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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속지 제6권/품행(品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10041

○ 민원(閔愿) : 자는 흥중(興仲)이요, 호는 석계(石溪)이며 본관이 여흥(驪興)이니 판서(判書) 민심언(閔審言)의 후손이다. 문과에 올라 직장(直長)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면서 행실은 방정했으며 목표하는 것은 높으면서 뜻은 넓었다. 충주(忠州) 음성(陰城)으로부터 옮겨와 진주의 옥봉(玉峰)에 살았다.

최원민(崔元敏) : 호는 죽계(竹溪)요, 본관이 삭녕(朔寧)이니 사간(司諫) 최복린(崔卜麟)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때 사촌형 최언양(崔言亮)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쳤고 난이 평정된 뒤 계유년에 진사에 합격했다.

○ 문상해(文尙海) : 자는 성용(聖用)이요, 호는 창해(滄海)다. 천성이 성효(誠孝)하더니 부모의 상을 당해서 슬퍼함이 예(禮)를 넘었다. 무신난(戊申亂)에는 향토의 선비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난이 끝난 뒤에는 은거하면서 혼자서 지내고 대명화시(大明花詩) 일 절(一節)을 읊어 풍천(風泉)의 감회에 붙였다.

○ 양순인(梁舜仁) : 자는 효수(孝叟)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증손이다. 벼슬이 만호(萬戶)에 이르렀으나 물러나서 벼슬하지 않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니 당시에 명망이 매우 드러났다.

○ 하응휘(河應彙) : 자는 회여(會汝)요, 호는 사시헌(四時軒)이다. 평생에 옛것을 좋아하고 학문을 즐기며 윤상(倫常)을 힘쓰고 의(義)를 소중히 여겼다. 「가자(家資)」와 「가훈(家訓)」 등의 편을 저술하여 자식과 조카들을 훈계했다. 문집(文集)이 있다.

○ 정대후(鄭大垕) : 자는 군징(君徵)이요, 본관이 초계(草溪)이다. 문학과 행의로써 칭찬을 받았다. 나이 91세에 수계(壽階)로 자헌(資憲)에 올랐다.

강진국(姜振國) : 자는 자유(子由)요,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의 현손이다. 당암(戇庵) 강익문(姜翼文)의 문하에서 유학하면서 학문하는 요지를 들었다. 일과 행실은 『덕천연원록(德川淵源錄)』에 보인다.

○ 이극민(李克敏) : 호는 매헌(梅軒)이요, 본관이 사천(泗川)이다. 효성과 우애가 하늘에서 나왔고 학문과 행의가 겸전했다. 경진년(인조 18년, 1640)에 특별히 별제(別提)로 불러 임경업(林慶業)의 막하에서 그를 돕기를 꾀하여 바다를 넘어가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임경업전(林慶業傳)』에 실려 있다. 봉강(鳳岡) 조겸(趙㻩)이 시를 지어 이를 찬미했다.

○ 하명세(河命世) : 자는 경현(擎玄)이요,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이다. 성품이 효성과 우애에 돈독했고 뜻은 맑고 깨끗한 것을 숭상했다. 욕심이 없어 고상하고 표일한 풍모가 있었다. 스스로를 송헌(松軒)이라 했다.

○ 성사묵(成師黙) : 자는 신언(愼彦)이요, 호는 도계(道溪)며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단아하여 학문이 있고 행의도 있어서 향리에서 추중(推重)했다.

○ 문응벽(文應璧) : 자는 벽경(璧卿)이요, 본관이 남평(南平)이니 성광(醒狂) 문할(文劼)의 5세손이다.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성벽이 있어 가방(佳坊)으로부터 미천(美川)과 함곡(函谷) 사이에 은거하여 욕심 없게 스스로를 즐기면서 평생을 마쳤다.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을 받았다.

○ 이정복(李挺復) : 자는 익첨(益瞻)이요, 호는 죽헌(竹軒)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 영특했고 문예가 일찍 성취되었다. 아우 죽파(竹坡) 이동복(李東復)도 또한 문학과 행의로써 칭송을 받았다.

○ 성사증(成師曾) : 자는 경유(景惟)요, 호는 금파(琴坡)이며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했으며 청검(淸儉)했다. 문학을 돈독하게 닦았으며 백씨 금계(琴溪) 성사안(成師顔)을 따라 힘써 노력하여 도움을 주고받으니 사람들이 원방(元方)과 계방(季方)으로서 비겼다.

○ 김시혁(金始赫) : 자는 경서(景瑞)요, 본관이 의성(義城)이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후손이니 김시채(金始采)의 아우다. 지촌(芝村)의 후사(後嗣)로 들어와 대를 이은 뒤로부터 심히 효행이 있었다. 또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일찍 『동강사우록(東岡師友錄)』을 편찬했다.

○ 하시명(河始明) : 자는 치응(雉膺)이요, 호는 월송(月松)이니 태계(台溪) 하진(河溍)의 후손이다. 출중한 커다란 절개가 있더니 을묘년(정조 19년, 1795)에 붓을 던지고 무과에 올라 구례현감(求禮縣監) 삼척진절제사(三陟鎭節制使)를 역임했다. 이르는 곳마다 맑은 덕이 있어 비를 세워 기렸다.

○ 김영기(金永耆) : 자는 영수(永叟)요, 호는 승암(勝庵)이며 본관이 의성(義城)이니 아호(鵝湖) 김휘운(金輝運)의 아들이다. 위의와 외모가 크고 훤칠했으며 풍치(風致)가 정성스러웠다. 문학과 행의로써 여러 번 유림(儒林)의 중망과 천거를 입었다. 유집(遺集)이 있다.

하진탁(河鎭卓) : 자는 자앙(子仰)이요, 호는 모죽재(慕竹齋)니 죽와(竹窩) 하일호(河一浩)의 아들이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젊어서부터 자제(子弟)에 대한 지나침이 없었다. 형제 네 사람이 평상을 맞대고 서로 힘을 써서 모두 이름과 실질이 있었다. 평생토록 그 선인(先人)의 전형(典型)을 통절히 사모하여 조그마한 집을 짓고 편액을 걸어 모죽(慕竹)이라고 했다.

○ 성필주(成弼周) : 자는 술여(述汝)요, 호는 탐청헌(探淸軒)이니 성성재(惺惺齋) 성황(成鎤)의 후손이다. 의표(儀表)가 굳세고 깨끗했다. 논의가 강직하니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그를 ‘세상을 먹일 만한 재주[需世之才]’라고 허락했다. 주고받은 글은 후손의 집에 갈무리해두었다.

이국헌(李國憲) : 자는 치로(致魯)요, 본관이 재령(載寧)이니 도와(道窩) 이덕윤(李德潤)의 증손이다. 타고난 자질이 민첩하고 재주와 슬기가 뛰어났다. 순조(純祖) 때에 사마시에 장원(壯元)으로 올라서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기더니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 하정범(河廷範) : 자는 인경(仁卿)이요, 호는 석천(石泉)이니 죽촌(竹村) 하윤일(河潤一)의 현손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위세와 무력으로써 그 뜻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넓은 학식과 올바른 행실로 당시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 김시진(金時震) : 자는 여원(麗元)이요, 본관이 강릉(江陵)이니 동애(東厓) 김헌(金獻)의 후손이다. 영조(英祖) 때에 무과에 올라 도총도사(都摠都事)가 되었더니 무신난(戊申亂)에 전공이 있어 원종훈(原從勳)에 기록되고 군기첨정(軍器僉正)에 제수되었다.

○ 김홍진(金弘鎭) : 자는 화현(華現)이요, 호는 야은(野隱)이며 본관이 의성(義城)이니 용호(龍湖) 김낙운(金樂運)의 손자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국량이 깊고 넓었다. 학문을 숙조(叔祖) 오연(梧淵) 김면운(金冕運)에게 배웠는데 권장하고 칭찬을 많이 받았다. 본주의 목사(牧使)가 다투어 조정에 천거했으나 갚아지지 않아 당시에 여론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정직(鄭直) : 자는 직경(直卿)이요, 호는 숙매(熟寐)니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경전을 넓게 보고 가정을 힘써 닦았다. 날마다 여러 형과 조카들을 한집에 모아서 강의하고 토구하는 것으로 서로 도왔다.

○ 성진민(成鎭民) : 자는 이습(而習)이요, 호는 금남(琴南)이니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더니 모친의 병중에는 손가락을 씹게 했고 아우의 병에는 새벽에 빌었다. 성품과 바탕이 너그럽고 국량이 크고 넓었다. 금호재(琴湖齋)를 증축하여 학문을 강의하는 장소로 삼았다.

○ 하계현(河啓賢) : 자는 능중(能仲)이요, 호는 묵와(黙窩)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아들이다. 문학으로써 이름이 당시에 알려졌다. 또 선인을 받드는 데 정성이 있었으니 종족에게 앞장서서 주장하여 시랑공(侍郞公) 하공진(河拱辰)의 별묘(別廟)를 진주 낙수암(晋州落水庵)에 세웠다. 유고(遺稿)가 있다.

○ 성치원(成致源) : 자는 효백(孝百)이요, 호는 양진당(養眞堂)이니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효도하며 공손한데다 인자하고 어질어서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일찍 고성(固城)에 옮겨 살면서 미암(美巖) 최규환(崔奎煥)에게서 배웠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나무하고 고기를 낚았으나 어버이 봉양에 맛있는 음식을 그치지 않았다. 나이 여든이 되어 송곡(松谷)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세상을 마쳤다

○ 하서범(河敍範) : 자는 내경(乃卿)이요, 호는 묵와(黙窩)다. 타고난 자질과 성품이 순후(醇厚)했다. 학업을 백부 국담공(菊潭公)에게서 받더니 뜻을 가다듬고 학문을 하여 문예가 일찍 성취되었다. 월포(月浦) 이우윤(李佑贇)과 진사 성경한(成慶漢) 등 여러 문인과 더불어 도의(道義)를 강마했다. 「심설(心說)」을 저술하여 배우는 사람에게 보였다.

정우윤(鄭瑀贇) : 자는 주범(周範)이요, 호는 간취당(澗翠堂)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타고난 바탕이 진중하고 관후했다. 풍류가 넓고 크더니 성재(性齋) 허전(許傳)·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 등 여러 어진 이들을 따라 놀아서 강마로 자익(資益)되었다. 서재를 살고 있는 집 서쪽 중턱에 세워 자식과 조카들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다.

정환대(鄭煥大) : 자는 성원(聲遠)이요, 호는 삼비재(三非齋)이며 본관이 연일(延日)이니 포은(圃隱) 선생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으로써 했고 집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게 했다. 스스로 감추는 것에 힘을 써서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이 서재 이름을 지었다.

○ 김두진(金斗鎭) : 자는 여원(汝元)이요, 본관이 의성(義城)이니 승암(勝庵) 김영기(金永耆)의 아들이다. 뜻을 돈독히 하여 힘써 배우고 거동이 아름답고 선인을 빛내니 일시에 이름난 덕망으로 추중(推重)하는 이가 많았다. 만년에 의령(宜寧)의 송산(松山)에 옮겨 살았기 때문에 호를 송산(松山)이라 했다.

○ 정호석(鄭顥錫) : 자는 노응(魯應)이요, 호는 지헌(芝軒)이며 본관이 해주(海州)이니 농포(農圃)의 주손(冑孫)이다. 올바른 행실로써 향당에서 칭송을 받았다.

강여완(姜汝完) : 자는 군기(君器)요,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손자다. 학업을 묵재(黙齋) 조석규(趙錫圭)에게서 받더니 독서의 큰 뜻에 통달했다. 또 뜻과 기상이 커서 작은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고 재주와 그릇이 남보다 컸다. 사람들이 재상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 성태수(成台秀) : 자는 희용(希用)이요, 호는 금파(錦坡)며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기상이 시원스럽고 행실이 단정하고도 엄숙했다. 유림(儒林)에 중요한 일이 공에게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 많았다.

○ 곽종린(郭鍾麟) : 자는 국서(國瑞)요, 호는 서주(西州)니 본관이 현풍(玄風)이다. 문장과 행의로써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백운동유계(白雲洞儒契)를 만들고 서문(序文)을 지어 변통했다.

○ 곽종승(郭鍾升) : 자는 영서(英瑞)요, 호는 봉남(鳳南)이다. 자질과 성품이 온아하고 공순했다. 풍의(風儀)가 단정하고 고왔으며 사부(詞賦)를 잘했다. 유고(遺稿)가 있다.

○ 최효숙(崔孝淑) : 자는 백온(伯溫)이요, 호는 삼수헌(三守軒)이며 본관이 삭녕(朔寧)이니 대사간(大司諫) 최복린(崔卜麟)의 후손이다. 고종 병오년에 진사에 올랐는데 풍신(風神)이 쇄락(灑落)하고 기골이 빙설(氷雪)과 같이 맑아서 한 점의 먼지도 없었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을 스승으로 삼았고 지와(芝窩) 정면교(鄭冕敎)와 쌍주(雙洲) 정세교(鄭世敎)와 친구를 맺어 잘 지냈다.

○ 하승락(河承洛) : 자는 우범(禹範)이니 하겸락(河兼洛)의 아우다. 일찍부터 궁마(弓馬)를 업으로 하여 능한 명성이 있었다. 일찍 거제부사(巨濟府使)가 되어 치적이 있었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형을 섬기기를 엄한 부친을 섬기는 것과 같이 했으며 또 종족에게도 화목하여 모두 환심을 얻었다.

○ 하석락(河錫洛) : 자는 우선(禹善)이요, 호는 의소헌(宜笑軒)이니 사헌(思軒) 하겸락(河兼洛)의 아우다. 무과에 올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선전관(宣傳官)·연산현감(連山縣監)·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풍채가 사람을 찌르는 듯이 비추고 뜻과 기상이 맑고 소탈하니 대원군(大院君)이 ‘한 집안에 세 가지 어려움을 이겼다[一家三難]’고 칭찬했다.

○ 성경혁(成慶奕) : 자는 성연(聖淵)이요,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공금당(共衾堂) 성동일(成東一)의 맏손자이다. 벼슬이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더니 유자(儒者)로서 고아하고 공손하고 검박했다. 다른 사물에 다툼이 없으니 사람들이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양혁수(梁奕洙) : 자는 자산(子山)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일을 따라 학문을 하더니 명경(明經)을 업으로 하여 과거에 오른 뒤에 전적(典籍)에 올랐다.

○ 한두원(韓斗源) : 자는 원칠(元七)이요, 호는 만오(晩悟)니 병사(兵使) 한범석(韓範錫)의 손자다. 무과에 올라 부장(部將)이 되었는데 의표(儀表)가 맑고 빼어났으며 행동거지가 단아했다. 만년에는 산업을 일삼지 않고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했다.

○ 백남두(白南斗) : 자는 성칠(星七)이요, 호는 운서(雲西)니 본관이 수원(水原)이다. 웅장하고 호방한 기개가 있었고 사우(士友)들이 추중(推重)했다.

○ 성석주(成奭柱) : 자는 경천(擎天)이요,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벼슬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이르렀다. 성품이 굳세고 재주와 국량이 넓고 관대했다. 발언을 하매 일을 잘 분간하니 사람들이 모두 경복했고 한때의 이름난 큰 선비들과 함께 추종하여 따르면서 강마했다.

○ 강상오(姜相五) : 자는 주호(周祜)요, 호는 매하(梅下)니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학업을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받더니 화려한 명성이 일찍부터 드러나서 동문의 벗들이 많이 추중(推重)했다. 어버이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쏟아 넣어 3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함이 지극했다.

○ 강건(姜鍵) : 자는 계현(啓玄)이요, 호는 매오(梅塢)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매촌(梅村) 강득룡(姜得龍)의 후손이다. 스스로 고요함을 지키면서 과거 공부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뒤에 원근의 인사들이 모두 ‘착한 사람이 갔다.’라고 일컬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 성칠규(成七奎) : 자는 국현(國顯)이요,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의표가 빼어났다. 평생토록 『중용(中庸)』 읽기를 좋아했다. 스스로 퇴장헌(退藏軒)이라 부르고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죽파(竹坡) 양식영(梁湜永)와 더불어 놀아서 많은 도움과 이익이 있었다. 불행히도 수명이 짧으니 향당에서 애석히 여겼다.

○ 이희구(李熙龜) : 자는 백경(伯敬)이요, 호는 삼산(三山)이니 성암(省庵) 이문모(李文模)의 아들로서 본관이 재령(載寧)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어질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고 지극했다. 또 남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동네 가운데 빈궁한 이들이 힘입어 끼니를 잇게 된 자가 심히 많았다. 학문과 행실이 모두 갖추어졌고 이름과 실제가 모두 높았다. 당시에 사람들이 공을 존경하고 우러르기를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다고 했다.

○ 하제명(河濟明) : 자는 운견(雲見)이요, 호는 술헌(述軒)이니 태계(台溪) 하진(河溍)의 후손이다. 성품과 도량이 청렴하고 개결하며 행의가 굳고 확실했다. 병신년(고종 33년, 1896)에 고을의 추천으로 연계재(蓮桂齋)지도보기를 옮겨 세우는 일을 주관했다.

○ 정인교(鄭仁敎) : 자는 성오(聖五)요, 호는 송암(松巖)이니 본관이 해주(海州)이다. 뜻을 지키는 것이 굳고 확실하여 그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않고 그 의(義)가 아니면 취하지 않았다. 뜻을 벼슬길에서 끊고 자취를 임하(林下)에 숨겨 시서(詩書)로써 혼자 즐겼다.

○ 하긍명(河亘明) : 자는 운일(運一)이요, 호는 누와(漏窩)다. 덕(德)을 임천(林泉)에서 기르고 효성과 우애로 집을 다스렸다. 나이 예순을 넘겨서 거상(居喪)에 예를 다했다. 젊어서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을 따라 배웠고 또 후산(后山) 허유(許愈)·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자동(李紫東)·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등 여러 어진 이들과 함께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강문오(姜文伍) : 자는 성언(成彦)이요, 호는 수죽(水竹)이니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용모가 단정하여 빼어났고 재주와 슬기가 영특했다. 장중하고 간묵함을 스스로 지켜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죽오(竹塢) 하범운(河範運)을 따라 배웠고 문집(文集)이 있다.

○ 최제효(崔濟斅) : 자는 순약(淳若)이요, 호는 운강(雲岡)이며 본관이 전주(全州)이니 계남(溪南) 최숙민(崔淑民)의 아들이다. 천성이 온후하고 집안의 학문을 복습했다.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즈음에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실천했으며 육예(六藝)의 문장에서 그 흐름을 섭렵하고 근본을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 조봉순(曺鳳淳) : 자는 호집(鎬集)이요,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며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남명(南冥) 선생의 후손이다. 일을 따르는 학문으로 명경과(明經科)를 업(業)으로 하더니 사우(士友)들에게 명망이 있었다.

정광우(鄭光祐) : 자는 치경(致敬)이요, 호는 기재(跂齋)니 본관이 해주(海州)이다. 효성스럽고 우애한데다 염직(廉直)하여 이익을 경영하지 않고 착한 일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했다. 병자·정축 두 해의 흉년 때 공에게 힘입어 목숨을 산 사람이 많았다. 당시에 ‘남주의 선인(善人)’이라는 칭찬이 있었다.

○ 강봉호(姜俸鎬) : 자는 백원(伯元)이요, 호는 담재(澹齋)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진사 강성관(姜聖綰)의 아들이다. 품성이 청명하고 행의가 단아하고 엄정했다. 벼슬이 참봉(參奉)에 이르렀으며 노백(老柏) 정재규(鄭載圭)를 스승으로 받들어 문학의 명망이 있었다.

○ 강우온(姜宇蘊) : 자는 휴중(休重)이요, 호는 만울(晩蔚)이니 농와(聾窩) 강곤(姜睔)의 아들이다. 타고난 바탕이 온화하고 빼어났다. 힘써 배우고 스스로 지키며 마음을 기울여 의(義)로 향하니 사람에게 추천되어 여러 번 빛나는 천거에 들었다.

○ 하성원(河聖源) : 자는 희백(羲伯)이요, 호는 태주(台洲)니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높은 기개가 있었으며 모든 유림(儒林)에 일이 있으면 정성을 다하고 힘을 폈다.

○ 하재한(河載瀚) : 자는 우범(禹範)이요, 호는 성와(省窩)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이다. 용모와 위의가 단아하고 품성이 우뚝했다. 옛것을 좋아하고 뜻을 숭상하여 궁색해도 원망하지 않았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공부했다. 유고(遺稿)가 있다.

○ 조용승(曺勇承) : 자는 치열(致悅)이요, 호는 삼산(三山)이다. 형상과 용모가 웅장하고 지기가 뛰어났다. 경인년에 서울에 가서 당로자의 천거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다. 얼마 후에 내무부주사(內務部主事) 겸 세자종승(世子從乘)으로 옮겼다가 또 얼마 안 되어 중부령(中部令)에 옮겼다. 이때는 국가에 어려움이 많고 역괴(逆魁)들이 조정의 권력을 도적질하므로 공은 동지 두어 사람과 함께 죽이기를 도모했다. 일이 발각되어 도리어 붙잡히게 되니 적이 성을 내어 국문(鞠問)했으나 의연한 태도로 꺾이지 않고 혀를 깨물어 피를 흘려 변하지 않는 뜻을 보였다. 감옥에 갇혔다가 달을 넘겨 백령도(白翎島)로 추방당했다.

○ 박영찬(朴榮纘) : 자는 이술(而述)이요, 호는 일암(逸庵)이니 본관이 태안(泰安)이다. 그릇과 국량이 확 트여서 능히 일을 생각하여 잘 판단했다. 태상왕(太上王) 병인년에 선공랑(繕工郞)에 제수되었더니 직에 나아간 지 10일 만에 사임장을 올렸다. 정자를 선조의 묘 아래에 세우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며 세상과 더불어 서로 잊었다.

○ 정동윤(鄭東允) : 자는 기여(紀汝)요,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퇴헌(退軒) 정천익(鄭天益)의 후손이다. 벼슬이 참봉(參奉)에 이르렀더니 타고난 자질이 장대하고 기량이 크고 깊었다. 풍채와 언론으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성품이 또 인자하고 은혜로워 예의와 법도로 은근히 움직이니 귀천(貴賤)이나 현우(賢愚)가 추중(推重)하고 신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문기우(文起羽) : 자는 남거(南擧)요, 호는 해사(海史)니 본관이 남평(南平)이다. 재주와 학술이 남보다 뛰어났다.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고 자신을 검속하는 데에는 방도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정택교(鄭宅敎) : 자는 순오(舜五)요, 호는 수졸(守拙)이니 본관이 해주(海州)이다. 바탕이 순박하고 식견이 바르며 조행과 실천이 고아하고 부지런했다. 벼슬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이르렀다.

○ 양주한(梁柱漢) : 자는 경수(擎秀)니 본관이 남원(南原)이다. 기절(氣節)과 재간이 있었다. 임신년에 강화(江華)에서 있은 양이(洋夷)의 난리를 막는 일에 공이 있었으므로 공주중군(公州中軍)에 올랐다가 경성병마우후(鏡城兵馬虞候) 겸 토포사(討捕使)로 옮겼다. 이르는 관방(關防)마다 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 손영원(孫永源) : 자는 대칙(大則)이요, 호는 한파(寒坡)니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학문이 넓고 도가 바른데다가 많이 들었으되 평생토록 높은 관과 해진 베옷으로 독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 김호영(金鎬永) : 자는 명부(命敷)요, 본관이 의성(義城)이다. 젊어서부터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했다.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니 네 번이나 향시에 갔었으나 예부의 시험에서 합격되지 못했다. 진실되게 궁구하면서 도(道)를 지켰다. 유고(遺稿)가 있다.

○ 정구교(鄭九敎) : 자는 의로(義老)요, 본관이 해주(海州)이니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기상과 도량이 우뚝하고 눈빛이 밝았다.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문예가 일찍 성취되니 사우(士友)들이 이를 칭송했다.

하재구(河載九) : 자는 주용(疇用)이요, 호는 모산(慕山)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인 각재(覺齋) 하항(河沆)의 후손이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더니 학업을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받았다. 뜻이 부지런하고 배움을 독실히 하여 교유하는 바가 매우 넓었다.

○ 조창래(趙昌來) : 자는 우언(禹言)이요, 호는 가정(稼亭)이며 벼슬이 승훈랑(承訓郞)과 사과(司果)에 이르렀다. 품성이 웅장하고 두루 다하며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되 항상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이 했다. 선조를 섬기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이 있었으니 충의공(忠毅公)의 비각(碑閣)을 중건하는 일이나 송객정(送客亭)에 비(碑)를 세우는 일은 모두 공이 자비로 부담해 이룬 것이다.

하재화(河載華) : 자는 복경(復卿)이요, 호는 여인헌(與人軒)이니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갑오년(고종 31년, 1894)에 진사가 되고 나라에 변란이 있은 뒤로부터는 유도(儒道)를 높이고 지키는 일에 힘을 다했다. 덕천(德川)의 경의당(敬義堂) 및 도동서당(道洞書堂)은 모두 공이 제창하고 주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 하계룡(河啓龍) : 자는 단파(丹坡)니 농와(農窩) 하익범(河益範)의 후손이다. 부지런히 배우고 독실한 실천으로 지극한 효성을 다해 어버이를 섬겼다 유고(遺稿)가 있다.

○ 한종원(韓鍾源) : 자는 성윤(聖允)이요, 호는 단호(丹湖)이며 본관이 청주(淸州)이니 사예(司藝) 한여철(韓汝哲)의 후손이다. 타고난 바탕이 온화하고 뜻을 세운 것이 확고했으며 영리를 구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단성(丹城)의 송계(松溪)에 우거(寓居)했는데 학산(學山) 박상태(朴尙台)와 혜산(惠山) 이상규(李祥奎)와 더불어 친교를 삼았다.

○ 김한영(金翰永) : 자는 처중(處中)이요, 본관이 의성(義城)이니 경오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호방하여 얽매이지 않은데다가 풍채가 더해져서 주위를 경복하고 압도시켰다. 상국(相國) 한계원(韓啓源)과 상국(相國) 유후조(柳厚祚)와 승선(承宣) 오덕영(五德永)과 더불어 가장 친했다.

정철기(鄭喆基) : 자는 응현(應賢)이요, 호는 옥초(玉樵)이며 본관이 연일(延日)이니 포은(圃隱) 선생의 후손이다. 풍신(風神)이 출륜(出倫)이었고 기상이 높으니 사람들이 경외(敬畏)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주(本州)의 병영(兵營)이 임술란을 겪은 뒤로부터 창고가 비게 되었는데 공이 쌀 천 석의 대가(代價)를 바쳤다. 본영(本營)에서는 ‘연일정씨의창(延日鄭氏義倉)’이라는 여섯 글자를 창고의 문 바깥에 써서 달았다. 또 조정에 전보(轉報)하니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했다.

○ 최정모(崔珽模) : 자는 태호(泰互)요, 호는 월강(月岡)이니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훌륭한 덕을 실행하고 유자(儒者)다운 전아한 풍류로 사우(士友)들에게 무게 있게 보였다.

○ 강면호(姜冕鎬) : 자는 주오(周五)요, 호는 만산(晩山)이다. 타고난 천품이 넓고 후덕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독실했다. 경전의 뜻을 강의하여 밝혔다. 일찍 어버이의 명령에 의지하여 과거를 보았으나 세상의 도리가 날로 잘못 되어가는 것을 보고 과거 보는 것을 거두어들였다.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여 이르기를 “천 가지 삿된 일과 만 가지 착한 일을 알고자 하면 모름지기 교만하고 인색한 마음과 혼자 있을 때를 삼가해야 함을 구별해야할 것[欲知千邪與萬善 須辨驕吝與愼獨]”이라 했다. 아우 동파(桐坡) 강찬호(姜燦鎬)와 더불어 서로 노력하면서 도움을 가졌다. 유집(遺集)이 있다.

○ 김창수(金昌壽) : 자는 윤보(允甫)니 헐후(歇厚) 김택영(金宅永)의 손자다.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기상과 도량이 우뚝하니 뛰어났다. 향당에서 그 덕과 의리에 감복해 ‘고가(古家)의 전형(典型)’이라고 칭송했다.

○ 이수일(李壽壹) : 자는 경빈(景賓)이요, 호는 후오(後嗚)이며 본관이 재령(載寧)이다. 자상하고 정밀했으며 기민하고 돈독하게 문학을 닦았다. 일찍 아버지를 잃은 후엔 형을 섬기기를 엄한 부친과 같이 했다. 자기 집의 있고 없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힘을 오로지하여 형을 받들었으며 십여 년이 되도록 맛있는 음식을 끊이지 않았다.

○ 김대림(金大林) : 자는 양극(養克)이요, 호는 노호(蘆湖)이며 본관이 의성(義城)이니 정자(正字) 김구락(金龜洛)의 아들이다. 성품이 전아하고 깨끗했다. 넉넉한 힘을 유림(儒林)의 일에 다하기를 좋아했다. 용강서당(龍江書堂)의 창건과 『윤백호집(尹白湖集)』의 간행과 보급에 특별히 공로가 있었다.

○ 박재구(朴在九) : 자는 춘여(春汝)요, 호는 삼호(三浩)이며 본관이 춘안(春安)이니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후손이다. 풍채와 위의가 뛰어나고 단정했으며 언론이 강직했다. 무릇 유림(儒林)에 일이 있으면 힘을 펴는 바가 많았다.

○ 한사원(韓士源) : 자는 정현(正賢)이요, 호는 은헌(隱軒)이니 봉악(鳳岳) 한봉일(韓鳳逸)의 후손이다. 타고난 바탕이 빛나고 맑았다. 기상과 도량이 높고 뛰어나 향리에서 추중(推重)되었다.

정호용(鄭浩鎔) : 자는 학연(學然)이요, 호는 만초(晩樵)니 정철기(鄭喆基)의 아들이다. 기상과 국량이 엄정하고 빼어나 금도(衿度)가 의연(毅然)했다. 젊어서 무과에 올라 장위영참군(壯衛營參軍)에 기용되었다가 얼마 후에 시종원우시어(侍從院右侍御)에 올랐다. 직분을 봉행함에 매우 부지런하더니 을미년에 왜병이 대궐을 범하는 일이 있었을 때에 선전관(宣傳官) 윤영선(尹映宣)과 함께 칼을 차고 바로 궐 아래로 달려갔다. 거의 창끝과 화살촉의 피해를 입을 뻔하다가 마침내 옥체에 탈이 없는 것을 탐지(探知)했다. 이로써 동료들로부터 공경하고 존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이수록(李壽祿) : 자는 남구(南區)요, 호는 매사(梅史)다. 천성이 강직하고 풍채와 위의가 단아하며 실천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하여 조금도 위의를 잃지 않았다. 평생에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법을 배우더니 깊이 정수를 얻었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공이 손수 심은 반매(盤梅)를 감상하고서 시를 써주었다.

○ 구연학(具然學) : 자는 도빈(道彬)이요, 호는 능암(綾巖)이니 본관이 능성(綾城)이다.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봉명사(奉命使)가 되어 입직했다. 시사(時事)가 날로 어그러지는 것을 보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처신하기를 경(敬)으로써 했는데 평소의 기거에서도 일찍이 반듯이 눕지 않았다.

○ 성치민(成致珉) : 자는 오현(五睍)이요, 호는 죽사(竹史)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성품이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학문을 연구 실천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자 상제(喪制)에 예(禮)를 다했다. 늙음에 이르러서도 법규를 잃지 않으니 향리에서 ‘숨은 덕[隱德]’이라고 칭송했다.

○ 허만순(許萬純) : 자는 태현(泰顯)이니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풍채가 수양으로 단정했고 언사가 큰비가 쏟아지듯 하며 편지 쓰기를 잘하니 후생들이 많이 사모했다. 나이 마흔이 되고서야 벼슬에 올라 주사함(主事啣)에 제수되고 또 참서관(參書官)이 되었다.

정상우(鄭象禹) : 자는 복여(福汝)요, 호는 운파(雲坡)니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천성이 영민하고 재예가 남보다 뛰어났다. 단계(端溪) 김인섭(金麟燮)·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을 따라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고 학문을 닦았다. 우곡정(隅谷亭)의 중수(重修)와 『실기(實記)』의 간행 등은 모두 공이 힘을 편 것이다. 수직(壽職)으로 가선(嘉善)에 올랐다.

○ 유진필(柳震必) : 자는 경선(景善)이요, 호는 홍주(鴻洲)니 훈신(勳臣) 유사(柳泗)의 후손이다. 무과에 올라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의관(議官)이 되었다. 위의와 체모가 빼어나게 웅위했고 말과 의논이 시원하여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다.

○ 정휘균(鄭彙均) : 자는 응락(應洛)이요, 호는 금와(金蛙)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자상하고 부드럽고 공경한데다가 또 재주와 행실이 있었다. 단계(端溪) 김인섭(金麟燮)의 문하에 출입했다.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유고(遺稿)가 있다.

○ 정인석(鄭麟錫) : 자는 윤형(允亨)이요, 호는 농운(農雲)이다. 진사에 합격하고 문학의 명망이 있어서 향당에서 추중(推重)했다.

○ 정제화(鄭濟和) : 자는 군필(君弼)이요, 호는 노동(老桐)이니 본관이 오천(烏川)이다. 타고난 바탕이 꿋꿋하여 비록 급하고 어려운 일이 앞에 닥치더라도 말이나 얼굴빛을 변하지 않았다. 가난이 뼈에 사무쳐도 대처하기를 태연히 했다.

○ 한창동(韓昌東) : 자는 남진(南振)이니 병사(兵使) 한범석(韓範錫)의 후손이다. 행의가 단정하고 장중했다. 의표가 빼어나고 엄정하니 향당에서 군자(君子)라고 일컬었다.

○ 정준석(鄭駿錫) : 자는 덕경(德卿)이요, 호는 송파(松坡)다. 타고난 성품이 자상하면서도 민첩했으며 온아한데다가 몸을 부지런히 하여 비루함이 없으니 향당에서 칭송했다.

○ 하홍규(河洪逵) : 자는 의경(毅卿)이요, 호는 강헌(剛軒)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약헌(約軒) 하용제(河龍濟)의 아들이다. 명문가의 맏손자로써 집안에서의 행실이 독실하니 유림의 명망이 매우 드러났다.

○ 강성조(姜聖祚) : 자는 무응(武應)이요, 호는 설림(雪林)이다. 의표가 단아하고 행의가 순전함을 갖추었다. 단계(端溪) 김인섭(金麟燮)의 문하에 출입하여 많은 가르침을 입었다. 만년에는 서소대(舒嘯臺)를 세워 시를 읊는 장소로 삼았다.

○ 이수희(李壽熙) : 자는 천로(天老)니 본관이 재령(載寧)이다. 벼슬이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뜻과 기상이 꿋꿋하고 분명했으며 의표가 맑고 빼어났다.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과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 더불어 사돈간이 되었다. 서로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고 만년에는 명옥정(鳴玉亭)을 세워 평생을 마쳤다.

○ 정영훈(鄭英壎) : 자는 희도(希道)요, 호는 농산(農山)이니 벼슬이 승훈랑(承訓郞)·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이었다.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했다. 어진 이를 사모하고 선조를 이어가는 데는 재력을 아끼지 않았다. 도남서실(道南書室)을 세워 쉬는 장소로 삼았다.

정규석(鄭珪錫) : 자는 성칠(聖七)이요, 호는 성재(誠齋)며 본관이 해주(海州)이니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의 후손이다. 침착하고 무겁게 행동했으며 말이 적었고 남의 장단점을 거론하지 않았다. 중년에는 단계(丹溪)에 옮겨가서 살면서 경전과 서적을 스스로 즐겼다. 『사서요선(四書要選)』과 『시람요찬(時覽要簒)』 각각 1책씩을 지어서 집에 소장했다.

○ 이갑종(李甲鍾) : 자는 성률(聖律)이요, 호는 국파(菊坡)니 본관이 재령(載寧)이다. 사람됨이 고아하고 부지런했다. 풍류가 온순하고 상냥했으며 교유하는 이들이 모두 일시의 명사였다. 즉 청계(晴溪) 최동익(崔東翼)과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 더불어 강마하는 도움을 가졌다.

○ 김창조(金昌祚) : 자는 윤겸(允謙)이니, 헐후(歇后) 김택영(金宅永)의 손자다. 타고난 성품이 꿋꿋하고 뜻과 기상이 고결했다. 문 앞에 손수 심은 한 그루 소나무가지와 줄기에 혹 같은 종기와 수염이 아래로 드리워져서 맑은 그늘이 땅에 가득했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스스로 돌아보니 솔이 나를 따르는가? 나는 나의 솔을 얻었는데 솔도 나를 얻었구나. 추운 겨울이 되어서도 절개를 바꾸지 않으니, 뜰 가에 서 있으면서 나의 즐거움을 유지한다네.[撫松自顧追松吾 吾得吾松松得吾 不改歲寒然後節 立如庭畔樂支吾]”라 했더니 이어 송오(松吾)라고 불렀다.

○ 한석동(韓碩東) : 자는 한약(漢若)이요, 호는 평은(坪隱)이다. 본관이 청주(淸州)이니 조은(釣隱) 한몽삼(韓蒙參)의 후손이다. 기골이 빼어나고 성품과 도량이 크고 깊었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섬김에 매우 효성스러웠다. 모부인이 중풍을 앓아 10년을 누워 있었으나 시탕(侍湯)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 허진(許稹) : 자는 청여(淸汝)요,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효성스럽고 우애함이 순박하고 지극했다. 풍의(風儀)가 단정하고 깨끗하니 사람들이 ‘덕이 있는 군자[有德君子]’라 일컬었다.

○ 이현도(李鉉道) : 자는 선일(善一)이요, 호는 성산(聲山)이며 본관이 재령(載寧)이니 영모재(永慕齋) 이인모(李麟模)의 증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니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목숨을 대신해주기를 빌었다. 상(喪)을 당해서는 3년 동안 목욕하지 않고 빗질을 하지 않았다. 집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서 규문(閨門)의 엄숙함이 조정과 같으니 당세의 덕망 있는 장로들이 ‘법도가 있는 집’이라고 칭찬했다.

○ 김용호(金容鎬) : 자는 주행(周行)이요, 호는 연호(蓮湖)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시원스러웠으며 신채(神彩)로 사람을 움직였으며 문장이 우뚝했다. 일찍이 서울의 과거장에 갔더니 어느 재상가에서 요청하기를 그의 아들과 과거장을 함께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공이 사례하여 이르기를 “어찌 독서한 사람으로서 남에게 굴종하면서까지 영화를 구하겠습니까?” 라 하고 이 뒤로부터 과거 보는 것을 포기하고 늙을 때까지 마쳤다.

○ 신종심(愼宗心) : 자는 처용(處庸)이요, 본관이 거창(居昌)이니 사과(司果) 신병조(愼炳朝)의 아들이다.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아래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구하(九下)라고 불렀다. 아버지 사과공(司果公)은 얽매이지 않는 큰 뜻이 있었는데 일찍이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다. 물러나서 드디어 처음으로 일삼는 것이 부자(父子)와 조손(祖孫)이 한집에서 글을 읽는 것이었다.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만학천산에 눈이 가득 쌓였는데, 한집에서 삼대가 함께 시를 읊는구나.[萬壑千山都積雪 一堂三代共吟詩]”라 했다. 궁하게 사는 것을 스스로 즐기면서 가난을 이유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 문호현(文頀鉉) : 자는 은용(殷用)이요, 호는 관거(冠居)다. 성품이 꿋꿋하여 곧으면서 기개가 있었다. 자신을 검속하는 것으로 가정을 다스려 집안의 가르침을 떨어뜨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했다.

○ 이달모(李達模) : 자는 긍심(亘心)이요, 호는 묵와(黙窩)니 본관이 철성(鐵城)이다. 체구가 크고 기상과 국량이 깊었다. 독실하게 학문을 닦되 힘을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에 쓰니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 허만해(許萬海) : 자는 우영(禹榮)이요, 호는 어산(於山)이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럽고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행동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했고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예를 지극히 갖추었다. 또 곤궁한 사람을 넉넉히 하고 가난한 자를 구휼하기를 범문정공(范文正公)의 의장고사(義庄故事)와 같이 했다.

○ 하영규(河泳奎) : 자는 경실(景實)이요, 호는 사계(士溪)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후손이다. 성품이 중후하고 질박하고 곧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독서와 치산(治産)에 고풍스런 집안의 규범이 있었다.

○ 성의주(成毅柱) : 자는 재일(在一)이요, 호는 소와(小窩)니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성품과 도량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의표가 단중하더니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과 수재(修齋) 김재식(金在植)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제했다.

○ 이병곤(李炳坤) : 자는 정부(正夫)요, 호는 괴당(槐堂)이며 본관이 성산(星山)이니 이호근(李鎬根)의 아들이다. 벼슬은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이었다. 어려서부터 학업을 월연(月淵) 이도추(李道樞)에게서 받았다. 상세하고 분명하여 영특하게 깨달았으며 효우(孝友)와 충신(忠信)으로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 하장식(河章植) : 자는 문휴(文休)요, 호는 모산(某山)이니 월호(月湖) 하계효(河啓涍)의 아들이다.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학문과 행실을 겸하여 갖추니 사람들이 옛날 집안의 남겨진 법이라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 한세동(韓世東) : 자는 국필(國弼)이요, 호는 죽암(竹庵)이니 한무원(韓武源)의 아들이다. 기품이 호탕하고 영매했고 성품과 도량이 온후하여 사람을 덕으로써 대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제했다.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장례 때에 곡반(哭班)에 참예했다가 여러 의사(義士)와 더불어 3·1운동(三一運動)을 일으키도록 꾀했다. 늦게는 죽암정사(竹庵精舍)를 세워 소요자적(逍遙自適)했다.

○ 성일주(成一柱) : 자는 경은(敬殷)이요, 호는 농은(農隱)이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했으며, 화목하여 선인의 교훈을 따라 지킬 뿐이고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 이영하(李英夏) : 자는 충일(忠一)이요,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집안의 가르침을 익혀서 일찍부터 당시의 명망이 있었다. 유림(儒林)의 중대한 일에 있어서는 힘을 편 것이 많았다.

○ 강낙구(姜洛九) : 자는 맹범(孟範)이요, 호는 석천(石泉)이다. 타고난 바탕이 순후하고 지조와 행실을 부지런히 닦았다. 일찍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학문에 마음을 다했다. 날마다 천상정(川上亭)에 있으면서 여러 벗들과 더불어 문학을 논하고 예(禮)를 강했다. 풍류로 술 마시고 시를 읊으며 욕심없이 스스로 즐겼다.

○ 김후세(金厚世) : 자는 인언(仁彦)이요, 본관이 김녕(金寧)이니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다. 일찍부터 궁마(弓馬)를 일삼더니 늦게야 학문을 좋아했고 벼슬은 만호(萬戶)에 이르렀다.

○ 전기주(全基柱) : 자는 방언(邦彦)이요, 호는 국포(菊圃)며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의 후손이다. 노백(老柏)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여러 번 장려와 허여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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