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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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씨(崔氏) : 영암(靈巖)의 선비 최인우(崔仁佑)의 딸로 주의 호장(戶長) 정만(鄭滿)에게 시집갔다. 홍무(洪武) 기미년(우왕 5년, 1379)에 정만이 일 때문에 서울에 갔는데 적이 마을에 들어왔다. 최씨는 바야흐로 나이 젊고 자색이 있었는데 적이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므로 나무를 안고 막다가 분을 내어 꾸짖고 죽었다. 그 뒤 10년이 되는 기사년에 도찰사(都察使) 장하(張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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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씨(鄭氏) : 승지(承旨) 조지서(趙之瑞)의 아내니 포은(圃隱) 선생 정몽주(鄭夢周)의 증손이다. 연산군(燕山君) 을축년에 조지서가 해를 만나 죽고 재물과 집이 모두 몰수되고 못을 파게 되었다. 정씨는 그 곁에 여막을 짓고 남편의 입던 옷을 걸어놓고 제사를 올리면서 3년을 마쳤다. 중종(中宗) 2년에 정려(旌閭)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안씨(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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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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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최운개(崔云凱)의 딸이요, 승사랑(承仕郞) 진양(晉陽)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임진년에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항상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써 죽음을 결단할 것”이라고 했다. 해를 넘겨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과연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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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의 열녀. 윤선랑은 본래 함안 양가의 딸이었는데 1876년(고종 13)에 큰 흉년을 당하여 일가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진주 청원촌(淸源村)에 이르러 최씨 집안의 불 때는 종이 되었다. 주인의 어머니가 몹쓸 병이 들자 정성껏 간병하였고, 남편이 사망하자 그 시어머니를 잘 봉양할 것을 동서에게 부탁하고 후사를 세워 남편의 뒤를 이어줄 것을 시동생에게 부탁한 다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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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출신의 대중가요 가수. 1918년 10월 18일에 경상남도 진주시 하촌동 194번지에서 태어났다. 남인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최씨 문중에서 태어난 남인수(당시 이름은 최창수(崔昌洙))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머니(장하방 씨)가 강씨 문중으로 재가(再嫁)를 하게 되어 이름을 강문수(姜文秀)로 바꾸었다는 말도 있고, 어렸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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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하여 음식물을 먹는 일, 혹은 이와 관련된 생활 자체를 이르는 말. 식생활에는 넓게는 음식물 자체와 음식물을 가공하는 조리 방법, 그에 필요한 조리기구, 식기, 식사예절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식생활이란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단순히 섭취한다는 개념을 넘어 기후와 지형, 토질, 생활습관 등의 지역 격차를 반영함으로써 특정 집단이나 지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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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열녀. 영암의 선비 최인우(崔仁佑)의 딸로서, 주(州)의 호장(戶長) 정만(鄭滿)의 부인이었다. 1379년에 정만이 일로 인하여 서울에 갔더니 적이 마을에 들어왔다. 적이 최씨에게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므로 나무를 안고 막다가 화를 내며 적들을 꾸짖고 죽었다. 1389년에 도찰사(都察使) 장하(張夏)가 조정에 최씨의 열행을 알려 정문(旌門)을 명령하고 아들 정습(鄭習)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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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최씨는 어려서부터 심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18세에 시집가서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남편 정세현(鄭世鉉)이 병을 얻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울면서 시어머니께 이르기를 “지아비가 죽으면 지어미는 따르는 것이 도리이니 맹세코 장차 같이 갈 것입니다.”라고 하고 손가락을 잘라 입에 대어 넣고, 하늘에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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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정용균(鄭龍均)에게 내린 정려비 및 관련 고문서. 1. 고문서 5점 가. 상서문 : 1879년(고종 16) 선비 208명의 연명으로 정용균의 효행을 관찰사에게 올려 정표(旌表)해 주기를 요청하는 문서이다. 가로 128.5㎝, 세로 57㎝의 저지(楮紙)에 해서(楷書)로 쓰여져 있고, 관찰사의 뎨김[題音]은 초서(草書)로 앞뒤에 쓰여 있다. 정용균은 평소 아침저녁으로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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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조상의 혼령이 담긴 것으로 여기고 집 안에서 모시는 단지. 세존(世尊)단지 또는 시조단지라고도 한다. 조상단지는 주로 종가(宗家)에서 이어져 내려왔다. 지금은 잘 찾아볼 수 없으며, 조상단지에 대한 신앙의 의도가 분명하지는 않다. 진주 지역에서는 쌀농사와 보리농사가 끝나면 햇곡을 갈아 넣는데, 이 곡식으로 제사 때 놓을 메(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밥)를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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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창촌리 구리마을에서 전승되는 진주 부자와 의령 부자가 경주 최부자 집에 놀러갔다가 망신을 당했다는 설화. 진주, 의령 부자와 경주 최부자 살림 설화는 ‘경주 최부자’ 이야기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진 설화로 전설적 요소를 가진 민담에 해당한다. 설화에서는 진주나 의령 등 실제 지명을 언급하고, 널리 알려진 최부자라는 인물을 지목하고 있지만 특정 시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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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妓女)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인 진주교방(晋州敎坊)을 중심으로 형성된 예술. 진주의 교방예술은 진주교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교방은 고려·조선시대 기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이다. 교방청(敎坊廳)은 본래 중국 당나라 때 궁중 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관기들과 악공들에게 가무악(歌舞樂)을 가르쳤다. 이러한 중국 교방의 전통은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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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에 있는 의병장 최대성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1752년(영조 28) 최대성(崔大晟)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세운 공로를 인정하여 “충신모의장군 증통정대부형조참의어모장군행훈련원정최대성지려(忠信募義將軍 贈通政大夫刑曹參議禦侮將軍行訓練院正崔大晟之閭)”를 내리면서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안간지구대 옆에 동향하여 있다.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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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하용도(河用渡)이고, 아버지는 최영순(崔永淳)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심성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최씨는 살아서 의지할 데가 없음을 애통히 여겨 바로 남편 뒤를 따라 하직하려 했으나, 스스로 이르기를 “자식이 없는 상인데 내가 어찌 예를 다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