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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10025

성여신(成汝信) : 자는 공실(公實)이요, 호는 부사(浮査)며, 우윤(右尹) 성두년(成斗年)의 아들이니 가정(嘉靖) 병오년(명종 1년, 1546)에 나서 만력(萬曆) 기유년(광해군 1년, 1609)에 생원과 진사의 두 시험에 합격했다. 일찍이 남명(南冥)과 구암(龜巖)의 두 문하에서 유학하여 경의(敬義)의 지결(旨訣)을 얻어듣고 종신토록 마음에 깊이 새겼다. 서책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필법에서도 당세에 이름이 났다. 일찍이 단속사(斷俗寺)에서 글을 읽더니 승(僧) 휴정(休靜)이 펴낸 『삼가귀감(三家龜鑑)』에 유가(儒家)를 맨 끝에 둔 것을 보고 공이 분을 내며 승도를 불러 그 판각을 불태우게 했으니 이처럼 그는 사교를 엄히 막았다. 임진왜란이 있은 뒤에 향읍이 분탕되고 학교가 다 폐해지니 공은 향약(鄕約)을 만들고 닦아서 무너진 풍속을 만회시키고 후진을 권장하고 이끌어 끊어진 학문을 강하여 밝히니 여기에서 유학의 풍속이 다시 진흥되었다. 또 동계(桐溪) 정온(鄭蘊)과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등 여러 공들과 더불어 계서회(鷄黍會)를 설립하여 만년에 종유(從遊)하는 즐거움을 삼았고 뒤에는 두셋의 동지와 더불어 『주지(州誌)』를 편찬했으며 임천서원(臨川書院)지도보기과 물계서원(勿溪書院)의 두 군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文集)이 있다.

강덕룡(姜德龍) : 자는 여중(汝中)이요, 호는 매촌(梅村)이며, 임계(臨溪) 강심(姜深)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임진란에 수사(水使) 원균(元均)의 진영에 달려가서 왜적과 연달아 싸워 열두 번을 크게 이기니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조정에 아뢰어 함창현령(咸昌縣令)에 제수되었다. 갑오년에 상(喪)을 만났다가 상기가 끝나니 이원익(李元翼)이 불러서 체부영장(體府營將)을 삼았다. 그리하여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적을 성주(星州)와 고령(高靈) 땅에서 격파하고 장기현(長鬐縣)으로 옮겼다가 예빈주부(禮賓主簿)에 옮겼다.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사직하고 돌아와서 봉양함에 효성의 감동으로 고기가 들어오는 이변이 있었다. 수연(壽宴)을 베풀 때에 죽헌(竹軒) 하성(河惺)이 서문을 만들었고 선조(宣祖) 때에 선무원종일등훈(宣武原從一等勳)을 기록했으며 숙종(肅宗) 때에 효행으로써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철종(哲宗) 때에는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조차석(曺次石) : 자는 일회(一會)니 남명(南冥)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의 아들이다.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서 익히니 스승과 벗들에게서 공경하는 바가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여러 번 군읍(郡邑)을 맡았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정기룡(鄭起龍) : 자는 경운(景雲)이요, 진주(晉州) 사람인데 그가 곤양(昆陽)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또 곤양인(昆陽人)이라고도 일컬었다. 13세에에 부친상을 당해 여묘(廬墓)에서 곡읍(哭泣)했다. 일찍부터 형과 함께 스스로 과거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형이 병으로 죽는 바람에 결국 붓을 던지고 무과에 올랐다. 임진년에는 장의공(莊毅公) 조경(趙儆)을 따라 적을 쳤는데 조경이 왜적에게 사로잡히니 공이 적진으로 달려가서 구출하여 돌아왔다. 나중에 또 창졸간에 왜적의 큰 대장인 가등청정(加藤淸正)을 만나니 공이 앞을 당하여 말을 세운 채로 수십 명의 적을 쏘아서 쓰러뜨리니 청정 등이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또 명나라 장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도산(島山)을 공격할 때에 공이 선봉이 되었고, 이절(李梲)이 죽자 그 나머지 군사 7백 명이 모두 공에게 소속되기를 원했다. 명나라 천자가 즉시 공을 총병(總兵)으로 삼았고 양호(楊鎬)·마귀(麻貴)와 사세용(史世用)이 표패(標牌) 및 시장(詩章)을 주었다. 크고 작은 60여 차례의 싸움에 일찍이 패하거나 꺾이지 않았고 의관(儀觀)이 웅장하고 빼어났으며 눈빛이 횃불과 같았고 용맹과 계략이 모든 장수의 으뜸이었다. 벼슬은 통제사(統制使)에 이르렀고 품계는 보국(輔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다.

하천일(河天一) : 자는 태화(太和)요, 호는 수긍(守肯)이니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둘째 아우이다. 각재(覺齋)의 문하에서 배우고 만력(萬曆) 기묘년(선조 12년, 1579)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천거로 찰방(察訪)에 제수되었다. 시와 문장이 고상하고 기묘했으며 『주역(周易)』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집(遺集)이 있다.

하경(河憬) : 송강(松岡) 하항(河恒)의 여섯째 아우니 여러 형들을 따라 익히고 강마했다. 뜻을 가다듬고 힘써 배워서 명망과 절행(節行)이 함께 드러났다. 천거로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하찬(河璨) : 자는 중진(仲珍)이요,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둘째 아들이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함께 도의(道義)로 사귐이 매우 친밀했다. 그가 죽자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가 묘지명을 지어 선생의 문하에 정의(情誼)가 두터웠음을 드러냈다.

주몽룡(朱夢龍) : 자는 운중(雲中)이요, 호는 용암(龍巖)이며 본관이 웅성(熊城)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웅장하며 용맹했다. 열두서너 살에 능히 앉아서 열 발이나 뛰었고 또 여러 책에 널리 통달했다. 일찍이 무과에 올랐으나 영예로운 벼슬을 일삼지 않고 오로지 어버이 봉양에만 뜻을 두었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금산군수(金山郡守)가 되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왜적을 쳐서 여러 번 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영산(靈山)의 전투에서는 곽공을 포위에서 벗어나게 하니 군중에서 무서운 호랑이라고 불렸다. 강덕룡(姜德龍)정기룡(鄭起龍)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여 당시 ‘영남우도(嶺南右道)의 세 마리 용’이라고 일컬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절도사(節度使)에 이르렀고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추증하고 시호를 무열공(武烈公)이라 했다.

○ 조차마(曺次磨) : 자는 이회(二會)요, 호는 모정(慕亭)이며, 남명(南冥)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의 아들이니 음직(蔭職)으로 현감(縣監)이 되었다. 기개와 도량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고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했다. 문하에 있던 여러 어진 이들을 따라 선생의 남긴 글을 수집했다. 무민당(无憫堂) 박인(朴絪)과 더불어 『연보(年譜)』 및 『사우연원록(師友淵源錄)』을 의논해 바로잡고 또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과 더불어 신도비(神道碑)의 일을 의논했다.

정인상(鄭麟祥) : 자는 인백(仁伯)이요, 호는 구암(龜巖)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진사 정기(鄭起)의 아들이다. 훈도(訓導)로서 받은 품계가 가선동지(嘉善同知)였는데 타고난 자품이 온순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겨우 약관의 나이로 남명(南冥)의 문하에 배우러 나가니 남명(南冥)이 경계하여 이르기를 “몸을 사랑하기를 옥(玉)과 같이 하고 마음을 가지기를 물과 같이 하며 병 때문에 스스로 게을리하지 말라.”고 했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다가 임진년에 함께 부친상과 모친상을 만났더니 왜적이 돌연히 이르러서 촌락을 불 지르기에 이르렀다. 공이 영구(靈柩)를 안고 울부짖으니 왜적도 그의 효성에 감동받아 군사를 거둬 물러갔다. 왜란이 끝난 뒤에 문을 닫고 뜻을 구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며 제현들과 더불어 『덕천원록(德川院錄)』을 수정했다. 뒤에 사림들이 청계사(淸溪祠)에 잇달아 배향할 것을 의논하던 즈음에 훼철(毁撤)을 만나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성(河惺) : 자는 자경(子敬)이요, 호는 죽헌(竹軒)이니 사간(司諫) 하진보(河晉寶)의 아들이다. 일찍이 집안의 학문을 이어받아 문학과 행실로 세상에서 추중(推重)되더니 계묘년(선조 36년, 1603)에 진사에 합격되어 천거로 참봉(參奉)을 제수받고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쳤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상주(尙州)에 이르렀다가 강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처음 광해군(光海君)이 윤리강상을 무너뜨리자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과 더불어 이름을 같이하여 상소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이에 문간공이 울면서 시를 지어 이르기를 “내 홀로 거문고를 안고 보니 석 자가 넘는구나. 오직 그대만이 귀를 기울여 넓고 높은 뜻 알았을 것을! 지금에 와서 줄 끊겨 이어지기 어려운 줄 알지마는, 거문고를 덮어두고 다시 타지 않으리”라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문집(文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하인상(河仁尙) : 자는 임보(任甫)요, 송강(松岡) 하항(河恒)의 아들이며 호는 모송재(慕松齋)니 만력(萬曆) 계축년(광해군 5년, 1613)에 생원에 합격했다. 일찍이 집안의 학문을 이어받아 배우면서 실천을 힘쓰더니 거상(居喪)을 당함에 슬픔을 다했다. 앞장서서 도내의 사림(士林)을 이끌고 소(疏)를 올려 남명(南冥)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했다. 후진을 가르치니 한때에 이름이 높았고 많은 사람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청계사(淸溪祠)에 모셨는데 『교재록(喬梓錄)』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이예훈(李禮勛) : 자는 화백(和伯)이요, 본관이 재령(載寧)이니 호군(護軍) 이침(李琛)의 손자다. 학문과 행실, 그리고 문장이 있더니 만력(萬曆) 임오년(선조 15년, 158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일찍이 이르기를 “‘성(誠)이란 글자는 다만 공부하는 시종(始終)만이 아니니 사군자(士君子)는 날마다 써야 한다.’고 했으니, 여기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스스로 호하기를 성재(誠齋)라 했다. 둘째 아들 이강(李堈)의 자는 자허(子虛)인데 부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문학과 절행이 있었다.

정대순(鄭大淳) : 호는 옥봉(玉峰)이요, 본관이 연일(延日)이니 포은(圃隱)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후예다. 임진란에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서 최기필(崔琦弼)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했고, 모촌(茅村) 이정(李瀞)·창주(凔洲) 하증(河憕)·백곡(柏谷) 진인(陳寅) 여러 어진 이들과 함께 난후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중건했다. 평생을 충의로써 스스로 힘썼고 항상 힘을 사문(斯文)의 일에 바쳤다.

○ 최홍서(崔弘緖) : 수우당(守愚堂)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화(禍)를 입은 것을 뼈아프게 여겨 문을 닫고 뜻만을 구했으며 당세(當世)에 뜻이 없었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태계(台溪) 하진(河溍)의 여러 어진 이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음직(蔭職)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 조겸(趙㻩) : 자는 형연(瑩然)이요, 호는 봉강(鳳岡)인데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의 증손이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더불어 벗을 삼아 잘 지냈다. 기상이 웅건하고 언론이 쇄락(灑落)했으며 문학과 절행으로 일컬어졌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낫게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자 죽을 마시고 여묘(廬墓)에서 모셨다. 일찍이 과거장에 달려갈 때에 관리가 말을 뇌물로 청하는 것을 물리쳤으니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가 만시(輓詩)에서 “황금이 없으면서 장수를 누렸으니 마침내 밝은 임금에 비겨 부끄럽지 않겠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산수에 노닐면서 영예로운 이름을 내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다. 나이로 받은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 부사직(副司直)이었다. 뒤에 효성으로써 참판(參判)을 받았다. 유집(遺集)이 있다.

박민(朴敏) : 자는 행원(行遠)이요, 호는 능허(凌虛)니 군수(郡守) 박안방(朴安邦)의 아들이다. 정묘년에 진사에 합격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영우의병대장(嶺右義兵大將)으로써 원종훈(原從勳)에 참여했다. 천계(天啓) 임술년(광해군 14년, 1622)에는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창주(凔洲) 하증(河憕)와 더불어 『주지(州誌)』를 편찬했다. 정강서원(鼎岡書院)에 모셨더니 뒤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했다. 문집(文集)이 있다.아들 박경광(朴慶光)은 자를 화보(和甫)라 하고 북부참봉(北部參奉)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일찍이 덕천원장(德川院長)이 되어 서원의 규정을 증수(增修)하고 대(臺)를 파서 연꽃을 심은 뒤에 스스로 애련당(愛蓮堂)이라 했다.

정승훈(鄭承勳) : 삼계(三溪) 정밀(鄭密)의 아들이요, 호는 매죽당(梅竹堂)이니 만력(萬曆) 무자년(선조 21년, 1588)에 생원에 합격했다. 그의 재주와 기량은 기이하고 훌륭했으며 지조와 절개가 뛰어났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창주(凔洲) 하증(河憕) 같은 여러 어진 이들을 따라 『진양지(晉陽誌)』를 편찬했다.

○ 한몽룡(韓夢龍) : 자는 사현(士見)이요, 봉사(奉事) 한계(韓誡)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정성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만나 쌀과 양식을 빌어서 어버이를 봉양했고 무과에 올라 여러 번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 성용(成鏞) : 자는 이문(而聞)이요, 호는 모성재(慕省齋)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품이 어질고 도타웠으며 필법이 청려(淸麗)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군진에 참가하여 군기(軍旗)를 빼앗는 등의 노력과 공적이 많이 세웠다.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禮)를 지나쳐 이로 인하여 병이 생겼으므로 담제(禫祭 : 초상으로부터 27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를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다.

한몽일(韓夢逸) : 자는 자진(子眞)이요, 호는 봉악(鳳岳)이니 한림(翰林) 한여철(韓如哲)의 손자다. 갑자년(인조 2년, 1624)에 진사에 합격하고 벼슬은 좌랑(佐郞)이었다. 세 곳의 원을 두루 역임했는데 모두 청덕비(淸德碑)가 있다. 학문이 정밀하고 넓었는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으니 정구가 높은 제자로 대접했다. 영춘(永春)으로부터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지내더니 병자호란을 당하여 어려움을 무릅쓰고 적진 속의 길을 뚫고 임금이 피난한 곳으로 달려가서 문안했다.

이홍훈(李弘勛) : 자는 백건(伯建)이요, 본관이 재령(載寧)이다. 타고난 천성이 온후하고 기개와 도량이 매우 뛰어났다. 겸양과 공경으로 청렴결백하여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집안의 종들을 거느리고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의 화왕산성(火旺山城) 진지로 달려갔더니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로 제수되었다.

○ 조차정(曺次叮) : 자는 개회(開會)니 남명(南冥)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의 아들이다. 그 용모가 거의 남명(南冥)을 닮았고 성품은 자상하고도 공경하며 삼갔다. 항상 숙흥야매(夙興夜寐)하던 선조의 가르침을 지켰다. 벼슬이 만호(萬戶)에 이르렀더니 높은 나이로써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하선(河璿) : 자는 사윤(士潤)이요, 호는 송대(松臺)니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손자다. 종숙부 송정(松亭)을 따라서 배우고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더불어 가장 친히 지냈다. 만력(萬曆) 계축년(광해군 5년, 1613)에 생원에 합격했다. 천거하여 침랑(寢郞)에 제수되었더니 전중주부(殿中主簿)로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잘못을 구하게 하니 거의 5천언(五千言)이었다. 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특별히 잘 대우하는 비답을 내려 포장하고 이어 소를 묘당(廟堂)에 내렸다. 문집(文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백홍제(白弘悌) : 본관이 수원(水原)이다. 성품이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임진란에 나이 아직 어리나 어머니를 받들고 산 속에 숨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잡혔다. 바야흐로 바다를 건널 즈음에 적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그 칼을 가만히 훔쳐서 배 가운데에 있는 적을 모두 다 죽이고 급히 같은 배에 사로잡힌 사람 70여 명을 이끌고 돌아왔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에 제수되었다.

○ 정훤(鄭暄) : 자는 언승(彦昇)이요, 호는 학포(學圃)며 본관이 연일(延日)이니 포은(圃隱) 문충공(文忠公)의 후예다.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을 가졌더니 자라서는 더욱 지략과 용맹을 겸비했다. 처음에는 합천(陜川)에서 살더니 광해군(光海君)이 강상(綱常)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고을의 서쪽 대평(大坪)의 고산(孤山)으로 옮겼다. 터를 가려서 학포재(學圃齋)를 세우고 강학(講學)과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학문과 절행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제수했으나 사은하고 곧 돌아왔다. 여러 번 현감(縣監)을 제수하는 데 이르렀으나 나가지 않고 추응시(秋應詩)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문집(文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 성광(成鑛) : 자는 이광(李廣)이요, 호는 재천정(在川亭)이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아들이다. 일찍이 집안의 학문을 이어받아 자기를 수양했고 또 문장 짓는 것을 잘했다. 문을 닫고 뜻을 구했으며 평상시 생활에서도 책상과 안석을 밝고 깨끗하게 했고 거문고와 책을 즐겼다. 앞뒤의 어버이 상(喪)에 슬픔으로 몸을 상하는 데 이르도록 상제의 예절을 다했다. 짚자리를 떠나지 않고 수질과 상복 띠를 벗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이중영(李重榮) : 자는 경휘(景輝)요, 호는 행와(杏窩)니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스승으로 삼았다. 정신을 다 쏟아서 학문을 묻고 명행(名行)을 갈고 닦아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재랑(齋郞)을 제수받고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있은 뒤로부터는 날마다 노중련전(魯仲連傳)과 도정절공(陶靖節公)의 시를 외워서 비분을 달랬다. 청천사(淸川祠)에 모셨다.

○ 이중경(李重慶) : 자는 선보(善甫)니 학문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며 항상 세상을 근심하는 뜻을 품었다. 명나라의 사직이 멸망하자 살고 있는 처마에 ‘황명처사지려(皇明處士之廬)’라고 써 붙이고는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한몽삼(韓夢參) : 자는 자변(子變)이요, 호는 조은(釣隱)이니 헌납(獻納) 한여철(韓汝哲)의 손자다. 만력(萬曆) 계축년(광해군 5년, 1613)에 생원에 급제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장여헌(張旅軒)의 문하에서 유학했다. 학문이 정밀하고 순수했고 실천이 돈독했다. 천거로써 동몽교관(童蒙敎官)과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우관(郵官)에 나간 지 두어 달 만에 즉시 설죽시(雪竹試)를 노래하고 지름길로 돌아왔으며 병자년에 화친이 이루어진 뒤로는 벼슬길에 뜻을 끊었다. 관직이 제수되었어도 나아가지 않고 낚시하는 것으로 마쳤다. 집의(執義)를 추증하고 임천서원(臨川書院)지도보기에 모셨으며 문집(文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 윤승경(尹承慶) : 자는 선숙(善叔)이요, 본관이 파평(坡平)이니 수찬(修撰) 윤효빙(尹孝聘)의 현손(玄孫)이다.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정축년(인조 15년, 1637)에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이 되어 곡식을 모은 노력 때문에 특별히 아버지의 벼슬을 추증했다. 정묘년(인조 5년, 1627)에는 덕천원장(德川院長)이 되어 선생의 문집(文集) 간행을 의정(議定)하더니 논의가 맞지 않아 공이 깊이 탄식하고 상심했다. 고상한 성품에 담백하여 화려한 것을 손에 대지 않았다. 가만히 학문을 연구했으며 함께 따라 사귀는 이가 모두 당세의 명류였다.

하홍도(河弘度) : 자는 중원(重遠)이요, 호는 겸재(謙齋)니 대사간(大司諫)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타고난 천품이 탁월하고 기이했고 학문이 정심하더니 광해군(光海君)의 때에 과거 보는 것을 폐하고 학업을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에게서 받았으며 남명(南冥) 선생의 학문으로써 도학을 강명(講明)하고 후진들 권장에 힘썼다. 정묘호란에 앞장서 부르짖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효종(孝宗)현종(顯宗)의 두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숙종(肅宗) 때에는 쌀과 콩을 내려주고 또 존례(尊禮)의 교지로 심히 후하게 대접하니 상소로 사례하고 이어 군왕의 도리 아홉 가지 일을 개진했다. 그가 죽자 사림(士林)들이 사당을 종천(宗川)에 세웠다.

○ 성순(成錞) : 자는 이진(而振)이요, 호는 천재(川齋)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영리하고 뛰어나서 재주와 기량이 남보다 뛰어나고 문장이 일찍부터 두드러졌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집안의 가르침에 젖어들었고 경의(敬義)의 참뜻을 탐구하여 날을 오래도록 쌓아서 마음으로 이해했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봉강(鳳岡) 조겸(趙㻩)·태계(台溪) 하진(河溍)과 함께 왕복하며 학문을 논했으며 그의 의리득실(義利得失)과 인물의 바름과 간사함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확실히 그러함이 있어서 뜻있는 선비들이 사당에 모시는 일을 의논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중광(李重光) : 자는 경현(景顯)이요, 호는 행정(杏亭)이니 행의(行義)로써 천거되어 찰방(察訪)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에 수륙군향차원(水陸軍餉差員)으로 운반을 독려했다. 조령(鳥嶺)에 이르러 화의가 이미 이루어진 것을 듣고 통곡하며 깃발을 던지고 돌아왔다. 정자를 청원리(淸源里)지도보기에 짓고 스스로 써서 이르기를 ‘죽어도 주나라 곡식으로는 굶주림이 옳겠고 살아서는 마땅히 바가지를 호수(灝水)에 걸리겠네. 수레를 돌이킴에 멀리가지 못하리니 세상길에는 티끌도 많은 것을’이라고 했다. 창평현감(昌平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청천사(淸川祠)에 모셨다.

정제생(鄭悌生) : 호는 동호(東湖)니 남계(南溪) 정승윤(鄭承尹)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병오년(선조 39년, 1606)에 진사에 합격하고 일찍부터 집안의 학문을 이어받아 실천함이 독실했다. 봉강(鳳岡) 조겸(趙㻩)이 만서(挽書)에서 “덕망은 삼대(三代)에 연이었고 문장은 일향(一鄕)에 으뜸이었네”라고 했다.

○ 성한영(成瀚永) : 자는 혼연(渾然)이요, 호는 양화당(釀和堂)이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손자요, 효자 성박(成鎛)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했으며 집안의 학문을 잘 이어받았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태계(台溪) 하진(河溍)·조간송(趙澗松)·봉강(鳳岡) 조겸(趙㻩) 여러 어진 이와 더불어 강마하고 토론하여 두터운 명망이 우뚝했다.

문홍운(文弘運) : 자는 여간(汝幹)이요, 호는 매촌(梅村)이니 만력(萬曆) 임자년(광해군 4년, 1612)에 진사에 합격했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아버지 성광공(醒狂公)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격문을 지었고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에 기록되었다. 문집(文集)이 있다.

정대영(鄭大榮) : 자는 여경(汝慶)이요, 호는 봉곡(鳳谷)이니 충의공(忠毅公)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큰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위(英偉)하고 기우와 도량이 넓고 깊었으며, 젊어서부터 재상의 그릇이 있었다. 경술년(광해군 1년, 1609)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풍도와 계책, 재주와 학문으로 성균관에서 추중(推重)했다. 부친께서 화(禍)를 당하자 또 다른 나라에 복속되는 아픔을 안고 당대의 세상과 연을 끊고 형제와 숙질(叔姪)들과 함께 남쪽 진주의 봉곡(鳳谷)에 숨어서 성품을 기르고 어리석은 이의 행세로 그 몸을 마쳤다. 뒷날 집의(執義)로 추증되었다.

정대융(鄭大隆) : 자는 여준(汝準)이니 정대영(鄭大榮)의 아우다. 문장과 필법으로 세상에서 존중되었고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부친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아프게 여겨 상복(喪服) 채로 남쪽으로 내려와 그대로 살았다. 의기사(義妓祠)지도보기 앞의 의암(義巖)이라는 두 글자는 곧 그의 글씨다. 뒤에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최탁(崔濯) : 호는 죽당(竹塘)이며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천품이 뛰어나고 문장과 행실이 일찍 이뤄져서 무과에 올랐다. 인조(仁祖) 때 광양현감(光陽縣監)이 되었는데 겨울에 병자호란이 있자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계미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심양(審陽)에 억류되자 공이 익찬(翊贊)으로 따라가서 이어 진언하기를 “구천(句踐)이 오(吳)나라에 보복한 것은 실로 원수를 갚기 위해 쓸개 맛을 보았던 것에 연유한 것이니 범려(范蠡)의 무리와 함께한 모책(謀策)이 아니었으면 어찌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대군이 이르기를 “재주를 다른 세대에서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수천 리의 동쪽 땅에 한 사람 범려가 없을 줄 알겠는가?”라고 했다. 공이 그림 그리는 맹영광(孟永光)에게 요청하여 회계산(會稽山)의 그림을 그려서 올렸다. 뒷날 정조(正祖) 때에 이것으로써 제목을 삼아 선비를 시험토록 명령했다. 일찍이 기사(機事)로써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죽으니 뒤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고 인천원(仁川院)에 모셨다.

하홍달(河弘達) : 자는 치원(致遠)이요, 호는 낙와(樂窩)니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아우다. 기상과 국량이 너그럽고 컸으며, 생긴 모습이 거대했다. 광해군(光海君) 때는 과거 보는 것을 포기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오로지 했다. 형을 따라 도의(道義)를 강마하니 사람들이 하남(河南)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에 비겼다. 문장이 간결하고 고아(古雅)했고 필법에 힘이 있었으며 활쏘기와 말 타기, 천문과 산법·의약(醫藥)과 병가류(兵家類)에까지 널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과 전형을 맡은 관리가 유직(儒職)을 으뜸의 자리로 여겼으나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정이심(鄭以諶) : 자는 신화(愼和)요, 호는 모헌(慕軒)이니 은렬공(殷烈公) 정신령(鄭臣嶺)의 후예다. 성품이 본래부터 효도하고 우애했고 마음의 학문을 탐구했다. 이광악(李光岳)의 문하에 유학하여 동계(桐溪) 정온(鄭蘊)·미수(眉叟) 허목(許穆)·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여러 어진 이들과 더불어 도의(道義)를 서로 연마했다, 청계사(淸溪祠)에 모셨다.

하직(河溭) : 자는 청백(淸伯)이요, 호는 초정(草亭)이니 태계(台溪) 하진(河溍)의 막내 동생이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을 따라 배우더니 재주와 행실이 일찍부터 두드러져서 매우 큰 촉망을 받았다. 명나라가 망하자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두 형과 더불어 은거하며 회포를 펴며 비풍(悲風)과 임천(林泉)에서 생을 보냈다.

손석윤(孫錫胤) : 자는 여선(汝善)이요,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숭정(崇禎) 계미년(인조 21년, 1643)에 진사에 합격했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벗으로 좋게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 태계(台溪) 하진(河溍)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상주(尙州)에 이르러서 강화가 이뤄졌음을 듣고 물러나서 문을 닫고서 뜻만을 찾으며 당대의 세상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한시중(韓時重) : 자는 여임(汝任)이요, 호는 사곡(沙谷)이니 봉악(鳳岳) 한몽일(韓夢逸)의 아들이다. 무자년(인조 26년, 164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4개 군(郡)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 맑은 치적이 있었다. 실천이 독실하고 그윽한 덕량이 있어서 사림(士林)이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벼슬이 사의(司儀)에 이르렀다.

하달영(河達永) : 자는 혼원(混源)이요, 호는 구이당(具邇堂)이니 진사 하협(河悏)의 아들이다. 위의와 용모가 단정하고 언론이 맑고 실천이 독실했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찰방(察訪) 권극경(權克經)·상사(上舍) 안시진(安時進)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는 벗이 되었다. 세상을 떠나자 겸재가 울면서 이르기를 “산해를 추모하고 존경하여 선인의 뜻을 이어받고, 연원(淵源)을 바로하여 후인의 몽매함을 깨우쳤네.”라고 했다.

○ 한시회(韓時晦) : 자는 여양(汝養)이니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아들이다. 기상과 국량이 높고 넓었으며 풍모와 정신이 빼어났다. 일찍이 부친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시례(詩禮)의 가업(家業)을 잘 빛냈다. 또한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속박되지 않는 모습이 있었다. 평생에 구차한 일을 하지 않았다. 아들의 공훈(功勳)으로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했다.

하달한(河達漢) : 자는 통원(通源)이니 진사 하협(河悏)의 아들이다. 일찍이 시례(詩禮)의 교훈을 이어받았고 효도하고 우애하는 천성이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고을의 표준이 되었다. 경자년(현종 1년, 166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는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용강정사(龍岡精舍)를 세워 장수(藏修)의 처소로 삼으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이 선학(先學)으로써 지목했다.

○ 허동립(許東岦) : 자는 진백(震伯)이요, 호는 연당(蓮塘)이며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부총관(副摠管)이었고 웅위하고 강직했다. 지략과 용맹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세상에서 ‘관서(關西)의 오호장(五虎將)’이라 일컬었다. 정묘년(인조 5년, 1627)에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강화도에 들어갔고 병자년(인조 14년, 1636)에는 쌍령(雙嶺)에서 싸워 이겨서 모두 위훈(偉勳)이 되었다. 현종(顯宗)께서 제문을 내려 이르기를 “황조(皇祖)의 중세(中歲)에 근심이 서방 변방에 있어 장수의 재목을 뽑아 쓰는데 순차로 하지 않도록 명령했을 때에 오직 다섯 사람이 있었으니 그 중의 한 사람이 경(卿)이었다. 붉은 끈으로 서쪽 남방에서 애연(藹然)한 치성(治聲)이었도다. 다섯 번은 장수의 직임을 맡았고 여섯 번이나 중군(中軍)을 도왔도다. 어쩌다 한번 든 병으로 갑자기 가서 일어나지 못했는고?”라고 했다.

이현재(李玄栽) : 자는 배원(培元)이요, 행정(杏亭) 이중광(李重光)의 아들이니 호는 죽촌(竹村)이다. 갑오년(효종 5년, 1654)에 진사에 합격했고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애서(厓西) 박진영(朴震英)을 따랐다. 많은 선비에게 앞장서 부르짖어 때때로 월순(月巡)을 베풀고 강(講)을 순순히 하여 권장하고 개유하니 일방의 인사로서 힘입고 성취한 자가 많았다.

○ 백서한(白瑞翰) : 본관이 수원(水原)이니 을유년(인조 23년, 1645)에 무과에 합격하고 벼슬에 올라 병사(兵使)·부총관(副摠管)에 이르렀다. 현종(顯宗)이 제문을 내려 이르기를 “씩씩한 무부(武夫)가 붓을 던지고 활줄을 당겼도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벼슬길에 나왔도다. 안으로는 주위(周圍)를 맡고 밖으로는 주군의 병부(兵符)를 찾도다. 부지런히 힘쓰고 성실함이 두드러져서 수십 년이 넘었도다. 내가 도끼를 주며 글을 써 주기를 ‘재차 남쪽 변방을 지키라.’ 했더니 칼을 놀리는 넉넉함이 있었고 아전(衙前)이 병기(兵器)를 모으니 백성이 편했도다. 한 사람 간성(干城)을 잃으니 생각할수록 서글프구나.”라고 했다.

하명(河洺) : 자는 차회(次晦)니 창주(凔洲) 하증(河憕)의 손자다. 경자년(현종 1년, 166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는 드디어 과거 보는 것을 폐지하고 자기를 수양하는 학문에 마음을 다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 양현(兩賢)의 문하에서 유학하니 양현이 사랑하고 중히 여겨 선학(先學)으로써 지목했고 동문의 여러 공들도 또한 모두 추중(推重)했다. 『남명문집(南冥文集)』의 일로 최(崔)·장(張)의 무리의 무함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양현이 그 무고에 걸린 줄을 알고 풀어주는 데에 매우 힘썼으므로 일이 마침내 옳은 데로 가게 되었다. 이 일은 『실기(實記)』가 있어 세상에 행한다.

○ 한익세(韓翼世) : 자는 보경(輔卿)이요,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니 승지(承旨) 한시회(韓時晦)의 아들이다. 기사년에 무과에 합격해 열일곱 고을을 역임하니 모두 맑은 덕화의 이름이 있었다. 벼슬이 수사(水使)에 이르러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으로 기록되었다. 아우 한영세(韓榮世)의 자는 달경(達卿)인데 맑은 성품에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물러설 줄을 알았다. 일찍이 벼슬하는 명부에 이름이 올랐으나 영화로운 승진을 구하지 않았다. 홀로 된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며 몸을 신칙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뒤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추증했다.

곽세건(郭世楗) : 자는 공가(公可)요, 호는 무위자(無爲子)니 현풍(玄風)으로부터 하대(下臺)에 옮겨와 살았는데 벼슬이 익산군수(益山郡守)에 이르렀다. 젊은 나이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칼을 집고 근왕(勤王)하려 했으나 화의가 이미 맺어진 것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일찍부터 미수(眉叟)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을 따라 공부했는데 문정공도 그의 심지가 고상하고 맑았기 때문에 크게 되도록 장려하기를 더했다. 갑인년(현종 15년, 1674)에는 임금의 뜻에 응해 상소하여 「기해예설(己亥禮說)」을 논했다.

하진룡(河震龍) : 자는 계도(啓圖)요, 호는 쌍부헌(雙負軒)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잠시도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기상과 국량이 발고 활달했다. 힘이 월등히 뛰어나 참봉(參奉)으로 특별히 천거되어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으로 제수되니 간성(干城)의 명망이 있었다. 효종(孝宗) 때에 우암(尤庵)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따라 북벌(北伐)의 일을 비밀리에 모의하고 재리산(宰理山)에 나갔다가 갑자기 국상을 만났다. 이로 말미암아 병이 나고 인산(因山)을 한 뒤에 병을 앓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으나 자식과 조카들에게는 북벌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 양의(梁嶷) : 자는 경앙(景仰)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다. 형상과 모양이 거대하고 타고난 천성이 기이하고 탁월해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여겼다.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는데 상국(相國) 이완(李浣)이 중히 여겼다. 일찍이 흥양현(興陽縣)을 맡았는데 어떤 중이 좌도(左道)의 존귀한 이와 사귀는 사람을 끼고 가운데서 이간질을 했다. 공이 그의 요사스러운 것을 알아내고 마침내 법사(法司)로 보냈더니 세상에서 이를 옳게 처리했다고 했다. 뒤에 특별히 천거되어 전주진영장(全州鎭營將)을 지냈다.

유세장(柳世章) : 자는 회경(晦卿)이요, 호는 공북정(拱北亭)이니 본관이 문화(文化)이다. 병진년(숙종 2년, 1676) 무과(武科)에 올라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처음에 훈련초관(訓鍊哨官)이 되었는데 때마침 갑자기 급한 난이 있자 공이 선두에서 떨쳐 추격하며 몸을 돌아보지 않으니 대장이 그의 충성됨을 칭찬했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척되어 사저에서 거처할 때에 선전관으로써 날마다 하얀 쌀 3되를 보자기에 싸서 ‘신이 근봉합니다.[臣謹封]’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던져 올렸다. 왕후가 환궁하여 쌀을 던져준 사람을 찾았으나 공은 끝내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 공북정(拱北亭)을 세우고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다.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했다.

○ 유세창(柳世彰) : 자는 회중(晦仲)이요, 호는 송곡(松谷)이며 유세장(柳世章)의 아우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는데 장성하자 아버지의 돌아가신 날로써 참최(斬衰)를 만들고 여(廬)를 묘 곁에 만들어 궤전(饋奠)과 곡하는 것을 한결같이 했다. 초상 중에 날아드는 꿩과 산노루의 특이한 자취가 있었다. 3년상을 끝내고 또 어머니의 복(服)을 입고자 하다가 백씨(伯氏)의 제지 때문에 이루지 못함을 종신의 여한으로 여겼다. 학문은 『소학(小學)』을 위주로 했고 실천에 힘썼으며 일찍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뵙고 돌아와서는 학포재(學圃齋)를 세우고 날마다 스승과 붕우들과 함께 도리를 강마하고 후진을 가르쳤다. 저술한 것으로 『가례고증(家禮考證)』이 있다.

○ 조석규(趙錫圭) : 호는 묵재(黙齋)요 본관이 함안(咸安)이니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현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여묘에서 3년을 모셨고 어버이가 돌아간 뒤로는 과거 보는 것을 그만두고 오로지 성리서(性理書)에만 뜻을 두었다. 문장과 필법이 세상에 전한다. 뒷날 서원 배향을 의논했으나 이뤄지지 못했다.

하철(河澈) : 자는 백응(伯應)이요, 호는 설창(雪牕)이니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과거 보는 것을 폐지하고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다하여 조예가 정밀하고도 깊었다. 문장과 덕행이 우뚝하여 유림에서 추앙받고 존중되었다. 곁으로 음양(陰陽)·성력(星曆)·사어(射御)·의약(醫藥) 등의 서책에 통달했으며 글씨의 획이 더욱 웅건했다. 한 시대에 금석(金石)과 누관(樓觀)의 편액을 써서 거의 원근(遠近)에 두루했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선비를 예우하는 것으로써 조정에 아뢰었다.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매양 국사(國士)로써 일컬어 유일(遺逸)로 여러 번 천거하여 들었다가 깎이더니 뒤에 아들이 존귀한 것으로 인해 대사헌(大司憲)을 추증했다.

○ 허성(許晟) : 자는 극명(克明)이니 부총관(副摠管) 허동립(許東岦)의 아들이다. 천품이 크고 훌륭하여 뜻이 사방에 있었다. 병술년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여러 번 주군(州郡)을 맡았다가 벼슬이 장연부사(長淵府使)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상공(相公) 이완(李浣)과 대장 유혁연(柳赫然)도 모두 귀하고 중히 여겼다.

박창윤(朴昌潤) : 자는 덕이(德而)니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손자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수사(水使)에 이르렀다. ‘충의로 보국하고 효우로써 전가하라.[忠義報國 孝友傳家]’는 8글자를 자손에게 훈계로 남겼다. 일찍이 대궐의 뜰에서 제갈무후(諸葛武侯)의 「팔진도(八陣圖)」를 배열했더니 숙종(肅宗)께서 감탄하고 가상히 여겨 이르기를 “서반(西班)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은 오지 박모(朴謀) 한 사람뿐”이라고 했다.

정유정(鄭有禎) : 호는 봉강(鳳岡)이니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손자다. 어렸을 적에 글을 지으니 충의공(忠毅公)이 매우 기특히 여기고 사랑했다. 스스로의 행실에 있어서는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았고, 학문을 함에는 공경과 충서(忠恕)를 위주했다. 형제가 함께 살면서 밤낮으로 강마하니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추중(推重)하고 허여했다. 숙종(肅宗) 때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했다.

하신행(河愼行) : 자는 여민(汝敏)이니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의 손자다.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드디어 벼슬길에 뜻을 끊고 후진을 가르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았다. 덕천서원(德川書院)과 남계서원(濫溪書院)의 원장(院長)이 되어 원규(院規)를 엄하게 세우고 선비의 기상을 일으켜 발양시켰다. 사람들이 그 장자(長者)다운 풍모와 도량에 감복했다.

○ 조광세(趙光世) : 호는 오재(梧齋)니 대소헌(大笑憲) 조종도(趙宗道)의 후예다. 천성이 순수하고 학문에 마음을 오로지 하여 세상에서 추앙되었다. 학문과 행실로써 여러 번 천거되었다가 탈락했다. 정식(鄭栻)이 기리며 이르기를 “학문의 공력이 정밀하여 깊고 행실의 마땅함이 순수하고도 독실했다.”고 했다.

한범석(韓範錫) : 자는 성뢰(聖賚)니 참판(參判) 한영세(韓榮世)의 아들이다. 을해년(숙종 21년, 1695)에 무과에 올라 다섯 도의 절도사(節度使)와 세 도의 통어사(統禦使)를 역임하고 부총관(副摠管)에 올랐다. 해적을 정탐하기 위해 홀로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갔더니 ‘풍공(豊功)이 훌륭하다.’는 글자가 교유(敎諭)하는 글에 함께 실렸으며 제문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무신년에는 양무원종훈(揚武原從勳)에 참예했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별이 떨어지는 기이한 변화가 있었다.

○ 한기석(韓箕錫) : 자는 동뢰(東賚)요, 호는 유오(柳塢)니 한범석(韓範錫)의 아우다. 기상과 도량이 활달하고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널리 배우고 문장을 잘했다. 주자(朱子)의 서법에 힘을 써서 깊이 참된 글자의 비결을 얻은 것이 있었다. 사우(士友)들과 함께 상소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 선생의 양현을 문묘에 종사(從事)하기를 청했다. 유집(遺集)이 있다.

하덕망(河德望) : 자는 첨경(瞻卿)이요, 호는 양정재(養正齋)니 설창(雪牕) 하철(河澈)의 아들이다. 문장이 바르고 품위가 있었으며 필법이 힘차고 굳셌다. 돈독하게 효제효도와 공경을 행하고 겸하여 육예(六藝 : 禮·樂·射·御·書·數)를 통했다. 감사(監司) 민응수(閔應洙)가 유일(遺逸)로써 임금에게 아뢰었고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독서에는 반드시 의리(義理)를 구명하고 사친(事親)에는 그 성효(誠孝)를 지극히 했습니다.”라고 했다. 을묘년(영조 11년, 1725)에는 지사(知事) 김재로(金在魯)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진주의 선비 하모(何某)는 학문과 행실이 영남의 많은 이들 가운데 뛰어납니다.”라고 아뢰니 임금이 각각 특별히 관직에 쓰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공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이어서 지평(持平)을 추증했다.

손명래(孫命來) : 자는 현승(顯承)이요, 호는 창사(昌舍)니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계유년(숙종 19년, 1693)에 생원과 진사를 함께 맞혔고 경인년에 문과에 올랐다.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는데 아홉 살에 산중의 절에서 글을 읽더니 매달린 북을 제목으로 시를 지어 이르기를 ‘텅 빈 마음에 우뢰를 감추었고 맑은 날에도 뇌정(雷霆)을 움직이네’라고 했다. 이미 한때 회자(膾炙)되더니 장성하자 옛것을 다스림에 그의 뜻이 창창하면서도 굳세고 장대하면서도 낭낭하여 옛 작자의 궤범을 힘써 따랐다.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바르게 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며 맑고 조심하기를 스스로 지키어 권세있는 귀인들과 더불어 교류하지 아니하니 이 때문에 시대에 용납되지 못했다. 물러나 초라한 집을 지키면서 문장을 즐겼다. 문집(文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하세응(河世應) : 자는 응서(應瑞)요, 호는 지명당(知命堂)이며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현손으로 기묘년(숙종 25년, 1699)에 생원 시험에 합격했다. 재주와 기량이 총명하고 영매했으며 견문이 넓었고,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모두 경전의 뜻을 전했다.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이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남쪽의 분양(汾陽)과 진주(晉州) 사이에서 놀았는데, 창사(昌舍) 옹(翁)도 능히 붓을 들어 양보하지 않고 문장을 견주었다. 만약 그저 콩과 곡식의 문장이라 하더라도 한 그릇의 밥을 지명거사에게 예로서 먼저 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와 눌암(訥菴) 이광정(李光庭)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가졌다. 문을 닫고 가르침을 주고받아 재주를 따라 성취시키니 한 시절 추중(推重)되었다. 문집(文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박태무(朴泰茂) : 자는 춘경(春卿)이요, 호는 서계(西溪)니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증손이다. 영조(英祖) 때 증광(增廣)의 생원에 합격하더니 문장과 행의(行誼)가 영남우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었다. 사복정(司僕正)을 추증하고 지계사(芝溪祠)에 모셨으며 문집(文集)이 있어 간행되었다. 도백(道伯) 이종성(李宗誠)의 포장하는 계문에 “행의(行誼)가 있고 덕(德)을 이루었으며 고을과 향리에서 교화를 세웠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세태(李世泰) : 자는 대래(大來)요, 호는 청사(淸榭)니 행정(杏亭) 이중광(李重光)의 후예다. 갈암(葛巖)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치지와 역행의 요지를 얻어듣고 여러 번 권장하고 칭찬함을 입었다.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과 고재(顧齋) 이면(李櫋)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하응운(河應雲) : 자는 여등(汝登)이니 생원 하명(河洺)의 손자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했으며 문장과 절행이 일찍부터 두드러졌고 음양(陰陽)의 맑고 거짓되는 분별에 엄했다. 일찍이 세 번이나 향시에 응했으나 눈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보고서는 마침내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가만히 성리(性理)의 학문을 연구했다. 이로 인해 스스로 습정재(習靜齋)라 불렀다. 아들 하재악(河載岳)과 하필동(河必東)에게 상소하게 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 양현을 문묘에 종사(從事)할 것을 청했다. 유집(遺集)이 있다.

이세후(李世垕) : 자는 재숙(載叔)이요, 호는 청계(淸溪)니 행정(杏亭) 이중광(李重光)의 후손이다. 학업을 갈암(葛菴)의 문하에서 닦아 크게 추천 받고 격려를 입었다. 병오년(영조 2년, 1726)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이르렀다. 직언 때문에 당시의 재상에게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뜻을 가다듬고 학문을 돈독하게 했다.

하달중(河達中) : 자는 군거(君擧)요, 석계(石溪) 하세희(河世熙)의 손자다.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스스로 지향할 방향을 깨달아 널리 경전을 상고하고 힘써 집안의 법도를 닦았다. 필력이 정묘하고 힘이 있었으며 법도가 있었다. 평생에 언론과 행실이 결백하고 정직하여 거짓이 없었고 진실된 덕(德)을 안으로 쌓아 영예로운 소문이 밖으로 드러났다.

정식(鄭栻) : 자는 경보(敬甫)요, 호는 명암(明菴)인데 또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일컬었으니 진사 정문익(鄭文益)의 후손이다. 나면서부터 기이한 자질이 있었고 젊어서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지조와 행실이 맑고 고상하더니 신주(神州)에 어진 이가 세상에 묻혀 있는 것을 깊이 통분히 여겨 과거 보는 것을 폐했다. 숙종(肅宗)경종(景宗)의 국상을 당해서는 방상(方喪)의 예절을 힘써 행했다. 아름다운 산수를 매우 사랑하여 국내의 산천을 두루 밟다가 두류산(頭流山)의 무이곡(武夷谷)에 들어가서 와룡암(臥龍菴)을 세우고 제갈무후(諸葛武侯)와 주자(朱子)의 화상(畵像)을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첨배(瞻拜)했다. 날마다 문하생과 더불어 학문을 강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도신(道臣) 조엄(趙曮)이 학행과 절의를 조정에 아뢰니 특별히 지평(持平)을 내리는데 고서(誥書)에 ‘오랑캐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라고 일렀다.

○ 이덕윤(李德潤) : 자는 여택(汝澤)이요, 호는 도와(道窩)니 지평(持平) 이형(李蘅)의 아들이다. 천성이 효애하고 기상과 도량이 맑고 뛰어났다. 아버지가 병들자 똥을 맛보며 손가락을 끊었고 부친이 돌아가자 죽을 마시고 여묘(廬墓)에서 살았다. 학문에 종사하면서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학문의 종지와 비결을 얻어들었다. 창설(蒼雪) 권공(權公)과 함께 범연히 한 『창수록(唱酬錄)』이 있다.

정상첨(鄭相詹) : 자는 여량(汝良)이요, 호는 동호(東湖)니 임강(臨江) 정환(鄭桓)의 아들이다. 풍도와 위의가 준수하고 깨끗했으며 규범과 법도가 근엄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당하여 김범갑(金范甲)에게 찔린 바 되어 문을 닫고 과거 보기를 정지 당하여 을사년에야 진사에 올랐다.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명분과 절의를 스스로 가다듬고 여러 사우들과 함께 소(疏)를 올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 양현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했고 또 소를 올려 육적(六賊)을 벨 것을 청했다. 무신년을 지내고서 집을 동호(東湖)에 세우고 세상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둘째 아들 정낙신(鄭樂臣)의 자는 평숙(平叔)이요, 호는 한재(閑齋)니 타고난 바탕이 도(道)에 가까웠다. 일찍부터 어버이를 잃었는데 집상(執喪)을 예법대로 했다. 자라서는 행실을 닦고 학문에 힘썼다. 이미 생원에 합격하고서는 세상의 법도가 더욱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자연과 더불어 살며 후진을 가르쳤다. 항상 온화하고 순수하여 평이하게 마음을 가졌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에 있어서는 반드시 칼로 쪼개듯이 끊었으니 무너져가는 풍속을 경계하기에 넉넉함이 있었다.

이덕화(李德華) : 자는 여중(汝重)이요, 호는 월암(月菴)이니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예다. 갈암(葛巖)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 나아가 선생 문하의 지결(旨訣)을 얻었다. 기묘년(숙종 25년, 1699)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司諫院)에 입직했고 나아가서는 군수(郡守)가 되었는데 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만년에는 서재를 월아산(月牙山)지도보기 아래 동산(東山)에 세우고 편액을 월암(月菴)이라 했으니 드디어 벼슬을 그만둔 것이었다.

하응천(河應天) : 자는 여칙(汝則)이요, 호는 자송당(自訟堂)이니 송파(松波) 하원(河沅)의 손자다. 문사(文詞)가 넉넉하고 넓었으며 필법이 힘차고 굳세었다. 일찍이 세 번이나 향시에 합격하고 문과시험에 달려갔으나 서리(書吏)가 좋은 물건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소매를 뿌리치고 돌아와서 성리(性理)의 서책에 마음을 다했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과 내수(耐叟) 허추(許錘)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분을 가졌다. 진주목사(晉州牧使) 윤노동(尹魯東)이 유일(遺逸)로 천거하고 감영에 보고하여 이르기를 “창을 밝게 하고 책상을 깨끗이 하여 종일토록 즐기는 바는 주자서(朱子書)뿐입니다.”라고 했다.

정상호(鄭相虎) : 자는 중선(仲善)이요, 호는 동야(東野)니 봉곡(鳳谷) 정대영(鄭大榮)의 증손이다. 성품과 도량이 강하고 굳세었고 기상이 여럿보다 뛰어났으며 재주와 슬기가 영리하게 나타났다. 문장을 지을 때는 간단하면서도 고졸하여 넓게 툭 트였으며 더욱이 힘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에 기울였다. 김범갑(金范甲)의 모함하는 상소에는 자식과 친구들에게 경계하되 이치에 의거하여 엄격하게 배척토록 했다. 무신년의 난에는 바른대로 지키고 흔들리지 않았다. 따라서 사촌형 평헌공(萍軒公)과 더불어 항의하는 상소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 양현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강만주(姜晩周) : 자는 위수(渭叟)요, 호는 만락재(晩樂齋)니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증손이다. 성품이 높고 깨끗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동약(洞約)」을 수정하여 무너져가는 풍속을 일으키도록 했다. 노년에 월배(月拜)의 도원동(道源洞)에 땅을 가려서 집을 짓고 못에 연꽃을 심어 늙음을 마쳤다.

○ 구반(具槃) : 자는 석관(碩寬)이요, 호는 성재(省齋)며 본관이 능성(綾城)이니 참판(參判) 예곡(禮谷) 구문유(具文游)의 둘째 아들이다. 삼가하고 후덕하면서도 재주와 국량이 있었고 깊이 침잠하여 고아한 식견이 있었다. 조정이 두드러지게 날로 어그러져 가는 것을 보고서는 벼슬길에 나아기를 즐거워하지 않고 진주의 승산리(勝山里)지도보기로 가려 옮겼다. 드디어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가만히 살면서 덕을 기르니 진주(晉州)에 구씨가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 조옹(趙滃) : 자는 사유(士維)요, 호는 춘수당(春睡堂)이며, 오재(梧齋) 조광세(趙光世)의 손자니 문학과 명망이 있었다. 교와(僑窩) 성섭(成涉)과 이계(尼溪) 박내오(朴來吾)와 더불어 한때 삼로(三老)라 불렸다.

강여관(姜汝寬) : 자는 군평(君平)이요, 호는 매계(梅溪)니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현손이다. 어머니의 명으로 아우 강여완(姜汝完)과 함께 학업을 외삼촌 묵재(黙齋) 조석규(趙錫圭)에게서 받더니 동학들이 모두 선배로 추숭했다. 신사년에 갈암(葛巖) 이현일(李玄逸)을 뵈니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가례(家禮)』에 의심스러움을 분별하는 것의 난처한 질문을 받고 더욱 견고히 노력했다. 일찍이 벽 왼편에 ‘경의성신(敬義誠愼)’의 네 글자를 걸어두었는데 묵재(黙齋)가 쓴 것이요, 벽 오른편에는 ‘국궁진취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여덟 글자를 걸어 두었는데 갈암(葛庵)이 쓴 것이다. 유집(遺集)이 있어 간행되었다.

○ 남국승(南國升) : 자는 사진(士晉)이요, 호는 내와(耐窩)니 습독(習讀) 남담(南霮)의 증손이다. 기상과 도량이 넓고 맑았다. 이안재(易安齋) 정기림(鄭起林)을 따라 배워서 문장을 일찍부터 이루었다. 필법이 진나라의 왕희지(王羲之)에 가까웠으니 금석(金石)의 문자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과 구와(懼窩) 이광점(李光漸)과 함께 도의(道義)의 교우가 있었다.

하진백(河鎭伯) : 자는 자추(子樞)요, 호는 국담(菊潭)이다. 세 살에 글자를 들으면 잊지 않았고 여섯 살에 능히 부시(賦詩)를 했다. 경술년(정조 14년, 1790)에 진사에 합격하고 다섯 차례나 입시했으니 대개 이수(異數)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시를 지어 준 일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단산(丹山)의 한 구비에 그윽한 곳 살고 있어, 백수(白首)로 궁구한 경(經)을 누구에게 물었던가?[丹山一曲寄幽居 白首經問孰如何]

고요히 앉아 또 찾는 것은 안자(顔子)의 즐거움이었고 잔년(殘年)이 된 때에 모두 붙인 것은 회옹(晦翁)의 글이었네.[靜坐且尋顔氏樂 殘年都付晦翁書] 골짜기에 있는 내와 언덕의 일월 속에 높은 베개를 베고 있어 서울의 먼지라도 소맷자락에 물들지 않으리.[澗阿日月惟高枕 京洛塵埃不染裾]’라고 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림자를 비춘 것’이라 했다. 상국(相國) 유후조(柳厚祚)가 이르기를 “두 번이나 천거에 들어갔고 이름이 선부(選部)에 올랐는데 그의 온축과 포부를 베푼 것이 아니라면 어찌 세도를 한결같이 개탄할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문집(文集)이 있어 간행되었다.

○ 이덕관(李德寬) : 자는 여길(汝吉)이요, 호는 소암(素菴)이니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예다. 풍모와 위의가 점잖으면서도 정숙했고 국량이 못처럼 깊으니 남방 주군에 호걸스러운 선비의 호칭이 있었다. 제산(霽山) 김공(金公)의 상(喪)에 광양(光陽)으로부터 배를 세내어 동쪽으로 거슬러 돌아오면서 강 위에서 제사 드리고 부의(賻儀)를 두터이 하고 두호하여 돌아가게 하니 당시에 사람들이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아들 요부(堯夫)가 배에 실은 5백 석의 보리로 석만경(石曼卿)의 초상을 도운’ 옛 일에 견주었다.

정도관(鄭道貫) : 자는 유성(由聖)이요, 호는 송죽헌(松竹軒)이니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현손이다. 효성과 우애로 선조를 받들매 지극한 정성으로 하였다. 오랫동안 잃었던 선조의 묘(墓)를 찾았을 때에 곤장을 잡고 스스로를 벌했고, 삼세(三世) 동안 나누었던 가산(家産)을 합하여 한집에서 함께 살았다. 병계(屛溪) 문헌공(文憲公) 윤봉구(尹鳳九)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친구로 삼았다.

하대관(河大觀) : 자는 관부(寬夫)요, 호는 괴와(愧窩)니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증손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행의(行誼)가 순백하게 갖추어졌다. 널리 옛날과 지금에 통했으며 미세하고 오묘한 데까지 연구했다. 웅위한 문사와 강건한 필법으로 일세에 이름을 날렸다. 일찍부터 『속주지(續州誌)』를 찬수했으나 마치지 못했다.

○ 한응검(韓應儉) : 자는 사겸(士謙)이니 부총관(副摠管) 한범석(韓範錫)의 손자이다. 젊어서부터 예로써 자신을 규율하여 망녕되게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경자년(정조 4년, 1780)에 무과로 선전관(宣傳官)에 올랐다. 임금이 그 모습과 행동거지를 기이하게 여기고 얼굴을 들도록 명령하여 즉시 별승전(別承傳)에 승진시켰으니 참하(參下)이었으나 특별히 내린 것이 있기에 이른 것이다. 다섯 고을을 맡아서 덕으로 교화하는 데 힘썼다.

하진락(河鎭洛) : 자는 탁지(卓之)요, 호는 겸와(謙窩)니 모송재(慕松齋) 하인상(河仁尙)의 후손이다. 젊어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을 가졌었다.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배웠으며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받들매 사람들이 가운데서 하는 말이 없었다. 여러 번 향시에 장원을 했으나 마침내 대궐에서 굽히었다. 드디어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배우니 같은 시기의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추중했다.

성동일(成東一) : 자는 내순(乃純)이요, 호는 공금당(共衾堂)이며 성성재(惺惺齋) 성황(成鎤)의 후손인데 무과로써 품계가 통정(通政)이요, 벼슬은 부사(府使)였다. 타고난 자품이 영특하고 국량이 점잖고 정숙했다. 스물이 되지 않아 어버이의 상을 만났더니 제전(祭奠)에 예(禮)로써 했고 계모를 효로써 섬겼다. 벼슬을 맡아서는 청렴하고 정직했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중국 한나라 때의 공수(龔遂)와 황패(黃覇)에게 견주었다. 측근에 부리는 사람을 취하는 데에 엄격하게 했으므로 감히 사사로운 것으로써 간여하지 못했다. 갑자년(고종 1년, 1864)에 사림(士林)에서 서원에 배향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때마침 서원철폐를 만나서 이루지 못했다.

하달성(河達聖) : 자는 청언(淸彦)이요, 호는 국헌(菊軒)이다. 학문과 식견이 관통하여 시원스러웠다. 강개하여 커다란 절개가 있었으며 자신을 규율함으로 집안을 다스려 집안의 가르침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의리가 정밀하고 깊었으며 시원스런 국량이 있었다.

○ 조명훈(曺命勳) : 자는 성보(聖甫)요, 호는 노우(老愚)니 지평(持平) 조천필(曺天弼)의 아들이다. 기상과 도량이 너그럽고 행동에 법도가 있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여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도하여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를 넘었다. 정조(正祖)가 붕어하자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매번 초하루 보름날에 집 뒤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라가서 북쪽을 향해 울면서 절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 산을 이름하여 읍궁대(泣躬臺)라 일렀다. 순조(純祖) 때에 일이 알려져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했다.

강학준(姜學濬) : 자는 성익(聖翊)이니 판서(判書) 강원양(姜元亮)의 후예다. 임자년(정조 16년, 1792)에 문과에 올라 내외의 벼슬을 역임하니 청렴하고 검박하다고 일컬어졌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반드시 정성을 다했고 상(喪)을 만나서는 슬픔을 갖춤이 지극했다. 후인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리고 사모하고 있다.

박지서(朴旨瑞) : 자는 국정(國禎)이요, 호는 눌암(訥菴)이니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후손이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과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에게 사사했다.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추향(追享)되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하이태(河以泰) : 자는 오겸(五兼)이요, 호는 함와(涵窩)다. 성품이 굳세고 너그러워 집에 있으면서도 몸을 가졌는데 한결같이 『소학(小學)』과 「내칙(內則)」을 모범으로 삼았다. 밤이 깊어서야 여러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증손자들이 차례대로 들어와서 저녁 인사를 드리게 했다. 닭이 울면 세수하고 빗질하고서 또 들어와서 살펴보게 하며 각각 그 하는 일을 가지게 했다. 80년을 하루같이 했고 여섯 아들이 있더니 모두 효도하고 우애하고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다.

○ 김면운(金冕運) : 자는 천찬(天贊)이요, 호는 오연(梧淵)이니 김휘운(金輝運)의 넷째 아우다. 문장과 덕망이 한 지방에서 무거웠고 유집(遺集)이 있어 간행되었다.

○ 조휘진(趙輝晉) : 자는 문연(文然)이요, 호는 동와(東窩)니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후예다. 사람됨이 기이하고 훌륭했다. 여러 사람 가운데에 훨씬 뛰어나서 경륜으로 세상을 건질 재주가 있었다. 당시에 우뚝했으므로 ‘남도(南道)의 주인’이라 했다. 성품이 다른 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좋아하여 말발굽과 수레가 거리를 메우고 손님이 대문에 찼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더불어 잘 지내더니 그가 영의정(領議政)이 되자 당시에 힘쓸 일 수천 마디를 조목조목으로 펴 보이고는 결국은 종신토록 다시 보지 않았다. 유집(遺集)이 있어 간행되었다.

○ 박재호(朴在皥) : 자는 용서(龍瑞)요, 호는 백은(白隱)이며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송월당(松月堂) 박호원(朴好元)의 후손이다. 임오년(순조 22년, 1822)에 문과에 올라 맑고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 두 고을을 맡아 청렴결백하게 정사를 하니 조정에서 공을 보기(輔器)라고 일컬었다. 중년에 깨끗이 물러나 달게 숲에서 늙으면서 학문을 강하는 것으로써 일삼았다.

하우현(河友賢) : 자는 강중(康仲)이요, 호는 예암(豫菴)이니 석계(石溪) 하세희(河世熙)의 현손이다. 나이 31세에 죽었으나 당시에 작은 안자(顔子)라는 칭찬이 있었다. 후산(后山) 허유(許愈)가 그 묘표(墓表)에 이르기를 “타고난 바탕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같은 시기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여기에 조예가 정밀하면서도 깊은 것을 더했으며 행의(行誼)가 순수하고 성대했다. 효성과 공경은 집안에서 충분했고 진실된 미더움으로 마을에서 신망을 얻었으며 그의 밝은 덕과 인물과 성리학과 『주역(周易)』의 의심되는 뜻을 논변한 여러 가지 설명은 스승을 연유하여 이어받은 것이 아니면서도 홀로 경전의 본지에 계합했다.”라고 했다. 문집(文集)이 있어 간행되었다.

○ 조용완(曺龍玩) : 자는 백옥(伯玉)이요, 호는 덕암(德巖)이니 교관(敎官) 조명훈(曺命勳)의 아들이다. 조상의 음덕으로 목릉참봉(穆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여러 번 옮겨서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천품이 고상하고 실천이 매우 돈독했다. 어버이를 모시는 데 있어 병들었을 때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드렸고 상(喪)을 당해서는 역척(易戚)의 예절을 다하니 같은 스승과 벗들이 중히 여겼다. 덕천서원(德川書院) 및 산천재(山天齋)를 중수했다. 벼슬자리에서는 맑고 절검했으므로 어사(御使)가 “다스리기를 부지런히 하고 착실히 했다.”고 하여 조정에 포상을 아뢰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이인모(李麟模) : 자는 인경(仁卿)이요, 호는 영모재(永慕齋)다. 위의와 태도가 침착하고 무게가 있었고, 재주와 도량이 연못처럼 깊었다. 비록 평소에 서로 알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번 보면 그가 장자(長者)임을 알게 되었다. 집에 있을 때는 이륜(彛倫)을 중히 여기고 은혜와 의리를 돈독히 했다. 자손에게 가르치기를 ‘의(義)를 먼저 행하고 문예(文藝)를 뒤에 하라.’고 했다. 덕망과 문학으로 한 세대에 추중(推重)되었고 일찍이 덕천원장(德川院長)이 되어 「원규(院規)」를 수정했다.

최상갑(崔祥甲) : 자는 낙현(洛見)이요, 호는 구헌(懼軒)이니 산포(山圃) 최익대(崔益大)의 손자다. 진사에 합격했는데 처음으로 과거 보는 공부를 하면서부터 문장이 같은 무리에서 뛰어났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 두 사람의 문하에 따라 수학했다. 오로지 마음을 속으로만 향하고 의(義)를 베풀기를 좋아했다. 재물을 덜어내어 구제해주고 경전과 역사를 온축하니 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할 재목으로 추앙했다.

○ 조희영(趙熙榮) : 자는 내겸(乃謙)이요, 호는 황당(篁塘)이니 오재(梧齋) 조광세(趙光世)의 현손이다. 천품이 도탑고 너그러웠으며 사람되는 것의 가르침을 복습(服習)했다. 늦게는 높은 덕망으로 모든 사원(祠院)에 갈라진 의논이 있으면 반드시 진정(鎭定)시켰다. 아들이 시종(侍從)이었기 때문에 은전의 준례를 따라 임금이 붉은 비단과 옥을 내렸다.

○ 한계철(韓啓轍) : 자는 여경(汝敬)이요, 호는 유계(柳溪)니 부사(府使) 한응검(韓應儉)의 아들이다. 경오년(순조 10년, 1810)에 무과에 합격하여 네 고을을 역임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벼슬이 방어사(防禦使)에 이르렀다. 비록 무(武)로써 몸을 일으켰지만 학문과 식견이 넉넉했고 타고난 바탕이 무겁고 국량이 깊었다. 그 입신과 행기에 있어서나 발언과 일에 대처함에 있어서 유가(儒家)의 모범이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만년에는 산수가 좋은 곳을 취해 삼가(三嘉)의 덕촌(德村)에 자리를 가려 옮겼다.

이명윤(李命允) : 자는 치백(致伯)이요, 호는 안호(安湖)니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예다. 타고난 바탕이 맑고 빼어났으며 식견과 도량이 원대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오로지 뜻을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두 책에만 두었는데 이르기를 “삼강(三綱)과 팔조(八條)는 경(敬)에서 통합되는 것이요, 오도(五道)와 삼덕(三德)은 성(誠)에 해당되는 것이니 일생을 쓰는 데에 무슨 부족함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했다. 무술년(헌종 4년, 1838)에 알성과(謁聖科)에 합격하고 벼슬을 역임하다가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사년(철종 8년, 1857)에는 소(疏)를 올려 참판(參判) 유치명(柳致明)과 권재대(權載大)를 구제하고 임술년에는 잘못된 무고에 걸려 고금도(古今島)로 귀양을 갔다. 섬사람들이 말하기를 “관왕묘(關王廟)에 제사를 지내면 마땅히 일찍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이 아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너는 범방(范滂)[동한인으로 당쟁에 걸려 죽임을 당했음]이 고도(皐陶)[순임금의 신하로 형옥을 맡은 관리]에게 제사지내지 아니한 것을 듣지 못했느냐? 나는 빈 지가 오래되었다.”라고 하고 ‘청천백일에 소명함이 확연하다.[靑天白日 廓手昭明]’라는 여덟 글자를 세든 집의 벽에 쓰기를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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