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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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필(崔琦弼) :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무과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더니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에 들어왔다.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가 임금이 피난한 곳으로 계문을 올리니 본주의 판관(判官)을 삼았다. 성이 함락되어 순절했는데 계해년(영조 19년, 1743)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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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경휘(河鏡輝) : 자는 공곽(公廓)이요, 호는 매헌(梅軒)이며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기축년(선조 22년, 1589)에 사마시에 올랐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어기지 않았다. 임진란 때 환성공(喚醒公)이 상주성(尙州城)으로 달려가는데 겨우 북문에 이르러 적병이 갑자기 닥쳤다. “여기가 나의 죽을 곳이다. 너는 빨리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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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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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역(梁嶧) : 호는 운곡(雲谷)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셋째 아들이다. 기유년(세종 11년, 1429)에 사마시에 합격해 연일진병마첨절제사(延日鎭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한데다가 뜻이 멀고 행실이 높아서 안과 밖에서 추중(推重)되었다. 단성(丹城)으로부터 진주 운곡(雲谷)에 옮겨와서 살았다. ○ 하공효(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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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현(李胤玄) : 자는 시로(時老)요,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니 매월당(梅月堂) 이하생(李賀生)의 증손이다. 18세 때에 부친을 모시고 산간 마을에서 천연두를 피하더니 갑자기 어느 날에 도적이 들어와 부친을 해치려고 했다. 윤현이 몸으로 날개처럼 덮어서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몸에 부상을 입고 이어 병을 얻어 의원을 찾아 약을 구하여 8년을 견디다 마침내 천수를 마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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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金憲昌)의 반란으로 인한 진주 지역 백성의 고통을 예고한 징조에 관한 설화. 진주시에서 1983년에 발행한 『내 고장의 전설』에 수록되었고, 이어서 1994년 진주문화원에서 발행한 『진주문화』16집에 수록되었다. 구술과 채록자는 알 수 없고, 사건을 나열하여 설명하는 방식의 설화 형태를 보인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14년(822)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부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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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 있는 서원. 경상도 지역에 건립된 193개의 서원 중 경상남도 지역은 19개 군에 44개 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주지역에 해당되는 서원은 7개로 경상남도에서 가장 많다. 재실의 수에 있어서도 진주지역에 약 500여개가 분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현재도 문중에 따라 새로 건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재(齋)’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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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시조 지백호(智伯虎)는 신라 초기 6부 가운데 진지촌(珍支村)의 촌장이다. 지백호는 신라 건국좌명공신(建國佐命功臣)이 되었고, 32년(유리왕 9)에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으며, 정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지백호의 42대 손인 득관조 정진후(鄭珍厚)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平章事)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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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의 공북문 성벽에 새겨진 글귀. 공북문 성벽 석각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의 북쪽문인 공북문(拱北門) 서쪽 성기에 새겨져 있는 글씨로 가로 80㎝, 세로 25㎝ 크기의 석재에 ‘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라고 씌어져 있다. 이는 진주성의 수축을 담당하였던 구역의 표시를 나타낸다. 조선시대의 축성 기록을 살펴보면,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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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경주. 자는 집중(執中).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진주성전투 때 손자 김덕연(金德連)과 더불어 창의종군하였는데, ‘왕사에 죽지 못하면 어찌 신하된 도리라 하겠느냐’고 하면서 전쟁에 임하였다. 결국 전투 중에 김덕연과 함께 순절하였다. 후에 숭질(崇秩)을 증여받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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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의 친일파. 1887년 8월 5일 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 독산리에서 태어나 대부호인 정부인 김씨의 손자로 입양,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380만원에 달하는 자산을 소유한 대지주로서 서울 이부자[李鳳來], 경주 최부자[崔浚]와 더불어 진주 김부자[김기태]로 일컬어지는 남한의 3대 갑부 중 한사람이었다. 진양군 문산면 삼곡리에서 사업을 하다가 지병 악화로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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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김개(金介)의 후손이다. 1728년(영조 4) 안의(安義)의 정희량이 무신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전사했다. 1826년(순조 26)에 증직을 내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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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출신의 화가. 내고 박생광은 말년 팔순의 나이에 채색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진주 출신의 대표적인 현대 한국 화가이다. 박생광은 1904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보통학교와 진주농업학교를 나왔다. 1920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교토[京都]에서 다치가와미술학원[입천산운미술학원(立川酸雲美術學院)]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923년에는 교토시립회화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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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장. 경상남도 양산(梁山) 출생으로, 원래 의원으로서 고향에서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양위(讓位)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진 직후인 1907년 12월 임진강·한탄강 유역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장 허위(許蔿) 휘하에 들어갔다. 1907년 12월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받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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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예빈경을 지낸 왕유(王惟)의 아들이다.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승진하여 감찰어사가 되어 원칙대로 법을 집행하여 칭송을 받았다. 뒤에 진주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어 경주로 전임하게 되었으나 진주 백성들의 청으로 1년을 더 유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였을 뿐 아니라 절도가 있었으므로 모든 일을 백성에게 이롭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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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주부(主簿) 이오(李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이자침(李自琛)이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 이난(李鸞)이며,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아들은 우의정 이완(李浣)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86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가 남병사 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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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조선 중기 무신 이수일(李守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이수일[1554~1632]의 본관은 경주, 호는 은암(隱庵), 시호는 충무이다.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왜군 격퇴에 공을 세우고 1603년 진주성을 증축하는 등 1605년 길주목사로 갈 때까지 진주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수일이 진주병사 재임 중 병사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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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곤양.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진주정씨에서 분적한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중시조이다. 좌찬성에 추증된 정호(鄭浩)의 아들이다. 초명은 무수(茂壽)이나 1586년(선조 19) 무과 급제 후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62년(명종 17) 출생하여 1622년(광해군 14) 60세로 별세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후 1590년 경상우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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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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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위치한 서원. 1919년 지방의 유림들이 중건할 당시 경주에 있는 서악서원의 이름을 본 떠 남악서원이라고 명명했다. 남악서원(南岳書院)이 처음 지어진 것은 680년경의 일이라고 하며, 1922년 지방 유림들이 중건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전략상 요지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신령을 만나 삼국통일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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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창촌리 구리마을에서 전승되는 진주 부자와 의령 부자가 경주 최부자 집에 놀러갔다가 망신을 당했다는 설화. 진주, 의령 부자와 경주 최부자 살림 설화는 ‘경주 최부자’ 이야기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진 설화로 전설적 요소를 가진 민담에 해당한다. 설화에서는 진주나 의령 등 실제 지명을 언급하고, 널리 알려진 최부자라는 인물을 지목하고 있지만 특정 시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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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진주에 있었던 기생조합. 조선시대의 기생제도 하에서 기생은 관기(官妓)로서 궁중의 약방이나 상의원(尙衣院 : 왕의 의복이나 궁중의 일용품을 맡던 관부) 등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평소에는 약을 달이거나 바느질을 하다가 연회가 있을 때는 불려가 노래나 춤을 추었다. 국권을 상실한 후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서울의 기생들이 처음으로 조합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이 한성권번(漢城券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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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남동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남동 산 456번지에 있다. 진주시의 동쪽에 있는 진주향교의 맞은편에 남북 두개의 봉우리를 가진 독립구릉이 위치하고 있다. 이 중 남봉은 해발 64.7m, 북봉은 해발 92.3m이며, 이 봉우리를 일반적으로 수정봉·옥봉으로 부르고 있다. 옥봉고분군은 이 구릉의 정상부인 두 봉우리 사이에 7기의 봉토분이 군을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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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가 있는 진주의 도시적 구역. 읍치(邑治)란 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治所)가 있는 도시적 구역으로, 흔히‘읍(邑)’혹은‘읍내(邑內)’라고 부르는 곳이다. 『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양지(晋陽誌)』 등에 기록된 건치연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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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부터 가야 등 고대시대까지의 무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의 죽음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인 존재로서 죽는 것이므로, 장송의례(葬送儀禮)는 개인적·가족적 차원을 넘어서 한 집단 전체 차원의 사회적인 제도가 된다. 따라서 죽음과 이에 부수된 의례의 결과로 생겨난 무덤에는 당연히 사회적 제도인 의례행위(儀禮行爲)가 반영되어 있다. 특히 고인돌처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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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및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탑은 산스크리트어(범어)로 스투파(stupa), 또는 팔리어로 투파(thupa)라고 하는데 이를 한역으로 번역하여 탑파라고도 한다. 탑의 기원은 인도에서부터 시작되며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인도의 스투파는 산치대탑에서 알 수 있듯이 복발형의 스투파로, 이후 중국에 전해지면서 여러 층을 겹쳐 쌓아 올라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