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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지 제3권/인물/본조(本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10047

하륜(河崙) : 고려 말에 과거에 합격해 중앙과 지방에 역임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질이 있었다. 태종(太宗)을 도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 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했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했다.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하연(河演) : 하윤원(河允源)의 손자이다. 과거에 합격해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호를 경재(敬齋)라고 했으니 종신토록 경(敬)으로써 일을 처리했고 일세의 명유(名儒)가 되어 삼조(태종, 세종, 문종를 역사했다. 졸한 뒤에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 했다. 이른 나이에 포은(圃隱)의 문하에 출입하여 충효가 순일 지극하고 성품은 고요하고 간결하면서도 강직하고 분명하며 풍도와 위의가 단아했다. 정도(正道)를 부식하고 유학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다. 평상시에는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서 가묘에 절하고 대궐을 향해 앉았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반드시 학자나 군자를 본받으려 했다.

일찍이 스스로 경책(警策)하여 이르기를 “존귀하게 되면 재앙이 가까워지고 부유하게 되면 어질지 못하게 되나니 어떻게 하겠는가? 운학(雲壑)에서 정신을 기르고 한 개의 표주박으로 안항(顔港)에 살더라도 즐거움이 있고 삼경(三徑)의 도원(陶園)에도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은 그대로 있다. 성현도 오히려 그러했거늘 하물며 작은 선비는 어떠하랴? 8~9칸이면 잔약한 일신을 용납할 것이요, 밭은 수십 이랑만 있으면 굶주림을 위로하기에 족할 것이니 나는 나의 분수를 지킬 것이요, 이욕(利欲)에 달려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나이가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져도 스스로 경책(警策)함이 이와 같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하경복(河敬復) :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이르렀고 시호를 양정(襄靖)이라 했다.

하경리(河敬履) : 하경복(河敬復)의 아우다. 하경복이 무략이 있어 북쪽 지방을 20여 년 동안이나 관장하니 조정에서 의논하여 공으로써 진주를 둘러있는 8~9개 고을의 군수로 제수하여 모부인을 봉양케 했다.

하한(河漢) : 하경복(河敬復)의 아들이다. 무략과 용맹이 뛰어났고 벼슬이 중추(中樞)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강장(剛莊)이다.

정이오(鄭以吾) :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시에 능하여 문집으로 『교은집(郊隱集)』이 있다.

○ 하종(河漴) : 하경리(河敬履)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의 지평(持平)을 지냈다.

정척(鄭陟) : 지방 과거를 거쳐 등제하여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事)·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고 시호를 공대(恭戴)라 했다. 성품이 부지런하고 삼가했으며 맑고 깨끗함을 스스로 지켰으며 조정의 의례(儀禮)를 미루어 생각한 바가 많았다. 세조(世祖)가 항상 말하기를 “세종(世宗)께서 ‘청직(淸直)’ 두 글자로써 경을 허락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이어 옷과 말을 하사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석덕(姜碩德) : 강회백(姜淮伯)의 아들이다. 벼슬이 돈녕부사(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를 대민(戴愍)이라 했으며 『완역재집(玩易齋集)』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희안(姜希顔) :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인순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고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전(篆)·예(隸)·진초(眞草)와 그림에도 모두 절묘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희맹(姜希孟) : 강희안(姜希顔)의 아우다. 정묘년의 과거에 장원하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시문이 정묘하고도 깊었으며 포용하는 것이 있었다.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맹경(姜孟卿) : 강회백(姜淮伯)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지낸 벼슬이 모두 깨끗한 요직이었다. 세조(世祖) 때에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해졌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하숙산(河叔山) : 세조(世祖) 때 친시에서 장원에 올랐고 벼슬이 낙안군수(樂安郡守)에 이르렀으나 그 뒤로는 병이 들어 벼슬하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자평(姜子平) : 문과에 장원하여 두 번이나 승지(承旨)가 되고 벼슬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아우 자순(子順)은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반성위(班城尉)가 되었다.

정성근(鄭誠謹) : 정척(鄭陟)의 아들로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후덕하며 맑고 바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일찍이 성종을 위해 3년상을 치렀으며 연산군(燕山君) 때에 죽임을 당했다. 아들 정주신(鄭舟臣)이 과거에 올랐다가 일찍 죽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하숙부(河叔溥) : 하경복(河敬復)의 손자로 무과에 올라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더니 청간(淸簡)으로 세상에서 칭송을 받았다.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구손(姜龜孫) : 강희맹(姜希孟)의 아들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 유순정(柳順汀) : 문무에 재질이 있어 정미년의 과거에서 장원으로 올랐고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두루 지냈다. 연산군(燕山君) 말년에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과 더불어 계책을 결단하고 정국(靖國)하여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혼(姜渾) : 일찍 과거에 올랐고 문장에 능했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정국(靖國)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형(姜詗) : 강자평(姜子平)의 아들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렀으나 연산군(燕山君) 때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 중종(中宗) 초에 참판(參判)을 추증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정숙기(鄭叔沂) :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정분(鄭苯) : 정이오(鄭以吾)의 아들이다. 영락(永樂) 병신년(태종 16년, 1416)에 별과에 합격하고 문종(文宗) 때에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재능과 도량이 있더니 정란(靖亂)이 있을 때에 마침 영남에서 돌아오는데 충주(忠州)에 이르러 목을 베어 조리 돌리는 행렬을 보았다. 용안역(用安驛) 앞에 이르러 경관(京官)이 역마로 달려오는 것을 노상에서 만나 전지(傳旨)가 있다고 큰소리로 외치는 말을 들었다. 공은 말에서 내려 재배(再拜)하고 경관에게 말하기를 “길 한가운데에서 형을 받는 것은 좋지 못하니 역관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경관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전지를 받으시면 적소(謫所)로 모시고서 돌아갈 뿐입니다.” 했다. 이에 공은 또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나를 살리는 것이냐?”라고 하고 말에 올라 관원과 함께 갔다.

관원은 일찍이 공의 낭리(郎吏)였음을 말했으나 공은 반드시 조정의 일을 물으면 응답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알고 낙안군(樂安郡)에 이르기까지 십여 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한 번도 입을 열어서 묻지 않았고 적소에 이르러서야 노고를 치하하고 헤어졌을 뿐이었다. 공은 적소에 있으면서 항상 선조의 신주를 받들어 제사를 모시더니 어느 날 밤잠에서 깨어나서 수행한 스님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정성을 다해 밥 한 그릇을 마련토록 하라.”고 했다. 제사를 마치고 그 신주를 불태운 다음 조금 있다가 사자가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유문쇄록(諛問鎖錄)』에 나와 있다.

○ 이혜(李惠) : 벼슬이 지보주사(知甫州事)에 이르렀다. 시례(詩禮)로써 세상에 이름났고 지은 시는 『청구풍아(靑邱風雅)』에 실려 있다. 문경공(文景公) 강맹경(姜孟卿)은 그의 외손이다. 반동산리(班東山里) 택지동(宅只洞)에 살았다.

정여창(鄭汝昌) : 자는 백욱(伯勗)이요 호는 일두(一蠹)이며 본관이 하동(河東)이다. 악양(岳陽)의 산수가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함양(咸陽)으로부터 옮아와서 악양현의 서쪽 도탄(陶灘)[지금의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서 살았다. 계묘년(성종 14년, 148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경술년(성종 21년, 1490)에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문과에 올라 한림에 뽑혔는데 외직을 구하여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제수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종성(鐘城)에 귀양갔다가 갑자년(연산군 10년, 1504)에 졸했다. 정축년(중종 12년, 1517)에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하고 을해년(선조 8년, 1575)에 시호를 내려 문헌(文獻)이라 했으며 경술년(광해군 1년, 1610)에는 문묘에 배향했다. 자세한 것은 문집(文集)에 나와 있다.

이인형(李仁亨) : 본관이 함안(咸安)으로 성화(成化) 무자년(세조 14년, 1468)에 문과 장원에 올랐고 시로 이름이 나 있었다. 일찍이 낙제(落第)하여 시를 지어 이르기를 “눈 속에 푸른 솔과 비 온 뒤의 산 모습은, 볼 때는 쉽지만 그릴 때는 어렵다네. 일찍이 당시 사람의 눈에 못들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연지(臙脂)를 사서 모란을 그릴 것을.[雪裏靑松雨後山 看時容易畵時難 早知不入時人眼 嶺買臙脂寫牧丹]”이라 하더니 그 뒤에 과연 장원에 올라 사람들이 이를 많이 일컬었다.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청간(淸簡)으로써 칭송을 받더니 무오년에 화가 무덤이 파헤쳐지는 데에 미쳤다. 병인년에 정국(靖國)되니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추증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금산명환(金山名宦)」에 나와 있다. 가좌촌(加佐村)지도보기에 살았다.

조지서(趙之瑞) : 자는 백부(伯符)요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며 본관이 임천(林川)이다. 성화(成化) 갑오년(성종 5년, 1474)에 생원에서는 장원으로, 진사에서는 제2로, 문과의 병과(丙科)에 합격했다. 벼슬이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죽었으며연표보기 병인년에 반정되어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를 추증했다. 동곡리(桐谷里) 삼장원동(三壯元洞)에 살았다.

조윤손(曺潤孫) : 본관이 창녕(昌寧)이며 관찰사(觀察使) 조숙기(曺淑沂)의 아들이다. 무로써 출신하여 벼슬이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자세한 것은 비문에 나타나 있다. 송곡리(松谷里)지도보기에 살았다.

정은부(鄭殷富) : 사과(司果) 정형손(鄭亨孫)의 아들이다. 홍치(弘治) 기유년(성종 20년, 1489)에 무과에 합격하고 용략이 일시에 으뜸이었더니 중외에서 벼슬을 지나매, 옛날 명장의 풍모가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특별히 공을 우도수사(右道水使)로 제수했다. 기사년에 아버지의 상사를 당하여 여막에 있을 때 경오년(중종 5년, 1510)의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웅천(熊川)이 함락되자 임금이 전지하여 공에게 명령을 내렸다. 공은 부득이하여 싸움터로 달려가서 조윤손(曺潤孫)과 함께 적진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서 칼을 휘둘러 모두 섬멸했다. 이때에 조윤손이 탄 말이 왜적에게 부상을 당해 땅에 넘어졌으니 공이 조윤손을 구해 함께 타고 나왔다. 조윤손은 이로써 재생의 은혜가 있다고 하여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정은부의 아들 정항(鄭沆)을 맞아 그의 사위로 삼았다.

그의 재주를 시험코자 마골(麻骨)을 백 보 밖에 세워두고 활을 쏘게 했더니 쏘아서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옛날에 버드나무 잎을 뚫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하윤(河潤) : 자는 수부(晬夫)이다. 성화(成化) 정유년(성종 8년, 1477)에 진사에 합격하고 계묘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지평(翰林持平)을 지내고 벼슬이 순천군수(順天郡守)에 이르렀다. 송곡리(松谷里)지도보기에 살았다.

손창(孫昌) : 자는 언겸(彦謙)이요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성화(成化) 을유년(세조 11년, 1465)에 진사에 합격하고 무자년에 문과에 올라 처음에는 한림(翰林)에 제수되었다가 벼슬이 병조정랑(兵曹正朗)에 이르렀다. 이하리(籬下里)에 살았다.

이령(李翎) : 이인형(李仁亨)의 아들이니 정덕(正德) 기묘년(중종 14년, 1519)에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벼슬이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이르렀다. 가좌촌(加佐村)에 살았다.

어득강(魚得江) : 자는 자유(子游)요 호는 관포(灌圃)이며 본관이 함종(咸從)이다. 홍치(弘治) 임자년(성종 23년, 1492)에 생원에 합격하고 병진년 문과에 올랐는데 연산조(燕山朝)였다. 성벽이 산수를 좋아하여 벼슬자리를 구하지 아니하고 세상 일이 편치 못함을 보고서는 말더듬이를 청탁하고 스스로 자취를 숨겼다. 고성(固城) 혼돈산(混沌山) 아래에 집을 짓고 자호를 혼돈영담(混沌詠潭)·사빈등처(泗濱等處)·천석거정(泉石居停)·관포(灌圃)·포옹장인(抱擁丈人)이라 했다. 중종(中宗) 때에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시집을 세상에 펴냈다. 퇴계(退溪)의 발문에 이르기를 “선생의 삶은 세속을 초월한 격조가 있었고 시에서는 율시(律詩)가 더욱 뛰어났다.[先生 生有拔俗之標 於詩尤長於律]”라고 했다.

성안중(成安重) : 자는 덕여(德輿)니 성화(成化) 기축년(예종 1년, 1469)에 생원이 되고 홍치(弘治) 임자년(성종 23년, 1492)에 병과에 올라 벼슬이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에 이르렀다.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이 지은 비문에 이르기를 “사람됨이 순정(諄正)하고 담설(談說)에는 법도를 따랐다.”고 했다. 가좌촌(加佐村)에 살았다.

정사룡(鄭士龍) : 자는 운경(雲卿)이요 호는 호음(湖陰)이며 본관이 동래(東萊)이다. 기사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더니 문형(文衡)을 맡았다. 경성으로부터 의령(宜寧)에 흘러들었다가 뒤에 본주에 옮겨와 살았다.

하우치(河禹治) : 자는 평지(平之)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안주목사(安州牧使)에 이르렀더니 지나는 곳마다 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그를 가리켜 성을 지키는 재목이 있어 장차 크게 쓰일 것이라고 했다. 안주(安州)에 있을 때에 질병 때문에 벼슬을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20년 동안이나 휴양하다가 죽었다.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이 찬한 묘명에 이르기를 “어떻게 하여 뒤에 두 아들을 남겼으나 청빈했다.”라고 했다. 사죽(沙竹)에 살았다.

성일휴(成日休) : 자는 자경(子慶)이요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교리 성안중(成安重)의 셋째 아들이다. 발자취를 강호에 숨기고 뜻을 영달과 이욕에서 끊었으며 자호를 무심옹(無心翁)이라 하고 초당(草堂)을 무심정(無心亭)이라 이름했다. 방당(方塘)에 임하고 명월(明月)을 대해도 모두 무심으로써 이름지었다. 손수 한 구절을 벽 사이에 써서 부쳤으니 “띠를 엮어 집을 삼고 대나무로 울을 삼아, 푸른 이끼 속을 파헤쳐서 못을 만들었는데 세간의 명리에는 무심한지 오래지만, 다만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있어 아는 척 하는구나.[編茅爲屋竹爲籬 鑿破蒼苔作小池 世間名利無心久 只有淸風明月知]”라 했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묘명을 지어 이르기를 “한 세상 소요하면서 영리를 구하지 않았네.[逍遙一世 不求榮利]”라 했다. 구동(龜洞)에 살았다.

성일장(成日章) : 자는 자화(子華)요 성일휴(成日休)의 아우다. 재예가 뛰어나고 문학의 이름이 일찍 드러났다. 여러 번 삼장(三場 : 과거의 초시, 복시, 전시)을 보았으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강응규(姜應奎)·강응태(姜應台)와 더불어 일시에 이름을 나란히 했다. 가좌촌(加佐村)에 살았다.

윤녕(尹寧) : 자는 정가(靜佳)요 본관이 파평(坡平)이며 자호를 역옹(櫟翁)이라 했으니 수찬(修撰) 윤효빙(尹孝聘)의 둘째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하고 백형 참봉(參奉) 윤선(尹宣)과 더불어 학문을 차원선정(車院先亭)에서 강하여 일찍 문명을 이루었는데 사부(詞賦)에 더욱 뛰어났다. 강응규와 더불어 시를 주고받아 한 질을 만드니 당시 사람들이 많이 일컬었다. 신당리(新塘里)지도보기에 살았다.

강응규(姜應奎) : 자는 규지(奎之)니 가정(嘉靖) 무오년(명종 13년, 1558)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나 있어 고을 사람 진사 유백온(兪伯溫)·진사 윤녕(尹寧)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고 이름이 성균관에서 존중되었다. 가좌촌(加佐村)지도보기에 살았다.

유백온(兪伯溫) : 자는 중옥(中玉)이요 본관이 영산(靈山)이다. 진사에 올랐고 집이 가난했으나 글 읽기를 좋아했다. 글 짓는 것을 잘했고 성균관에 있으면서 명성과 칭찬이 있었다. 그가 함께 사귄 사람은 모두 당시에 알 만한 이름의 선비였으니 남쪽으로 오는 사신과 정승이나 가까운 고을에 수령된 이들이 혹 음식을 보내거나 물건을 주면 스스로 사사롭게 하지 않고 아버지의 집으로 보냈다. 서모의 성품이 간악함이 견줄 데가 없었으나 가정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서동생에 유종남(兪終男)·유필남(兪必男)이 있으나 모두 악소년이었다. 진사가 어느 날 방백을 촉석루에서 만나보고 크게 취해 밤에 돌아오는데 유종남 등 두 사람이 따라오다가 사천(沙遷) 위에 이르러 물에 던지려 했는데 바위 아래에서 지키던 종복이 오는 것을 보고는 그 계책을 이루지 못했다. 이 뒤로는 대우가 더욱 두터워졌다. 정촌(鼎村)에 살았다.

정두(鄭斗) : 자는 이남(以南)이니 가정(嘉靖) 무오년(명종 13년, 1558)에 생원 시험에 합격했다. 재기가 탁월하고 역학(易學)에 밝았으며 천문과 지리에 널리 통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장차 도래할 사람의 일을 앞질러 알았고 또 새나 짐승의 소리를 알았으며 글 짓기를 잘했다. 만년에 저술한 「가필부(呵筆賦)」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동산리(東山里)에 살았다.

○ 정익(鄭翊) :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하지 않았고 편안하고 고요하여 구하는 것이 없었다. 일찍부터 학업을 폐하고 자연에서 하늘이 준 본성을 기르니 판서(判書) 이준민(李俊民)이 매양 동곡(東谷)의 장인(丈人)이라 일컬었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이공량(李公亮) : 자는 인숙(寅淑)이요 본관이 전의(全義)이다. 재예가 탁월해 여러 번 과거장에 달려갔으나 마침내 예조에서 실패하고 이어 급제하지 못했다. 늦게야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으로 제수되었다. 술을 즐겨해 거리낌이 없었고 집이 서울에 있어 중요 기관에 있는 아는 이가 많았으되 끝까지 한 번도 권문세가를 향해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매양 형제 다섯 사람이 일당에 모여 화목하고 즐거워하니 당시 사람들이 공경히 존중했다. 대여촌(代如村) 가방(佳坊)에 살았다.

이공보(李公輔) : 자는 직경(直卿)이니 본관이 전의(全義)이다. 조상의 덕택으로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다. 집에 있을 때는 예(禮)로써 몸을 단속했고 자제들이 허물이 있으면 나이가 비록 많더라도 반드시 매를 때려 다스렸다. 고을 사람과 더불어 술을 마시어 더러 비록 취하기에 이르더라도 단정히 앉아 흐트러지지 않았고 의논이 바람처럼 쏟아져 나오니 듣는 사람이 모두 존경하고 그 뜻을 따랐다. 가방(佳坊)에 살았다.

조식(曺植) : 자는 건중(楗仲)이요 호는 남명(南冥)이며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삼가(三嘉)의 토동촌(兎洞村)에 살면서 그의 집 이름을 계복(鷄伏)라 했고 시내 위에 초가 정자를 짓고 뇌룡사(雷龍舍)라 했다. 김해(金海)가 처향(妻鄕)이기 때문에 왕래하며 살더니 그 정자 이름을 산해(山海)라 했다.

가정(嘉靖) 신유년(명종 16년, 1561)에 두류산(頭流山)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가서 양당(兩塘)의 시내 위에 터를 가려서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집의 이름을 산천(山天)이라 했다. 이름을 깊이 감추고 스스로 닦은 지가 여러 해더니 중종(中宗)명종(明宗)의 두 조정에서 두 번이나 주부(主簿)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현감(縣監)을 제수했으나 일어나지 않았으며 사지(司紙)를 제수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또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으로써 부르니 한 번 나가서 명령을 사례했던 바 임금이 전내로 이끌어 들이고 치란(治亂)의 도와 학문을 공부하는 일과 삼고초려(三顧草廬) 등의 일을 물었다. 이에 대한 논대하는 말이 부드러우면서도 간절하니 명종이 칭선하고 탄상했으나 그 다음 날에 산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도 여러 번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다가 가경 신미년에 병이 들어 임신년(선조 5년, 1572) 2월 8일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72세였다.연표보기 을묘년에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문집에 나타나 있다.

최영경(崔永慶) : 자는 효원(孝元)이요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다. 서울 사람으로 남명(南冥) 선생을 사사하여 고을의 도동촌(道洞村)에 와서 살더니 아우 최여경(崔餘慶)과 함께 한집에 살면서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했다. 명종(明宗) 때에 처음에는 참봉(參奉)을 제수하고 또 사축(司畜)을 제수하며 또 지평(持平)을 제수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러다가 기축(己丑)의 역변(逆變)으로 왕옥(王獄)에서 원통하게 죽으니 이는 경인년(선조 23년, 1590)이었다.연표보기

공은 평생에 효성과 우애를 다했고 천성이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이 했으며 올바른 이가 아니면 보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세상에서 합하는 사람이 적었다. 신축·임인년(선조 34년·35년, 1602)에 도내의 선비들이 함께 모여 합의하는 상소를 올려 그 원통함을 풀게 되었고 덕천서원(德川書院)에 배향했다.

최여경(崔餘慶) : 자는 적원(積元)이요 수우당(守愚堂)의 아우다. 이 고을 사람 정몽상(鄭夢祥)의 딸에게 장가들고 한양으로부터 수우당을 모시고 와서 도동촌(道洞村)에서 살았다. 한집에 같이 살면서 엄한 부친처럼 섬겼으며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천(公薦)으로 감역(監役)이 되었다가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전임되었으나 기축년에 권신이 수우당의 아우라고 하여 국청하는 뜰에 잡아들여 죄를 삼아 죽였다. 뒤에 원통한 것이 풀리게 되어 참의(參議)로 추증되었다.

○ 이제신(李濟臣) : 자는 언우(彦遇)요 호는 도구(陶邱)며 본관이 철성(鐵城)이니 의춘현(宜春縣)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뜻이 커서 얽매이지 않았다. 10세에 고을 사람 안주(安宙)에게서 학업을 배우니 안주가 사고(史庫)라고 칭찬했다. 재물과 산업이 풍요했으나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고 두 누이에게 나눠주었다. 외사촌 성몽설(成夢說)이 매우 빈궁하자 노비를 주어 물을 긷고 방아를 찧도록 도움을 주었다. 18세에 부친상을 만나서는 초상과 제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지했고 21세에 성균관에 들어가서 배신(裵紳)과 김범(金範)과 김희년(金禧年)과 여응구(呂應龜)와 더불어 벗을 삼았다. 글을 올려 명륜당(明倫堂)에서는 나이에 따라 앉는 자리를 정할 것을 청했더니 일은 비록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명성이 더욱 깊어졌다. 인종(仁宗)이 승하함에 심상(心喪) 3년을 했다. 당시에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가 나랏일을 처리하면서 공이 조정을 비방한다고 하여 기어코 죽음에 빠뜨리고자 하므로 공은 기회를 보아 물러났다. 이때에 정사룡(鄭士龍)이 한 고을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두텁게 대접하더니 정득청(鄭得淸)과 하훈도(河訓導)에게 부탁하여 돌아가게 했다. 이때 이기가 정사룡에게 묻기를 “이모는 지금 어데 있는가?” 하니, 정사룡이 말하기를 “이모는 빈궁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기에 얼마 전에 정득청과 하훈도에게로 갔다.”고 했다. 이기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족히 헤아릴 것이 못 된다.” 하고 마침내 해코지할 뜻을 그쳤다.

이로부터 세상일에 생각을 끊고 물외(物外)에 뜻을 놓아 수석(水石)이 맑고 그윽한 곳을 만나면 문득 소요하며 종일토록 손으로 거문고를 타고 혹은 노래 부르며 혹은 춤을 추니 당시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만년에는 남명(南冥) 선생을 따라 덕천동 고마장(叩馬場)에서 살면서 선생을 모셨다. 깨달음에 투철한 곳이 많아 선생이 이를 칭찬하여 이르기를 “언우는 나의 늙은 벗”이라고 했다. 항상 활 쏘는 기물과 장기 도구를 가지고 다니니 선생이 꾸짖기를 “어찌하여 소년과 같은 짓을 하는가?”라고 말하니 공이 즉시 한 줄의 시를 읊어 이르기를 “기구(棋口)를 보는 것은 남의 헐뜯는 말을 끊는 것이요, 사혁이란 마음속으로 자기반성을 생각함이로다.[看棋口絶論人語 射革心存反己思]”라 했다. 선생과 모든 사람들이 칭상하더니 나이 70여 세에 병들어 도구(陶邱)에서 죽었다.연표보기

진극경(陳克敬)의 『사우록(師友錄)』에 이르기를 “한 세상의 위에서 소요했고 천지의 사이에서 눈을 흘기고 세상을 보았다.[逍遙一世之上 睥睨天地之間]”라 했으니 참으로 적실한 논의라 하겠다. 그가 지은 시구에 절창이 많은데 일찍이 의령(宜寧) 모아동(毛兒洞)에 살면서 읊기를 “몸은 사굴산(闍崛山) 깊은 골짜기에 살지만 마음은 두류산 상상봉을 대한다네.[身居闍崛深深谷 心對頭流上上峰]”라 했다. 또 한강(漢江)의 제천정(濟川亭)에 놀면서 읊기를 “동쪽 서쪽 들이 넓어 벼향기 익었는데, 위 아래로 강이 깊어 늙은 고기 살쪘구나.[東西野闊稻香熟 上下江深魚老肥]”라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어로비(魚老肥) 선생’이라 했다. 양응정(梁應鼎)이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었을 때에 촉석루에 올라 읊기를, “방장(方丈)과 도구(陶邱)의 늙은이 촉석루에 올라왔네. 개인 하늘 밝은 달을 읊조리니 저 강이 널찍하여 가을 기운을 마셨구나.[方丈陶邱老 來登矗石樓 天晴吟裏月 江闊飮邊秋]”라 하니 양공이 칭찬하여 이르기를, “맑고도 트인 골격은 나 응정의 미칠 바가 못 된다.[淸疏骨格 非應鼎所及]”이라 하고 드디어 붓을 놓았다.

이정(李楨) : 자는 강이(剛而)요 호는 구암(龜巖)이다. 가정(嘉靖) 병신년(중종 31년, 1536)에 문과 별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 벼슬이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퇴계(退溪)를 스승으로 섬겼고 중종(中宗)인종(仁宗)의 상을 3년 동안 입었으며 나이 55세에 모부인의 상을 만났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아침저녁으로 곡을 폐하지 않았고 여막(廬幕) 밖을 나가지 않았다.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모셨다.

이준민(李俊民) : 자는 자수(子修)니 참봉(參奉) 이공량(李公亮)의 아들이다. 기유년(명종 4년, 1549)에는 문과에 합격하고 병진년(명종 11년, 1556)에는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렀다. 기질이 탁 트여 밝고 정직했다. 조정에 서니 의연함이 옛 대신의 기풍이 있었다.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강원(姜源) : 자는 계청(季淸)이니 가정(嘉靖) 임자년(명종 7년, 1552)에 생원에 합격하고 병진년(명종 11년, 1556)에 문과에 올랐다. 천성이 맑고 간소하여 생업을 경영하는 것에 뜻을 두지 않았다. 여섯 번이나 주군(州郡)을 맡았으되 염근(廉謹)하고 엄명(嚴明)했다. 그가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삼청선생(三淸先生)이라고 일렀으니 대개 덕이 맑고 주(州)의 이름이 청(淸)자이며 정사를 하는 것이 맑았기 때문이다. 원당(元堂)에 살았다.

정관(鄭寬) : 자는 백유(伯裕)니 참봉(參奉) 정석찬(鄭碩贊)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정엄(鄭嚴)·정교(鄭敎) 두 아우가 모두 명성을 얻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일찍이 봉화훈도(奉化訓導)가 되었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정밀(鄭密) : 자는 숙성(叔成)이니 훈도(訓導) 정관(鄭寬)의 아우다. 가정(嘉靖) 계묘년(중종 38년, 1543)에 진사가 되고 무오년(명종 13년, 1558)에 문과에 올랐다. 천성이 청간하고 우졸하더니 벼슬에 나아가서는 맑고 조심스러워서 관원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그리워했다. 정사의 공적이 가장 두드러져서 세 고을을 역임했으나 추워도 앉을 방석이 없었다. 어긋나게 시류에 따르는 무리를 보면 지위가 있어도 덕을 칭찬하지 않았다. 벼슬은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그쳤고 호를 삼계(三溪)라 했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 유응두(柳應斗) : 자는 추보(樞甫)니 가정(嘉靖) 경자년(중종 35년, 1540)에 사마시험에 합격하고 병오년(명종 1년, 1546)에 문과 병과(丙科)에 올라 벼슬이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원당(元堂)에 살았다.

한여철(韓汝哲) : 자는 중명(仲明)이니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가정(嘉靖) 계묘년(중종 38년, 1543)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고 무신년(명종 3년, 1548)에 문과 갑과에 올라 한림(翰林)에 뽑혀서 들어갔다. 양친을 위해 외치(外治)에 보(補)할 것을 구하여 세 고을에서 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벼슬은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정수개(丁樹介)에 살았다.

하위보(河魏寶) : 자는 미재(美哉)니 목사(牧使) 하우치(河禹治)의 손자다. 가정(嘉靖) 무오년(명종 13년, 1558)에 생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자상(慈詳)하고 화목하고 즐거워했다. 상장(喪葬)과 제사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다. 몸가짐이 허물에 연루됨이 없었고 고을에서 처신함에 정성스레 믿음을 다하니 고을 사람들이 공경히 복종했다. 단지동(丹池洞)에 살았다.

김추(金樞) : 자는 태운(太運)이니 본관이 학성(鶴城)이다. 천성이 순후하고 친족들에게는 돈독했다. 이웃에게 화목하며 외족(外族) 가운데 가난하고 의탁할 데가 없는 이들을 한집에 거두어 기르며 남자는 장가들이고 여자는 시집보내며 풍족하게 돕고 예절을 갖추니 향리에서 착하게 여겼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김대명(金大鳴) : 자는 성원(聲遠)이요 김추(金樞)의 아들이니 가정(嘉靖) 무오년(명종 13년, 1558)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고 경오년(선조 3년, 1570)에는 문과에 장원으로 올랐다. 타고난 성품이 자상(慈詳)하고 문장의 아름다움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4군을 돌아가며 역임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염정수졸(恬靜守拙)하여 벼슬을 구함에 뜻이 없었고 시골에서 늙음을 마쳤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신점(申霑) : 자는 군흡(君洽)이요 본관이 고령(高靈)이며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다. 사람됨이 염정(恬靜)하고 스스로를 지켜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 따로 서당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치고 날마다 거문고 타고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겼다. 조동(槽洞)에 살았다.

강언평(姜彦平) : 자는 군보(君保)요 지평(持平) 강전(姜詮)의 아들이다. 효우가 천성에서 나왔으니 그의 형 진사 강여평(姜汝平)이 중병을 얻자 친히 스스로 약을 달여서 백방으로 조치하여 그 병이 낫게 되었다. 그가 죽자 만 1년 동안은 빈소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진성리(晉城里)에 살았다.

정몽슬(鄭夢虱) : 자는 중상(仲祥)이요 본관이 장기(長鬐)이다.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남을 대접할 때는 정성스럽게 했고 일을 처리할 때는 공평했다. 강심(姜深), 신점(申霑)과 더불어 한 고을의 요역(徭役)을 의논해 정하고 시행을 편리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 고른 부역에 감복하고 이들을 ‘진양(晉陽)의 삼로(三老)’라고 일렀다. 북방(北坊)에 살았다.

강심(姜深) : 자는 태함(太涵)이니 기량과 풍도가 뛰어나고 훌륭하여 온 고을의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 재예가 뛰어나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시내 곁에 초가로 정자를 짓고 늙도록 지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절구 한 수를 써서 이르기를, “감암산 아래 설매(雪梅)의 마을에, 냇가에 띠풀로 지은 집이 있어 대숲이 문 되었네. 여러 해에 병이 많고 사람 발자국도 적었는데, 아침부터 홀로 앉아 황혼에 이르렀네.[紺巖山下雪梅村 茅屋臨溪竹作門 多病年來人跡小 終朝獨坐到黃昏]”라고 했다. 경차관(敬差官) 김행(金行)이 그 집을 방문하고 이어 여기에 차운(次韻)하여 이르기를 “산이 물을 에워싸서 우리 마을 안았으니, 여기는 속된 인간의 화복문(禍福門) 이루었네. 대숲에 앉아보면 맑은 뜻이 넉넉하니, 한바탕 봄날에 단잠을 황혼에 맡겨 두자.[山圍水抱自成村 不是人間禍福門 坐對竹林淸意足 一場春睡任昏昏]”라고 했다. 아들 강덕룡(姜德龍)이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이 있었기 때문에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추증되었다. 설매곡(雪梅谷)에 살았다.

하진보(河晉寶) : 자는 덕재(德哉)니 생원 하위보(河魏寶)의 아우다. 천성이 편안하고 즐거워했고 인덕과 도량이 너그러웠다. 일에 임하고 사물을 대할 때 밖으로는 부드럽고 안으로는 밝았다. 가정(嘉靖) 을묘년(명종 10년, 1555)에 문과에 올라 검열(檢閱)을 거쳐 서장관(書狀官)이 되고 대시(臺侍)를 역임하며 주부(州府)를 두루 맡아 다스리니 모두 치적과 명성이 있었다. 벼슬은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단지동(丹池洞)에 살았다.

정안(鄭安) : 자는 계인(季仁)이니 첨정(僉正) 정밀(鄭密)의 아우다. 융경(隆慶) 경오년(명종 3년, 1570)에 장원으로 진사가 되었더니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나 있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고 강호에서 참다운 본성을 길렀다. 호를 용담(龍潭)이라 했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 이간(李衎) : 자는 화숙(和叔)이요 군수(郡守) 이은려(李殷礪)의 아들이며 관찰사(觀察使) 이맹현(李孟賢)의 증손이다. 그의 조부 이종(李瑽)이 본주의 통판(通判)이 되고 외조부 이몽린(李夢麟)이 본도의 병사(兵使)가 되었을 때에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 두 집이 서울에 있으면서 높은 벼슬의 영화가 이미 족했으니 자손의 한 사람은 이곳에 혼인시켜서 남쪽 고을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 하고, 곧 실가(室家)를 전 교수(敎授) 이희적(李熙績)의 딸에게 주고 계속해서 살게 했다. 사람됨이 중후관대(重厚寬大)하여 그의 얼굴을 대하고 교제와 접대를 받는 이들은 모두 장자다운 풍모에 감복했다. 초문(草門)에 살았다.

하국보(河國寶) : 자는 선재(善哉)니 사간(司諫) 하진보(河晉寶)의 아우다. 만력(萬曆) 계유년(선조 6년, 1573)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천성과 기질이 순수하고 진실하여 효우돈목(孝友敦睦)했다. 특이한 행실을 끊고 사물을 저해하는 마음이 없었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옛사람의 기풍이 있었다. 단지동(丹池洞)에 살았다.

하공필(河公弼) : 자는 희양(希亮)이니 천성이 순후하고 행실이 돈독하며 부모께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일찍부터 문학의 이름이 있어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신당리(新塘里)지도보기에 살았다.

정승개(鄭承凱) : 자는 치중(治中)이요 훈도(訓導) 정관(鄭寬)의 아우다. 천성이 순후하고 친족에게 돈독하며 이웃에게 화목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 남태형(南泰亨) : 자는 원길(元吉)이다.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나 있었고 사학(史學)에 밝았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진성리(晉城里)에 살았다.

하락(河洛) : 자는 도원(道源)이요 호는 환성재(喚醒齋)니 남명(南冥) 선생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융경(隆慶) 무진년(선조 1년, 1568)에 진사 시험에서 장원이 되고 생원 시험에서 제2등이 되었더니 천거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계미년(선조 16년, 1583)에 상소하여 박사암(朴思菴)·이율곡(李栗谷)·성우계(成牛溪)의 억울함을 구했는데 임금으로부터 은혜가 넓고 두터운 비답을 받았다. 임진란을 당해서는 아들 생원 하경휘(河鏡輝)와 더불어 집안의 종들을 거느리고 함께 상주성(尙州城)으로 달려가다가 적을 만나 죽었는데 아들 하경휘가 몸으로 덮어 가리다가 함께 죽었다. 공은 좌승지(左承旨)을 추증했다. 수곡리(水谷里)에 살았다.

하항(河沆) : 자는 호원(浩源)이요 호는 각재(覺齋)니 융경(隆慶) 정묘년(명종 22년, 1567)에 생원 시험에 합격했다. 뜻이 굳고 맑아 순수했다. 뛰어난 재주가 특출하더니 젊은 나이에 남명(南冥) 선생을 뵙고 제자의 예로 모셨다. 남명 선생은 그가 재주가 있고 또 학문에 뜻을 두는 것을 사랑하여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읽기를 권했다. 이로부터 오로지 자신의 수양하는 학문을 숭상하고 날마다 강구하기를 일삼았다. 실천을 독실하게 하고 언행에 규범이 있으니 선생께서 매우 소중한 그릇으로 여기셨다. 진주 고을에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로서 점점 나아갈 바를 알게 된 것은 대개 공이 앞장서서 이끌었기 때문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심상(心喪)을 입고 기축옥사(己丑獄死)의 화에 대해 소(疏)를 만들고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짖어 수우당(守愚堂)의 원통함을 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니 이를 종신의 한으로 삼았다. 두 번이나 참봉(參奉)으로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덕천원장(德川院長)이 되었다. 자못 일시의 모범이 되었더니 중년에는 대각촌(大覺村)으로 옮겨 살면서 호를 각재라 했다. 늦게는 다시 돌아와서 옛터를 닦고 집 이름을 내복재(來復齋)라 하더니 나이 50여 세에 병으로 내복재에서 세상을 마쳤다. 수곡리(水谷里)에 살았다.

이염(李琰) : 자는 옥오(玉吾)요 본관이 철성(鐵城)이다. 기국과 풍도가 웅위(雄偉)하고 용모가 수려했다. 이른 나이에 『소학(小學)』과 사서(四書)에 힘쓰더니 더욱 『대학(大學)』의 성의장(誠意章)에 공력을 써서 속이지 않음과 홀로 있을 때도 삼가하는 것으로 일용 공부를 삼았다. 비록 어두운 방에 있더라도 의관을 반드시 바르게 하여 엄연히 하는 것이 스승과 붕우를 대하는 때와 같이 했다. 부모의 상중에 있을 때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지했고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바칠 때는 친히 스스로 음식을 갖춰서 그 정결함을 극진히 했다. 또 여러 아우들을 대할 때는 그 우애를 극진히 했으니 아우 이선(李璿)과 이탁(李琢)이 모두 등에 종기를 앓을 때에 항상 그 농즙(濃汁)을 빨아주고 그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했다. 수우당(守愚堂)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친구로 삼아 의리를 나누니 수우당도 깊은 조예를 허락했다.

공천(公薦)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을 삼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51세가 되던 해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니 수우당이 매우 애석하게 여겨 이르기를, “내가 교유한 사람이 많았으나 실제에 힘쓰고 독실하게 행하는 것이 이와 같은 사람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라고 했다. 호를 안계(安溪)라 하더니 임종할 때에 수우당·각재(覺齋) 하항(河沆)·조계(潮溪) 유종지(柳宗智)·하예산(河禮山)이 모여서 병문안을 가니 안계가 말하기를, “내가 먼저 가는 것을 슬프게 생각하지 말게. 수년 뒤가 되면 마땅히 나의 죽음을 부러워할 것.”이라고 했다. 뒤에 기축옥사(己丑獄死)의 화가 생겨나서 수우당 및 조계가 모두 화를 입으니 그의 말이 과연 맞았다. 주내(州內)의 죽동(竹洞)에 살았다.

손천우(孫天佑) : 자는 군필(君弼)이요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천성이 순후하고 행실이 돈독하며 효우가 두텁더니 남명(南冥)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고 수우당(守愚堂)과 더불어 도의의 친교를 맺었다. 호는 무송(撫松)이다. 이하리(籬下里)에 살았다.

신공필(愼公弼) : 자는 사훈(士勳)이요 본관이 거창(居昌)이다. 기질이 헌앙(軒昻)하여 청렴과 고상함을 스스로 지켰다. 늙어 남명(南冥) 선생을 섬기니 선생이 칭찬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천품이 맑고 고상하고 지식이 통명(通明)하니 비록 시례(詩禮)의 이름난 선비라고 하더라도 자못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백곡리(柏谷里)에 살았다.

양응룡(梁應龍) : 자는 사운(士雲)이니 성질이 청수하여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고 남명(南冥) 선생의 문하에 출입했다. 운곡(雲谷)에 살았다.

○ 김여(金勵) : 자는 여지(勵之)니 성품이 뜻이 크고 조략하되 남의 착하지 못한 것을 보면 더러운 것을 보는 것과 같이 했으며 남명(南冥) 문하에 출입했다.

하면(河沔) : 자는 혼원(混源)이니 생원 하희서(河希瑞)의 아들이다. 과거 공부에 힘을 써서 여러 번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그의 아들 하수일(河受一)·하천일(河天一)·하경휘(河鏡輝)가 모두 사마(司馬) 시험에 합격하고 하수일은 문과에 오르니 이른바 “나는 비록 공부를 못했지만 우리 세 아들은 공부한 사람.”이라고 한 것과 같다. 수곡리(水谷里)에 살았다.

조종도(趙宗道) : 자는 백유(伯由)요 어계(漁溪) 조여(趙旅)의 후손이다. 천품이 고명하여 스스로 청백을 지켰으며 더욱이 예학(禮學)에서 자세함을 이루었고 남명(南冥) 선생을 사사하여 경의(敬義)의 뜻을 들었다. 일찍이 사마(司馬)를 맞혀서 안기찰방(安奇察訪)에 발탁 제수되었다. 장예원사평(掌隷院司評)과 한성참군(漢城參軍)에 누차 전직되었고 외직으로 양지현감(陽智縣監)·금구현감(金溝縣監)으로 보(補)했다. 을해년(선조 18년, 1585) 이후로 당의(黨議)가 횡류하여 조정이 두드러지게 안정되지 않는 것을 보고 문득 술을 마시고 희소(戲笑)하며 자호를 대소헌(大笑軒)이라 이르고 스스로 자취를 세상에서 숨겼다.

기축년(선조 22년, 1589)에는 죄가 아닌 것으로써 연루되어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함께 잡혀 여러 달을 갇혀 있었으나 담소가 침착하고 역시 움직이지 않더니 얼마 뒤에 놓여났다.임진란에는 직장(直長) 이공노(李公魯)와 의병을 일으켜 군현에 격문을 전하다가 마침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진주에 온 것을 보고 기뻐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를 도왔다.”고 했다. 임시로 의령가수(宜寧假守)로 제수되었다가 가을에 피난 중의 조정에서 의병을 일으킨 공을 포상하여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제수되었고 겨울에는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뒤로 연이어 안주(安州)와 청풍(淸風)에 명령이 있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도로 함양군(咸陽郡)을 지켰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적이 재차 발동하니 급기야 처자를 거느리고 황석산성(黃石山城)으로 들어가서 사수할 계책을 삼다가 성이 함락되자 안음군수(安陰郡守) 곽준(郭䞭)과 더불어 갓과 띠를 갖추고 북쪽을 향하고 죽으니연표보기 아내 이씨(李氏)도 따라 죽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소남리(召南里)에 살았다.

하응도(河應圖) : 자는 원룡(元龍)이요 만력(萬曆) 계유년(선조 6년, 1573)에 진사가 되었다. 기개와 도량이 탁 트이고 넓어서 작은 절개에 구애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남명(南冥) 선생의 제자가 되어 추향할 바를 알았다. 중년이 되어 하동현(河東縣) 신월촌(新月村)으로 옮겨 살면서 형제 세 사람이 모부인을 받들고 주방을 한집에서 같이하더니 공천(公薦)으로 소촌찰방(召村察訪)으로 제수되었다. 정유난이 있은 뒤에 본 고을이 이산되어 모양이 없게 되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공이 부지런하고 능력과 재주가 있다.’고 하여 판관(判官)을 제수했다. 뒤에 능성(綾城)과 예산(禮山) 두 고을에 임명하니 모두 정사의 치적이 있었고 만년에는 덕산동(德山洞)에 들어가서 병으로 세상을 마쳤다.연표보기 서신대(西申大)에 살았다.

진극경(陳克敬) : 자는 경직(敬直)이요 본관이 여양(驪陽)이다. 사람됨이 강직하여 옳은 것을 보면 반드시 용기를 내었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했으니 이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찍이 남명(南冥)의 문하에 출입하니 수우당(守愚堂)도 또한 깊이 허락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중건하고 이어 원장이 되었다. 마동(馬洞)에 살았다.

이정(李瀞) : 자는 여함(汝涵)이요 본관이 재령(載寧)이다. 재예가 뛰어나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집에 있을 때는 효우했고 고을에서는 돈목했다. 일찍부터 남명(南冥) 선생의 제자가 되었고 임진란이 발생했을 때는 향병(鄕兵)을 불러 모아 적의 통로를 막아 끊었고 그 공으로 사근찰방(沙斤察訪)을 제수했다. 이어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니 산성을 굳게 지켰고 나아가서는 청주목사(淸州牧使)와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제수되었다. 난이 끝난 뒤에는 함안(咸安)으로부터 서면원당(西面元堂)으로 옮겨와서 살았는데 이는 그의 처가의 고을이기 때문이었다. 이어 덕천서원(德川書院)의 원장이 되어 원우(院宇)의 아직 끝내지 못한 것을 중건했다. 원당(元塘)에 살았다.

유종지(柳宗智) : 자는 중명(仲明)이다. 천성이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와 위의가 단정하고 아름다웠으며 언론이 자세하고 분명하고 또 재주와 슬기가 있었다. 각재(覺齋) 하항(河沆)과 함께 남명(南冥) 선생을 뵙고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받아 비로소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다. 수우(守愚) 선생을 따라 놀면서 도의의 벗이 되었고 항상 의리와 공과 사의 구별을 강론했다. 두 번이나 참봉(參奉)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더니 기축옥사(己丑獄死)의 변으로 억울하게 감옥에서 죽었다. 이때 나이 44세였고 호는 조계(潮溪)다. 원당(元塘)에서 살았다.

하천주(河天澍) : 자는 해숙(解叔)이다. 처음에는 남명(南冥) 선생을 뵙고 『근사록(近思錄)』을 배우고 뒤에는 수우당(守愚堂) 문하로 나아갔다. 수우당이 기국과 도량이 있음을 알고 가장 중히 여겼으며 밖은 온유하고 안으로는 강건했다. 부모를 섬김에 맛있는 음식과 따뜻하고 서늘한 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림의 풍도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분하게 여겨 매양 맑은 것을 드러내고 혼탁한 것을 물리치려는 뜻을 가지다가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류가 애석하게 여겼다. 서신대(西申大)에 살았다.

정승윤(鄭承尹) : 자는 임중(任中)이요 교도(敎導) 정관(鄭寬)의 아들이며 융경(隆慶) 경오년(선조 3년, 1570)에 진사가 되었다. 효성과 우애가 깊고 지극하여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 집상(執喪)을 예로써 했다. 깊은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묘를 3년 동안 지키되 발을 밖에 내지 않고 죽을 마시며 슬퍼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탄복했다. 악한 것을 미워하는 단단한 기질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했고 전원에서 분수를 지키면서 가난했지만 그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호는 남계(南溪)다. 동산(東山)에 살았다.

이호변(李虎變) : 자는 자무(子武)요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손자다. 경오년에 생원과 진사에 함께 합격했다. 기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했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구암이 종기를 앓아 형세가 매우 위중하자 이호변이 항상 입으로 그 농즙(濃汁)을 빨아서 종기를 낳게 했다.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강주(康州)에 살았다.

이곤변(李鯤變) : 자는 자거(子擧)니 이호변(李虎變)의 아우다. 형제가 진사에 동방으로 합격했으며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했다. 글 짓는 것을 잘해 그가 지은 부(賦)와 표(表)가 사람들의 입에 많이 회자되었다. 강주(康州)에 살았다.

신가(申檟) : 자는 양중(養中)이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다. 천성이 순박하고 진실하여 어버이를 섬기거나 스승을 섬김에 있어 정성과 간곡함을 다했다. 손님이나 친구를 접대함에 있어서도 인정과 정성을 다했다. 수우당(守愚堂)의 문하에 출입했는데 수우당도 독실함을 인정했다. 조동(槽洞)에 살았다.

○ 이인민(李仁民) : 자는 자원(子元)이요 이공준(李公準)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탁 트여서 작은 자잘한 것에 구애되지 않았다. 일찍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삼재(三宰) 이준민(李俊民)의 집에 이르렀다. 그와 술을 마시다가 술이 반쯤 취했을 때에 삼재가 말하기를, “자원아, 너는 시골에 내려가지 말고 내 집에 이대로 머물러 있어라.”라고 말했다. 자원이 대답하지 않고 얼마를 있은 뒤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크게 웃고서 말하기를, “형은 아우를 알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형은 일찍부터 이 아우가 벼슬을 구하는 사람으로 보셨습니까?”라고 했다.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가 안기찰방(安奇察訪)이 되었을 때에 자원이 대소헌의 집에 손님으로 갔더니 이때에 서익(徐益)이 안동군수(安東郡守)가 되었다가 자원이 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관광(觀光)을 하고 싶다.”고 하며 자원을 맞이했다. 자원이 이르니 술을 놓고 크게 마시더니 자원이 여기에서 바로 그의 목을 잡고 그의 가슴을 누르면서 꾸짖어 말하기를 “서익아, 너는 어찌하여 술을 마시지 아니하느냐?”며 몹시 거칠게 행동했다. 서익이 관청 안으로 달려 들어가니 자원이 쫓아 들어옴으로 서익과 아속들이 달려가서 피하여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웃고 ‘태수의 관광’이라고 했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될 때에 죽었다.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하수일(河受一) : 자는 태이(太易)요 하면(河沔)의 아들이다. 기축년(선조 22년, 158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신묘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로 전적(典籍)·형조정랑(刑曹正郞)·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외직으로 영산현감(靈山縣監)·상주제독(尙州提督)·경상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다. 만년에는 벼슬에 나가는 것을 일삼지 않고 당의(黨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수곡(水谷)에 서재를 짓고 오로지 생도들의 가르침에만 힘쓰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다. 일찍이 모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지식이 사람에게 가장 큰 것이니 『대학(大學)』에 ‘지식을 이루는 것은 뜻을 정성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먼저 하는 데에 있다.’고 했고, 『중용(中庸)』에 ‘인용(仁勇)은 지식이 있은 뒤에 나타난다.’고 했으니, 배우는 사람들이 공부를 할 때 어찌 궁리(窮理)에서 외면하겠는가?”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나의 각재(覺齋) 숙부께서 남명(南冥) 선생께 친히 배우고 그 도를 전했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수중(手中)에 밝은 달이 요순(堯舜)으로부터 전해졌으니 우리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굳게 사숙(私淑)할 것을 생각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잊지 말라.’고 했으니 너희들은 나의 문하에서 나가더라도 깊이 오르는 것과 같은 힘을 이루게 하라.”라고 했다. 호는 송정(松亭)이니 문집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수곡리(水谷里)에 살았다.

정홍조(鄭弘祚) : 자는 사응(士應)이요 정인평(鄭仁平)의 계자(繼子)다. 성질이 순후하여 고을에서 추앙되고 인정받았다. 기축옥사(己丑獄死)의 변이 일기 전에 진주판관(晉州判官) 홍정서(洪廷瑞)가 말하기를, “역적이 최모(崔某)와 왕래한다는 말을 주(州)의 별감(別監)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이로 인해 정홍조가 왕옥(王獄)에 갇혀 있더니 문초에 대답하는 말이 조금도 의심스럽지 않아 영남우도의 사림(士林)들이 화를 면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수우당(守愚堂)이 갇혔을 때에 어떤 사람이 「옥중기(獄中記)」를 쓴 것이 있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진주(晉州)사람 정홍조가 공의 옥안(獄案)에 연좌되어 서울로 잡혀 갔더니 어떤 사람이 공에게 말하기를 ‘불행히도 정홍조가 무고한 일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라 하니 공이 말씀하기를, ‘내가 정홍조와 비록 같은 고을에 살지만 일찍이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정홍조가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것도 운명이니 어떻게 하겠는가?’”라 했다. 정홍조가 옥에 들어갔을 때에 공은 이미 돌아간 때였다. 정홍조는 한 선비의 물음에 따라 옥자(獄者)에게 대답한 까닭이 매우 지극하니 선비가 타이르며 말하기를 “무릇 옥사(獄辭)란 바른 것으로써 할 따름이다. 하늘의 도리는 뚜렷하게 밝은 것이니 귀신도 속이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다. 정홍조가 분해하며 일러 말하기를 “최공은 풍류를 아는 선비요, 나와 같은 자는 흙덩이에 묻힌 벌레와 다름이 없다. 언제나 그 문하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왔으나 지금은 나이가 늙었다. 설사 잊어버리고 면하게 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반드시 침 뱉고 꾸짖기를 ‘이는 최모를 그릇 죽게 한 자’라고 할 것이니, 홀로 자손을 어떤 지경에 놓이게 하겠는가?”라고 했다.

대개 이 옥사는 김제군수(金提郡守) 허흔(許昕)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허흔이 진주판관(晉州判官) 홍정서(洪廷瑞)에게서 들으니 “역적이 최모의 집에 왕래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홍정서는 스스로 말하기를 “진주별감(晉州別監) 정홍조에게서 들었다.”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홍정서는 먼저 이미 옥에 갇혀 있더니 수차 사람을 보내어 협했으나 정홍조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기에 이르러서는 이르기를 “최모의 집은 주치(州治)의 5리쯤에 있어서 이 홍조의 집과는 실로 40리나 됩니다. 이때에 역적은 이미 이름을 숨긴 지가 오래였고, 설사 백일하에 왕래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른바 이름난 이들과 함께 모일 수가 있겠습니까? 5리의 판관이 알지 못한 것을 40리의 먼 거리에 있는 정홍조가 홀로 알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일 가만히 몰래 왕래했다고 하더라도 저는 실지로 알지 못했는데 어찌 홍정서에게 말을 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옥사(獄辭)가 승전색(承傳色)에게 들어감에 이르러서 뜻을 펴 홍정서에게 계속 형벌과 심문을 가하더니 취조관이 정홍조가 반복한 것을 거듭 아뢰었다. 이리하여 정상이 거의 드러난 것 같으니 홍정서에게 심문을 가하는 것이 옳지 못했고 밤도 이미 깊었으므로 다른 승전색이 나와서 홍정서에게 한번 심문하여 마치고 부득이하여 또 정홍조에게 한번 매질했다가 다음 날에 함께 석방했다.

한계(韓誡) : 자는 신백(愼伯)이요, 한여철(韓汝哲)의 아들로 만력(萬曆) 경인년(선조 23년, 1590)에 생원에 합격했다. 집에는 효도하고 우애했으며 향당에서는 돈목했다. 나이 스물이 안 되어 부친상을 당했더니 아우 한응(韓譍)과 더불어 상중에 있으면서도 가르침을 매우 부지런히 했다. 타일러 말하기를 “네가 성인(聖人)이 되지 못하면 이는 나의 허물”이라 하고 항상 경계하고 타이르기를 더했다. 한응의 나이 15세에 능히 논책(論策)을 지으니 이에 이르기를, “나의 가르침은 끝났다.” 하고 비로소 함께 담소하고 놀면서 즐겼다. 천거되어 참봉(參奉)이 되고 봉사(奉事)에 이르렀다. 정수개(丁樹介)에 살았다.

한응(韓譍) : 자는 신중(愼仲)이요 한계(韓誡)의 아우다. 형제가 20여 년을 함께 살아도 사람에게 이간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친구를 접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믿음으로 했고 지론(持論)은 반드시 옳았다. 이렇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중하게 보였더니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정수개(丁樹介)에 살았다.

강의문(姜義文) : 자는 의숙(宜叔)이요, 생원 강호(姜灝)의 아들이다. 맑은 얼음과 같은 지조와 가을 하늘과 같은 기상으로 악한 것을 미워하기를 나쁜 냄새와 같이 했고 옳은 것이 아니면 개자(芥子) 한 알도 취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청원리(淸源里)지도보기에 살았다.

이욱(李郁) : 자는 문재(文哉)요,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만력(萬曆) 기묘년(선조 12년, 1379)에 생원에 합격했는데, 성질이 단아하고 장중하며 언론이 알맞았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했다. 재주가 있으되 펼쳐 보이지 않더니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될 때에 죽었다. 반동산(班東山)에 살았다.

○ 이호(李壕) : 자는 사고(士高)요, 본관이 철성(鐵城)이며 참봉(參奉) 이염(李琰)의 아들이다. 천성이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했다. 효도와 우애스런 행실로 능히 그 가풍을 잇더니 불행하게도 일찍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주내(州內)에 살았다.

하증(河憕) : 자는 자평(子平)이요, 생원 하국보(河國寶)의 계자(繼子)다. 만력(萬曆) 신묘년(선조 24년, 1591)에 진사에 합격했다. 천성이 순후하고 앎과 행실이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워 평생의 일 처리를 진실되고 도타운 것을 주로 하고 모난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명(南冥) 선생이 평일에 차(箚)·기(記)·자(子)·집(集) 가운데서 요긴한 말을 뽑아 『학기(學記)』라고 이름하여 쓰다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니 공이 덕천원장(德川院長)이 되어 교정과 증보를 하고 장인을 모아 판각에 부쳐서 널리 전했다. 또 한두 동지와 더불어 『진주지(晉州誌)』를 편찬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으니 사류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호는 창주(凔洲)다. 단지동(丹池洞)에 살았다.

하협(河悏) : 자는 자기(子幾)요, 생원 하위보(河魏寶)의 아들로 만력(萬曆) 을사년(선조 38년, 1605)에 진사에 합격했다. 사람됨이 자상하고 화평하고 단아하며 효우가 천성에서 나왔다. 형제 사이에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즐거운 모습이었고 붕우를 접대함에 있어서는 서로 착한 것으로 경책(警策)하니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명함이 절륜하고 지식이 고명했으며 또 빛나는 재주가 있으니 장차 크게 쓰일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세도가 공평치 못함을 보고 일찍부터 과거 보는 것을 폐했다. 강호에서 참된 성품을 기르고 편안하고 조용하게 지내면서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불행히 일찍 죽으니 원근의 선비들이 애석히 여겼다. 단지동(丹池洞)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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