룡(河震龍)의 후예다. 신유년(철종 12년, 1861)에 진사에 합격했다. 기상과 품성이 진실되고 순수했고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했다. 집이 가난했어도 봉양에는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다해 항상 어버이를 기쁘게 하기를 일삼았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정용균(鄭龍均) : 자는 윤원(允元)이요, 호는 모재(慕齋)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성품이 침착하고 장중하더니 겨우 배우기 시작하자 스스로 힘써 외우고 익히는데 거의 먹고 자는 것을 잊었고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학질을 앓아 해를 넘기니 똥을 맛보고 새벽마다 빌었는데 홀연히 새매가 있어 메추리를 떨어뜨리기에 취하여 이바지하기를 세 번이나 하여 드디어 낫게 되었다. 나이 34세에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그 아우 정낙균(鄭樂均)이 형의 죽음을 아프게 여기다가 병을 얻어 거의 불구의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날 꿈에 형이 불러 이르기를 “부모를 끝까지 봉양할 책임이 너에게 있거늘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아끼지 않느냐?” 하고 한 봉의 약을 내어주니 마시고 깨어나니 병이 나아 드디어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임진년(고종 29년, 1892)에 일이 알려져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헌납(獻納) 김인섭(金麟燮)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 양정악(梁挺岳) : 호는 덕암(德巖)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반걸음도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언제나 출입함에 방위를 바꾸지 않고 기약을 어기지 않았으며 좌우에서 봉양함에 뜻과 몸을 함께 지극히 했다. 일찍이 과시(科試)로 달려가 거의 시소(試所)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말을 돌리고 시를 읊어 이르기를 “칠십의 어버이께서 언제나 눈앞에 계시는데, 백천(百千)의 만 가지 일이 모두 다 뜻이 없네[七十雙親常在眼 百千萬事摠無情]”라고 했다. 급히 집에 이르니 어머니가 과연 병을 얻어 사흘 뒤에 돌아갔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강사석(姜師碩) : 자는 상능(尙能)이요, 호는 지지당(遲遲堂)이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겨울이라 매우 추운데도 베짜기를 걷지 않으니 “이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장차 너의 옷을 만들려고 한다.”고 하니 이르기를 “자식이 되어 어머니를 수고롭게 함이 이와 같아서야 되겠습니까?”라 하고 드디어 울면서 날을 끊었다. 어머니는 이로 말미암아 다시는 친히 짜지 못했다. 기사년(고종 6년, 1869)에 도신(道臣)의 계달로 인해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을해년(고종 12년, 1875)에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정한기(鄭漢基) : 자는 군성(君聖)이요, 아우 정석기(鄭碩基)의 자는 국첨(國瞻)이며 호는 가헌(稼軒)인데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일찍부터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풍현(風眩)을 앓아 십 년을 요 위에서 뒤척이면서 남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공의 형제가 지성으로 약을 달이며 매서운 추위와 혹심한 더위에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소변 도구와 약을 담는 숟가락의 봉양과 대변의 빨래를 아내나 가족에게 맡기지 않았다. 몸을 편하게 해드릴 방도와 입에 맞는 맛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지극한 정성 덕분에 어머니의 병이 점점 좋아져 아흔 살의 천수(天壽)를 누리게 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여 이르기를 ‘정씨의 두 효자’라 했다. 계사년(고종 30년, 1893)에 함께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그리고 참찬(參贊) 곽종석(郭鍾錫)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가헌실기(稼軒實記)』가 세상에 행한다.

박효근(朴孝根) :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예(禮)로써 몸을 가지고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정성스러운 효심의 감동으로 산신령이 약을 주어 어머니가 숨이 끊겼다가 환생되었다. 을유년(고종 22년, 1885)에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윤수현(尹守賢) : 본관이 파평(坡平)이다. 타고난 품성이 순수한 효자여서 어려서부터 능히 어버이 모시는 도리를 다했다. 아버지가 머리의 등창 때문에 여러 달 동안 누워서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나았다. 꿩과 올빼미와 고기를 모두 원하는 대로 받들어 올렸다. 천수를 다해 세상을 마치니 집상(執喪)에 지나치게 슬퍼했으며 비바람에도 성묘를 폐하지 않았다. 고종(高宗) 때에 일이 알려져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했다.

박영회(朴瑛會) : 박효근(朴孝根)의 둘째 아들이다. 어버이를 위해 약을 구하다가 눈 속에서 백화사(白花蛇)를 얻어 올렸더니 어버이의 병이 나을 수 있었다. 을유년(고종 22년, 1885)에 정려(旌閭)되었다.

황용갑(黃龍甲) : 자는 운선(雲善)이요, 통정(通政) 황계량(黃桂亮)의 후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면서도 어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다했다. 아버지가 병들자 3년 동안 하늘에 빌고 산에 제사지냈다. 깜깜한 밤에 약을 지으러 가면 호랑이가 따라서 왕래했고 의원의 집에 사나운 개가 있었으나 이를 보고는 꼬리를 흔들었다. 병을 고치려고 허벅지를 베어 가만히 드렸다. 상(喪)을 당해서는 애통해 하는 것이 지나쳐 예(禮)를 넘겼다. 아내 신창표씨(新昌表氏)는 공이 돌아가자 빈소(殯所)를 거두어 마치고서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高宗) 때에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남려(南黎) 허유(許愈)가 여기(閭記)를 지었다.

강맹신(姜孟臣) : 그의 어버이가 종기를 앓았는데 의원이 두꺼비 고약이 가장 좋다고 말했으나 때마침 겨울이라 힘써 구해 드렸다. 병이 곧 낫고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김창석(金昌錫) :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여 나면서부터 특이한 바탕을 가졌다. 아버지가 병들어 다섯 달 동안 백 가지 약이 효험이 없었는데 다만 원하는 것은 사슴의 피였다. 단(壇)을 모으고 하늘에 빌었더니 산속의 사슴이 저절로 왔다. 피를 취해 올렸더니 병이 즉시 완쾌되었다. 신묘년(고종 28년, 1891)에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김성률(金聲律) : 자는 진오(振五)요,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했다. 집안이 매우 가난했으나 몸소 농사를 지어 맛있는 음식으로 이바지했다. 그 어머니가 여러 해에 걸쳐 몸져누웠으나 백 가지 약이 효험이 없었는데 홀연히 기가 끊김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넣어서 다시 소생시켰다. 잘 봉양하며 편히 지나게 된 것이 8년이었다. 조정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김준원(金俊元) :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공경을 다했다. 살아서 봉양과 죽어서 장송(葬送)에 반드시 그 정성을 다했다. 초상 중 어느 깊은 밤, 상청(喪廳)에서 불이 났는데 형세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김준원은 불꽃을 무릅쓰고 영구(靈柩)를 안고 하늘에 부르짖으며 통곡하니 하늘에서 폭우를 내려서 불을 껐다. 장례를 지내고서는 여묘(廬墓)에서 3년을 모시니 사나운 호랑이가 와서 지켰다. 무인년(고종 15년, 1878)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 김수구(金壽垢) : 김준원(金俊元)의 손자다. 나이 겨우 16세에 아버지의 병석을 모시면서 집 뒤에 단(壇)을 쌓고 울부짖으며 하늘에 빌었다. 달을 넘기도록 게을리하지 않더니 어느 날 홀연히 감응이 있어 무지개와 같은 것이 단으로부터 나타나서 아버지가 누워 있는 병상에 뻗쳤다. 이로 인해 곧 병이 나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옥명휘(玉明輝) : 본관이 의춘(宜春)이니 어려서부터 능히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알았다. 아침저녁의 문안과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니 한 가지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부모의 병에 약을 의춘(宜春)의 옛 마을에서 구하더니 밤에 갑자기 비바람 속에 호랑이가 와서 감응하는 특이한 변이 있었다. 일찍이 괴이한 중을 만나 영험한 약초를 얻어 달여 먹고서 문득 좋아지기도 했다. 아내 함안조씨(咸安趙氏)도 효성으로 시부모를 모셨기 때문에 함께 정려(旌閭)를 입었다. 하겸진(河謙鎭)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김석공(金錫恭) : 본관이 김해(金海)으로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그 아버지가 귀먹고 벙어리가 되는 병을 앓았다. 김석공은 그 아내와 더불어 각각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사지내고 산에 빌어 자신이 대신하기를 구했다. 몸에 편하고 입에 맞는 음식을 언제나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산 꿩이 주방으로 들어오고 겨울철에 채소가 판에 오르는 감응이 있어 여러 해 동안 쌓였던 고질의 귀먹고 벙어리가 된 병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고종(高宗) 대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김언상(金彦祥) : 본관이 김해(金海)이니 효행이 탁월하고 특이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황섭(黃攝) : 본관이 창원(昌原)이니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병들자 겨울철인데 얼음을 깨서 고기를 얻었고 약을 먼 곳에서 구하다가 마침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큰 호랑이가 호위하고 왔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진덕승(陳德升) : 자는 군성(君聖)이요, 본관이 여양(驪陽)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서 입에 넣으니 이미 끊어졌던 명이 살아났다. 상을 당해 여묘(廬墓)살이를 했는데 들에 불이 나서 온 골짜기가 다 타고 장차 묘소와 여막(廬幕)에까지 미치려 하더니 바람이 둘러져서 불이 저절로 꺼졌다. 고종(高宗) 때에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김종길(金鍾吉) :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나이 17세에 어머니 상을 당했더니 거상(居喪)에 범절을 한결같이 노성(老成)한 이들과 같이 했다. 아버지가 병들자 똥을 맛보아 차도를 징험하더니 의원이 말하기를 “백장사(白章蛇)의 기름이 효험이 있으리라.” 했다. 때마침 깊은 겨울이었기에 하늘에 빌고 울부짖으니 홀연히 큰 뱀이 얼음 비탈에서 나왔다. 이를 취해 기름을 만들어 드리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 일이 을유년(고종 22년, 1885)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 한학동(韓學東) :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후손이다. 어버이가 병들자 3년 동안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의원이 이르기를 “사슴고기면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산에 올라가서 하늘에 빌었더니 산 사슴이 저절로 와서 오래된 병이 나았다. 기축년(고종 26년, 1889)에 일이 알려져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했다. 판서(判書) 홍우길(洪祐吉)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 김윤재(金潤載) : 본관이 김해(金海)이니 천성이 온순하고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아버지가 이질(痢疾)을 앓자 똥을 맛보아 증상을 징험하고 단(壇)을 모아 북두칠성을 향해 절을 했다. 우연히 신통한 중을 만나 산삼 두 뿌리를 얻어먹고 병이 나았다. 고종(高宗) 대에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 김용석(金鎔錫) : 본관이 김해(金海)이니 효행이 탁월하고 특이했으므로 고종(高宗) 대에 임금이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 안광의(安光義) : 본관이 순흥(順興)이니 회헌(晦軒) 안유(安裕)의 후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몸과 마음의 봉양을 극진히 했다. 병이 들었을 때에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넣어 수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고을의 사람들이 그의 효행을 들었으므로 을사년(광무 9년, 1905)에 정려(旌閭)를 입었다.

강의회(姜義會) : 자는 찬지(贊智)니 통정(通政) 강회백(姜淮伯)의 후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몸과 마음으로써 봉양했다. 병이 들었을 때는 하늘에 빌고 똥을 맛보며 허벅지를 베어 약에 탔다. 고종(高宗) 대에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이상은 정려(旌閭)를 입은 것이다.

○ 정염(鄭濂) : 자는 거원(巨源)이니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둘째 아들이다.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아 학문이 일찍 이루어졌다. 나이 28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자 예(禮)를 넘어 슬퍼하여 몸을 상하는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감찰(監察)을 추증했다.

이형(李蘅) : 자는 이문(以聞)이니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손이요, 호는 제헌(霽軒)이다. 어버이가 병들자 똥을 맛보아 그 달고 쓴 것을 징험하고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청했다. 상을 당해서는 여묘(廬墓)에서 상제(喪制)를 마쳤다. 탁월한 효행으로 임술년(영조 18년, 1742)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했다.

하응회(河應會) : 자는 응백(應伯)이요, 호는 어은(漁隱)이니 초은(樵隱) 하맹산(河孟山)의 현손이다. 재주와 기상이 매우 뛰어나고 뜻은 맑고 고상한 것을 숭상했으며 힘을 『소학(小學)』의 「내칙(內則)」에 두었는데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바르게 했으며 아침저녁으로 문안했다. 홀로 있는 것을 삼가해 속이지 않는 것으로써 평생의 공부로 삼았다. 상을 만나서는 여묘(廬墓)살이로 3년을 지내는데 한 쌍의 까마귀가 묘 곁에 와서 살면서 서로 지켜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효자까마귀라 일컬었다. 경진년(인조 18년, 1640)에 참봉(參奉)을 제수하고 뒤에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증직했다.

○ 조천필(曺天弼) : 자는 열경(悅卿)이요, 호는 임계(林溪)며 아우 조양필(曺良弼)의 자는 태경(泰卿)이니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후손이다. 효성이 순박하고 지극하더니 아버지의 상을 만나 여묘(廬墓)에서 3년 동안 죽을 마셨다. 어머니의 병이 심하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소생할 수 있었으며 돌아가시는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부친의 상과 같이했다. 기유년(정조 13년, 1789)에 일이 알려져서 함께 지평(持平)을 추증했다.

○ 이규욱(李奎旭) : 자는 여일(汝一)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의 뜻을 승순(承順)했다. 무른 음식의 이바지와 차고 더운 것의 범절에 알맞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많은 나이로 수직(壽職)을 받게 되자 사람들이 정성스러운 효성에 감동된 것이라고 말했다. 상을 당해서는 예절이 갖추어지고 슬픔이 지극하니 향리에서 감탄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추증했다.

○ 조용현(曺龍現) : 자는 이옥(利玉)이니 현감(縣監) 조용완(曺龍玩)의 아우다. 성품이 효우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받들어 어김이 없었다. 병중에 모시고 약을 다스림에 약과 똥을 맛보았다. 상을 당해 슬퍼하는데 거의 지탱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이르기를 “왕상의 잉어와 맹종의 죽순이 증자(曾子)의 양지(養志)만 같지 못하다.[王鯉孟筍 不如曾子之養志]”라고 하더니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마치니 향당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정사년(철종 8년, 1857)에 지평(持平)을 추증했다.

조성택(趙性宅) : 자는 인수(仁叟)요, 호는 횡구(橫溝)다. 나이 50세를 넘겨서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자 묘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있는데 밤에 크나큰 호랑이가 와서 항상 여막(廬幕)을 지켜주었다. 뒤에 어머니의 상(喪)을 만나서도 여막에서 살기를 전과 같이 했다. 이때에 나이 60세였고 그가 건너는 시내를 사람들이 ‘효자도(孝子渡)’라 일컫고 걷던 산길을 ‘효자도(孝子道)’라 일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교관(敎官)을 추증했다. 유집(遺集)이 있다.

이광점(李光漸) : 자는 진여(進汝)요, 호는 구와(懼窩)니 신암(新菴) 효익공(孝翼公) 이준민(李俊民)의 후손이다. 진사에 올라 문장에 능했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받드는 데에 어김이 없었다. 여섯 살에 처음 배우기 시작하더니 ‘사람은 다시 소년이 되지 못한다[不得更少年]’이란 구절을 읽고서는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울었다. 아홉 살에 마마를 피해 산간 마을로 가던 중 아버지 첨추공(僉樞公)이 경계하여 이르기를 “앞에 다리가 있으니 말에서 내리는 것이 옳다.”라고 했다. 이미 지나고서 여러 종에게 물으니 “이미 지나쳤습니다.”라 하니 공이 이르기를 “어버이의 명령은 어길 수가 없다.” 하고 즉시 말을 돌려 다리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말에서 내려서 갔다. 뒤에 서울에 놀더니 꿈에 어머니가 병이 난 것을 보고 즉시 바쁘게 길을 돌려서 밤에 본주의 경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마을의 의생인 허언(許鄢)을 찾고자 응석사(凝石寺) 앞에 이르렀더니 두 마리의 호랑이가 길을 막으므로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해 급히 절문을 두드리니 허공이 마침 여기에 있어서 탕약(湯藥)을 얻어 돌아갔다. 그런데 어머니의 병이 과연 꿈에서 본 것과 같았으므로 즉시 그 약을 시험했더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일이 알려져 집의 부역을 면제받았다.

정억령(鄭億齡) : 자는 수백(壽伯)이니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증손이다. 문장과 필법이 정묘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더니 어버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무과로 바꾸었다. 어머니의 병이 4년을 계속하자 똥을 맛보아 그 차도를 징험했고 눈 속에서 고기를 얻고 영산(靈山)에서 산삼을 얻으니 신명(神明)의 감응이 있은 것이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을 마셨고 슬픔을 하루와 같이 하니 향리에서 그 효행을 감탄하고 연장(聯狀)으로 방백(方伯)에게 청해 부역을 면제받는 혜택을 입었다.

하준현(河駿顯) : 자는 성모(聖謨)니 쌍부헌(雙負軒) 하진룡(河震龍)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일찍부터 의지할 바를 잃고 큰아버지의 집에서 살았다. 이러다가 아버지가 김화현(金化縣)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낮에는 나무하고 밤에는 글을 읽으면서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자 친히 빨아 드리며 목욕하고 하늘에 빌었다. 철이 아닌 음식물을 정성을 다해 공양하니 사림(士林)들이 관부(官府)에 올려 부역을 면제받게 했다.

하의용(河毅鎔) :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이다. 집이 가난했으나 어버이를 봉양함에는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갖추었다.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드려서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또 눈이 멀자 겨울에 개구리를 구워 드리니 보는 것이 다시 밝아졌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그 부역을 면제받게 했다.

이상은 벼슬을 추증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시킨 것이다.

허근(許根) : 자는 군무(君茂)요, 본관이 분성(盆城)이다. 나이 16세에 어머니의 병을 받들다가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대어 넣음으로서 3년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고 언제나 손을 소매 속에 감추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거상(居喪)에 이르러서는 슬퍼함이 거의 목숨이 위태할 지경이 되었다. 아버지가 많은 방법으로 깨우치고 최경언(崔景彦)에게 배우도록 하니 최공은 그의 효성을 칭찬했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여묘(廬墓)로 3년을 보냈다. 상을 마친 뒤에는 마침내 여의고 상하여 일어나지 못하니 나이 겨우 30여 세였다.

강득윤(姜得胤) : 자는 언술(彦述)이니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아들이다. 효우하고 자상하고 화목했다. 아울러 청렴하고 검박했으며 근면하고 후덕했다. 일찍이 『가훈삼편(家訓三篇)』을 저술했다. 부친상을 당해 슬퍼하는 것이 예를 넘었고 홀로 된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고 기쁘게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여 어머니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수연(壽宴)을 베푸니 여러 군(郡)에서 모두 모이고 태계(台溪) 하진(河溍)이 서문을 지어 이를 기록했다. 70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여묘(廬墓)에서 죽을 마셨다.

하원(河沅) : 자는 대중(大中)이요, 호는 송파(松坡)니 죽헌(竹軒) 하성(河惺)의 손자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봉양하더니 지극한 효성으로 맛있는 음식과 약물의 봉양이 알맞았다. 뒷간 치우는 것을 정성으로 몸소 행하고 남에게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거상(居喪)에 이르러서는 피눈물로 죽을 마시니 이때 공은 이미 머리가 허연 늙은이였다. 향리에서 그의 효성에 감동해 장차 사실을 들어 관부(官府)에 알리려고 하니 공이 들어서 알고 힘써 중지시켰다.

하홍(河泓) : 자는 중해(仲海)니 창주(凔洲) 하증(河憕)의 손자다. 성품이 강직하고 분명했으며 정직하고 효우에 돈독했다. 어머니의 병을 모시기를 20년이나 계속했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똥을 맛보고 손가락의 피를 드리우고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구하더니 마침내 소생할 수 있었다. 상을 당하자 상복을 벗지 않고 죽을 마시다가 슬퍼함이 지나쳐 결국은 일어나지 못했다.

하현(河灦) : 자는 여해(汝海)니 진사 하협(河悏)의 손자다. 4~5세 때에 능히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절하고 꿇어앉는 것이 어른과 같았으며 성품과 행실이 순박하고 효성스러웠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머니를 섬기더니 몸과 마음을 지극히 갖추었다. 병을 고치려고 똥을 맛보고 피를 쏟았으며 돌아가심에 이르러서는 여묘(廬墓)살이를 했다. 지금도 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하효자 시묘곡(河孝子侍墓谷)이라 이른다.

강식준(姜式儁) : 자는 미중(美仲)이요, 호는 소은(素隱)이니 매은(梅隱) 강흥운(姜興運)의 아들이다. 어버이의 병에 똥을 맛보고 손가락의 피를 드렸으며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했다. 일찍이 새로 난 쌀을 얻어서 올리고자 하는데 고기가 떨어진 것을 근심하더니 홀연히 까마귀가 8개의 계란을 물고 와서 곁에 두고 간 일이 있었다. 또 흰옷 입은 중이 꿩을 묘로 올라가는 길에 바쳤다. 또 얼었던 눈이 저절로 녹고 깎아지른 듯한 구렁에 옛날에는 물이 나는 샘이 없었는데 여묘(廬墓)에서 산 때로부터 샘물이 솟아오르다가 공이 돌아간 뒤로는 샘이 저절로 말랐다. 형제간에 우애했고 온화한 기운이 합한 듯 했으며 뜻을 돈독히 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유집(遺集)이 있어 간행되었다.

○ 성창석(成昌錫) : 자는 문약(文若)이요,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니 경학(經學)에 마음을 쏟아서 그 집안의 명성을 이었다. 성품이 본래부터 효우스러워 어버이 섬김에 있어 몸과 마음의 봉양에 그 정성을 다했다. 한 마디의 말이나 한 번의 발 디딤도 감히 부모를 잊지 않았다. 상을 당하니 집상(執喪)이 예(禮)를 넘어섰다.

하해수(河海壽) : 자는 성경(成卿)이요, 대간(大諫) 하결(河潔)의 후예니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학문과 행실이 순박하고 익숙했다. 부모를 섬김에 비둘기가 방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감응이 있었다. 어머니가 병들어서 생배를 생각했으나 얻지 못했더니 이 때문에 종신토록 배를 먹지 않았다.

하한주(河漢周) : 자는 이호(而浩)요,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처자(妻子)에게 기울지 않고 오직 부모요, 부모를 봉양하는 것만이 옳다고 여겼다. 부모가 다른 곳을 가려고 하자 젓가락을 쪼개면서 울고 청하여 이를 그치게 했고 형제가 함께 살면서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 거상(居喪)에 예(禮)를 넘치게 하니 고을과 이웃에서 ‘효우한 군자’라고 칭찬했다.

하윤천(河潤天) : 자는 구장(九章)이요, 호는 연정(蓮亭)이다. 타고난 자질과 품성이 청아하고 기상과 도량이 넓고 후덕했다. 어려서부터 이미 식견과 국량이 있었고 학문을 함에 있어서 실천을 귀한 것으로 삼았다. 어버이의 병을 모실 때 다섯 달 동안이나 백방으로 힘을 써도 효력이 없고 점점 위중하니 머리를 조아리고 북두칠성에게 몸을 대신할 것을 구했으며 글을 지어 산에 빌어 다섯 줄기의 영삼(靈參)을 얻어 올리고 효력을 본 뒤 천수를 마쳤다. 부모가 돌아가시고는 여막에서 3년을 보냈으며 집안의 식솔들을 제어하는 데는 엄하게 했고 자식과 조카들을 훈계하는 데는 의(義)로써 했다. 이에 『몽유습견(蒙幼習見)』 1부를 저술했다.

○ 이한정(李漢楨) : 자는 방용(邦用)이요, 호는 창암(蒼菴)이니 재주와 슬기가 남보다 뛰어났고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다. 나이 14~15세에 연이어 모친상과 부친상을 만나 날마다 호곡하고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상제(喪制)를 마칠 때까지 게을리하지 않으니 향리가 사모했다.

정상함(鄭相咸) : 자는 임경(林卿)이요, 호는 원재(源齋)니 진사 정문익(鄭文益)의 후손이다. 나면서부터 지극한 정성이 있었고 어버이를 섬김에 먼저 뜻을 받들어 몸에 편한 물건은 모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의 피로써 회생시켜 천수(天壽)을 마치니 향리가 모두 그 효성을 칭찬했다.

정보(鄭堡) : 자는 화백(華伯)이니 징질와(懲窒窩) 정유기(鄭有棋)의 증손이다. 타고난 바탕이 개결하고 정직했으며 앎과 실천이 고상하고 깨끗했다. 두 아우 정규(鄭珪)와 정목(鄭睦)과 더불어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된 봉양으로 모난 데가 없이 사우(師友)가 되었다. 거상(居喪)에는 여묘(廬墓)로 상제(喪制)를 마쳤다.

○ 이재형(李再馨) : 자는 방숙(芳叔)이요, 호는 응재(凝齋)다. 학문을 함에 한결같이 성리(性理)를 위주로 후진을 가르침에 명성과 여망이 유림(儒林)에서 두터웠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전후의 상(喪)에 묘 곁에서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 박능환(朴能煥) : 자는 내성(乃成)이요, 호는 성와(誠窩)이며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송월당(松月堂) 박호원(朴好元)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한 효성을 다했고 남은 힘으로 학문을 닦으니 모범이 되어 높은 취향에 드러났다.

이국정(李國禎) : 자는 치재(致載)요, 본관이 재령(載寧)이며, 호를 농아(聾啞)라 했고 집에 있을 때는 한결같이 어버이를 봉양하는 뜻으로써 일삼았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억울한 누명을 입어 옥중에 갇혔는데 공이 정성을 다해 서울로 분주했다. 혈서(血書)로써 원통함을 호소하여 마침내 이치대로 귀결되었다. 사우(士友)로 그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그 심지와 노력에 감복하고 정성된 효성에 감탄했다.

성치상(成致祥) : 자는 화백(和伯)이요, 호는 죽와(竹窩)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품성이 온아하고 정성스런 효심이 돈독하고 지극했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면서도 몸과 마음의 봉양은 두루 이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선조의 묘사(墓事)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입어 멀리 천 리 밖으로 유배되었다. 이에 공이 발을 싸매고 서울로 달려가서 혈서(血書)로 억울함을 울려 열손가락이 온전한 것이 없었다. 임금이 그 억울함을 비춰보고 그 효성에 마음이 감동하여 송사를 결단 짓고 귀양살이를 풀어주니 향당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효성을 칭찬했다.

하학호(河學浩) : 자는 대보(大甫)요, 호는 조산처사(螬山處士)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더니 모부인(母夫人)의 열행(烈行)을 정포(旌褒)하는 일 때문에 발을 싸매고 경향으로 달리면서 무릇 8년 동안 계속했다. 지극한 정성이 하늘에 닿아 마침내 정려를 입게 되었다. 상국(相國) 채제공(蔡濟恭)은 이르기를 “이 어머니에 이 아들이다.”라고 했고 판서(判書) 송재경(宋載經)은 이르기를 “지극한 효성이 족히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했으며 진신사우(縉紳士友)들은 한결같이 칭찬하고 하례하여 이르기를 “공의 성효가 마침내 하늘을 움직여 그는 이 어머니의 효자가 된 것이다.”라고 했다.

하응현(河膺賢) : 자는 사언(師彦)이니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아들이다. 글을 읽는 것을 「상례(喪禮)」에서 익혔고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명령을 이어받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밤이 깊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어버이가 자다 놀라 깰 것이 두려워 감히 부르지도 못하고 또 돌아와서 얼굴을 대하지 않는 것도 염려스러운데다가 자신의 방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도 마땅치 않아 결국 문밖에서 엎드려 새벽에 이르렀다. 이밖에 계모를 섬김에도 또한 지성의 행실이 많이 있었다.

○ 정동윤(鄭東贇) : 자는 치진(致震)이요, 호는 우만(愚巒)이니 은와(隱窩) 정지형(鄭志衡)의 아들이다. 타고난 바탕이 침착하고 장중했으며 덕망과 행실이 순박하고 도타웠다. 나이 겨우 열 살 때에 글을 짓는 재능을 영특하게 펼쳤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되지 못했다. 어버이가 병들자 수발에 정성을 다했고 똥을 맛보고 손가락의 피를 넣었으며 자라가 이르러 오는 감동이 있었다. 상을 당하자 상례(喪禮)를 삼가했으며 슬퍼하는 것이 예(禮)를 넘었다.

○ 조창우(曺昌祐) :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후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의 병을 모심에 얼음 속의 자라와 눈 속의 고사리가 솟아나는 감응이 있었고 상을 당해서는 여묘(廬墓) 상제(喪制)를 마쳤다.

정경양(鄭慶良) : 자는 길재(吉哉)요, 호는 남호(南湖)니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후손이다.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얼굴이 곱고 기상이 맑았다. 경전을 널리 궁구하고 곁으로 백가(百家)에 통달했다. 종일토록 책상을 대하고 깊은 뜻에 몰두했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병이 있어 낫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니 의복을 풀지 않고 단(壇)을 모아 하늘에 빌어 8일 만에 회생했다. 그 아버지가 서화(書畵)에 능했는데 일찍이 정암(定菴) 곽월(郭越)의 산수도(山水圖)를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 아버지의 수택(手澤)이다.”라고 하고 대를 옮겨 쓰다듬다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정암(定菴) 곽월(郭越)이 얼굴을 고치고 이르기를 “그대는 참으로 하늘이 낸 효자”라고 했다. 벼슬은 평시봉사(平市奉事)였고 수직(壽職)으로 받은 품계가 정헌대부(正憲大夫)였다

○ 허성(許珹) : 자는 성옥(成玉)이요, 호는 오촌(烏村)이니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더니 어머니의 병을 모신 지 8년 동안 발자국을 집 밖에 내지 않았다. 곁에서 부축하여 지키며 먹고 마시는 요리의 범절과 빨래의 소임을 처와 노복에게 맡기지 않았다. 상(喪)을 당해서는 곡읍(哭泣)이 슬프고 심하니 조문하는 이가 감탄했다.

하인수(河仁壽) : 자는 천지(千之)요, 호는 이곡(梨谷)이니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의 아들이다. 집안의 가르침에 젖어들어 문학과 행실이 일찍부터 이뤄졌다. 필법이 정묘했으며 한결같이 어버이의 뜻에 순응하여 털끝만한 거슬림도 없었다. 7세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슬피 우는 것을 그치지 않고 피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잠시도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앉거나 서는데도 늘 법도가 있었으며 집안에 거처할 때는 족슬(足膝)의 흔적을 두었다. 부친이 늙어 마음의 병이 있어서 모든 가르치고 명령하는 것이 뜻밖에서 많이 나왔으나 한결같이 모두 받들었다. 살고 있는 집이 잘못된 곳이 없었는데도 고칠 것을 명령하면 즉시 고쳤으며 경전의 뜻이나 문장의 뜻에 이르기까지 오직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따랐다. 사람들이 더러 이를 꾸짖고 비난하면, “아버지의 가르침을 어떻게 감히 고치는가?”라고 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수년 동안 지내더니 부친의 병세는 마침내 약을 쓰지 못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에 원근의 선비들이 지극한 효성으로 추거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그가 죽자 노백헌(老伯軒) 정재규(鄭載圭)는 시로써 곡하여 이르기를 “효도와 봉양에 어김이 없는 것은 증자(曾子)의 뜻이었고 시(詩)의 명성은 또 종문(宗文)의 집에 있었네.”라고 했다.

하달규(河達圭) : 자는 여삼(汝三)이니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릴 때부터 한 가지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어버이께 드렸다. 『효경(孝經)』을 받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사람의 도리로서 과연 이와 같이 하겠는가?”라고 했다. 어버이가 늙자 글 읽기를 폐하고 나무하는 것을 업으로 하여 구들을 따뜻하게 하려 했다. 이리하여 날마다 방망이를 망이산중(望夷山中)에 끊어서 부엌에 이바지하고 도왔다. 나이 14세에 아버지가 병들어 창증이 매우 심하더니 의원이 이르기를 “오직 가물치라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 하니 공이 지극한 정성으로 구하여 어버이의 병이 좋아졌다.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칭찬했다. 평생토록 의복과 음식에 좋은 것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대개 어버이를 사모하여 그러한 것이었다.

정규로(鄭奎魯) : 자는 성약(聖若)이요,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집이 가난했으나 학문을 좋아했고 어버이를 섬김에 그 정성과 효도를 다했다. 나이 겨우 17세에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의 피로 잠시 회생되었다가 겨우 5일이 지나고서 아버지가 또 갑자기 병들이 동시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만났다. 깊은 산에 쌍빈(雙殯)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곁을 지키니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마침 큰 비가 와서 물 때문에 쌍구(雙柩)를 운반하여 평지로 옮기니 옛 빈을 모셨던 산이 무너졌다. 사람들은 효성의 감응이라 일렀다.

이희길(李熙吉) : 자는 용선(庸善)이요, 호는 사가(四可)니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우하여 두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어기지 않았는데 모부인이 이질(痢疾)을 앓아 두어 달 동안이나 낫지 않으므로 하늘에 목숨을 빌었다.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었다. 이미 돌아가신 뒤에는 집안의 재력을 기울여 장지(葬地)를 다듬고 바람이 차고 비나 눈이 와도 살피고 쓸기를 폐하지 않았다. 언제나 기일(忌日)의 앞날을 택해 못에 고기 낚기를 일삼더니 다른 사람은 한 마리를 못 잡아도 홀로 넉넉했다. 사람들은 효성에 감동된 소치라 이르고 ‘왕상의 잉어와 맹종의 죽순’에 견주었다.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은 그 묘표(墓表)에서 이르기를 “그 순박한 정성과 독실한 실천이 신(神)과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했다.

하재남(河在南) : 자는 경가(敬可)다. 생각이 깊어 아버지의 실패를 만회하는 재주를 가졌다. 처음에 아버지와 형을 따라 배우다가 가난이 심하여 봉양할 수가 없음을 보고 드디어 치산(治産)을 잘하여 그 부족한 것을 충당시켰다. 형이 어려서 병에 걸려 여러 해를 앓더니 의원을 맞아 조리하고 치료함이 지극하여 쓰지 않음이 없었다. 형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이르기를 “눈이 어두워 촛불도 분별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조금도 슬픈 빛을 보이지 않았다. 재차 배필을 잃었어도 한번도 근심스럽거나 괴로운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대개 그 어버이가 계셨기 때문이었다. 어버이의 병을 모시고 해를 넘기더니 한 번의 소변이나 한 번의 일어나고 눕는 것도 먼저 뜻을 받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 쌍강공(雙岡公)이 임종에 이르러 갑자기 사람을 붙들어 일으키게 하고 붓을 쥐고 글을 써서 이르기를 “효성스러웠구나, 경가여!”라 하고 또 아래 구절을 쓰려고 하다가 기운이 모자라서 가셨는데 붓은 아직도 손에 있었다.

강수호(姜洙鎬) : 자는 성오(成五)니 장령(掌令) 강성희(姜聖喜)의 아들이요, 사인(士人) 강영호(姜泳鎬)의 아우다. 장령(掌令) 강성희(姜聖喜)가 중풍을 앓아서 해가 쌓이도록 병상에 누웠더니 강수호는 그 형과 함께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다. 한 모금의 물과 한 번의 소변도 먼저 뜻을 받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병든 아버지를 편안케 하는 데는 남김없이 알아서 했으며 상을 당해서는 슬픔으로 몸을 상하는 것으로 상제(喪制)를 마쳤다.

하경주(河璥周) : 자는 의원(儀元)이니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의 후손이다. 정성스러운 효도가 하늘에 뿌리박혀 어버이를 섬김에 몸과 마음으로 잘 봉양했다. 시탕(侍湯)에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손가락을 찢어서 피를 흘려 넣어 목숨을 아홉 달이나 연장시켰다. 상(喪)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시묘(侍墓)를 3년 동안 계속했다.

○ 허장(許漳) : 본관이 김해(金海)으로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했다.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원했고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서 그 목숨을 연장시켰다. 상(喪)을 당하고서는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 곡을 했다.

○ 최형(崔灐) : 자는 여준(汝俊)이니 사간(司諫) 최복린(崔卜麟)의 후손이다. 3년 동안 어머니의 병을 모심에 의약과 좋아하는 채소 재배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겨울철에 살아 있는 뱀을 얻는 기이한 효험을 보았다. 상을 당해서는 슬퍼함이 상제(喪制)를 넘었다. 수직(壽職)으로 받은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

강달욱(姜達旭) : 자는 우약(友若)이요, 호는 묵촌(黙村)이니 수헌(守軒) 강숙경(姜叔卿)의 후손이다.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했다. 어버이의 병을 모심에 똥을 맛보고 하늘에 빌었으며 상을 당하자 상복을 벗지 않았고 여묘(廬墓)에서 상제(喪制)를 마쳤다. 그 아우 강달지(姜達之)도 또한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하여 향리에서 드러나게 알려졌다.

강결(姜玦) :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다. 어머니가 나이 92세에 이르도록 병을 앓았는데 어느 날 구운 꿩을 생각하므로 강결이 목욕하고 하늘에 빌었다. 이때 갑자기 꿩이 날아와서 부엌에 들어오는 일이 있었다. 그 전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중에 돌림병을 피해 갔더니 호랑이가 문을 지키는 일이 있었다.

○ 강원상(姜元尙) :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이니 성품이 돈독하고 효성스러웠다. 겨우 네 살에 밖에 나가서 대추나 배를 얻으면 반드시 부모께 드렸다. 여섯 살에 부친상을 당해서는 손뼉을 치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굴리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복(服)을 마치고 어머니 김씨가 따라 죽으려고 원상을 안고 울면서 이르기를 “나를 익히 보아라. 다른 날 저승에서 어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원상이 갑자기 아이처럼 울며 말리고자 이르기를 “이미 아버지를 잃었는데 또 어머니마저 없으면 아이는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때문에 어머니가 차마 죽지 못했더니 아우 강유안(姜有安)과 강원한(姜元漢)과 더불어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고 상을 당하자 여묘(廬墓)에서 3년을 보냈다. 또 어렸기 때문에 부친의 상복을 입지 못했다고 하여 3년 동안 묘 곁에서 추복(追服)을 입었다.

○ 서상보(徐商輔) : 자는 덕로(德老)니 본관이 달성(達成)이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찢어서 피를 쏟아 넣어 살아나게 하니 이웃과 마을이 모두 그 효성을 칭찬했다.

강형무(姜亨武) : 자는 찬익(贊翼)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몸소 품팔이를 하여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어버이께 바쳤고 병이 나면 밥을 먹지 않았다. 그 아버지를 집에서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더니 날마다 가서 살피는데 비바람이나 차고 더운 것 때문에 폐하지 않았다. 또 심한 우레나 더운 바람과 급작스런 비를 만나면 묘소에 달려가서 상복을 벗어서 봉분을 덮고 울면서 ‘놀라지 말라.’고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효자라고 일컬었다.

하철언(河喆彦) :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아버지가 병들자 재계하고 목욕하며 하늘에 빌었다. 상을 당해서는 몸이 상하도록 슬퍼하며 예제(禮制)를 마치니 고을과 이웃이 그 효성을 칭찬했다.

○ 김용호(金容鎬) : 자는 경숙(敬叔)이요 본관이 김해(金海)이니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할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쏟아 넣어 회생시켰다. 그 아버지의 병에도 또한 같이 했으며 평생토록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이웃에서 그 효성을 감탄했다.

○ 안경숙(安敬淑) : 집이 가난해 배우지 못했으나 능히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그 어머니가 병들어 기절하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입에 넣어 반나절 동안 회생시켰으며 이미 돌아간 뒤에는 곡하며 몸부림치다가 기절하니 이웃과 마을이 모두 그 효성을 칭찬했다.

이상은 문축(文軸)이 있다.

○ 허소율(許少㐕) : 그 후손(后孫)이 삼가(三嘉)로부터 정려(旌閭)를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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