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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17
영어의미역 Encountering the Elegant Lifestyle of Jinju Confucian Scholars at Pavilion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황경규

[정의]

진주 지역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며 정신 수양의 장소로 활동되었던 건축물인 누각과 정자.

[진주 누정의 특징]

일반적으로‘누정’은 사방을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다락 구조로 높게 지어진 누각(樓閣)과 경관이 수려하고 사방이 터진 곳에 지어진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말로 자연 속에서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며 정신 수양의 장소로 활용되었던 건축물이 대부분이다. 누정은 경관이 좋은 산이나 대(臺), 또는 언덕 위에 위치하여 산을 등지고 앞을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냇가나 강가 또는 호수나 바다 등에 임하여 세워져 있다. 또, 궁실의 후원 등 원림(園林)과, 변방 또는 각지의 성터에도 누정이 많이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옛날 중요 건물에는 문루를 두었는데, 주로 객사의 부속으로 혹은 성문의 한 형태로 지었다.

진주의 누정은 남강을 중심으로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것이 많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촉석루(矗石樓)이다. 옛날 비봉산 아래 고경리(古京里)에 있었던 객관의 남쪽 대문 밖에는 봉명루(鳳鳴樓)가 있었는데, 촉석루와 더불어 진주의 대표적 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진양지(晋陽誌)』「정대(亭臺)조」를 보면, 남강을 접하고 있는 금산리(琴山里)[현재 금산읍]와 상사리(上寺里)[현재 사봉면] 등지에 정자들이 산재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주의 정자는 1632년 완성된 『진양지』와 1932년 발간된 『진양속지(晋陽續誌)』, 1967년에 발행된 『진양속지증보(晋陽續誌增補)』, 1995년에 발간된 『진주누정지(晋州樓亭誌)』에 소개되어 있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은 정자들도 많다. 이들 문헌에 소개된 정자 중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존재했을 당시 정자의 기능을 한 것을 여기에 소개한다. 다만, 『진주누정지』에 기록된 정(亭)들은 정자 본래 기능보다 조상을 숭모하기 위한 재실(齋室)의 기능에 더 치중했으므로 여기서는 소개하지 않는다.

[『진양지』에 기록된 정자]

○ 강각(江閣) : 옥봉리(玉峯里)에 있었으며,옥봉정사(玉峯精舍)라고 불렀다. 승지 조순지(趙舜之)의 별장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다.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이 1588년에 지은 기문(記文)이 전한다.

○ 수우당(守愚堂) : 저동(猪洞)에 있다. 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이 만들고 이름 지은 것으로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기문이 전한다.

○ 봉황대(鳳凰臺) : 금산리(琴山里) 백동(柏洞)에 있다. 생원 강급(姜汲)의 송정(松亭)이었는데, 대구부사 김윤안(金允安)이 소촌찰방(召村察訪)으로 있을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 임연대(臨淵臺) : 조동(槽洞)에 있다. 운당(雲堂)의 남쪽 벼랑 위에 참봉 이염(李琰)이 살면서 이름을 지었다. 임진년에 병화로 불탔다.

○ 형림정(逈臨亭) : 금산의 끝 한쪽 모퉁이에 있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권유로 승지(承旨) 배대유(裵大維)가 이름을 짓고, 주인 강신(姜愼)은 이를 나무에 새겨 걸었다.

○ 동정(東亭) : 금산리(琴山里)에 있다. 앞에 연못이 있어 경치가 깨끗하였으므로 동네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활 쏘는 곳으로 삼았다.

○ 수안정(數雁亭) : 금산리(琴山里) 창암(蒼岩) 위에 있었다. 수사(水使) 정은부(鄭殷富)의 별사(別榭)였는데 지금은 폐해졌다.

○ 쌍송정(雙松亭) : 삽동(鍤洞)의 남대지(南大池) 북쪽에 있다. 충순위(忠順衛) 정당(鄭澢)이 정자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정당은 수사 정은부의 아들이다.

○ 임강정(臨江亭) : 가방동(佳坊洞) 입구에 있다. 남강에 접해 있고 월아산을 마주보고 있어 매년 좋은 때가 되면 동네 사람들이 술을 가지고 와서 여기에서 마신다.

○ 파벽당(把碧堂) : 영모당의 서편에 있는데, 진사 이정윤(李貞胤)이 이름을 지었다.

○ 영모당(永慕堂) : 참봉 이공량(李公亮)이 지었으며 파벽당의 동쪽에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기문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시가 전한다.

○ 반구정(伴鷗亭) : 남강의 상류 1리쯤에 있다. 아름다운 나무 두 그루가 강 위에 짙은 그늘로 덮여 있어 경치가 매우 깊숙하다.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살면서 지은 것으로, 그의 기문이 있다.

부사정(浮査亭) : 구동(龜洞)의 동쪽 언덕 위에 있다. 고목 50여 그루가 사방으로 에워싸서 그늘이 덮여져 있고, 백여 명이 앉을 만하여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그 곁에 정사를 지었다. 진사 이흘(李屹)이 상량문을 지었다.

○ 관어정(觀魚亭) : 송강(松江) 위에 있다. 구부려서 맑은 못을 보면 노는 고기를 셀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안주목사(安州牧使) 하우치(河禹治)가 세웠는데 지금은 빈터만 있다.

○ 송강정사(松江精舍) : 관어정 위쪽으로 7~8보쯤에 있다. 선비 하항(河恒)이 지었는데, 하항하우치의 증손이다. 임진년에 불탔다.

○ 용두정(龍頭亭) : 가좌촌(加佐村)의 진동(津洞)에 있다. 관찰사 이인형(李仁亨)의 집이 그 남쪽에 있고 고목이 숲을 이루어 전망이 상쾌하게 트여있다. 진사 강응규(姜應奎)의 시가 전한다.

○ 삼수정(三樹亭) : 진동(津洞)에 있다. 세 그루의 늙은 괴목(槐木)이 솥발처럼 시냇가에 서 있는데 크기가 7~8 아름이 될 만하므로 삼수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 정돌정(鄭突亭) : 반동산촌(班東山村)에 앞에 있다. 진사 정승윤(鄭承尹)의 기문이 있다.

○ 낙모정(落帽亭) : 반동산(班東山)에 있으며 판서 강혼(姜渾)이 이름을 지었다.

○ 쌍괴정(雙魁亭) : 상사리(上寺里) 백야현촌(白也峴村)에 있다. 옛날 반주(班州)에 목(牧)이 설치되었을 때 석탑을 세워 산세를 진압한다고 하여 탑정(塔亭)이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인데, 1570년에 마을사람인 정안(鄭安)이 진사시에 장원이 되고 김대명(金大鳴)이 문과에 장원이 되었으므로 탑정을 쌍괴정이라고 했다.

○ 천상정(川上亭) : 백야촌 앞에 있다. 쌍괴정과 더불어 위아래에서 서로 맞대고 있어 군수 김대명이 ‘정자가 시내 위에 있다’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우곡정(隅谷亭) : 상사리 우곡촌(隅谷村) 남쪽에 있다. 앞에 연못이 있고 굽어보면 넓은 들에 임하게 된다. 자헌대부 정온(鄭溫)이 지은 것이다.

○ 반월정(半月亭) : 반성현(班城縣)의 동쪽에 있다.

○ 비사정(庇駟亭) : 방어산 서쪽 승어촌(勝禦村) 앞에 있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정자 이름을 지었다.

관란정(觀瀾亭) : 염창(濂滄)의 바위 위에 있다. 우후(虞侯:병마절도사 다음가는 벼슬) 허국주(許國柱)가 짓고 진사 정승윤이 이름을 지었는데 우후가 죽은 뒤 곧 폐해졌다.

○ 계정(溪亭) : 양전리(陽田里) 남쪽 시내 위에 있다. 생원 정두(鄭斗)가 지었는데 옥같이 흐르는 물이 못을 이루어 경치가 소쇄한데, 지금은 폐해졌다.

○ 명홍정(冥鴻亭) : 송곡리(松谷里)에 있다. 판서 조윤손(曺潤孫)이 지었는데 탁영대(濯纓臺)가 그 아래에 있다.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이 상량문을 지었다.

○ 조월대(釣月臺) : 명홍정 동쪽에 있는데 하취연(河就演)이 지어 은거하는 곳으로 삼았다. 관포 어득강이 이름을 지었다.

○ 영담정사(永潭精舍) : 영선현(永善縣) 남쪽에 있다. 관포 어득강이 지은 것으로 앞에는 연못이 있고, 뒤편에는 매화나무와 대를 심어 경치가 좋다. 지금은 없어졌다.

○ 동락정(東洛亭) : 양산(陽山)의 서쪽에 있다. 동네사람들이 술 마시고 활 쏘는 곳으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수해 때문에 무너졌다.

○ 서하정(西河亭) : 금동(金冬) 오암정(於巖亭) 서쪽에 있는데 동락정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했다.

○ 망구정(望龜亭): 강주지(康洲池) 위 진사 이곤변(李鯤變)의 집 앞에 있다. 못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만 그루나 있고 놀이하는 곳도 있다. 경치가 그윽하여 다분히 서호(西湖)의 흥취가 있었는데, 임진왜란를 겪으면서 분탕이 된 것을 그의 손서 이수기(李守紀)가 중창하였다.

○ 침류정(枕流亭) : 독고산(篤古山)마을 앞에 있다. 깊은 못이 그 앞에 뻗어 있고 절벽이 좌우로 둘러 있다. 서쪽으로는 천왕을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촉석루에 임하여 있다. 종사랑(從仕郞) 박인(朴氤)이 지은 것을 자손이 대대로 이어왔다. 빙허암(憑虛巖)이 그 서쪽에 있고 빙허대가 그 동쪽에 있다.

○ 율탄정(栗灘亭) : 내평(內坪)에 있다. 밤나무 숲이 둘러 있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인데 깨끗하고 툭 트여 있다. 동지(同知) 이충걸(李忠傑)이 대(臺)를 쌓고 놀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쾌재정(快哉亭) : 장암(場巖)에 있다. 첨정(僉正) 이순(李珣)이 지은 것으로 일명 아호정사(牙湖精舍)라고 하였다. 앞에는 바다의 포구에 임해 있고, 동쪽으로는 사천현(泗川縣)을 굽어볼 수 있다. 임진왜란 뒤에 빈터만 남아 있다.

○ 족정(足亭) : 마동(馬洞)에 있다. 함양군수 정효순(鄭孝純)이 지은 것으로 좌의정 청라 김극성이 관찰사가 되어 편액을 걸어 외손 류기정에게 전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허백정(虛白亭) : 족정(足亭)의 서쪽에 있다. 절벽이 뾰족하게 서 있고 굽어보면 맑은 못에 다다른다. 문병(文炳)이 지은 것인데, 그의 손서(孫壻) 김운익(金雲翼)이 소유했다가 병화로 불탔다. 각재(覺齋) 하항(河沆)의 시가 전한다.

○ 운금정(雲錦亭) : 수곡촌(水谷村) 생원 하희서(河希瑞)의 집 앞에 있다. 1605년에 쓴 송정 하수일의 기문이 전한다.

○ 칠송정(七松亭) : 다회탄(多會灘) 위에 있다. 소나무 일곱 그루가 그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름을 지은 것이다. 현릉참봉(顯陵參奉) 조정(趙珵)이 세운 것인데. 소나무는 임진왜란 뒤에 불타고 세 그루만 남아 있다. 송정 하수일의 시가 전한다.

○ 만류정(萬柳亭) : 원당촌(元堂村) 앞 시내 위에 있으며 동네 사람들이 놀며 잔치하는 곳이다. 영해부사(寧海府使) 유시(柳蒔)가 처음 이곳에 살았는데 그 뒤로 자손들이 번성했다. 수우당 최영경이 이곳을 지나가다가‘만류’라고 불렀다.

○ 홍림정(洪林亭) : 원당촌 앞에 있다. 큰 나무들이 그늘을 지어 덮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여기서 쉬었다.

○ 사수정(四樹亭) : 백곡촌(柏谷村) 앞에 있다. 큰 냇가에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술 마시고 활 쏘는 곳이다.

○ 만취정(晩聚亭) : 가귀곡(嘉貴谷)에 있다. 마을 사람 강지특(姜智特)이 세웠다.

○ 문암정(門巖亭) : 종화(宗化)의 동쪽에 있다. 돌문이 있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인데, 습독(習讀) 손형(孫炯)이 처음 지었다. 임진왜란 뒤에 군수 최기변(崔琦抃) 이곳에 있으면서 정사(亭榭)를 세웠다.

○ 칠수정(七樹亭) : 서신대(西申大)에 있다. 7그루의 큰 나무가 있으며 동네 사람들이 마시고 활 쏘는 곳이다.

○ 삼수정(三樹亭) : 운곡(雲谷)에 있다.

○ 뇌암정(雷巖亭) : 운곡(雲谷)에 있다. 마을 사람 류인용(柳寅龍)이 지었는데, 계사년 난에 불탔다.

○ 빙옥정(氷玉亭) : 선천(鐥川)의 남포동 동쪽 1리쯤에 있다. 인동현감(仁同縣監) 정주(鄭宙)가 세웠는데, 창원부사 이정(李瀞)이 소유했다.

○ 오룡정(五龍亭) : 섬진강 가에 있다. 생원 손시(孫時)가 지었는데, 생원의 아버지 생원 손수령(孫壽齡)에게 아들 8명이 문과·무과·생원·진사가 되어 현달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팔룡(八龍)이라 불렀고, 그의 손자 손륜도 아들 다섯을 두었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다.

○ 계영정(桂影亭) : 섬진강가에 있다. 진사 이희만(李喜萬)이 지었다. 돌을 깎아내어 정자를 만들고 대를 심어 울타리로 삼으니, 달밤에 두꺼비의 그림자가 배회하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다.

○ 송객정(送客亭) : 소남(召南)의 북쪽에 있다. 현감 조응경(趙應卿)이 세우고 빈객을 전송했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다.

○ 수월정(水月亭) : 침곡(針谷)의 높은 바위 위에 있다.

○ 어풍정(御風亭) : 신당(新塘) 남강 가에 있다. 생원 정이량(鄭以良)이 소유했는데 자손이 지키지 못하고 외증손 현감 강덕룡(姜德龍)이 맡았다.

○ 단구정(丹邱亭) : 단지동(丹池洞)에 있다. 동네 사람들이 술 마시고 활 쏘는 곳인데 앞에는 넓은 들이 있고, 남쪽으로 월아산이 읍하고 있다.

○ 동정(東亭) : 설매곡(雪梅谷)에 있다.

○ 거원정(車院亭) : 사죽(沙竹) 거의원(車衣院)의 길 가에 있다. 신관이 구관을 영송(迎送)하는 곳이다.

[『진양속지』에 기록된 정자]

○ 광제정(光霽亭) : 주의 동쪽 30리 상사리에 있다.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이 노닐던 곳으로 후손이 지었다. 현재 ‘光風霽月亭’이라고 현판이 붙어 있다.

○ 연정(蓮亭) : 주의 동쪽 50리 승산촌에 있다. 총관(總管) 허동립(許東岦)이 못을 파서 연을 심고 연당이라 했는데, 그의 후손이 못 위에 정자를 세워 기렸다.

○ 옥봉정(玉峰亭) : 승산촌의 성현동(聖賢洞)에 있는데, 처사 허민(許玟)이 머물던 곳으로 그의 아들 허건(許健)이 세웠다.

○ 행정(杏亭) : 주의 동쪽 청원리 방어산 아래에 있는데, 찰방 이중광(李重光)이 은거하던 곳이다.

○ 세한정(歲寒亭) : 주의 동쪽 청원리 송현 아래에 있는데, 처사 이현학(李鉉鶴)이 지었다.

○ 금호정(琴湖亭) : 금산면 용심촌에 있는데, 주사 이희영(李禧榮)이 지었다.

○ 지곡정(止谷亭) : 진성면 두릉촌에 있는데, 습독(習讀) 남담(南霮)이 세웠다.

○ 가천정(可川亭) : 주의 남쪽 40리 개천리에 있는데, 선비 최정기(崔正基)가 독서하던 곳이다.

○ 죽남정(竹南亭) : 봉동(鳳洞)에 있는데 장령(掌令) 강성희(姜聖喜)가 물러나서 쉬던 곳이다.

○ 침류정(枕流亭) : 옛날 독고 강가에 있었는데, 호은 박인의 후손 동형(東衡)과 재순(在舜)이 삼계리(三溪里)에 중건한 것이다.

○ 기산정(岐山亭) : 주의 남쪽 10리 삼계촌에 있는데, 감역(監役) 박영찬(朴榮纘)이 지었다. 그 뒤 후손 재순이 증축했다.

○ 신당정(新塘亭) : 주의 남쪽 30리 내동면 가포에 있다. 옛날에는 신당촌에 있었는데 신당 하공헌(河公獻) 후손이 이곳에 이건했다.

○ 하한정(夏寒亭) : 주 서쪽 50리 양구촌(良邱村)에 있다. 이(李)·양(梁)·최(崔)·백(白)·정(鄭)·하(河) 여섯 성씨 25명이 건축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편액을 썼다.

○ 함월정(涵月亭) : 주의 서쪽 50리 월횡촌(月橫村)의 시냇가에 있는데, 증(贈) 교관(敎官) 조성택(趙性宅)이 지었다.

○ 서소정(舒嘯亭) : 주의 서쪽 90리 되는 삼장리(三壯里) 석남촌(石南村)에 있는데, 계재(溪齋) 정제용(鄭濟鎔)이 세웠다.

○ 백한정(柏寒亭) : 주의 서쪽 백곡리(柏谷里) 신안동(新安洞)에 있다. 월담(月潭) 하용표(河龍杓)가 세웠다.

○ 사뢰정(士賴亭) : 주의 서쪽 40리 수곡면(水谷面) 효자리(孝子里)에 있다. 농은(農隱) 하경칠(河慶七)이 은거하며 살던 곳으로, 자식들이 세웠다.

고산정(孤山亭) : 주의 서쪽 30리의 대평(大坪)의 남쪽에 있는데, 학포(學圃) 정훤(鄭暄)이 은거하며 독서하던 곳이다.

○ 퇴수정(退守亭) : 주의 서쪽 20리 신대촌(申大村) 영법산(永法山) 아래 취죽담(翠竹潭) 위에 있다.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가 독서하던 곳이다.

○ 태계정(台溪亭) : 주의 북쪽 20리 태동(台洞)의 관지촌(觀旨村)에 있는데, 태계 하진(河溍)이 공부하던 곳이다.

○ 임연정(臨淵亭) : 주의 북쪽 태동촌에 있는데, 하씨들이 강학하던 곳이다.

○ 임계정(臨溪亭) : 주의 북쪽 설매곡리(雪梅谷里)에 있는데, 증(贈) 참의(參議) 강심(姜深)이 세웠다.

○ 삼고대(三高臺) : 주의 서쪽 신대촌(지금의 대평면)에 있다. 영무성 하응도, 어은(漁隱) 하응회(河應會), 신계(新溪) 하천주(河天澍)가 시를 읊조리며 놀던 곳으로 후손들이 증축했다.

○ 행정(杏亭) : 주의 동쪽 40리 진성리에 있는데, 낙진헌(樂眞軒) 정인평(鄭仁平)이 노닐던 곳이다.

○ 송객정(送客亭) : 주의 서쪽 삼장면(三壯面) 덕교리(德橋里)에 있다. 덕계 오건남명을 뵙고 돌아올 때 남명이 이곳에서 배웅을 했다. 뒤에 정자를 세웠다.

[『진양속지 증보』에 기록된 정자]

○ 진남루(鎭南樓) : 촉석루 서쪽에 있다. 일명 진주성 북장대라고 한다.

○ 망미루(望美樓) : 남성동에 있다. 옛날 관찰사가 집무를 하던 선화당(宣化堂) 문루인데, 지금의 영남포정사이다.

서장대(西將臺) : 성내 서쪽 강 절벽 위에 있다.

○ 진주 비봉루(飛鳳樓) : 포은 정몽주 선생 유적지로, 후손 상진(相珍)이 중건했다.

○ 삼계정(三溪亭) : 주의 동쪽 진성면 이천리(耳川里)의 연무산(燕舞山) 아래에 있는데, 지평 정밀(鄭密)이 강학하던 곳이다. 옛날에는 사봉면 백야촌에 있었는데, 후손이 여기에 옮겨 세웠으며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이 기문을 지었다.

○ 모로정(慕魯亭) : 주의 동쪽 진성면월아산 아래 용고미촌(龍顧尾村) 뒤편 고절한 곳에 있으니, 간암(艮嵒) 박태형(朴泰亨)이 강학하던 곳이다.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이 기문을 지었다.

○ 매산정(梅山亭) : 주의 동쪽 일반성면 창촌리(倉村里)에 있는데, 매은(梅隱) 박창종(朴昌宗)이 부친 남계(南溪) 박헌대(朴憲大)를 위하여 세웠다.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이 기문을 지었다.

○ 하누정(何陋亭) : 일반성면 선옥동(仙玉洞)에 있는데, 남파(南坡) 한진규(韓鎭奎)가 지은 것이다. 우산(芋山) 이훈호(李熏浩)가 기문을 지었다.

○ 매산정(梅山亭) : 주의 동쪽 일반성면 운천리(雲川里)에 있는데, 손정(孫禎)이 정자를 지었다. 이병주(李秉株)가 기문을 지었다.

○ 반사정(反思亭) : 주의 동쪽 이반성면 발산리(鉢山里)에 있으니, 상산(商山) 김씨 그의 선조 통덕랑 봉승(鳳承)을 위하여 지었다. 단계(端磎) 김인섭(麟燮) 기문을 지었는데, 정자의 남쪽에 그의 선조 임란 충신 김준민(金俊民) 선도비가 있다.

○ 회산정(晦山亭) : 주의 동쪽 이반성면 평촌(坪村) 오봉산(五峰山) 아래에 있는데, 회산(晦山) 한우동(韓右東)이 독서하던 곳이다.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가 기문을 지었다.

○ 방산정(防山亭) : 주의 동쪽 지수면 승산촌(勝山村)에 있는데, 교리(校理) 구연호(具然鎬)가 물러나 쉬던 곳이다. 권용현(權龍鉉)이 기문을 지었다.

○ 지산정(智山亭) : 주의 동쪽 지수면 승산촌에 있는데 서천(瑞泉) 구승(具昇)이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은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후손이 끝내 이루었다. 성환혁(成煥赫)이 기문을 지었다.

○ 지신정(止愼亭) : 주의 동쪽 지수면 승산촌의 목양산(木陽山) 아래 신독곡(愼獨谷)에 있는데, 승선(承宣) 허준(許駿)이 짓고 연재(淵齋) 송병준(宋秉濬)이 명명한 집이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가 기문을 지었다.

○ 세한정(歲寒亭) : 주의 동쪽 안계(雁溪)에 있는데, 세한정 한계로(韓啓魯)의 정자다. 그의 현손 한응동(韓應東)이 중심이 되어 창건하였는데 산이 물을 둘러 안고 있어 경치가 좋다.

○ 만포정(晩圃亭) : 주의 동쪽 청광리(淸光里)에 있다. 농은(農隱) 이헌규(李■헌奎)가 고성 척곡(尺谷)으로부터 여기에 옮겨와서 살았는데, 그의 아들 이진세(李鎭世)가 정자를 지어 기렸다.

○ 청류정(聽流亭) : 주의 동쪽 청광리에 있는데, 진사 박돈병(朴敦秉)이 지었다.

○ 청계정(聽溪亭) : 주의 동쪽 봉치(鳳峙)에 있다. 한청계가 세상이 날로 잘못되는 것을 보고 명리(名利)를 사절하고 정자를 시내 위에 짓고 이름을 은반정(隱槃亭)이라고 했는데, 오래돼 피폐해져 후손이 중건하였다.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기문을 지었다.

○ 봉강정(鳳岡亭) : 주의 동쪽 개천면 봉치에 있는데 김하두(金夏斗)가 그의 선친 회남공(晦南公)을 위하여 지었다.

○ 소강정(小岡亭) : 주의 동쪽 봉치에 있는데, 김해 김기민(金奇玟)이 지은 것이다.

○ 가산정(佳山亭) : 주의 남쪽 금곡면 가수동(佳水洞)에 있는데 승초(勝樵) 류진순(柳震淳)이 은거하며 살았다. 그의 아들 류호열(柳浩烈)이 정자를 세우고 강학을 하였다.

○ 후심정(後潯亭) : 주의 남쪽 내동면 귀곡리(貴谷里)에 있는데, 죽성(竹醒) 정은교(鄭誾敎)가 경술국치 후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 신암정(新岩亭) : 주의 남쪽 내동면 신율리(新栗里)에 있는데 전달홍(全達洪)이 그의 선조 신암 전양(全瀁)을 위하여 지었다. 권용현이 기문을 지었다.

○ 동화정(東華亭) : 주의 남쪽 오곡(吾谷)의 동쪽 화산(華山) 아래에 있는데, 서낙언(徐洛彦)이 놀던 곳으로 그의 아들 병문(丙文)이 정자를 세웠다. 회봉 하겸진이 기문을 지었다.

○ 영원정(穎源亭) : 주의 남쪽 봉발리(鳳鉢里) 영수 위에 있다. 효자 양남파(梁南坡)와 한조(漢祚)가 선영의 아래에 정자를 세웠다. 과재(果齋) 이교우(李敎宇)가 기문을 지었다.

○ 천상정(川上亭) : 주의 남쪽 평촌(坪村)의 서쪽 산하천(山下川) 위에 있다. 강성옥(姜性玉)이 세웠다. 청계(晴溪) 최동익(崔東翼)이 기문을 지었다.

○ 춘곡정(春谷亭) : 주의 서쪽 수곡면 사곡(士谷)에 있는데 참봉 하경(河憬)의 재실이다. 김황(金榥)이 기문을 지었다.

○ 팔송정(八松亭) : 주의 서쪽 수곡면 예은산(禮隱山) 아래에 있다. 예은 이창규(李昌圭)가 만년에 머물던 곳이다. 정인보(鄭寅普)가 기문을 지었다.

○ 가산정(稼山亭) : 주의 서쪽 수곡면 요산촌(樂山村)에 있다. 가산 유명준(柳明準)이 처음 이곳에 살았는데, 그의 후손 원복(遠馥)과 원태(遠泰)가 정자를 세웠다. 하용환(河龍煥)이 기문을 지었다.

○ 서계정(西溪亭) : 주의 서쪽 수곡면 원계(元溪) 아래에 있다. 농암(聾岩) 손경세(孫慶世)가 머물던 곳이다. 회봉 하겸진이 명(銘)을 지었다.

○ 귤하정(橘下亭) : 주의 서쪽 두양리(斗陽里) 두방산(斗芳山) 아래에 있는데, 귤하정 최식민(崔植民)이 은거하던 곳이다. 후손이 추모하여 새로 세웠다.

○ 계남정(溪南亭) : 주의 서쪽 두양리 두방산 아래에 있는데, 최숙민(崔琡民)이 강학하던 곳이다.

○ 공옥정(拱玉亭) : 주의 서쪽 병천(屛川)에 있는데, 만호(晩湖) 하식원(河植源)이 그 앞에 정자를 세우고 날마다 벗과 더불어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신재(新齋) 최정의(崔正의)가 기문를 지었다.

○ 하한정(夏寒亭) : 주의 서쪽 양구촌(良邱村)에 있는데, 철종 때 마을 사람 26인이 계를 만들어 창건하였다. 처음 이름은 삼하정(三夏亭)이었으며,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흥선대원군의 편액을 걸었다.

○ 삼산정(三山亭) : 주의 서쪽 두방리에 있는데, 수당(受堂) 강석홍(姜錫洪)이 여기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이현덕(李鉉德)이 기문을 지었다.

○ 명옥정(鳴玉亭) : 주의 서쪽 청룡리(靑龍里)에 있는데, 참봉 이수희(李壽熙)가 살던 곳이다. 하회봉·조심재가 함께 기문을 지었다.

○ 소천정(小川亭) : 주의 서쪽 덕산 대포(大浦)에 있는데, 복암(復菴) 조원순(曺垣淳)이 머물던 곳으로 고을 인사들이 계를 만들어 정을 세웠다.

○ 농아정(聾啞亭) : 주의 서쪽 덕산 곡점(曲店)에 있는데, 경재(敬齋) 이은열(李殷悅)이 창건하여 쉬는 장소로 삼았다.

○ 망운정(望雲亭) : 주의 북쪽 미천면 미곡리(美谷里)에 있는데, 함양오씨들이 그의 선조 진사공(進士公) 오문도(吳文道)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중헌(重軒) 김재수(金在洙)가 기문을 지었다.

○ 옥산정(玉山亭) : 주의 북쪽 미천면 어옥리(於玉里)에 있는데, 나주임씨(羅州林氏)가 세운 것으로 종족이 모이는 장소로 삼았다. 회봉 하겸진이 기문을 지었다.

○ 취옹정(醉翁亭) : 주의 북쪽 미천면 벌당리(伐塘里)에 있는데, 취옹 김상규(金祥奎)가 휴식하던 곳이다. 권용현이 기문을 지었다.

○ 남정(楠亭) : 주의 북쪽 미천면 어옥리 동구에 있다. 선옹(仙翁) 임자발(林自潑)이 여기에 옮겨와 살았는데, 산수와 전원의 흥취가 있었다. 후손 만수(晩睡) 임계상(任桂相)이 대를 쌓아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 석천정(石泉亭) : 주의 북쪽 집현면 신당(新塘)에 있는데 석태륜(石泰崙)이 세웠다.

○ 수죽정(水竹亭) : 주의 북쪽 명석면 추동(樞洞)에 있는데, 수죽 강문오(姜文伍)가 세운 것이다. 공이 세상을 떠나 정자도 폐해졌더니 병자년에 그의 손자 재선(在善)이 그의 아들 예조(睿祚)로 하여금 중건케 했다. 회봉 하겸진이 기문을 지었다.

○ 제월정(霽月亭) : 주의 북쪽 대곡면 단지동(丹池洞)에 있는데, 단지 하협(河悏)이 남긴 정자다.

○ 임연정(臨淵亭) : 주의 북쪽 명석면 관지동 태계정사의 남쪽에 있는데, 태계의 후손들이 뜻을 이어온 곳이다. 회봉 하겸진이 기문을 찬하였다.

○ 용강정(龍岡亭) : 주의 북쪽 대평면 신풍리(新豊里) 대죽동(代竹洞)에 있는데, 회산(檜山) 황종경(黃鍾警)이 그의 부친 호은(湖隱) 황기룡(黃基龍)을 위하여 세웠다. 죽성 정언교와 송산 권재규가 함께 기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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