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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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영(向榮) : 헌덕왕(憲德王) 때에 청주도독(菁州都督)이 되자 김헌창(金憲昌)이 자기편에 붙이려 했으나 향영은 몸을 빼어 달아나서 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았다. ○ 김흔(金昕) : 헌덕왕(憲德王) 때에 강주도독(康州都督)이 되었다. ○ 복세(福世) : 신문왕(神文王) 5년에 청주총관(菁州摠管)이 되었다. ○ 김암(金巖) : 강주태수(康州太守)다.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으로 성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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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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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 있는 서원. 경상도 지역에 건립된 193개의 서원 중 경상남도 지역은 19개 군에 44개 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주지역에 해당되는 서원은 7개로 경상남도에서 가장 많다. 재실의 수에 있어서도 진주지역에 약 500여개가 분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현재도 문중에 따라 새로 건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재(齋)’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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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동부에 위치한 면(面). 조선 전기까지 진주목(晋州牧) 남면(南面) 송곡리(松谷里), 인담리(麟淡里), 금동어리(金冬於里), 성을산리(省乙山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금동어리는 송곡리에 합했다가 1623년(인조 1)에 다시 나누었다. 1832년(순조 32)에는 인담리를 성을산리에 합하여 송곡리, 금동어리, 성산리(省山里)라 하다가 1864년(고종 1)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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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서원(南岳書院) :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장군 및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죽곡리 817-1번지에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호이다. 남북 자오선 상에 솟을대문과 서원, 사당 건물이 일직선에 배치되어 있는데, 서원의 좌우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동·서재(東·西齋)가 있다. 서원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오량 구조 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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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무관·병법가·천문가. 금관가야(金官加耶) 왕족의 후손, 김유신(金庾信)의 적손(嫡孫)인 김윤중(金允中)의 서손(庶孫)이다. 김암은 본래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술법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천문학과 병법에 밝았으며, 지방관으로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지역을 맡아 잘 다스렸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김암이 젊은 시절에 중국 당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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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 서원의 기능과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공부하는 곳, 선현을 모신 곳, 향촌사회의 도서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종교행사와 관련된 서원의 역할은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교육의 기능보다 사묘(祠廟)의 기능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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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물을 조리하여 판매하는 곳. 음식점이 우리 사회에 언제부터 생겼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우리의 의식주생활의 기틀이 잡힌 때부터라고 추측된다. 문헌상으로는 김유신(金庾信)이 ‘천관(天官)의 술집’에 드나든 데에서 비롯되는데, 지금의 기생집과 같은 곳으로 ‘술과 음식을 제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1.삼국시대의 주막(酒幕) 삼국시대부터 불교가 성하면서 사원에서 재(齋)를 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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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위치한 서원. 1919년 지방의 유림들이 중건할 당시 경주에 있는 서악서원의 이름을 본 떠 남악서원이라고 명명했다. 남악서원(南岳書院)이 처음 지어진 것은 680년경의 일이라고 하며, 1922년 지방 유림들이 중건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전략상 요지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신령을 만나 삼국통일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