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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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필(崔琦弼) :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무과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더니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에 들어왔다.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가 임금이 피난한 곳으로 계문을 올리니 본주의 판관(判官)을 삼았다. 성이 함락되어 순절했는데 계해년(영조 19년, 1743)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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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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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변(崔琦抃) : 현감(縣監)을 지냈으니 본관이 전주(全州)이요, 인천(仁川)에 살았다. ○ 최기준(崔琦準) : 부사(府使)를 지냈으니 본관이 전주(全州)이요, 인천(仁川)에 살았다. ○ 하응구(河應龜) : 부장(部將)을 지냈고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훈에 기록되었다. ○ 하천오(河天鰲) : 수문장(守門將)을 지냈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 황계량(黃桂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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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윤민(河潤民) : 진사다. ○ 손석윤(孫錫胤) : 자는 여선(汝善)이요, 계유년(인조 11년, 1633)에 진사에 올랐으니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 손지순(孫之順) : 자는 덕이(德而)요, 갑술년(인조 12년, 1634)에 진사에 올랐고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 조진(曺𣉮) : 갑술년(인조 12년, 1634)에 생원에 올랐고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 성호정(成好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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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운표(朴運杓) :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기축년(1949)에 와서 신묘년(1951)에 갔다. ○ 노재륜(盧在崙) : 본관이 풍천(豊川)이니 신묘년(1951)에 와서 같은 해에 갔다. ○ 조희두(曺喜斗) :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신묘년(1951)에 와서 계사년(1953)에 갔다. ○ 김한기(金漢基) : 본관이 김해(金海)이니 계사년(1953)에 와서 같은 해에 갔다. ○ 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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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역(梁嶧) : 호는 운곡(雲谷)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셋째 아들이다. 기유년(세종 11년, 1429)에 사마시에 합격해 연일진병마첨절제사(延日鎭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한데다가 뜻이 멀고 행실이 높아서 안과 밖에서 추중(推重)되었다. 단성(丹城)으로부터 진주 운곡(雲谷)에 옮겨와서 살았다. ○ 하공효(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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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원(閔愿) : 자는 흥중(興仲)이요, 호는 석계(石溪)이며 본관이 여흥(驪興)이니 판서(判書) 민심언(閔審言)의 후손이다. 문과에 올라 직장(直長)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면서 행실은 방정했으며 목표하는 것은 높으면서 뜻은 넓었다. 충주(忠州) 음성(陰城)으로부터 옮겨와 진주의 옥봉(玉峰)에 살았다. ○ 최원민(崔元敏) : 호는 죽계(竹溪)요, 본관이 삭녕(朔寧)이니 사간(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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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현(李胤玄) : 자는 시로(時老)요,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니 매월당(梅月堂) 이하생(李賀生)의 증손이다. 18세 때에 부친을 모시고 산간 마을에서 천연두를 피하더니 갑자기 어느 날에 도적이 들어와 부친을 해치려고 했다. 윤현이 몸으로 날개처럼 덮어서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몸에 부상을 입고 이어 병을 얻어 의원을 찾아 약을 구하여 8년을 견디다 마침내 천수를 마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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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최운개(崔云凱)의 딸이요, 승사랑(承仕郞) 진양(晉陽)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임진년에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항상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써 죽음을 결단할 것”이라고 했다. 해를 넘겨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과연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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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진(河溍) : 자는 진백(晉伯)이요 호는 태계(台溪)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태촌(台村) 하공효(河公孝)의 아들이다. 갑자년(인조 2년, 1624)에 진사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여러 번 맑은 요직을 거쳐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러 많은 녹봉에 뽑혔다. 병자호란 때 향병을 모아 달려가다가 상주(尙州)에 이르러 부친상을 만나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사간원(司諫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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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륜(河崙) : 고려 말에 과거에 합격해 중앙과 지방에 역임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질이 있었다. 태종(太宗)을 도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 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했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했다.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하연(河演) : 하윤원(河允源)의 손자이다. 과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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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牟恂) : 세종(世宗) 때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종기를 빨아서 낫게 했고 또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에 똥을 맛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군만(君萬) : 광대이다. 그의 아버지가 밤에 호랑이에게 물려가자 군만이 하늘을 부르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활과 활촉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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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경상도 지방에서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의 영역이었으며 이것은 서부 경상남도에서 거창, 산청, 진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4세기경으로 편년되는 평면 타원형의 주거지의 분포 상황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야의 영역이었던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 후기에 이르러 영역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지방 통지조직 중 삼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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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 있는 서원. 경상도 지역에 건립된 193개의 서원 중 경상남도 지역은 19개 군에 44개 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주지역에 해당되는 서원은 7개로 경상남도에서 가장 많다. 재실의 수에 있어서도 진주지역에 약 500여개가 분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현재도 문중에 따라 새로 건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재(齋)’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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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 조식(曺植)의 외손이다.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맞지 않는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황해도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경상남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5월 경상남도 함안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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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기차·배·비행기 등을 이용하여 사람이 오고 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 일. 진주시는 동쪽으로 마산시 및 함안군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 하동군, 남쪽으로 사천시 및 고성군, 북쪽으로는 산청군 및 의령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진주시는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문화·정치·경제의 중심지이고, 교통의 결절지이다. 진주시는 영남과 호남을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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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진주에서 조직된 영남 사림들의 친목단체. 섭리에 순응하고 이상적인 도학(道學)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사림파의 친목단체로 조직되었다. 지배층의 솔선수범과 근검절약을 신조로 삼았다. 1489년(성종 20), 진주목사 경임, 김해도호부사 이손(李蓀)[1439~1520], 창원도호부사 이영분(李永賁), 전 진주목 교수 김일손(金馹孫)[1464~1498], 조위(曺偉) 등을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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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나 차들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비교적 큰 길. 진주는 역사적으로 서부 경상남도의 문화·정치·경제의 중심지이고, 도로 교통의 결절지이다. 진주시는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동서 방향으로 남해고속국도와 남북을 연결하는 통영~대전 간 고속국도가 교차하고 있고, 2번 일반국도·3번 일반국도·33번 일반국도가 통과하는 영남과 호남 간 그리고 중부 지역과 남부 지역 간의 교통 요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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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성동일(成東一)[1753~?]이 발급받은 호패와 가족의 호패꾸러미 일괄. 성동일은 본관이 창녕, 호는 공금당(拱衾堂)이다. 횡성현감, 칠곡부사 등을 지내며 정사를 잘 돌보았다. 이 호패는 1780년(영조 4)에 발급받은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의 후손 성조석 댁에서 보관하고 있다. 재질은 나무이고, 길이 10.5㎝, 폭 2.2㎝, 두께 0.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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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추지(樞之). 성종 때 교리를 지낸 성안중(成安重)의 손자로, 성일휴(成日休)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모시면서 법도에 어긋남이 없도록 했으며,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서는 6년간의 시묘살이로 자식된 도리를 다했다. 어머니가 먼저 별세하여 서모를 모셨는데, 서모도 친모처럼 섬겼으며, 서동생들도 친동생같이 돌보았다. 서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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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효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는 이선(而善)·흡여(翕如), 호는 매죽헌(梅竹軒). 아버지는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이다. 1571년(선조 4)에 성여신의 장남으로 태어나 진주 대여촌에 살았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모촌(茅村) 이정(李瀞)[1541~1613]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아버지와 스승은 모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들이다. 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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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직제학을 지낸 성사재(成思齋)의 6대손이며, 성흔(成忻)의 아들이다. 출생연도는 미상이며 음서로 진주판관에 임명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진주판관으로 발탁되어 군무를 맡아 성벽을 개수하고 무기를 수선하는 등 전비를 갖춘 후 격문을 붙여 충의지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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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는 덕여(德輿). 아버지는 성우(成祐)이고, 어머니는 진주강씨로 강소산(姜小山)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성자량(成自諒), 증조할아버지는 성만용(成萬庸)이다. 부인은 진주하씨로 하충(河漴)의 딸이다. 1469년(예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2년(성종 2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조선시대의 종5품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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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浮査, 桴楂)·야로(野老). 우윤을 지낸 성두년(成斗年)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충절을 지킨 성여충(成汝忠)과 성여효(成汝孝)가 그의 형이다. 1546년(명종 1) 출생하여 1632년(인조 10) 86세로 별세하였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문명을 떨치다가 1609년(광해군 1) 63세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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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진주목사 성이성(成以性)의 선정을 기리는 비. 성이성은 본관은 창녕, 호는 계서(鷄西)이다.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어사 민정중(閔鼎重)의 보고로 선정이 조정에 알려졌다. 후에 청백리로 뽑혔으며 사후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1657년(효종 8)부터 이듬해까지 진주목사를 지낸 성이성[1595~1664]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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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화(子華). 성안중(成安重)의 아들이며, 성일휴(成日休)의 아우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성일장(成日章)은 재예(才藝)가 남보다 뛰어나고 학문적인 명성이 일찍 알려져서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불행하게도 급제를 하여 그 이름을 날리지는 못해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강응규(姜應奎), 강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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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경(子慶), 호는 무심옹(無心翁). 교리(校理) 성안중(成安重)의 셋째아들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강호에 은거하여 영리를 멀리 하였으며 자호를 무심옹(無心翁)이라 하고 초당은 무심정(無心亭)이라 일렀다고 한다. 방당(方塘)에 임하고 자연을 대할 때에도 모두 무심으로 이름 지었다. 손수 ‘피를 엮어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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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화백(和伯), 호는 죽와(竹窩). 인조 때의 학자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스러워 가난한 형편에도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다. 그의 아버지가 죄를 입어 먼 곳에 귀양을 가게 되자 걸어서 서울까지 가 혈서로 아버지를 구해 달라는 호소문을 올렸는데, 열 손가락이 온전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왕이 그 지성스러운 효성에 감동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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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영남사림으로서 남명학파를 이룬 성리학자 조식. 조식(曺植)의 생졸년은 1501(연산군 7)~1572(선조 5)이며,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이며, 남명은 그의 호이다. 어떤 위대한 인물이 역사에 출현하는 데에는 역사적 전통과 지리적 특성이 바탕이 된다. 남명 역시 조선 초기 이후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이 형성해온 학문적 연원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경상우도(慶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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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유학자 성환부의 문집. 성환부(成煥孚)[1870~1947]는 휘(諱)가 환보(煥寶)이고 자는 인술(仁述), 호는 정곡(正谷)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성낙주(成駱柱)와 진양하씨(晋陽河氏) 사이의 여덟 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성품이 공순하고 효성스러웠으며, 가세가 기울어진 이후 농사일을 하면서도 학문을 즐기다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장지(葬地)는 신기(新基) 안산(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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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자는 문위(文偉). 현령을 지낸 조안중(曺顔仲)의 아들이다. 1434년(세종 16)에 태어나 1475년(성종 6) 문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에 발탁되었다. 1478년 이조좌랑에 재직 중 평안도에 파견되어 민심을 회유하였다. 1479년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정벌할 때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이 되어 참전하였고, 이듬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 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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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본가는 삼가판현(三嘉板峴)[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지역]에 있었고, 토동(兎洞)은 외가이다. 아버지는 조언형(曺彦亨)으로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지냈으며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로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이자 좌의정(左議政) 최윤덕(崔潤德)의 외손녀였다. 조식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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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 할아버지는 울진현령 조안중(曺顔中)이고,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조숙기(曺淑沂)이다. 어머니는 정유의(鄭攸宜)의 딸이다. 진주 송곡리에 살았다. 1502년(연산군 8)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선전관이 되었다. 1506년 유빈(柳濱)·윤상로(尹漡老) 등과 협의하여 연산군을 폐하려 하였으나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의 반정이 먼저 성공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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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판문동에 있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댐과 남강댐에 의해 생긴 인공호수. 진주를 흐르는 남강의 근원은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는데 경호강이라 부르며, 다른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덕천강으로 부른다. 이 두 강이 진주 시내 서쪽 광탄(光灘)[너우니]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 제방을 쌓고 사천만으로 방수로를 뚫어 남강 하류의 홍수를 방지하자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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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加芳里)에 있는 조선 중기의 누각(누정) 건물.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慶尙右道)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닦던 장소였다. 부사정(浮査亭)의 ‘부사(浮査)’는 부사 또는 야로(野老)로 불려지던 성여신(成汝信)[1546~1632]의 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성여신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야로로 남명 조식(曺植) 선생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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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성씨는 원래 중국 성씨로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 후 당나라 때에 학사 성경이가 우리나라로 건너왔고 백제에는 성충, 신라에는 성저라는 사람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의 성씨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고증할 수 없다. 시조는 창녕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이며 고려 때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 중윤을 역임한 성인보(成仁輔)이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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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호탄동에 있는 정부투자기관. 도로의 건설 및 유지·관리와 이와 관련된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도로 교통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69년 1월 17일 한국도로공사법이 공포되고, 같은 해 2월 15일 한국도로공사가 창립되었다. 이후 1988년 3월 2일에 부산, 창녕, 마산과 함께 한국도로공사 경남지사 진주지부가 발족하였다. 1995년 8월 10일 한국도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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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까지의 한국전쟁 기간 중 진주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한국전쟁은 민족의 비극으로서 우리 사회에 큰 피해와 흔적을 남겼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 수행 주체와 성격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대한 쟁점이 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책임 주체를 둘러싼 논란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전통주의설과 수정주의설 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