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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21
한자 晋州-敎坊藝術
영어의미역 Gyobang Arts in Jinju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강동욱

[정의]

기녀(妓女)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인 진주교방(晋州敎坊)을 중심으로 형성된 예술.

[개관]

진주의 교방예술은 진주교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교방은 고려·조선시대 기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이다. 교방청(敎坊廳)은 본래 중국 당나라 때 궁중 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관기들과 악공들에게 가무악(歌舞樂)을 가르쳤다. 이러한 중국 교방의 전통은 우리나라의 경우 발해를 거쳐 고려 문종 시기에 도입되었고, 조선조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장악원(掌樂院) 소속의 좌방(左坊)과 우방(右坊)을 교방이라고 불렀다. 1458년(세조 4)에 전악서(典樂署)를 장악원으로 개편하고 좌방과 우방을 두었는데, 좌방은 아악(雅樂)을, 우방은 속악을 맡게 하였다. 또한 교방은 지방 관아에 부속된 건물로 대개는 관문 밖 객사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역시 이곳에서 지방의 기녀들이 악기·노래·춤 등 각종 예기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 불려 다녔다.

진주교방은 어디 있었을까? 진주의 인문지리지인 『진양지』관우(館宇)조에 “중대청(中大廳) 동쪽과 서쪽에 낭청방(郞廳房)이 있고 서쪽 낭청방 앞에 교방(敎房)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대청은 객사 건물로, 안에 왕을 의미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한 달에 두 번 배례(拜禮)를 올리던 곳으로, 진주 비봉산 아래 고경리(古京里)에 있었던 건물이다. 지금 옛 진주 MBC 건물 근처에 진주교방이 있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진주 교방예술은 진주 사람들의 풍류와 멋에서 찾을 수 있지만, 우리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방춤뿐이다. 대부분의 진주 교방예술이 기녀들의 생산물로 치부해버려 그들의 문화적 산물은 거의 소멸되고, 단지 교방춤만이 전승되어오는 것이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교방춤은 오히려 교방청이 폐지된 이후, 지방으로 흩어졌던 관기들이 권번(券番)이나 기생조합을 만들어 기방을 중심으로 추었던 춤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방춤은 기방춤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과거 교방청의 궁중정재(宮中呈才)나 향악정재(鄕樂呈才)의 춤을 이어받기도 했지만, 지방의 무악(巫樂)과 같은 민속악(民俗樂)에 맞추어 추는 민속춤을 가미하기도 했다.

오늘날 교방춤은 전문 예능의 무용으로서 춤의 예능을 전수받은 예능인들에 의해 공연되고 있으며, 이들 춤의 대부분이 국가무형문화재나 지방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진주 검무, 진주 한량무, 진주 교방굿거리, 진주 포구락무 등이 진주교방 예술로 전해지고 있다.

[교방가요와 진주목사 정현석]

진주 교방예술이 진주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 데는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이 지은 『교방가요(敎坊歌謠)』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진주의 교방예술은 『교방가요』를 통해 지금껏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서울대학교 정병욱 교수는 “남한의 색향인 진주에 부임한 이 책의 편자는 음악과 무용에 상당한 식견과 취미가 있어서 교방에서 익히는 가무를 교정하여 풍교(風敎)를 바로잡고 가창에 부르는 시조시를 선택하여 한역함으로써 교방의 가요를 정착시키려고 한 의도가 엿보인다.”고 했다. 또 정병욱 교수는 “지방의 민족적인 정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의암사(義巖祠)[의기사(義妓祠)를 말함]를 중건하고 의암별제(義巖別祭)를 신설하여 몸소 〈의암별곡〉과 수장(數章)의 시조시도 창작하여 이 책을 편찬했다”는 점을 밝혔다.

『교방가요』 당시 진주의 교방에서 연행되던 악가무(樂歌舞)를 수록했다는 점에서 진주의 교방예술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수록된 악가무들이 비록 진주에서만이 연행되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직접 만든 ‘의암별제가무’의 절차를 상세히 수록해 진주 사람들이 그의 뜻을 계승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교방가요』는 풍교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현석 목사의 뜻이 담겨 있다. 1862년 이른바 임술민란(壬戌民亂)이라고 하는 진주농민항쟁이 진주에서 처음 일어나 시국이 불안했다. 정현석 목사는 불안한 시국 속에서 진주 사람들에게 민족적인 정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의암별제를 만들어 진주교방의 가요를 정착시키려 했던 것이다.

정현석 목사는 1867년(고종 4년) 진주목사로 부임, 그 이듬해 경상우병사와 의논하여 의기사(義妓祠)를 중수하고 의암별제를 만들었다. 1870년 정현석 목사는 김해부사로 부임했는데 『교방가요』는 진주목사로 부임해 편찬하기 시작해 김해부사 시절에 완성한 것이다.

초계정씨(草溪鄭氏) 족보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편에 따르면, 정현석 목사의 자는 보여(保汝)이고 호는 박원(璞園)이다. 1817년(순조 17) 1월 8일에 출생하여 1844년(헌종 10) 증광진사시에 합격해 음사(蔭仕)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시작으로 내직으로 삼조(三曹)와 사부(四府)를 두루 거치고, 외직으로는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호조참판을 지냈다. 1866년(고종 3)에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지냈으며 1867년 진주목사로 부임했다. 1883년에는 덕원부사(德原府使)로 부임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를 설립했다. 1894년에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899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교방가요』의 목차는〈총목(總目)〉과 〈무(舞)〉로 나누어져 있다. 〈총목(總目)〉은 우조(羽調)·계면(界面)·잡가(雜歌)·시조(時調) 부분으로 되어 있고, 〈무(舞)〉는 육화대(六花隊)·연화대(蓮花臺·附鶴舞)·헌선도(獻仙桃)·고무(鼓舞)·포구락(抛毬樂)·검무(劍舞)·선락(船樂)·항무(項莊舞)·의암가무(義巖歌舞)·아박무(牙拍舞)·향발무(響鈸舞)·황창무(黃昌舞)·처용무(處容舞)·승무(僧舞) 부분으로 되어 있다.

〈총목〉의 우조와 계면 부분은 가곡창(歌曲唱)에 필요한 시조 33수를 한역시(漢譯詩)와 함께 싣고 있다. 다음에는 우조시조(羽調時調)에 딸린 시조시(時調詩) 17수를 한역하고, 시조시 원문 3수만을 수록하였다. 또 계면시조(界面時調)에 딸린 시조시 25수를 한역하고, 시조시 원문은 5수만을 수록하였으며, 농시조(弄時調) 12수를 한역하고 원문은 8수만을 수록하고, 우락(羽樂) 3수, 계락(界樂) 3수, 편(編) 4수(시조시 원문은 3수)를 싣고 있다.

잡가 부분은 당시 진주교방에서 불리던 가사로, 권주가(勸酒歌) 여섯 수를 한역해 시와 원문을 함께 싣고 있으며, 그 외 「춘면곡(春眠曲·29句)」·「처사가(處士歌·30句)」·「양양가(襄陽歌·가사없음)」·「상사별곡(相思別曲·4句)」·「매화타령(梅花打令·6句·2句)」·「관동별곡(關東別曲·가사 없음)」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악기〉는 금류(金類:8종)·목류(木類:3종)·석류(石類:1종)·사류(絲類:9종)·죽류(竹類:12종)로 분류해 소개하고 있다.

〈무곡(舞曲)〉으로는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포구락(抛毬樂)·연화대(蓮花臺)·수보록(受寶籙)·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하황은(荷皇恩)·성택(聖澤)·하성명(賀聖明)·육화대(六花隊)·곡파(曲破)·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봉래의(鳳來儀)·아박(牙拍)·향발(響鈸)·무고(舞鼓)·학무(鶴舞)·황창무(黃昌舞)·처용가무(處容歌舞)·교방가요(敎坊歌謠) 등 23종의 정재곡목이 실려 있다.

다음에는 〈악사(樂詞)〉를 『악학궤범』에서 인용하여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악·연화대·육화대·곡파 등의 악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가품(歌品)〉이라고 하여 가곡창의 풍도(風度)를 초중대엽(初中大葉)·이중대엽(二中大葉)·삼중대엽(三中大葉)·후정화(後庭花)·이후정화(二後庭花)·초삭대엽(初數大葉, 또는 초수대엽이라고도 함.)·이삭대엽(二數大葉)·삼삭대엽(三數大葉)·편시조(編時調)·편락시조(編樂時調)·소용(搔聳)·편소용(編搔聳)·만횡(蔓橫)·편삭대엽(編數大葉, 또는 편수대엽이라고도 함.) 등 14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가절(歌節)〉에는 장구로 맞추는 가곡의 장단법인 매화점 장단을 그림으로 상세히 나타내고 있다.

〈여창(女唱) 실연도(實演圖)〉가 있는데, 기가(妓歌) 4명에 금(琴) 1명, 철사금(鐵絲琴) 1명이고, 악공(樂工)들은 세필률(細篳篥) 2명에 피리(笛) 1명, 해금(奚琴) 1명, 장고(杖鼓) 1명으로 되어 있다. 이어 창(唱)이라 하여 실제 연행장에서 가창물을 부르는 순서를 기록했다. 육화대·연화대·헌선도·고무·포구락·검무·선락·항장무·의암가무·아박무·향발무·황창무·처용무·승무 등 14종의 정재(呈才)가 소개되어 있는데, 실제로 진주교방에서 행해졌던 춤으로 그림까지 곁들여 설명을 하고 있다.

창가(倡歌)·잡요(雜謠)·단가(短歌) 항목이 있는데, 창가 항목은 춘향가·심청가·박타령·매화타령·토끼타령·화용도 등 판소리 6마당에 대한 짤막한 소개가 되어 있고, 잡희(雜戱)로 사당·풍각·초란·산대·곽독·취승 등을 소개하고 있다. 잡요 항목에는 산타령·놀량·방아타령·화초타령이 소개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단가 항목에 「환산별곡」을 소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교방가요』의 판본은 모두 3종으로, 표지의 제목들이 각기 다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교방가요(敎坊歌謠)』,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은 『교방제보(敎坊諸譜)』, 통문관 소장본은 『교방가보(敎坊歌譜)』로 되어 있다.

[진주 포구락무]

포구락은 제기처럼 수술이 달린 채구(彩毬)를 포구문(抛毬門)의 풍류안(風流眼)에 던져 넣는 놀이를 춤과 악과 노래로 형상화하는 궁중정재의 하나이다. 포구락은 고려 문종 27년(1073) 11월에 교방의 여제자 초영 등 13인이 중국으로부터 들여와 연희되었다. 그 후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중요한 궁중정재의 하나였던 것은 성종 때의 『악학궤범』과 고종 때의 정재 무도홀기에 의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춤이 고려 문종 때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조선조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로서 많이 상연되었고, 9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온 문화재적인 춤의 하나이다.

포구락 전승자 이윤례(李潤禮) 할머니의 회상에 따르면, 과거 진주교방에서 자주 연희되었다고 하며, 또 고종 때 진주목사였던 정현석의 기록인 『교방가요』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윤례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이 춤은 진주감영의 연회는 물론 매년 춘추로 촉석루에서 개최되던 의암별제(義巖別祭)·한시백일장(漢詩白日場)·향사례(鄕射禮)·투호례(投壺禮)·향음주례(鄕飮酒禮) 등에 추었다고 한다. 특히 향사례나 투호례에서 출 때는, 놀이가 끝나면 활 쏘는 남자들은 「선비가」를 불러 선창을 하고, 춤추던 여자들은 후렴을 받아 춤추며 흥겨운 한마당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의 진주 포구락의 끝 부분에 「선비가」를 부르게 된 것은 이것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진주 포구락무는 궁중정재의 그것보다 축소·변화되면서 민속화 되고, 진주지역 특성으로 전승된 것이다. 정현석의 『교방가요』에는 “여러 기녀들이 동헌 마당에 구문(毬門)을 설치하고 함께 절한다. 음악이 시작되면 쌍쌍이 마주 보고 춤을 추다가 기녀 두 사람씩 구문의 동쪽 서쪽으로 나누어 앉아 공을 가지고 놀다가 일어나서(다른 모든 기녀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공을 잡고 춤춘다. 왼손은 머리에 대고, 오른손은 높이 들고 풍류 눈구멍으로 던진다(여러 번 견주다가 던진다). 명중시키는 기녀에게는 꽃을 상으로 머리에 꽂아 주고 명중시키지 못하는 기녀는 뺨에 먹물을 찍는다. 만약 공이 떨어지기 전에는 도로 잡아 다시 던져, 그래도 맞추지 못하면 또한 같은 형식으로 벌을 준다. 만약 공이 풍류 안에 던져 떨어지지 않을 때는 상도 벌도 없게 된다. 나머지 기녀들도 차례로 짝지어 위와 같이 던진다. 의식이 끝나면 모두가 다 같이 어울려 함께 춤추다가 함께 절하고 물러난다(諸妓 置毬門於軒中 諸妓齊拜 樂作 雙雙對舞 每二妓 分坐於毬門東西 弄毬而起(餘妓休) 執毬而舞 左手擡頭 右手仰抛於風流眼中(屢提乃抛) 中者 揷花於髺 不中者 點墨於腮 若毬未及墜 而還執更抛 又不中者 亦如之 若抛毬於眼 而不墜者 無賞無罰 餘妓雙雙分抛如上 儀訖齊舞 齊拜而出)”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인 진주 포구락무 보유자 및 보유자 후보 현황은, 보유자 정금순(鄭今順)[1930년생. 1991. 12. 27 ~ 현재]과 보유자 후보 박설자(朴雪子)[1943년생. 1991. 12. 27 ~ 현재], 김행자(金幸子)[1942년생. 1991. 12. 27 ~ 현재]가 있다.

[진주 한량무]

한량무(閑良舞)는 양반 태생으로 과거에 급제를 못한 한량이란 호반(虎班)과 승려가 한 기녀를 사이에 두고 서로 유혹하는 내용을 무언극(無言劇)의 형태로 꾸민 무용극이다. 한량은 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 또는 돈 잘 쓰고 노상 놀고먹는 사람을 이른다. 이 춤은 조선 중기 이후 남사당(男寺黨)패들이 각지를 돌면서 각종 재주를 보이는 중간에 일종의 여흥으로 한량무를 추기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한량무는 한량과 중이 한 여인을 유혹하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한 무용극(舞踊劇)이다.

그 후 조선 말기까지 남사당패의 무동(舞童)들에 의해서 전승되다가 남사당패가 분산되면서 1910년 이후부터 이 춤은 어른들의 무용으로 기방에서 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 지역마다 각기 한량무와 유사한 춤들이 있었으나 거의 소멸되고, 오직 진주지역에서만 1969년도부터 강귀례(姜貴禮)로부터 재연되어 1979년도에 경상남도지방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춤은 권선징악의 교육적인 요소를 가지고 조선조 한때의 퇴폐한 사회상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진주 한량무 보유자는 김덕명(金德明)[1924년생. 한량역], 성계옥(成季玉)[1927년생. 승려역], 정행금(鄭幸今)[1936년생, 색시역], 최금순(崔今順)[여, 1930년생, 상좌역], 서정남(徐廷南)[1936년생. 별감역], 김연이(金蓮伊)[1936년생. 주모역], 김정애(金貞愛)[1938년생. 악사] 등이다.

[진주교방 굿거리춤]

진주교방 굿거리춤은 진주교방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굿거리춤을 말한다. 교방이 폐지되기까지 관기제도에 의해 전해오던 춤으로, 무속 금지령으로 무당들이 교방으로 유입되면서 굿거리춤이 되었다.

1900년대 이후 진주교방 굿거리춤은 승무와 더불어 예기들에 의해 교방에서 예술적으로 다듬어졌다. 고종 때 예기로 활동했던 최완자씨가 1940년대부터 지도하여 당대 명기들로 하여금 판소리와 함께 공연하였으며, 춤사위의 이름도 음악의 창법이나 가락의 호칭과 혼합하여 쓰게 되었다. 춤의 성격은 차분하면서 끈끈하여 섬세하면서 애절한 무태로서 정·중·동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 무아지경에 이르게 하는 매력을 갖추고 있다.

교방굿거리춤은 굿거리장단인 자진타령가락으로 시작하여, 염불가락에서는 타령가락보다 자진가락이 많이 들어간다. 차분하면서 끈끈하고, 섬세하면서 애절한 느낌을 준다. 굿거리장단의 하나인 3분박으로 외마치질굿보다 조금 빠른 자진 타령가락으로 시작하여 염불가락에서 타령가락보다 자진가락이 많이 들어가며 춤 동작이 복잡하고 즉흥적이다.

199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보유자 김수악[1926년생], 보유자 후보 정혜윤[1941년생]이 보존 계승에 힘쓰고 있다.

[의암별제]

1868년(고종 5년) 당시 진주목사 정현석은 경상우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의기사를 다시 중건한 뒤, 춘추로 두 번 지내던 제사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좋은 날을 택하여 논개에 대한 제향을 실시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의암별제이다.

진주목사 정현석은 당시 부패한 탐관오리와는 달리,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지방관이었다. 또 그는 당시 다른 수령들과는 달리 교방의 문화에 대한 애정어린 생각과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국악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판소리와 가무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이때 시작된 의암별제는 매년 6월 중에 좋은 날을 정해 지냈다.

의암별제는 모두 기생들로만 진행되었다. 악사를 제외하고는 제관과 연희자가 모두 여자들이었다. 초헌관을 비롯해 아헌관과 종헌관은 신망 있는 늙은 기생 중에서 뽑고 당상과 당하의 집례는 글을 아는 기생을 선임했다.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되면서 의암별제의 맥이 끊어졌다. 진주 기생들은 나라를 잃은 뒤에도 교방의 전통을 이어 진주권번 또는 진주기생조합을 만들어 의암별제를 전승하고자 했으나 이어갈 수 없었다. 당시 기생들은 조선 말 의암별제에서 가무를 했던 늙은 기생들의 뜻을 받들어 향불이라도 피우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의암별제는 결국 일제강점기 때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해방 후 의암별제는 복원되지 못하고 뜻있는 권번 출신 늙은 기생들에 의해 의기창렬회라는 단체를 통해 의기사에서 겨우 논개에 대한 제사만 지내왔다. 의기창렬회는 의암별제 복원을 최대의 숙원사업으로 삼았으나 구전과 기억에만 의존해 의암별제를 복원하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많았다. 그러다가 의기창렬회의 노기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의암별제도 사라질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의암별제는 사라지지 않고 부활된다. 조선 말 진주교방 출신의 최순이[1891~1973]와 성계옥에 의해서였다. 최씨는 생존 때 직접 참여한 의암별제의 모습을 자신에게 진주검무를 배우던 성계옥에게 전했다.

최씨는 조선 말 진주교방의 기생으로 9세 때부터 검무를 추는 한편, 궁중에 들어가 어전에서 연희를 했으며 논개의 제향을 할 때에도 검무를 추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최순이로부터 진주검무를 직접 전수받은 성계옥은 의암별제 복원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사라진 의암별제 복원을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연구하던 중 의암별제에 대한 문헌이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 수장고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정현석의 『교방가요』란 책을 입수하였다.

의암별제의 복원은 정현석이 지은 『교방가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방가요』에는 조선 말 실시되었던 의암별제에 대한 모습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현석이 지은 『교방가요』는 의암별제의 제례 과정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사실 복원에 있어 완벽한 복원을 가능케 했다. 결국 성계옥씨의 수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1986년『의암별제지』가 간행되었고, 이에 따라 그동안 구전으로만 떠돌던 의암별제 봉행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1992년 의암별제가 촉석루에서 재현되었다. 국권 상실로 단절된 의암별제가 8·15해방 이후 처음 열렸다. 일제에 의해 폐지된 지 82년만이었다.

의암별제는 지난 1992년부터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주관으로 촉석루에서 봉행해오다가 2004년 제3회 진주논개제 때부터 진주성 광장에서 봉행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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