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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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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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변(崔琦抃) : 현감(縣監)을 지냈으니 본관이 전주(全州)이요, 인천(仁川)에 살았다. ○ 최기준(崔琦準) : 부사(府使)를 지냈으니 본관이 전주(全州)이요, 인천(仁川)에 살았다. ○ 하응구(河應龜) : 부장(部將)을 지냈고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훈에 기록되었다. ○ 하천오(河天鰲) : 수문장(守門將)을 지냈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 황계량(黃桂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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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윤민(河潤民) : 진사다. ○ 손석윤(孫錫胤) : 자는 여선(汝善)이요, 계유년(인조 11년, 1633)에 진사에 올랐으니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 손지순(孫之順) : 자는 덕이(德而)요, 갑술년(인조 12년, 1634)에 진사에 올랐고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 조진(曺𣉮) : 갑술년(인조 12년, 1634)에 생원에 올랐고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 성호정(成好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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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역(梁嶧) : 호는 운곡(雲谷)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셋째 아들이다. 기유년(세종 11년, 1429)에 사마시에 합격해 연일진병마첨절제사(延日鎭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한데다가 뜻이 멀고 행실이 높아서 안과 밖에서 추중(推重)되었다. 단성(丹城)으로부터 진주 운곡(雲谷)에 옮겨와서 살았다. ○ 하공효(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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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원(閔愿) : 자는 흥중(興仲)이요, 호는 석계(石溪)이며 본관이 여흥(驪興)이니 판서(判書) 민심언(閔審言)의 후손이다. 문과에 올라 직장(直長)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면서 행실은 방정했으며 목표하는 것은 높으면서 뜻은 넓었다. 충주(忠州) 음성(陰城)으로부터 옮겨와 진주의 옥봉(玉峰)에 살았다. ○ 최원민(崔元敏) : 호는 죽계(竹溪)요, 본관이 삭녕(朔寧)이니 사간(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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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현(李胤玄) : 자는 시로(時老)요,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니 매월당(梅月堂) 이하생(李賀生)의 증손이다. 18세 때에 부친을 모시고 산간 마을에서 천연두를 피하더니 갑자기 어느 날에 도적이 들어와 부친을 해치려고 했다. 윤현이 몸으로 날개처럼 덮어서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몸에 부상을 입고 이어 병을 얻어 의원을 찾아 약을 구하여 8년을 견디다 마침내 천수를 마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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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륜(河崙) : 고려 말에 과거에 합격해 중앙과 지방에 역임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질이 있었다. 태종(太宗)을 도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 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했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했다.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하연(河演) : 하윤원(河允源)의 손자이다. 과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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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金憲昌)의 반란으로 인한 진주 지역 백성의 고통을 예고한 징조에 관한 설화. 진주시에서 1983년에 발행한 『내 고장의 전설』에 수록되었고, 이어서 1994년 진주문화원에서 발행한 『진주문화』16집에 수록되었다. 구술과 채록자는 알 수 없고, 사건을 나열하여 설명하는 방식의 설화 형태를 보인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14년(822)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부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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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의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지방통치구역. 강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 3년(663) 2월에 빼앗겨 신라 영토가 되었다. 이후 신문왕 5년(685)에 거열주를 뽑아내어 청주(菁州)를 설치하고 총관(摠管)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에는 다시 전국의 지방조직을 9주, 5경으로 정비하고 명칭을 고쳤는데, 이때 청주를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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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지방제도인 9주의 하나. 신라 통일기의 지방제도를 9주 5소경제라 한다. 통일 이전에 신라는 전국을 5주로 나누어 지배하였으나, 삼국통일 이후에는 확대된 영토에 걸맞게 지방제도를 재편성했다. 종래의 상주, 하주, 한산주, 수략주, 하서주 가운데 하주의 영역을 문무왕 5년(665)에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어 동쪽 지역을 삽량주라고 하고 서쪽지역을 거열주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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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남쪽의 통일신라[676~935]와 북쪽의 발해[698~926]가 양립하던 시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후 935년까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한편, 통일신라 북방에는 698년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중국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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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조직화된 집단. 진주는 가야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신라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983년(성종 2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1896년(고종 33년)에는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진주는 경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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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진주시의 역사. 진주시는 경상남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도농 복합형 통합시로, 동쪽은 함안군,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고성군·사천시, 북쪽은 산청군·의령군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712.84㎢, 인구는 약 33만명이며, 1읍, 21동, 15개 면을 관할하고 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육도시이자 문화도시로, 현재는 첨단산업단지가 입지한 혁신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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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연지사에서 주조된 통일신라시대의 동종. 임진왜란 때 일본에 약탈된 종으로 추정되며 현재 일본 후쿠이현[福井縣] 츠루가시[敦賀市] 조구신사[常官神社]에 소장되어 있다. 종에 새겨진 “태화 7년 3월일 청주연지사(太和七年三月日菁州蓮沚寺)”라는 명문(銘文)으로 미루어 833년(흥덕왕 8)에 주조되었고, 청주(菁州)가 지금의 진주시 지역이므로 진주지역에 있던 연지사에 바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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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서남부에 1994년까지 존속했던 행정 구역. 1895년 지방 제도 개정에 의해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면서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입지하게 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에 의해 진주군의 44개 면이 17개 면으로 통합되고, 함안군의 3개 면이 2개 면으로 폐합되어 진주에 편입되었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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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진주 행정구역 명칭. 진주는 고려 초기 청주(菁州)라 하였다가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83년(성종 2) 2월 주제(州制)를 목(牧)으로 개혁하면서 진주는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성종 14년(995) 9월 처음으로 전국에 10도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산남도(山南道)가 설치되어 10주 37현을 통할했다. 현종 9년(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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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던 서민금융기관. 무진(無盡)이란 일정한 계좌수와 급부 금액(給付金額)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부금을 납입한 부금자(賦金子)에게 1계좌마다 추첨·입찰 등의 방법에 의하여 일정 금액을 급부하는 제도였다. 1914년 말 당시 서울에는 137조(組)의 무진강이 있었으며 무진구수(無盡口數)는 1,738구였다고 한다. 또한 1921년 7월 말 무진회사는 77개소에 이르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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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진주의 사찬(私撰) 지리지. 지리지는 수록된 공간 범위에 따라 전국지인 여지(輿誌)와 지방지인 읍지(邑誌)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리지를 편찬한 주체에 따라 국가기관에서 만든 관찬(官撰) 지리지와 개인이 편찬한 사찬 지리지로 나누어진다. 전국 단위의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된 읍지는 전국 지리지인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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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가 있는 진주의 도시적 구역. 읍치(邑治)란 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治所)가 있는 도시적 구역으로, 흔히‘읍(邑)’혹은‘읍내(邑內)’라고 부르는 곳이다. 『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양지(晋陽誌)』 등에 기록된 건치연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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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의 옛 지명 진주는 가야 지역으로 거열성(居列城)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문무왕 3년(663) 2월에 거열성을 공취하여 거열주(居列州)라고 하였다. 신문왕 5년(685) 봄에 처음으로 9주를 정비하면서 거열주를 높여 청주(菁州)라 하고 대아찬 복세(福世)로 하여금 청주총관을 삼았다. 「삼국사기지리지」와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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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한씨(韓氏)는 기자조선에 연원을 두고 있다. 위만에게 밀려 마한으로 온 준왕(準王)[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의 8세손인 원왕(元王)은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우량(友諒)이 신라의 상당(上黨)[청주의 옛 지명]으로 옮겨 한씨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사적에 의하면 한씨의 시조는 기자의 후예 우량의 32세손 한란(韓蘭)[?~?]이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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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내의 촉석루에 걸린 현판의 시. 현재 촉석루에는 현판에 새겨진 9편의 시가 걸려 있다. 하륜이 지은 「촉석루기」에는 훌륭한 시영(詩詠)으로 면재 정을보, 우곡 정이오, 상헌 안진[?~1360], 경은 설장수[1341~1399], 급암 민사평[1295~1359], 이재 허선생(누구인지 불명) 등 여섯 명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정을보와 정이오의 시가 촉석루에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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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신백(愼伯). 한여철(韓汝哲)의 아들이다. 1590년(선조 23)에 생원에 합격하였다. 집에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으며 주변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돈독하였다. 그의 나이 약관(弱冠, 스무 살)이 못되어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아우 한응(韓膺)을 가르치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우에게 항상 ‘네가 성인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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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청주. 자는 천뢰(天賚), 호는 유계(柳溪).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증손이다. 성품이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극진히 모셨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 정희량(鄭希亮)이 안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상중이었으므로 이를 통분히 여겨 “늙은 신하는 임금의 욕됨에 놀라 적개심에 불타는 마음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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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변(子變), 호는 조은(釣隱). 헌납(献納) 한여철(韓汝哲)의 손자로, 아버지는 참봉 한계(韓誡)이며, 어머니는 허주(許鑄)의 딸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 한몽룡(韓夢龍) 밑에서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박제인(朴齊仁)·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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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성뢰(聖賚). 1695년(숙종 21)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벼슬을 거쳐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 기민(饑民)을 진휼하고 서울에서 약을 구해다 악역(惡疫)을 퇴치하는 등의 공을 세워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그 후 통어사(統禦使)·부총관(副摠管)을 지내고,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안성(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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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 자는 중명(仲明). 사직 한승리(韓承利)의 아들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품행이 매우 방정하고 효도가 극진하여 이름을 날렸다. 1543년(중종 38)에 생원이 되었고, 1548년(명종 3)에는 부묘별시문과(祔廟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그 후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1553년 무렵에 공조좌랑을 지낸 바 있으며, 이어 헌납 등을 거쳐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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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신중(愼仲). 한여철(韓汝哲)의 아들이며 한계(韓誡)의 아우이다. 친구를 접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신의로 하였고, 그 주장이나 의견이 항상 반듯하여 그 또래의 친구들이 항상 듬직하게 여기며 어려워하였다. 형 한계(韓誡)와 더불어 형제가 모두 사람에게 간언(間言, 이간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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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우경(佑卿)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주부에 이르렀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이 무신란을 일으키자 난을 진압하고 위세를 떨쳤다. 뒤에 양무공신에 오르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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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윤경(潤慶). 호는 송암(松菴). 장무공(莊武公) 황윤(黃潤)의 8대손이다.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 때 의병장이 되어 적을 거창의 소사평(素沙坪)에서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무신란은 청주 출신의 이인좌(李麟佐)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