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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553
한자 孝子
영어음역 hyoja
영어의미역 dutiful so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백태남

[정의]

부모를 극진히 잘 섬기는 아들.

[개설]

효자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효녀(孝女)가 있지만, 전통적인 가족제도 하에서는 부모와 아들의 관계가 우선적이었으므로 ‘효자’라는 용어가 ‘효도를 하는 자식’의 개념을 포괄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지배한 전통적인 규범으로서의 효 또는 효도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일 등을 포함한다.

[효사상의 전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충효사상(忠孝思想)을 중시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함을 인륜의 근본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에 전하여오는 신라의 효녀 지은(知恩) 이야기는 지극한 효성의 대표적 예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특히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왕조에서는 효도를 가장 강조하여 조정에서는 『삼강행실도』나 『오륜행실도』 같은 서적을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 「효자가」를 짓고 「효자도(孝子圖)」를 그려 효를 강조하는 교화용 교재로 삼았다. 이에 따라 민간에는 효자가 하늘의 도움으로 겨울에 잉어를 구하여 병든 어머니를 공양했다는 「효자와 잉어설화」, 효자가 자기 살을 베어 굶어 죽게 된 부모를 살렸다는 「효자할고설화」 등이 전해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매년 연초에 충신, 열녀와 함께 효자를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고 이들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한편, 조세와 군역을 면제해주거나 곡식과 의복을 하사하는 등 특전을 베풀었다. 특히 전통시대에는 위난을 당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사례가 많은 것이 특색인데, 1592년의 임진왜란 때에는 전국적으로 67인의 효자를 선정하여 정문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진주의 빛나는 효성들]

진주목의 읍지인『진양지』에는 1,045인의 진주 인물이 실려 있는데, 이 중 효자로 이름을 남긴 185인의 효행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멀리 신라와 고려에서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전시대에 걸쳐 진주에 빛나는 효성의 자취를 남기고 있으며, 그들의 신분도 고위관직에 있던 양반 출신부터 승려, 농민,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중 몇 명의 행적을 통하여 당시의 효행 내용을 살펴본다.

성각(聖覺) : 신라 중기의 승려로, 성주군 법정사(法定寺)에서 수도하던 중 고향의 어머니가 병환이 위중함을 알고는 번민을 하자 스승이 이 사실을 알고 가서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라고 허락하였다. 성각은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지성으로 보살피고, 고기가 떨어지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끓여 드렸다. 이에 얼마 안 가서 어머니의 병환이 낫게 되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이 벼 3백석을 하사하였다.

정유(鄭癒) : 고려 말 공민왕 때의 효자로, 지선주사(知善州事)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1372년(공민왕 21) 아우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가 하동군을 지켰는데, 밤에 왜구가 갑자기 침입하자 사력을 다해 싸워 병석에 있던 아버지를 구하였다.

성두년(成斗年) : 조선 전기의 효자로, 성종 때 교리를 지낸 성안중(成安重)의 손자이며, 성일휴(成日休)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모시면서 법도에 어긋남이 없도록 했으며,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서는 6년간의 시묘살이로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 어머니가 먼저 별세하여 서모를 모셨는데, 서모도 친모처럼 섬겼으며, 서(庶)동생들도 친동생같이 돌보면서 그들이 서얼 출신이라 관아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을 백방으로 힘써 양민이 되게 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효성과 우애를 보고받고 우윤(右尹) 벼슬을 내렸다.

노개(盧介) : 조선 중기의 효자로, 진주 어느 절의 노비였다.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업고 떠돌아다니면서 걸식으로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고, 담제(禫祭 : 대상을 치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뒤 비로소 고기를 입에 넣었다 한다.

강내운(姜來運) : 조선 후기의 효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강덕룡(姜德龍)의 후손[5세손]이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땅을 치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모습이 이미 성인의 그것과 같았다. 집이 본래 가난하였어도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고, 어머니가 중병으로 병석에서 시달리자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어머니께 드려 두 번이나 소생케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심에 감복하였다. 이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간 여묘살이를 계속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92년(고종 29) 임진년에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강사석(姜師碩) : 조선 말기의 효자로, 어려서부터 효심이 유달랐다. 다섯 살 때 어느 겨울 날 어머니가 추운 날씨에도 베짜기를 계속하니, “이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장차 너의 옷을 만들려고 한다.” 하니, “자식이 되어 어머니를 고생시킴이 이와 같아서야 되겠습니까?”라 하고, 울면서 날(베를 짤 때 세로로 놓는 노끈 따위)을 끊었으므로 어머니는 더 이상 베를 짜지 못하였다. 고종 6년(1869)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1875년에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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