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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속지 제2권/유행(儒行)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10026

강지특(姜智特) : 참의(參議) 강우(姜佑)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자품이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세상에 쓰일 재목’이라고 하더니 장성함에 이르러서는 문학과 절행으로 고을에 울렸다. 설창(雪牕) 하철(河澈)이 칭찬하여 이르기를 “영매하여 굳세고 뛰어난 것이 사람들의 경탄할 바”라고 했다.

하경소(河鏡昭) : 자는 공극(公極)이요, 호는 동야(東野)니 각재(覺齋) 하항(河沆)의 아들이다. 집안의 가르침에 물들어 언론과 행실이 순결하고 예학(禮學)에도 깊었다. 사호(思湖) 오장(吳長)과 초료당(鷦鷯堂) 유덕룡(柳德龍)과 함께 벗으로 잘 지냈다.

정문익(鄭文益) : 자는 자겸(子謙)이요, 호는 용강(龍岡)이며 본관이 해주(海州)이니 대사간(大司諫) 정신(鄭愼)의 아들이다. 을묘년(선조 22년, 1589)에 생원에 합격했다. 뜻을 고상하게 가져서 영예로운 이름을 구하지 않았다. 둘째 형 충의공(忠毅公)이 화를 당하자 두 조카를 이끌고 남쪽으로 와서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를 진주(晉州)에서 만나 이어서 살았다.

○ 유덕룡(柳德龍) : 자는 시현(時見)이요, 호는 초료당(鷦鷯堂)이며 본관이 문화(文化)이다. 어려서 남명(南冥)의 문하에서 배우더니 남명이 병이 들어 각재(覺齋) 하항(河沆)에게 일러 말하기를 “잘 깨우치면 우리 고을에 안자(顔子)를 본뜰 만할 것”이라고 했다. 드디어 각재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치고 만년에는 삼가(三嘉)에 거처를 옮겨 후진을 장려하고 이끌어 주었으나 소문이 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삼가의 북암사(北巖祠)에 모셨으며 『실기(實記)』가 있다.

강신(姜愼) : 목사(牧使) 강천(姜闡)의 후예니 아우 찰방(察訪) 강척(姜惕)과 함께 문학과 절행이 있었다. 회림정(徊臨亭)을 강 위에 세우고 형제가 시문을 주고받으니 당시 사람들로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성황(成鎤) : 자는 이화(而和)요, 호는 성성재(惺惺齋)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다섯째 아들이다. 평온하고 고요한 것을 스스로 지키고 벼슬길에 뜻을 끊고 평생을 극기복례(克己復禮)로써 힘을 쏟는 근본으로 삼았다. 태계(台溪) 하진(河溍)·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등 여러 어진 이와 더불어 학문을 강하고 토론했는데 사귐이 매우 밀접했다. 상(喪)을 당해서는 집례(執禮)를 매우 엄하게 했다.

○ 정외(鄭頠) : 자는 자의(子儀)요, 호는 추담(秋潭)이니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후예다. 행의(行誼)가 일찍부터 이뤄지고 학문과 식견이 넉넉하고 풍부했으며 미수(眉叟) 허목(許穆)·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태계(台溪) 하진(河溍)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가졌다. 그의 아들 정려(鄭欐)도 또한 겸재 하홍도(河弘度)를 스승으로 섬겨 재예가 출중했으며 사부(辭賦)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진사에 합격했다.

하달원(河達遠) : 자는 백원(伯源)이니 죽헌(竹軒) 하성(河惺)의 아들이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했다. 풍도와 위의가 단아했고 학업이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아우 하달장(河達長)은 진사에 올랐더니 문학이 일찍부터 이루어지고 필법이 정묘했다. 젊은 나이에 동계(東溪) 권공(權公)의 신주(神主)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썼는데 원근의 사림(士林)으로 잘한다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준(鄭濬) : 자는 심원(深源)이니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온순하고 행동이 정직했다. 아우 정렴(鄭濂)과 더불어 박황암(朴篁巖)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을 하는 요점을 얻어들었다. 저술한 유문(遺文)이 불에 타서 다 잃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 허도(許䆃) : 본관이 김해(金海)이니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했다. 단정하고 문장이 훌륭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순박하고 지극했다. 일찍부터 수우당(守愚堂)을 따라 배우니 수우당도 그 마음가짐을 사랑하여 매양 소중히 여겼다. 임진왜란의 병화가 이르자 외삼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군사로써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달려갔다.

정동선(鄭東善) : 자는 사원(士元)이요, 호는 기옹(綺翁)이며 본관이 하동(河東)이니 진사에 합격했다. 호남(湖南)에서 침곡(針谷)으로 옮겨 살아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태계(台溪) 하진(河溍)·학포(學圃) 정훤(鄭暄)과 더불어 추종하고 따르면서 학문을 강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시문이 여러 어진 이들의 문집 가운데서 많이 보인다.

○ 이성(李城) : 호는 우매당(友梅堂)이니 운당(雲堂) 이염(李琰)의 아들이다. 성품과 행실이 독실하여 바로잡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법도로써 스스로를 엄하게 했다. 효성과 우애가 천성에 근본한 것이어서 어버이의 뜻을 잘 따랐다. 조용히 욕심을 줄여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하홍진(河弘晉) : 자는 성오(省吾)요,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음을 성현의 글에만 두니 당시 세상의 사우(士友)들이 군자다운 사람으로 추중(推重)하고 허여했다. 감사(監司) 우복룡(禹伏龍)은 ‘효도하고 우애하는 독실한 선비’라고 칭찬했다.

정효생(鄭孝生) : 남계(南溪) 정승윤(鄭承尹)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고 기이했으며 학문과 식견이 넓고도 깊었다. 일찍부터 과거 보는 것을 폐하니 유림(儒林)의 추앙을 받았다. 그가 돌아가자 태계(台溪) 하진(河溍)이 만사에서 이르기를 “공(功)은 마을의 서당에서 후진을 지도하던 날에 있었고, 행(行)은 문정에서 효도하고 우애하던 때에 드러났네.[功在鄕塾提撕日 行著門庭孝友時]”라고 했다.

○ 유이영(柳伊榮) : 자는 도무(道茂)요, 본관이 문화(文化)이며 벼슬은 훈도(訓導)니 조계(潮溪) 유종지(柳宗智)의 아들이다. 기축옥사(己丑獄死)로 조계가 횡액을 입어 연루된 것으로 왕옥(王獄)에서 죽으니 공은 그 아우 봉사(奉事) 유관영(柳關榮)과 함께 상언(上言)하여 억울함을 씻었다.

○ 정계(鄭枅) : 자는 임중(任重)이요, 호는 타석재(他石齋)니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집안의 학문을 전해 받아서 문한(文翰)과 덕행으로 세상에서 추중(推重)되었다. 두 어버이의 상(喪)에는 모두 여묘(廬墓)로 상제(喪祭)를 마쳤다. 유고(遺稿)가 있어 간행되었다.

하변(河忭) : 자는 자하(子賀)요, 호는 단주(丹洲)니 송강(松岡) 하항(河恒)의 아우다. 아름다운 풍모와 위의에 문장을 잘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사로잡혀 왜국에 끌려갔다. 화복(禍福)으로 위협했으나 절개로 항거하면서 굴복하지 않았다. 왜국에 머무른 지 21년 만에 절개를 온전히 하고 돌아왔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봉강(鳳岡) 조겸(趙㻩) 등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소무(蘇武)의 절개에 비유했다.

○ 이인영(李人英) : 자는 자춘(子春)이요, 호는 송강(松岡)이니 교도(敎導) 이자(李稵)의 후예다. 성품이 평소에 맑고 곧았다.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고 날마다 여러 생도들을 모아 학업을 베풀어 게을리하지 않으니 이로써 모범과 법도가 되었다.

하달제(河達濟) : 자는 회원(會源)이니 생원 하위보(河魏寶)의 손자다. 경자년(현종 1년, 1660)에 생원에 합격했는데 문장이 일찍부터 드러나서 당시 무척 촉망받았으나 스스로는 이름을 감추는 데 힘썼다.

○ 백서우(白瑞羽) : 자는 운정(雲程)이요, 호는 해정(海亭)이니 본관이 수원(水原)이다. 재주와 학문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집안을 다스림에 규범이 있었으며 자신을 조심함에 법도로써 하니 향당에서 칭찬했다.

정대형(鄭大亨) : 자는 여길(汝吉)이요, 호는 여우재(如愚齋)니 생원 정문익(鄭文益)의 아들이다. 문장이 넉넉하고 넓었으며 지조가 높고 고상했다. 가정의 교훈을 지키고 자취를 거두고 숨겨서 기르니 사우(士友)들이 그 풍도를 사모했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손자 정숙(鄭橚)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몰두했고, 청렴개결한데다가 더욱이 궁한 사람을 살피고 급한 사람 구휼하기를 좋아했다.

정유계(鄭有禊) : 자는 공서(公瑞)요 본관이 해주(海州)이니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손자다. 도암(陶菴) 이재(李縡)가 화상(畵像)을 기려 이르기를 “용모와 위의가 맑고 시원스러웠고 문장도 또한 이와 같았다.”라고 했다.

○ 이원직(李元直) : 호는 용강(龍岡)이요, 본관이 함안(咸安)이니 매헌(梅軒) 이인형(李仁亨)의 후예다. 굳게 지조를 지켰고 맑고 빼어나서 재주와 슬기가 예리하고 뛰어났다. 젊은 나이에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를 뵈니 겸재가 매우 사랑하여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주었다. 스승이 돌아가자 심상(心喪)을 입었다.

하경렴(河景濂) : 자는 경주(景周)니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의 후예로 장령(掌令) 하계부(河季溥)의 손자다. 젊을 때부터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 가서 배웠고, 시(詩)에 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이여한(李如漢) : 자는 응시(應是)니 재주와 기국이 영특하고 학문이 깊었으며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강한사(姜寒沙) 등 여러 어진 이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가졌다. 벼슬은 별좌(別坐)였다.

○ 한시헌(韓時憲) : 자는 여장(汝章)이요, 호는 균곡(筠谷)이니 봉사(奉事) 한계(韓誡)의 손자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맑았으며 학문이 넓고 충분했다. 몸소 행하는 것은 깨끗하게 하고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온화했다. 글을 볼 때에는 훈고(訓誥)의 가지와 말단만을 자잘하게 보지 않았다. 성현의 종지(宗旨)를 잃지 않을 것을 요구하니 우뚝하게 유림의 명망이 있었다.

정유기(鄭有祺) : 자는 수계(壽季)요, 호는 징질와(懲窒窩)이니 진사 정대영(鄭大榮)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했다. 어버이를 섬김에 친애와 공경을 지극히 갖추었고 병을 간호함에 있어서는 약을 받들기를 10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상에는 슬픔으로 몸을 상하게 하여 예제(禮制)를 넘겼다. 형제 네 사람이 함께 살면서 학문을 강함에 편안하고 기뻐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학문을 하는 데는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으로써 진실됨을 삼았다. 그리고 안으로 수양하는 데 넉넉했고 곧은 마음을 안고 스스로 편안히 지냈으며, 알고 있는 것이 드런나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았다. 『독서차록(讀書箚錄)』이 있어 집안에 소장했다.

하덕휴(河德休) : 자는 도경(道卿)이니 설창(雪牕) 하철(河澈)의 셋째 아들이다. 굳세고 고명하며 재능이 있어서 일찍부터 시례(詩禮)를 업으로 했다. 임오년(숙종 28년, 1702)에 무과에 올라 네 고을을 역임하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무(武)로써 드러났다 하더라도 영화스러움과 초췌한 것으로써 뜻을 삼지 않았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의 형 양정재(養正齋)와 더불어 한집에 모여 날마다 소요하니 사람들이 ‘연못의 두 학(鶴)’이라 일컬었다. 수직(壽職)으로써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중추(同中樞)에 이르렀다.

○ 조경윤(曺慶潤) : 자는 여길(汝吉)이요, 호는 동곡(桐谷)이다. 그 아우 조경홍(曺慶泓)의 자는 사길(士吉)이요, 호는 동산(桐山)인데 함께 각재(覺齋) 하항(河沆)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아름다운 풍채와 위의에 재주와 슬기가 많았고 독실한 행실을 가다듬으니 사문(斯文)의 권장과 칭찬을 듬뿍 입다가 스승이 돌아가자 복을 마치고 돌아왔다.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이 시를 주었으니 ‘대각산(大覺山)이 무너진 뒤로부터 영남의 문장은 두 사람에게 부촉했네.[自從大覺山頹後 嶠右文章囑兩君]’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임진년의 병화에 송정(松亭)이 동지와 더불어 언약하고 각각 스스로 군량미를 준비해 흩어지고 도망간 이들을 불러 모을 때에 공도 함께 참여했다. 시를 주어 이르기를 “지난해 가을바람에 처음으로 불러 모을 때 강 머리에 나날이 깊이 서로 보이셨네. 지금에 와서 그 정회가 어떻다고 묻겠는가? 온갖 꽃 다 떨어지고 황조만 지저귀네.[去歲秋風召募初 江頭日日長相見 如今情緖問如何 落盡百花黃鳥囀]”라고 했다.

하자징(河自澂) : 자는 성회(聖會)니 하찬(河瓚)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겸재(謙齋)의 문하에 들어가서 깊이 대성하기를 기약함이 두터웠다. 그가 죽자 겸재가 울면서 하직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우두커니 서서 표일한 재주를 생각하니 호탕(浩蕩)한 사원(詞源)이었네. 대를 이어받은 절개와 기상은 떨치고 권장하여 높게 오르는 것이었도다. 한마디 말로써 속된 사람을 놀라게 함이여, 장사치가 옥(玉)을 넘었도다. 사악한 질병이 높은 말을 지껄여 옥로(玉露)가 번성했도다. 세상에서 만일 나를 썼더라면 혼연(渾然)히 비쳐주었으리라.”고 했다.

○ 허서(許曙) : 자는 수초(遂初)니 부총관(副摠管) 허동립(許東岦)의 큰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특이하고 빼어났다.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장군가의 집에서 성장했으면서도 어진 선비로써 스스로 몸을 가졌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진사 하달한(河達漢)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 하자호(河自灝) : 자는 여우(汝愚)니 하찬(河璨)의 아들이다. 아우 하자혼(河自渾)의 자는 원초(原初)인데 함께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서 수업하니 겸재가 심히 사랑하고 중히 여겼다. 주자서(朱子書) 가운데에서 학문하는 긴요한 점을 들어 힘쓰도록 했다.

이태로(李台老) : 자는 방언(邦彦)이니 행정(杏亭) 이중광(李重光)의 후예로 재주와 기량이 호매(豪邁)했다. 젊어서 갈암(葛巖) 이현일(李玄逸)을 따라 배우다가 돌아올 때에 시를 주었는데 이르기를 “사람들이 좋은 관리가 되기만을 바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네. 어떻게 호인이 되겠는가? 의(義)를 의지하고 인(仁)에 거(居)하는 일이로다. 이렇게 하는 데는 또한 방법이 있나니 충서(忠恕)를 행하면서 방외(方外)로 할지로다. 그대에게 경계하노니 지나치게 바쁘게 말 것이요, 밤낮으로 외경(畏敬)하는 생각을 가져야만 하리.[人要做好官 不願作好人 何以作好人 由義與居仁 爲之亦有術 行恕而方外 戒爾勿太忙 日夕存敬畏]”라 했다.

하정(河瀞) : 자는 이해(爾海)니 생원 하달제(河達濟)의 아들이며 호를 괘호정(掛壺亭)이라 했다. 세 번이나 향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고 숨어 살면서 학문을 강하니 후진들로서 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다. 유집(遺集)이 있다.

정기(鄭夔) : 자는 자첨(子瞻)이요, 호는 율리(栗里)니 포은(圃隱) 문충공(文忠公)의 후예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동중자제(洞中子弟)이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그 문하에 배우더니 임인년에 겸재가 임금에게 사은소(謝恩疏)를 올릴 때에 소를 받들고 입성하여 드디어 침낭(寢郞)에 제수되는 특전을 입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사은하는 소를 가지고 와서 관리로 선발된 것은 의리상 편치 못한 것’이라 여기고 드디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 정준남(鄭俊男) : 자는 도우(道又)니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더니 성장함에는 더욱 단아하고 장중했으며 또한 수완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만나서 군사를 낙동강 왼쪽으로 피했다가 돌아와서는 주자서(朱子書)에 깊이 몰두했다. 일찍이 손수 소나무를 심고 시 한 수를 지었으니 “오고 가면서 늘 어루만지며 사랑하나니 어느 누가 세한의 심정을 알겠는가?[盤桓常愛撫 誰識歲寒心]”라는 구절이 있다. 스스로를 우호거사(隅湖居士)라 했다.

○ 하태륜(河泰崙) : 자는 군필(君弼)이니 관찰사(觀察使) 하형(河泂)의 후손이다. 영예와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심했다. 스스로를 성옹(醒翁)이라 하고 후학의 지도에 힘쓰니 성취한 이가 많았다.

○ 안시진(安時進) : 광주(廣州)사람이다. 경자년(현종1년, 166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부사가 병이 들자 공이 옆에 앉아서 시중을 들면서 “학문하는 요점을 듣고자 합니다.” 하니 부사가 저술한 침상의 단편 18편을 전수하였다. 공이 마음에 간직하고 잊지 아니하였다. 공은 또 일찍이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 왕래하면서 더욱 가르침을 받았다.

○ 강헌(姜櫶) : 참의(參議) 강우(姜佑)의 후손이고 벼슬은 찰방(察訪)이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데 힘썼으며 사람을 접대함에는 사사로운 감정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영화로운 벼슬길을 사절하고 돌아와 고향에서 늙었다. 수직으로 부호군(副護軍)을 받았다.

○ 양응화(梁應華) : 자는 백종(伯宗)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다. 일찍부터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의 예(禮)를 가지고 오직 삼가했다. 천거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집에 있으면서 전해오던 가업을 넉넉히 했다. 문암강(文巖江)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붕우와 더불어 문학을 논하고 예를 강하여 한 세대에 남쪽 고을의 풍류승사(風流勝事)로 삼았다.

○ 유해(柳楷) : 자는 자정(子正)이니 조계(潮溪) 유종지(柳宗智)의 손자다. 일찍이 집안의 학문을 이어받아 경전의 뜻을 깊이 연구했으며 벼슬이 찰방(察訪)에 이르렀다.

○ 조정세(趙靖世) : 자는 평보(平甫)요,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니 대소헌(大笑軒)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여러 사람 중에서 특히 뛰어났다. 기상과 국량이 보통 사람과 달라서 홀연히 대인의 뜻을 가졌었다. 장성하자 문예가 일찍 이루어지고 성리(性理)와 『근사록(近思錄)』의 책에 깊은 힘을 얻어 당시 많은 유림들로부터 촉망받는 존재였다.

정환(鄭桓) : 자는 무중(武仲)이요, 호는 임강정(臨江亭)이니 징질와(懲窒窩) 정유기(鄭有祺)의 아들이다. 일곱 살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슬퍼하기를 어른과 같이 했다. 학문과 식견이 해박하고 행동이 고결했다. 숙종 때 기사(己巳)의 변을 당하자 탄식하여 이르기를 “천하에 어찌 어머니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라고 했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화를 입자 권우형(權宇亨)에게 말하기를 “우옹의 상(喪)을 호송함으로써 금고(禁錮)를 입는다면 어찌 영예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 부자와 수촌(睡村) 이여(李畬)가 모두 높은 선비로써 대접했다. 뒷날 사복정(司僕正)을 증직했다.

정즙(鄭楫) : 호는 사무재(四無齋)니 봉강(鳳岡) 정유정(鄭有禎)의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했고 학행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성망과 명예가 매우 깊었다.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의 문하에 따라 유학했다. 유집(遺集)이 있다.

○ 김덕항(金德恒) : 호는 판암(版巖)이니 본관이 선산(善山)이다. 타고난 품성이 보통 사람과 다르더니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깊고 공부가 매우 치밀했다. 성리서(性理書)에 밝았고 한편으로는 천문학에 통했다. 상국(相國) 남구만(南九萬)과 함께 기해예설(己亥禮說)에 대하여 서로 논변했다.

○ 박정신(朴挺新) : 자는 계방(季方)이요, 호는 어은(漁隱)이니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후예다. 진사에 합격하고 『남명연원록(南冥淵源錄)』을 교정하니 당시에 호걸과 문호라 일컬어졌다.

○ 김명겸(金命兼) : 자는 경일(景鎰)이요, 호는 삼함재(三緘齋)니 백암(白巖) 김대명(金大鳴)의 증손이다. 단아하고 장중했으며 순수했다. 일찍부터 과거 보는 공부를 버리고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어렵고 의심되는 곳을 문답했고 연구하고 궁리한 것이 쌓이고 깊숙했다. 석담(石潭) 권대운(權大運)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송정신월 죽계청풍(松亭新月 竹溪淸風)’이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주었다.

○ 양진세(梁鎭世) : 자는 백망(伯望)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다. 병오년(현종 7년, 1666)에 진사에 합격했는데 일찍부터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 들어갔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진중하며 총명하여 애써 기록했다. 조상을 받들 때는 정성으로 했고 사람을 대할 때는 충성으로 했다. 문장과 행의로써 세상에서 일컬어졌다.

○ 성항(成杭) : 자는 정용(貞用)이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증손이다. 일찍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실천에 힘써서 문학과 행의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 만년에는 철성(鐵城)에 우거하여 후학의 지도에 힘쓰니 문하에 쟁쟁한 문학의 선비가 많았다.

○ 이중정(李重禎) : 자는 휴보(休甫)요, 호는 오천(梧泉)이니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손자다. 집안을 이어받아 문학과 행의로써 세상에 이름났다.

○ 조진명(曺晉明) : 자는 자소(子昭)니 남명(南冥)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의 손자다. 음직(蔭職)으로 찰방(察訪)이 되었는데 가학의 연원에 물들어 영예로운 소문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관직에 있으면서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었다. 사문(斯文)의 모든 일을 반드시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등 여러 어진 이와 더불어 의논했으며 또 일찍이 신도비(神道碑)의 일을 의논했다.

정구(鄭構) : 자는 지세(旨世)요, 호는 노정헌(露頂軒)이며 본관이 해주(海州)이니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증손이다. 착한 일을 즐거워하고 의로운 것을 좋아했으며 문장과 필법으로도 세상에 추중(推重)되었다.

○ 이집(李集) : 자는 의중(義仲)이요, 본관이 재령(載寧)이며 남계(南溪) 이번(李蕃)의 손자다. 일찍이 집안의 교훈을 받고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서 수업하니 겸재가 경의(敬義)로써 설명해주었다.

○ 조준명(曺浚明) : 자는 자심(子深)이니 만호(萬戶) 조차정(曺次矴)의 아들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했다. 나면서부터 바탕이 매우 아름다웠고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문학과 행의로써 사우(士友)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당시에 음옥(淫獄)의 일로 무고(誣告) 된 일이 있어 사문(師門)에 미쳤더니 창주(凔洲) 하증(河憕)·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등의 여러 어진 이들과 의논하고 글을 저술하여 이를 밝혔다.

하윤관(河潤寬) : 자는 택후(澤厚)요, 호는 인재(忍齋)다. 7~8세 때부터 순박하고 고상한 뜻과 행실이 있었다. 글을 받아 읽을 때는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자식과 조카들에게 재물을 불리는 것을 하지 말도록 경계하여 이르기를 “뜻을 손상시키고 허물을 더하는 것이니 심히 옳지 못하다.”고 했다. 바라보면 엄숙한 듯하고 나아가면 부지런하고 따뜻했으니 후배로서 자리에 모시고 가르침을 받는 자는 순주(淳酒)를 마시는 것 같았다.

○ 남국문(南國文) : 자는 명중(明仲)이요, 호는 남계(籃溪)니 봉사(奉事) 남극창(南極昌)의 손자다. 일찍이 집안의 학문을 이어받아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의 문하에 나갔더니 문학과 행의가 당시의 동년배들을 뛰어넘었다. 구사당(九思堂) 김진행(金晉行)은 그를 칭찬하여 ‘뜻과 행실이 속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윤일(河潤一) : 자는 택선(澤善)이요, 호는 죽촌(竹村)이니 진사 하달한(河達漢)의 손자다.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여 빠른 말이나 갑자기 얼굴빛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다섯 살에 능히 글자를 분별했고 자라서는 묵재(黙齋) 조석규(趙錫圭)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돌아간 뒤에 효성과 우애하는 학행으로써 유장(儒狀)이 있었으되 국가의 포장(襃獎)을 입지 못하니 향당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하응명(河應命) : 자는 성휴(聖休)요, 호는 치와(癡窩)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재주와 기상이 기발했다. 효성과 우애의 돈독함과 조행(操行)의 정성스러움은 집안의 학문을 잘 이어받은 것이었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했으나 조용히 스스로를 닦고 이름을 어리석음으로써 숨겼으니 대개 그 걱정이 없는 것을 보인 것이다.

하대명(河大明) : 자는 진숙(晉叔)이요, 호는 한계(寒溪)니 설창(雪牕) 하철(河澈)의 손자다.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뛰어났고 문장과 필법으로 당세에 이름이 났다. 젊은 나이에 향시를 마쳤고 정문(程文)의 여섯 가지 문체에 힘을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또 예학(禮學)을 밝게 익혀서 원근에 나아가 물었다.

하필청(河必淸) : 자는 천기(千期)요, 호는 태와(台窩)니 진사 하응세(河應世)의 아들이다. 무오년(영조 14년, 1738)에 문과에 올라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치고 나아가 경양승(景陽丞)이 되었다. 재질이 뛰어나고 행의가 순결했으며 뜻과 기상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나 당시의 논의에 거슬렀기 때문에 지위가 덕(德)에 맞지 않았으니 시속의 논의가 애석하게 여겼다.

정상점(鄭相點) : 자는 중여(仲與)요, 호는 불우헌(不憂軒)이니 농포(農圃) 충의공(忠毅公)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선조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과거 보는 것을 폐했다. 임천(林泉)에 소요하고 쉬면서 거문고와 독서를 즐겼다.

○ 한정석(韓鼎錫) : 자는 덕원(德元)이요, 호는 돈계(遯溪)니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후손이다. 문학과 행의로써 사우(士友)들에게 추중(推重)되었다. 두 아들 한백유(韓伯愈), 한중유(韓仲愈)도 함께 선비의 행실이 있었다.

정상길(鄭相吉) : 자는 길보(吉甫)요, 호는 동주(東洲)니 진사 정즙(鄭楫)의 아들이다. 권수암(權遂菴)의 문하에서 수업했고 효우와 학행으로 이름을 당세에 드러냈다.

○ 한성(韓成) : 자는 취지(就之)요, 호는 유은(柳隱)이니 한기석(韓箕錫)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단아하면서도 장중했고 지조가 맑고 개결하여 조정에 선 지 10여 년 동안에 권세와 이익이 되는 문하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비록 무관직에 종사하면서도 마음은 자신을 규율하는 데에 두고 한결같이 유자(儒者)의 업으로써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벼슬은 절제사(節制使)에 이르렀다.

○ 이한철(李漢哲) : 자는 내원(來遠)이요, 호는 자송당(自訟堂)이니 소암(素菴) 이덕관(李德寬)의 아들이다.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고 후배를 권장하고 진취시켜 성취시킨 이가 많았다. 여섯 번이나 향시에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실패했다. 고을 사람이 요로처에 뇌물을 쓰고자 공에게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거절하면서 이를 꾸짖어 이르기를 “그대는 나의 친구가 아닌가?”라고 했다.

○ 허경(許金+戶/向) : 자는 개숙(開叔)이요, 호는 독성재(獨醒齋)니 부총관(副摠管) 허동립(許東笠)의 후예다. 문사(文辭)가 풍부하고 필법이 정묘했으며 아홉 번이나 향시에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실패했다. 드디어 번연히 깨닫고 말하기를 “옛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진실로 자기를 위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사람들의 독서는 다만 과거에 응시하는 것만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드디어 홀로 깨우치는 것으로써 그의 서재에 편액(扁額)을 걸고서 날마다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여러 책에 깊이 몰두했다. 자세히 해석하여 조예가 정밀하고 심오했다.

하필동(河必東) : 자는 사흘(士屹)이요, 호는 사고헌(四顧軒)이니 습정재(習靜齋) 하응운(河應運)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명쾌하며 착한 일을 하는 데에 과감했다. 일찍이 여러 사우와 더불어 상소(上疏)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해 임금으로부터 정중한 비답을 받았다. 일찍이 이도암(李陶庵)을 따라 배워서 명성과 기대가 우뚝했으나 불행히도 세상을 일찍 떠나니 사우들이 탄식하고 애석히 여겼다.

이세근(李世根) : 자는 달후(達厚)요, 호는 갈모당(葛茅堂)이니 행와(杏窩) 이중영(李重榮)의 후손이다. 외삼촌 모계처사(茅溪處士) 조석기(曺錫基)에게서 배웠더니 벼슬자리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이 한번 보고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겨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고 그의 집에 서문을 지어 기렸다.

강흥운(姜興運) : 자는 문거(文擧)요, 호는 매은(梅隱)이니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5세손이다. 곤궁한 사람을 먹이고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며 옛사람의 수레와 의복이 함께 폐단이 된다는 의(義)를 가지니 향당에서 모두 착하고 신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 박맹기(朴孟夔) : 자는 화명(華命)이요, 호는 석포(石浦)다. 문장은 선진(先秦)을 추구하고 글씨는 창사[蒼史, 창힐(蒼頡)과 사주(史籒)]를 본떴으며 저술한 「화곡설(禾谷說)」과 「추야도(秋夜圖)」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 이광호(李光浩) : 자는 계보(季甫)요, 호는 학암(學菴)이니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의 후예다. 어려서부터 지조와 절개가 있어 항상 선조의 가르침 가운데에 ‘충효전가(忠孝傳家)’의 네 글자로써 경책(警策)하고 격려했다. 처음에 그의 할아버지가 동계(桐溪)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과 더불어 서로 좋아하더니 포천(抱川)으로부터 결혼하고 옮겨 살았다. 무신년(영조 4년, 1728)에 역적인 정희량(鄭希亮)이 친척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이끌어서 두렵게 크게 꾸짖어 끊고는 그날로 모부인을 모시고 남쪽으로 달려오면서 지나는 곳마다 점벽(店壁)에 반드시 크게 써서 이르기를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이모(李某)는 역적 량(亮)을 피하여 여기를 지난다.”고 했다. 명암(明菴) 정식(鄭栻)이 보고 의롭게 여겨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니 이로부터 진주(晉州) 사람이 되었다.

정숙(鄭塾) : 자는 회일(會一)이니 징질와(懲窒窩) 정유기(鄭有祺)의 증손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올라 문장과 효우로써 세 번이나 천거를 입었으나 마침내 등용되지 못하니 당시의 논의가 애석하게 여겼다.

하복호(河復浩) : 자는 길보(吉甫)요, 호는 단사(丹砂)니 치와(癡窩) 하응명(河應命)의 아들이다. 타고난 천품이 영특하고 문장이 넉넉하고 넓었다. 여러 번 향시에서 합격했으나 또한 상(喪) 때문에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진을 가르쳐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유집(遺集)이 있다.

○ 김곡(金鵠) : 호를 교채려(咬菜廬)라 했으니 백암(白巖) 김대명(金大鳴)의 후예다. 일찍이 사마시에 올라 문장의 명성이 크게 떨치고 지은 글도 수만 언이었는데 불 속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 최동일(崔東逸) : 본관이 전주(全州)이니 실천하는 것이 고아하고 부지런했다. 경학(經學)에 정통했으며 갑오년(영조 50년, 1774)에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조석기(曺錫基) : 자는 덕보(德甫)요, 호는 모계(茅溪)니 정우당(淨友堂) 조치우(曺致虞)의 후손이다. 일찍이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학문이 넓었고 힘써 행하면서 영리를 구하지 않았다. 방어산(防禦山)지도보기 아래에서 은거했다.

강재후(姜載後) :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의 후손이다. 도량과 포부가 크고 원대했으며 재예가 탁월했다. 『백계시축(白溪詩軸)』이 있다. 임오년(숙종 28년, 1702)에 문과에 올라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정도진(鄭道震) : 자는 성빈(聲彬)이요,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현손이다. 타고난 자질이 온후하고 순수했으며 기상과 포부가 엄숙하고 단정하여 옛날 집안의 법도가 있었다. 문학과 행의로써 고을에 드러났다.

○ 정상우(鄭相宇) : 자는 성빈(聖賓)이요, 호는 야은(野隱)이며, 본관이 하동(河東)이니 진사 정국교(鄭國僑)의 후예다. 타고난 성품이 침착하고 장중하여 뜻을 세운 것이 견고하고 확실했다. 학행으로써 향리에 알려졌다.

정희래(鄭喜來) : 자는 낙붕(樂朋)이요, 호는 운곡(雲谷)이니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예다. 총명이 절륜하고 문사에 공교롭고 필력이 노련했다. 여러 번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문과에서 실패했다.

하극호(河極浩) : 자는 일숙(一叔)이요, 호는 단연(丹淵)이니 모송재(慕松齋) 하인상(河仁尙)의 현손이다. 타고난 자질이 슬기롭고 문장이 일찍 성취되었다. 세상의 도의가 날로 그릇되어 감을 보고 소문이 들리기를 구하지 않았다. 성리학에 잠심했으며 괴천(槐泉) 유문룡(柳汶龍)·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추중(推重)했다.

○ 김성운(金聖運) : 자는 대집(大集)이요, 호는 주담(珠潭)이니 삼함재(三緘齋) 김명겸(金命兼)의 아들이다. 재주와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경적(經籍)에 통달하고 문장이 넉넉했다. 자신을 신칙하고 행동을 제어했으며 규범을 지키고 빈궁한 대로 살면서도 검약을 지키며 편안히 스스로를 즐겼다.

○ 김문수(金文粹) : 자는 회보(晦甫)요, 본관이 의성(義城)이며 동강(東岡) 문정공(文貞公) 김우옹(金宇顒)의 5대손이다. 성주(星州)로부터 와서 고을의 동쪽 압현리(鴨峴里)에 살았다. 성품이 엄하여 법도가 있었고 풍도와 체재가 단정하고 훌륭했다. 후덕하고 도량이 넓고 커서 보는 자가 공경하고 사랑했다. 일찍이 용봉면(龍奉面)의 「규약안(規約案)」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 권용현(權龍見) : 자는 기이(紀爾)요, 호는 월암(月巖)이다. 나면서부터 특이한 재질이 있었다. 어릴 때에 종이 위에 부모(父母)의 글자를 보면 갑자기 차마 밟고 넘지 않았다. 스승께 학문을 배울 때는 『소학(小學)』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이르기를 “사람 되는 도리는 다 이 책에 있다.”라고 했다. 어버이를 모시고 병들었을 때에 고기가 뛰어들고 손가락을 벤 일이 있었고 여묘(廬墓)에서는 호랑이가 감동하는 일이 있었다. 만년에는 양전리(陽田里)에 와서 우거하니 마을 사람들이 교화되어 선량하게 된 것이 많았으므로 양(陽)을 양(良)으로 고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도신(道臣)이 조정에 알려 그 세금을 면제시켰다. 수직(壽職)으로 관직을 받더니 돌아가자 효행으로 여러 번 추증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정려(旌閭)되었으며 회계서원(檜溪書院)에 모셨다. 『실기(實記)』가 있다.

정광익(鄭光益) : 뒷날 봉(封)으로 고쳤다. 자는 술원(述遠)이니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성품이 덕이 크고 뜻을 세운 것이 견고했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문하에서 유학했다. 때마침 원릉(元陵)의 계제를 만나서 여론이 한 번 변하게 되었으나 높은 모양처럼 스스로를 지켜 확고하게 변하지 않았다. 그가 기거하는 집의 편액을 수선당(守先堂)이라 일렀으니 대개 그의 윗대에서 지키던 바의 논의를 나타낸 것이다.

정찬익(鄭燦益) : 자는 명숙(明叔)이요, 호는 삼모재(三慕齋)니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예다. 사마시에 합격했는데 위의가 단아하고도 장중했다. 학문과 행의가 일찍 성취되었다. 병계 윤봉구(尹鳳九)에게서 수학했는데 병계가 지은 「천명인심도(天命人心圖)」의 “초목과 금수는 인의예지(仁義禮智)로써 이름 짓지 못한다.”는 등의 글을 보고 크게 칭찬을 더했다. 미호(美湖) 김원행(金元行)과 역천(櫟川) 송명흠(宋明欽)과 더불어 도의의 교분을 삼았다. 여러 사우(士友)와 더불어 상소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의 양현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해 후하게 대우하는 비답을 받았다.

○ 김광련(金光鍊) : 자는 자정(子精)이요, 호는 입암(立巖)이니 백암(白巖) 김대명(金大鳴)의 후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가 뛰어나서 4~5세에 능히 글을 지어 가끔씩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었다. 성장해서는 독서에 더욱 힘쓰고 경서의 가르침에 깊이 몰두했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하는 큰 방향을 얻어들었다. 만년에는 집을 국사봉(國士峰) 아래에 짓고 장차 노경의 계책을 삼아 다시는 사물(事物)로써 마음을 쓰지 않았다. 문집(文集)이 있다.

○ 박천동(朴天東) : 자는 유청(幼靑)이요, 호는 남포(南浦)니 석포(石浦) 박석기(朴石夔)의 아들이다. 성리학에 깊이 몰두하여 도설(圖說)을 많이 저술했다. 그가 죽자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의 유림들이 사당을 세우자는 의논을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강세준(姜世儁) : 자는 자진(子眞)이요, 호는 매고(梅皐)니 지우당(至愚堂) 강래운(姜來運)의 아들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풍채가 고아하고 깨끗했다. 경륜(經綸)을 쌓고 품었으나 시골에서 세상을 마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유집(遺集)이 있다.

곽선(郭璿) : 자는 경옥(景玉)이니 무위자(無爲子) 곽세건(郭世楗)의 후예다. 사마시에 합격되고 문학과 행의가 있었으며 사우(士友)로 더불어 상소하여 남명(南冥)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을 문묘에 종사(從事)할 것을 청했다.

강필준(姜必儁) : 자는 미백(美伯)이니 매은(梅隱) 강흥운(姜興運)의 아들이다. 순박하고 돈후한 행실이 있었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가 자기와 달리하는 자 때문에 무고에 엮이게 되자 화(禍)를 무릅쓰고 공의(公議)를 불꽃처럼 일으켜 반드시 이치를 펴기에 이르렀다. 또 남명(南冥)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소를 일으켰을 때 그 논의를 주관하기도 했다.

○ 성사안(成師顔) : 자는 경묵(景黙)이요, 호는 금계(琴溪)다. 용모가 크고 훤칠했고 성정이 담박하고 평화로운 것을 좋아했다. 집안의 생계에 애쓰지 아니하고 시서(詩書)에만 힘써 정진했다. 나이 사십에 과거 보는 것을 폐지하고 후진양성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니 와서 배우는 자가 심히 많았다. 문학과 행의로 세상에 추중(推重)되더니 죽은 후에 향당에서 사당을 세우자는 의논을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하정중(河正中) : 자는 군직(君直)이니 하자혼(河自渾)의 현손이다. 성품이 눈빛이 번쩍거리고 빛이 났으며 자유분방했다. 훌륭한 풍채에 문장이 능했다. 아름다운 산수에서 놀기를 좋아하여 두 번이나 평양(平壤)에 들어갔고 한양의 문학으로 이름난 자와 모두 시집의 서문을 지어준 것이 수백 편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온 나라를 두루 교유(交游)하니 비록 얼굴은 알지 못해도 그 이름을 듣는 사람들은 공경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번암(樊巖) 채상국(蔡相國)과 더불어 도의로 맺어 가장 친밀했다.

○ 하윤채(河潤采) : 자는 군직(君直)이요, 호는 오오당(五吾堂)이니 괘호정(掛壺亭) 하정(河瀞)의 아들이다. 두 번이나 향시에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실패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검약을 지키며 글 짓는 것을 즐겼다. 저서로는 『자경훈몽(自警訓蒙)』과 『궁격설역리(窮格說易理)』 등의 편저 및 유집(遺集)이 있다.

○ 최익대(崔益大) : 자는 겸수(謙叟)요, 호는 산포(山圃)니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독서하기를 좋아했는데 경전(經典)에 힘을 기울였다. 일찍이 세 번이나 향시에 뽑혔으나 대과에 실패하고 돌아와서는 대산(大山) 이문경공(李文敬公)을 뵙고서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을 강(講)했다. 취향(趣向)이 매우 바르고 마음을 수립하는 것으로 행실을 제어하여 한결같이 유문(儒門)의 규범을 따랐다. 만년에는 가천(佳川) 상류에 와서 노년을 마쳤다. 유집(遺集)이 있다.

○ 조득우(趙得愚) : 자는 입중(立中)이요, 호는 남강(南岡)이니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후예다. 항상 대산(大山) 문경공(文敬公)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 가서 의심되는 것을 여쭈고 강론했다. 평생토록 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친상(親喪)을 입지 못한 것을 슬프게 여겼다. 항상 옷 속 깊이 승대(繩帶)를 입고 화려한 채색 옷으로 장식을 더하지 않았다. 「영모정(永慕亭)」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인간으로 지극히 서글픈 일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게 되는 일이니 오십에 어버이를 생각하는 사람, 순(舜)임금 한 사람뿐이던가? 다행히도 정회를 부칠 땅을 구해 지붕을 얽었으니 길이 사모할 미약한 정성만이 날마다 더욱 새롭네. (人間至慟早孤身 五十思親舜一人 構軒幸得寓懷地 永慕微誠日益新)”이라 했다. 문집(文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 강형은(姜亨殷) : 자는 자윤(子胤)이요, 호는 인재(忍齋)니 한림(翰林) 강안중(姜安重)의 후예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천리(踐履)가 독실했다. 어버이를 섬김에 마음과 시물(時物) 모두 지극했다. 거상(居喪)에 여묘(廬墓)살이를 하니 향리에서 포창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힘써 중지시켰다.

하일호(河一浩) : 자는 이보(履甫)요, 호는 죽와(竹窩)다. 타고난 자품이 너그럽고 기상과 도량이 온화하고 순수했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일렀다. 만년에는 후학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소임을 삼았다. 가르치는 데에는 『소학(小學)』을 먼저 했다. 문집(文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 허존(許存) : 자는 성옹(惺翁)이요, 호는 귤원(橘園)이며 본관이 양천(陽川)이니 정자(正字) 허추(許錘)의 아들이다. 부친이 당시의 논의에 거슬려 본주(本州)에 귀양살이를 하더니 따라서 놀 때에 고을의 경승과 풍토의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그의 두 아들을 금만장(金萬庄)에 와서 살게 했다. 문장에 능하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는데도 쓰여지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많이들 애석하게 여겼다.

○ 남국붕(南國鵬) : 자는 운거(雲擧)요, 호는 경의재(敬義齋)니 남계(籃溪) 남국문(南國文)의 아우다.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정성스러웠고 재주와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다. 젊은 나이에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을 희양(晞陽)의 귀양살이 하는 곳에서 뵙고 제자의 예를 가졌다. 오직 부지런히 마음을 자기를 수양하는 학문에 두었으며 조예가 독실했다. 제산이 칭찬하여 이르기를 “바탕이 아름답고 학문을 즐기니 세속의 선비와 다른 점이 있다.”고 했다.

○ 허윤(許潤) : 자는 능택(能澤)이요, 호는 서고(西皐)니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거상에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문학과 덕행으로써 당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벼슬에 나가고 물러남에 두 길이 아니면 어찌 영화와 이달(利達)로 그 마음을 더럽히겠는가?”라고 했다. 방 한 칸을 깨끗이 쓸고 기거하면서 뜻을 구하고 성리학(性理學)에 깊이 몰두했다.

○ 한상기(韓相琦) : 자는 규백(奎伯)이요, 호는 낙명재(樂命齋)다. 지조가 맑고 고상했으며 문사(文詞)가 정묘하고 넓었다. 여러 번이나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드디어 적은 서재를 세우고 벽에 ‘분수에 편안하고 천명을 안다[安分知命]’는 네 글자를 걸어두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와서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고 유집(遺集)이 있다.

하진중(河鎭中) : 자는 자심(子深)이요, 호는 복와(復窩)니 학문과 행의로 세상에서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안으로는 큰형 국담공(菊潭公)과 서로 화합하여 시를 주고받으면서 남이 미처 알지 못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밖으로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를 비롯한 여러 어진 이들과 도의(道義)로 사귐을 맺었다.

정내의(鄭乃毅) : 자는 사상(士相)이요, 호는 반곡(盤谷)이니 효자 정보(鄭堡)의 큰 아들이다. 하늘이 낸 효자여서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기니 뜻에 순응하여 어김이 없었다. 자라서는 가정의 교훈에 젖어들어 몸소 삼가하고 글에 힘써 문학이 일찍부터 이루어져 여러 번 향시에 합격했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상례(喪禮)를 가짐이 매우 엄하여 날마다 상복을 입고 성묘(省墓)했다.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고 문을 닫아걸고 뜻만을 구하니 조예가 더욱 깊었다.

하치중(河致中) : 자는 내윤(乃潤)이요, 호는 사연(舍淵)이니 하자호(河自灝)의 현손이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밭 갈고 글을 읽었다.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극진히 했고 글을 지을 때에는 종이를 펴놓고 한 글자도 고치거나 더 보태지 않았다. 만년에는 방장산(方丈山) 가운데에 살면서 저술하기를 즐겼다.

정지형(鄭志衡) : 자는 옥여(玉汝)요, 호는 은와(隱窩)니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기상과 도량이 넓고 깊었고 자품과 성정이 도타웠다. 9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거상(居喪)에 한결같이 어른과 같이 했고 몸소 행함에 하나같이 법도를 따랐으며 처세에 모범이 있었다. 경림서원(慶林書院)과 종천서원(宗川書院)의 원장이 되어 한때에 추허(推許)하는 바가 되었다

허담(許橝) : 자는 사경(士擎)이요, 호는 장암(丈巖)이니 부총관(副摠管) 허동립(許東笠)의 후손이다. 7~8세에 이미 집안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었고 성년이 되기도 전에 시와 문장으로 과장(科場)에 명성이 있었다. 무오년(정조 22년, 1798)에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는 것에는 뜻을 끊고 마음을 성리서(性理書)에 두었으며 손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그림을 그려서 항상 눈에 보이게 했다. 부모의 상(喪)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옛날의 상제(喪制)를 지켰다. 그리고 아우와 누이동생 중에 가난한 이에게는 반드시 불쌍히 여겨 구휼했는데 종중 친족들이 모두 그 어짐을 칭찬했다.

정국채(鄭國采) : 자는 사관(士觀)이요, 호는 함인재(含忍齋)니 모렴재(慕濂齋) 정도동(鄭道東)의 손자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사사(師事)하여 문학과 덕행으로 사우(士友)들에게 추중(推重)되었다.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를 따라 놀고 그가 엮은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참작하여 수정했다. 그가 죽자 도내(道內)의 선비들이 사당에 들이는 일을 의논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하익범(河益範) : 자는 서중(叙中)이요, 호는 사농와(士農窩)이니 효자 하진태(河鎭兌)의 아들이다. 성품이 굳세고 씩씩한 가운데에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했다. 일찍 과거 보는 것을 포기하고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사사(師事)하면서 또 경호(鏡湖) 이공을 따라 놀았다. 돈독하게 배우고 힘써 행했으며 예학(禮學)에 밝아서 사문(師門)에서 추앙하고 존중되었다. 『담상문답(潭上問答)』과 『대학강의(大學講義)』 및 유집(遺集)이 있다.

정승의(鄭承毅) : 자는 중렬(仲烈)이요, 집의(執義) 정대영(鄭大榮)의 후예다. 자품이 영특하고 빼어났는데 발분하여 학문을 했다. 형제와 함께 미호(美湖) 김원행(金元行)을 뵈니 김미호가 시를 지어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학문이 매우 해박하고 실천이 독실했으며 천인성명(天人性命)으로부터 하락팔괘(河洛八卦)와 오행(五行)에 이르기까지 모두 저설(著說)하여 밝혔다. 아들이 시종(侍從)이었기 때문에 은전(恩典)으로 동중추(同中樞)가 되었다.

하병일(河秉一) : 자는 시서(時瑞)요, 호는 연정재(煙艇齋)이니 쌍부헌(雙負軒) 하진룡(河震龍)의 후예다. 성담(性潭) 송문경공(宋文敬公)의 문인으로 재주와 기상이 탁월하고 학문에 깊이 몰두했다. 과거에 뜻이 없어 자연에서 생활하며 참다운 본래의 성품을 길렀다. 유집(遺集)이 있다.

○ 조양우(趙養愚) : 자는 인중(仁仲)이요, 호는 괴려(槐廬)니 춘수당(春睡堂) 조흡(趙潝)의 조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었으나 힘써 배워서 유행(儒行)으로써 이름이 났다. 유집(遺集)이 있고 그가 엮은 『예고집성(禮攷集成)』은 집에 갈무리했다.

○ 이국병(李國昞) : 자는 치승(致升)이니, 우졸(愚拙) 이재훈(李再勳)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과거 보는 것을 일삼아 여러 번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황산(荒山) 반모의 집에, 세상을 밝힐 한 서생이 있다네.[荒山半畝屋 晟世一書生]”라 하고 증자(曾子)의 ‘날마다 세 번씩 성찰한다[日三省]’의 뜻을 취해 그 문의 편액을 ‘성헌(省軒)’이라 일렀다. 종일토록 의관을 갖추고 고요히 앉아 있으면 신명(神明)이 엄숙하게 임한 듯했다.

○ 허술(許述) : 자는 군선(君善)이니, 부총관(副摠管) 허동립(許東笠)의 후예다. 자태와 품성이 시원스럽고 훤칠했으며 덕기(德器)가 엄정하고 정중했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을 얻어들었으며 「태극성학도(太極聖學圖)」를 좌우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보고 살폈다.

○ 한식(韓烒) : 자는 성빈(聖彬)이요, 호는 용사(龍沙)니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돈독한 행실에 효우했고 오로지 실천을 힘써서 동문(同門)에서 추앙받고 존중되었다. 양정재(養正齋)를 세우고 깊이 몰두하여 힘써 배우니 대개 몽양(蒙養)으로 성현이 되고자 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수직(壽職)으로 첨중추(僉中樞)가 되었고 유집(遺集)이 있다.

○ 유당(柳塘) : 자는 잠가(潛可)요, 본관이 문화(文化)이니 좌의정(左議政) 유만수(柳曼殊)의 후예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문예가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12세에 사서(四書)와 『예기(禮記)』를 통달했고, 18~19세에 성리(性理)의 학문을 통달했다. 예암(豫菴) 하우현(河友賢)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중용성명도(中庸性命圖)」를 정정하여 이루고 나이 33세에 세상을 마치니 당시 사람들이 ‘작은 안자(顔子)가 죽었다.’라고 일컬었다. 대각서원(大覺書院)과 종천서원(宗川書院)의 선비들이 서로 이어 서원에 배향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 성한주(成翰周) : 자는 정로(楨老)요, 호는 금호(琴湖)니 공금당(共衾堂) 성동일(成東一)의 손자다. 기상과 도량이 온아(溫雅)하고 스스로 굳세고 깨끗함을 지켰다. 서재를 서쪽 성 산중에 세우고 책을 읽고 학문하는 장소로 삼으니 와서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다.

정빈의(鄭鑌毅) : 자는 극명(克明)이요, 호는 무호옹(無號翁)이니 농포(農圃) 충의공(忠毅公)의 후예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형을 받드는 데에는 우애했다. 형 한옹(閒翁)이 안주(安州)의 임소에 있을 때에 갑자기 풍비증(風痺症) 때문에 여러 달 동안 고통이 심했는데 산에 올라가서 백 일 동안 기도를 올려 백씨의 병이 조금 나았다. 벼슬을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 늦게서야 문학을 이루어 세상에서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 이협(李峽) : 자는 윤백(允伯)이요, 호는 성암(醒菴)이니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예다.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했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설요차고궁록(理說要箚固窮錄)』을 저술했다.

○ 하진민(河鎭敏) : 자는 자형(子亨)이요, 호는 돈와(遯窩)니 진사 하달한(河達漢)의 후예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며 유행(儒行)으로 세상에 일컬어졌다. 유집(遺集)이 있고 늦게는 김해(金海)에 옮겨 가서 살았다. 자세한 것은 금릉(金陵)의 『인물지(人物誌)』에 나와 있다.

하진현(河晉賢) : 자는 사중(師仲)이요, 호는 용와(容窩)니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경전을 공부하여 여러 번 동당(東堂)에 가고자 서울의 과장에 달려갔더니 당로자(當路者)가 뇌물을 요구하므로 “아버지가 계시는데 자식이 오로지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즉시 서찰로 가정에 아뢰었더니 함와가 글을 옮겨 매우 꾸짖어 이르기를 “선비가 벼슬을 하려는 것은 본래 임금을 섬기려는 것이거늘 지금 너는 비로소 벼슬을 하고자 하면서 임금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냐?”라고 했다. 명령을 듣는 즉시 내려와서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드디어 크게 문학에만 힘을 기울여 한 지방의 사표가 되었다. 유집(遺集)이 있다.

○ 이규일(李奎一) : 자는 여방(汝芳)이요, 호는 운호(雲湖)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학문에만 오로지 정진했으며 일찍이 『인도심오황극설(人道心五皇極說)』을 저술했다. 글 짓는 데는 오로지 힘쓰지 않았고, 세교(世敎)를 붙드는 데만 뜻을 두었던 것이다.

정광의(鄭光毅) : 자는 원경(遠卿)이요, 호는 묵재(黙齋)니 동호(東湖) 정상첨(鄭相詹)의 손자다. 생원에 합격하고 성균관의 추천으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을 배했다. 일찍이 기천(沂川) 문간공(文簡公) 홍명하(洪命夏)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했다. 뜻을 가다듬고 노력하여 문행과 덕망이 우뚝했으므로 남복(男服)의 여망(輿望)이 되었다.

○ 남찬(南璨) : 자는 광언(光彦)이요, 호는 매곡(梅谷)이다. 남태형(南泰亨)의 후예이며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의 문인이다. 뜻과 기상이 얽매이지 않고 조예가 순실하니 제산(霽山)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아름다운 바탕에 올바르게 연마하니 유경(遺經)을 풀어서 생각할 만 하리로다. 원하여 이르노니 영명한 아우와 같이하여 바른 길을 따라가서 다른 길로 가지 말라.[美質宜追琢 遺經可繹思 願言同令弟 趨正莫他之]”라 했다.

○ 한계로(韓啓魯) : 자는 능일(能一)이요, 호는 세한정(歲寒亭)이니 유오(柳塢) 한기석(韓箕錫)의 증손이다. 문장과 행의로 세상에서 추앙하는 바가 되었고 저술한 것으로는 『패고피(敗鼓皮)』 5권과 『두류지(頭流誌)』 2권이 있다. 일찍이 「제월고운(霽月孤雲)」이란 시를 지어 한때 회자되니 사람들이 ‘제고옹(霽孤翁)’이라 일렀다. 또 처음과 끝을 드러내어 백여 편을 읊으니 사람들이 ‘작은 강절(小康節)’이라 일컬었다.

○ 허주(許輳) : 자는 여집(汝集)이니 부총관(副摠管) 허동립(許東笠)의 후손이다. 장암(丈巖) 정호(鄭澔)의 문하에서 수업했고 문학과 행의로써 사우(士友)들에게서 추앙받고 존중되더니 소(疏)를 올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 양현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했다.

○ 유지현(柳之賢) : 자는 희부(希夫)요, 호는 명호당(明湖堂)이니 송곡(松谷) 유세창(柳世彰)의 후손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문하에 유학하여 예(禮)에 대한 의심되는 점을 논변하여 발명한 바가 많았다. 그리고 함인재(含忍齋) 정국채(鄭國采)와 사농와(士農窩) 하익범(河益範)과 더불어 벗으로 잘 지냈고 유집(遺集)이 있다.

하정범(河鼎範) : 자는 정경(鼎卿)이요, 호는 한시당(恨是堂)이다. 나면서부터 탁월한 재주가 있어 경서와 사적에 널리 통했다. 성품이 남에게 아첨하지 않고 차라리 쌓아둘지언정 남에게 팔지 않았고 스스로 눈감고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 조용순(曺龍珣) : 자는 내옥(乃玉)이니, 현감(縣監) 조용완(曺龍玩)의 아우다. 타고난 자질이 단정하고 기상과 도량이 엄격하고 장중했다. 글을 읽고 실천함에 선현으로써 스스로를 기약했고 효성과 우애가 더욱 돈독했다. 갑인년(철종 5년, 1854)에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하경현(河景賢) : 자는 유중(孺仲)이요, 호는 고재(顧齋)니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둘째 아들이다. 일찍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평상시에도 일찍이 옷을 끄르거나 두 발을 포개고 앉지 않았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 유학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에 종사했다. 일찍이 우산(愚山)에서 글을 읽으면서 우연히 전염병에 걸렸다. 입재(立齋)가 날마다 두 번씩 병을 묻고 보았는데 입재가 이르면 반드시 옷을 거두고 단정히 앉았다. 어느 날 또 와서 보니 공이 이르기를 “지금 마침 땀을 내고 있으니 바라건대 들어오지 마소서.”라고 했다. 드디어 문을 열고 보니 땀이 흘러 몸이 흠뻑 젖었는데도 갓과 옷을 바로 정돈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했다. 입재(立齋)가 감탄하여 이르기를 “산해(山海 : 남명 선생을 가리킴)의 경의(敬義)에 대한 가르침이 그대에게서 더욱 징험된다.”라고 했다. 유집(遺集)이 있다.

○ 정지탁(鄭志倬) : 자는 장언(章彦)이요, 호는 허재(虛齋)니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뜻과 기상이 매우 뛰어나고 문예가 일찍 성취되었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 유학하더니 사귀는 이가 모두 다 일대의 명사였다.

하진달(河鎭達) : 자는 영서(英瑞)요, 호는 역헌(櫟軒)이니 생원 하명(河洺)의 현손이다. 기상과 도량이 엄정(嚴正)하고 평소의 성품이 효우하며 경전에 힘을 쏟고 예서(禮書)를 읽었다. 후진을 가르치더니 일찍부터 선대의 남긴 글을 거두어 엮어서 『추모록(追慕錄)』 4책을 이루었다. 또 유집(遺集)이 있다.

하대현(河大賢) : 자는 신여(愼汝)요, 호는 사와(士窩)니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다섯째 아들이다. 함와의 성품이 엄격하고 준절하여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음에 물들어 덕성과 도량이 성인과 같았다. 점점 자라 힘써 문장을 배워서 다듬었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 읽기를 좋아했고 열심히 반복해 외우는 것을 자신의 말과 같이 했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공손히 뵈니 유치명이 깊이 장려하기를 더했다.

이정모(李廷摸) : 자는 찬경(贊卿)이요, 본관이 재령(載寧)이며 농아헌(聾啞軒) 이국정(李國禎)의 아들이다.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분명하여 바른 도리를 지켜 변치 않음이 확고했다. 일찍이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배웠으므로 학문에 근원이 있었고 응와(凝窩) 상서(尙書) 이원조(李源祚)가 집의 편액을 썼으니 주화(輳龢)라고 일렀다.

정산의(鄭山毅) : 자는 성옥(聖玉)이요, 호는 명일(明逸)이니 뜻과 절개가 맑고 고상했다. 주자(朱子)의 글을 읽기 좋아하고 일찍이 과거 보는 것을 사양하여 스스로 지키니 세상에서는 명옹(明翁)에 초손(肖孫)이라 일컬었다. 감사(監司)의 계달(啓達)로 벼슬에 등용되는 명령을 입었다.

김휘운(金輝運) : 자는 치화(穉和)요, 호는 아호(鵝湖)니 김문수(金文粹)의 손자다. 기량이 넓고 편안했고 도량이 연못처럼 깊었으며 행의가 도타웠고 넓은 학식에 담론하기를 좋아했다. 을축년(순조 4년, 1804)에 증광 진사가 된 뒤 강호에 은거하면서 벼슬에 나가기를 즐거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용봉면(龍奉面)의 「향약안(鄕約案)」을 증보 수정했다. 유고(遺稿)가 있어 간행되었다.

○ 한광렬(韓光烈) : 자는 경회(景晦)니 용사(龍沙) 한식(韓烒)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으며 대대로 집안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성품이 또 지극히 효성스러워 거상(居喪)에 여묘(廬墓)를 옛 제도대로 마쳤다.

○ 허연(許煉) : 자는 백여(百汝)요, 호는 임와(林窩)니 장와(丈窩) 허담(許橝)의 아들이다. 성품이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시끄럽고 화려한 데에는 생각을 끊었다. 감사(監司) 신석우(申錫祐)가 강의하는 모임을 본주(本州)에 설치하고 청해 훈장(訓長)을 삼았다. 평생토록 검약으로써 몸소 법도로 삼으니 향리에서도 법규로 삼았다. 유고(遺稿)가 있다.

○ 김낙운(金樂運) : 자는 숙간(叔幹)이요, 호는 용호(龍湖)니 김휘운(金輝運)의 아우다. 문학과 행의가 있었고 저술한 바로는 『인사시종록(人事始終錄)』 2권이 있다.

하계범(河啓範) : 자는 낙경(洛卿)이니 송파(松坡) 하원(河沅)의 후손이다. 품성이 너그럽고 온화했다. 총명하여 애써 기록하니 문예가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벼슬을 할 뜻이 없었고 항상 노년의 절개로써 스스로 가다듬어 만취(晩翠)를 호로 삼았다. 사우(士友)로써 어울려 학문을 강마하는 자들이 심히 많았으되 허락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몸소 군자로써 행했다. 일찍이 『속주지(續州誌)』를 편찬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 하탑(河䑽) : 자는 군응(君膺)이요, 호는 낭은(浪隱)이다. 천성이 온아하고 강학에만 몰두했다. 널리 캐고 광범위하게 더듬어서 『조야기문(朝野記聞)』 1부를 엮어 집에 갈무리했다.

최중집(崔重集) : 자는 공학(孔學)이요, 호는 고학암(古學菴)이며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병자년(순조 16년, 1816)에 생원에 합격했고 총명함이 뛰어났고 문장과 기개가 한때 우뚝하여 으뜸이었다. 저술한 책으로는 『천추집의(千秋集義)』와 『고학집(古學集)』 수십 권이 있었으나 간행할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 허박(許鑮) : 자는 성중(聲仲)이요, 호는 국천(菊泉)이니 부총관(副摠管) 허동립(許東笠)의 후손이다.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뜻을 두어 ‘독실하게 실천하는 군자’로 일컬어졌다. 문집(文集)이 있어 간행되었다.

이기일(李基一) : 자는 사영(士英)이요, 호는 묵인당(黙忍堂)이니 행와(杏窩) 이중영(李重榮)의 후손이다. 젊어서부터 출중하여 기개가 있었다. 옛 것을 사모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믿었고 사교(邪敎)를 배척하고 유학을 바로 세우는 것으로 이름이 일방에 드러났다. 승지(承旨) 성대진(成大璡)이 「당기(堂記)」를 지어 이를 기렸다.

정석윤(鄭碩贇) : 자는 치경(致敬)이요, 호는 용헌(容軒)이니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천품이 굳세고 기국과 도량이 훌륭했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뜻과 구체(口體를 갖추어 지극했다. 그리고 향당의 일에는 한결같이 공명정대한 것으로써 힘쓰니 사람들이 저절로 존경하고 감복했다.

○ 남경(南璟) : 자는 휘언(輝彦)이니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나가는 바가 일찍부터 바르고 문장이 아름다워 성망이 있었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이 글로써 힘쓰도록 이르기를 “원컨대 더욱 힘쓰고 노력하여 원대한 기약을 할 것이요, 중도에 이르러 폐하지 말게 하라. 이것이 곧 간절한 소망.”이라고 했다.

구석검(具錫儉) : 자는 치약(穉約)이요, 성재(省齋) 구반(具槃)의 후예다. 을묘년(정조 19년, 1795)에 진사에 합격했다. 성품이 엄격 단정했고 행동에 법도가 있었으며 일찍이 이해(利害)로써 그의 마음에 누가 되지 않게 했다.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감히 옳지 않은 일로써 간여하지 못했다. 향리의 자제와 더불어 예속(禮俗) 십수 조(條)를 정하여 관혼상장(冠婚喪葬) 때 습독(習讀)하고 마시고 활 쏘는 데에도 모두 일정한 예를 가졌으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익혀 풍속이 되었다고 이른다.

○ 신명구(申命耈) : 자는 국수(國叟)요, 호는 남계(南溪)며 본관이 평산(平山)이니 통제사(統制使) 신유(申劉)의 아들이다. 생원과 진사의 두 가지 시험에 합격하고 일찍부터 경치 좋은 곳을 따라 놀아서 나가는 것이 바람직했다. 문장과 풍채가 한 세대를 경동시켰으나 낙척(落拓)하여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았다. 가족을 이끌고 방장산(方丈山)에 숨어서 붕우와 시주(詩酒)로써 물외(物外)의 즐거움을 삼았다.

○ 최상우(崔祥羽) : 자는 경휘(景輝)요, 호는 치암(恥菴)이니 교관(敎官) 최규환(崔奎煥)의 아들이다. 젊어서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를 뵙고 학문하는 커다란 방향을 얻어들었다. 여기에서 과거 보는 것을 포기하고 힘써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여러 글들을 읽어 탐색하고 체득했다. 고상한 성품으로 고요히 물러나서 언제나 세상을 근심하는 뜻을 가졌다. 「편의육책(便宜六策)』을 저술했으니 모두 밝은 재주가 나라 다스리는 중요한 계책이었다. 『기망(記罔)』 및 유집(遺集)이 있다.

○ 구석채(具錫采) : 자는 문첨(文瞻)이요, 호는 추봉(秋峰)이니 성재(省齋) 구반(具槃)의 후예다. 타고난 자질과 품성이 매우 고상했다. 기개와 도량이 높고 바르며 어진 일을 해결하는데 능했고 빈궁한 자를 돌보는 장점이 있었다. 고을과 이웃이 그의 인덕과 의리에 감복했고 사우(士友)들이 ‘외경하는 벗’이라고 일컬었다.

○ 허영(許郢) : 자는 초객(楚客)이요, 호는 문보(文甫)다. 허언(許鄢)의 자는 초삼(楚三)이니 귤원(橘園) 허존(許存)의 아들이다. 형제가 함께 문장과 행의가 있었다. 한편으로 의학(醫學)에도 능통하여 당시 세상에서 ‘창힐(蒼頡)과 편작(編鵲)’라 일컬었다.

○ 이헌병(李憲秉) : 자는 치문(致文)이니, 현감(縣監) 이한익(李翰翼)의 손자다. 품성이 높고 꼿꼿하며 재주가 영특했다. 어린 시절부터 장난을 해도 평범치가 않더니 젊은 나이에는 주자서(朱子書) 읽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집의 서쪽 송월애(松月崖)에 소나무가 우뚝 서 있는 것을 사랑하더니 이 때문에 송애(松崖)를 호로 삼았다.

하열(河悅) : 자는 습여(習汝)요, 호는 신묵재(愼黙齋)니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의 후손이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배우더니 행의(行誼)가 독실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다.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니 향당이 잘한다고 칭찬했다.

○ 이지(李祉) : 자는 사수(士綏)요, 봉사(奉事) 이홍훈(李弘勛)의 손자다. 어려서는 효성으로 이름이 나더니 자라서는 학문에 뜻을 두어 옛 책과 역사에 널리 통했고 몸을 돌이켜 몸소 행했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암행어사로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듣고 불러서 보고는 크게 기이함을 찬탄했고 돌아가서는 조정에 알려서 드디어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를 삼게 했다.

○ 구석주(具錫疇) : 자는 치성(致誠)이니 진사 구석검(具錫儉)의 아우다. 일찍부터 과거 보는 공부를 폐하고 한결같이 마음을 붙잡는 것으로써 힘썼다. 일찍이 덕원동주(德院洞主)가 되어 여러 생도들과 더불어 「원규(院規)」를 수정했다.

하우현(河愚顯) : 자는 무원(武源)이요, 호는 청계(淸溪)니 하한주(河漢周)의 현손이다. 젊은 나이에 문장과 필법이 함께 건전했다. 몸을 떨쳐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여러 번 향시에 달려가 합격했으므로 사우(士友)들에게 늘 앞을 다투어 나가는 것을 보였다. 뒤에 이를 뉘우쳐서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선비의 숭상할 일이겠는가?”라 하고 이 뒤로부터는 문을 닫고 과거 보기를 일삼지 않았다. 성리학(性理學)에만 마음을 다하면서 후생들을 가르쳐 나아가게 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다.

○ 박지응(朴旨鷹) : 자는 운로(雲路)니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6세손이다. 계묘년(정조 7년, 1783)에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가 되었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과 우애로 어버이의 뜻에 순종하며 섬겼다. 종족과 친척에게는 돈목(敦睦)으로 처신했으며 문학도 풍부하고 넉넉했다.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사우(士友)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정봉신(鄭鳳臣) : 자는 중의(仲儀)요, 호는 동오(桐塢)니 용강(龍岡) 정문익(鄭文益)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깨끗했으며 위의와 용모가 단정하면서도 장중했다. 남을 대접할 때는 반드시 가득한 정성으로 대했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일정한 법식을 베풀지 않았다. 더욱이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니 고을과 이웃에 모범이 되었다.

○ 이요묵(李堯黙) : 자는 극중(克中)이니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예다. 재주와 슬기가 있었고 학문에도 능하여 『심성이기도설(心性理氣圖說)』을 저술했다.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사우(士友)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황암집(篁巖集)』 2권이 있어 세상에 간행되었다.

○ 이정모(李正模) : 자는 낙휴(洛休)요, 호는 오양(梧陽)이니 성헌(省軒) 이국병(李國昞)의 아들이다. 아우 몽광자(夢狂子) 이수모(李秀模)와 더불어 소동산방(小洞山房)에서 글을 읽더니 서로 서로 권장하며 매진했다. 시로써 뜻을 펴고 때를 따라 학문에 매진할 뜻을 가지더니 형은 총명하면서 애써 기록했고 아우는 남보다 월등하여 큰 뜻이 있었다.

이현만(李賢萬) : 자는 낙천(樂天)이요, 호는 송재(松齋)니 정랑(正郞) 이세구(李世垢)의 후예다.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고 덕망과 도량이 너그럽고 넓었다. 집에 있으면서 큰 도략이 있었고 남을 사랑하여 내가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니 사우(士友)들이 많이 추앙하고 허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사람이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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