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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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여신(成汝信) : 자는 공실(公實)이요, 호는 부사(浮査)며, 우윤(右尹) 성두년(成斗年)의 아들이니 가정(嘉靖) 병오년(명종 1년, 1546)에 나서 만력(萬曆) 기유년(광해군 1년, 1609)에 생원과 진사의 두 시험에 합격했다. 일찍이 남명(南冥)과 구암(龜巖)의 두 문하에서 유학하여 경의(敬義)의 지결(旨訣)을 얻어듣고 종신토록 마음에 깊이 새겼다. 서책은 읽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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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필(崔琦弼) :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무과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더니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에 들어왔다.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가 임금이 피난한 곳으로 계문을 올리니 본주의 판관(判官)을 삼았다. 성이 함락되어 순절했는데 계해년(영조 19년, 1743)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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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경휘(河鏡輝) : 자는 공곽(公廓)이요, 호는 매헌(梅軒)이며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기축년(선조 22년, 1589)에 사마시에 올랐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어기지 않았다. 임진란 때 환성공(喚醒公)이 상주성(尙州城)으로 달려가는데 겨우 북문에 이르러 적병이 갑자기 닥쳤다. “여기가 나의 죽을 곳이다. 너는 빨리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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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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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경인(孫景仁) : 자는 사원(士元)이요,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문과에 올라 습독(習讀)을 지냈다. ○ 강희(姜僖) : 문과에 올라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 손형(孫炯) : 습독(習讀)을 지냈고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 하준해(河遵海) : 찰방(察訪)을 지냈다. ○ 손경례(孫景禮) : 자는 사형(士亨)이요,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직장(直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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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변(崔琦抃) : 현감(縣監)을 지냈으니 본관이 전주(全州)이요, 인천(仁川)에 살았다. ○ 최기준(崔琦準) : 부사(府使)를 지냈으니 본관이 전주(全州)이요, 인천(仁川)에 살았다. ○ 하응구(河應龜) : 부장(部將)을 지냈고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훈에 기록되었다. ○ 하천오(河天鰲) : 수문장(守門將)을 지냈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 황계량(黃桂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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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윤민(河潤民) : 진사다. ○ 손석윤(孫錫胤) : 자는 여선(汝善)이요, 계유년(인조 11년, 1633)에 진사에 올랐으니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 손지순(孫之順) : 자는 덕이(德而)요, 갑술년(인조 12년, 1634)에 진사에 올랐고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 조진(曺𣉮) : 갑술년(인조 12년, 1634)에 생원에 올랐고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 성호정(成好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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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철(鄭鍾哲) : 본관이 초계(草溪)이니 을유년(1945)에 와서 무자년(1948)에 갔다 ○ 이상룡(李相龍) : 본관이 전의(全義)이니 무자년(1948)에 와서 기축년(1949)에 갔다 ○ 최태현(崔泰鉉) : 본관이 전주(全州)이니 기축년(1949)에 와서 경인년(1950)에 갔다 ○ 이박규(李璞珪) : 본관이 한산(韓山)이니 경인년(1950)에 와서 신묘년(1951)에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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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운표(朴運杓) :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기축년(1949)에 와서 신묘년(1951)에 갔다. ○ 노재륜(盧在崙) : 본관이 풍천(豊川)이니 신묘년(1951)에 와서 같은 해에 갔다. ○ 조희두(曺喜斗) :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신묘년(1951)에 와서 계사년(1953)에 갔다. ○ 김한기(金漢基) : 본관이 김해(金海)이니 계사년(1953)에 와서 같은 해에 갔다. ○ 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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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역(梁嶧) : 호는 운곡(雲谷)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셋째 아들이다. 기유년(세종 11년, 1429)에 사마시에 합격해 연일진병마첨절제사(延日鎭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한데다가 뜻이 멀고 행실이 높아서 안과 밖에서 추중(推重)되었다. 단성(丹城)으로부터 진주 운곡(雲谷)에 옮겨와서 살았다. ○ 하공효(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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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원(閔愿) : 자는 흥중(興仲)이요, 호는 석계(石溪)이며 본관이 여흥(驪興)이니 판서(判書) 민심언(閔審言)의 후손이다. 문과에 올라 직장(直長)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면서 행실은 방정했으며 목표하는 것은 높으면서 뜻은 넓었다. 충주(忠州) 음성(陰城)으로부터 옮겨와 진주의 옥봉(玉峰)에 살았다. ○ 최원민(崔元敏) : 호는 죽계(竹溪)요, 본관이 삭녕(朔寧)이니 사간(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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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현(李胤玄) : 자는 시로(時老)요,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니 매월당(梅月堂) 이하생(李賀生)의 증손이다. 18세 때에 부친을 모시고 산간 마을에서 천연두를 피하더니 갑자기 어느 날에 도적이 들어와 부친을 해치려고 했다. 윤현이 몸으로 날개처럼 덮어서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몸에 부상을 입고 이어 병을 얻어 의원을 찾아 약을 구하여 8년을 견디다 마침내 천수를 마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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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최운개(崔云凱)의 딸이요, 승사랑(承仕郞) 진양(晉陽)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임진년에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항상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써 죽음을 결단할 것”이라고 했다. 해를 넘겨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과연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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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진(河溍) : 자는 진백(晉伯)이요 호는 태계(台溪)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태촌(台村) 하공효(河公孝)의 아들이다. 갑자년(인조 2년, 1624)에 진사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여러 번 맑은 요직을 거쳐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러 많은 녹봉에 뽑혔다. 병자호란 때 향병을 모아 달려가다가 상주(尙州)에 이르러 부친상을 만나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사간원(司諫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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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민요의 하나로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 유행·전승되는 유흥요. 노랫가락은 창부타령 등과 함께 잡가에 속한다. 이들 노래는 처음에 전문적인 소리꾼들에 의해 불리었다가 점차 기생들에게 전파되어 유행되었던 노래이다. 노래의 주요 사설은 시조로 불리던 것이다. 이번에 채록된 노랫가락은 다양하게 불리던 사설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 노랫가락은 창부타령과 함께 잘 알려진 경기 지방의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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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여진(汝眞), 호는 후산(後山). 진사에 합격하고 행의(行義)가 곧아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후산정(後山亭)을 세웠으며 유집이 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사마조(司馬條)」에 이름이 올랐으며,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관련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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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미중(美仲), 호는 소은(素隱). 조선 중기의 무신인 강덕룡(姜德龍)의 6대손이고, 아버지는 매은(梅隱) 강흥운(姜興運)이다. 어머니는 인재(忍齋) 하윤관(河潤寬)의 딸이다. 1734년 진주시 대곡면 설매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남달라 6~7세에 문리를 알았으며 효성 또한 뛰어났다. 한말 선비 이도묵은 강식준의 학문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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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자산가이자 친일파. 본관은 진양. 1885년 출생하여 경상남도 진주군 가차례면 강주동에서 성장하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유년시절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보냈다. 1913년 당시 재산이 40만원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자산가였으며, 일제의 식민정책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협력한 친일인사이다. 학력에 관한 사항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관리로 진출한 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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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백부(伯父), 호는 통정(通亭). 할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강군보(姜君寶)이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강시(姜蓍)의 아들이다. 강종덕(姜宗德), 강우덕(姜友德), 강석덕(姜碩德), 강순덕(姜順德)을 아들로 두었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부사·첨서사사(簽書司事)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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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섬유를 생산하거나, 실크 등의 섬유를 원료로 쓰는 가공품을 생산하는 산업. 진주지역의 견직공업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은 없다. 전통적인 기법의 견직생산에 대한 기록은 구한말에 진주 인근의 산청지역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근대식 견직공장이 설립된 것은 1910년대이다. 1920년대에 추겸호가 동양염직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30년대에는 일본인 오다나까가 오다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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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학자 하복호의 문집. 하복호(河復浩)[1726~1805]의 자(字)는 정보(亭甫), 호는 단사(丹砂), 또는 방아와(訪我窩)이다. 아버지 하응명(河應命)과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양(晋陽)이다. 어린 시절부터 조숙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형제, 친척들과의 우애도 깊었다. 벼슬자리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승지(承旨) 이동화(李東嘩),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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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성 동쪽지역으로, 옛 행정구역 또는 행정지명 중 하나. 조선 전기에는 자연촌락의 성장과 중앙집권화의 진행에 의해 중앙권력이 군현의 하부단위인 촌락에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면리제라는 촌락운영체계가 형성되었다. 경국대전에 5호(戶)를 묶어 1통(統)으로, 5통을 묶어 1리(里)로 한다고 규정하고, 몇 개의 리를 묶어 면(面)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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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무(五武)마을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 석맥(石脈) 풍수가 삽입되어 있다. 석맥 풍수는 바위와 관련하여 길한 것과 흉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이 이야기에서는 산의 모습과 산에 놓인 바위가 자라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머리를 마을 쪽으로 하고 있어 마을에 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흉한 바위로 설명되었다. 오무마을의 내력을 전하는 이야기로 수 백 년 전의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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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승되는 도리깨로 보리타작하면서 부르는 민요. 보리타작 노래는 보리타작의 기능적 성격에 잘 부합하는 노래이다.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하는 일은 행동을 통일하여 빠르게 진행되는데, 노래도 그에 맞추어 사설을 짧게 메기면 짧은 여음으로 일정하게 받는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행동 통일이 요구되는 일의 성격상 짧은 사설과 빠른 변화를 요구한다. 이에 따라 이 노래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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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목 진주성의 북쪽지역으로 옛 행정구역 또는 행정지명 중 하나. 조선 전기에는 자연촌락의 성장과 중앙집권화의 진행에 의해 중앙권력이 군현의 하부단위인 촌락에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면리제라는 촌락운영체계가 형성되었다. 경국대전에 5호(戶)를 묶어 1통(統)으로, 5통을 묶어 1리(里)로 한다고 규정하고, 몇 개의 리를 묶어 면(面)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읍치를 중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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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있는 강민첨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산앙사(山仰祠)에 봉안된 강민첨(姜民瞻)[?~1021]은 진주(晋州)가 본관으로 목종 때 문과에 급제, 1012년(현종 3)에 안찰사(按察使)로서 영일(迎日) 등지에 쳐들어온 동여진(東女眞)을 격퇴하였다. 1018년 거란[契丹]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姜邯贊)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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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의 행정구역 중 하나. 조선시대 진주성 서쪽지역으로, 현재 평거동, 대평면, 수곡면 지역과 하동군 화개면, 악양면, 적량면, 옥종면, 청암면, 횡천면 일부와 사천시 축동면, 산청군 시천면, 삼장면, 단성면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고려 태조 23년(940) 3월에 강주(康州)를 진주(晋州)로 개칭하면서 처음으로 지금의 진주라는 지명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성종 2년(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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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 신문지라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정기적으로 뉴스나 정보를 제공하는 문화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은 1883년 10월 31일 창간된 『한성순보』이다. 이 신문은 중앙정부기관에서 발행한 신문으로 국민들에게 외국의 사정과 개화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반면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은 1909년 10월 15일에 진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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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하진(河溍)[1597~1658]이 받은 교지첩. 하진의 호는 태계(台溪)이고, 본관은 진양이다. 『양조은함첩』은 1633년(인조 11)부터 1657년(효종 8)까지 25년에 걸쳐 받은 교지첩으로,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진주하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다. 총 45매이며, 표지에 ‘양조은함첩(兩朝恩銜帖)’라 씌어 있다. 당시의 인사관리제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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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진주시의 역사. 진주시는 경상남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도농 복합형 통합시로, 동쪽은 함안군,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고성군·사천시, 북쪽은 산청군·의령군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712.84㎢, 인구는 약 33만명이며, 1읍, 21동, 15개 면을 관할하고 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육도시이자 문화도시로, 현재는 첨단산업단지가 입지한 혁신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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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를 개조(開祖)로 하는 전통시대의 대표적인 사상. 유교의 교리는 곧 인의(仁義)와 도(道)와 수기(修己), 치인(治人)에 귀결된다.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오경(五經)과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四書)는 유교의 중요한 경전이다. 공자 이후 유교가 천하에 행하여져 여러 학파와 함께 일어났으나 증자(曾子), 자사(子思)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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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석초(錫初)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그의 손자 정열(鄭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다가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다. 정열도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을 쏜살같이 떨치며 돌전(突戰)하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광윤은 판관(判官)을 증직(贈職), 부장(部將)을 추증받았으며 선무원종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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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양. 자는 성약(聖若).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였고 어버이를 섬김에 그 성효(誠孝)를 다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정규로는 나이 겨우 17세에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잠시 회생시켰다. 겨우 5일이 지나고서 아버지가 또 갑자기 병들어 양우(兩憂: 부상과 모상)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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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병마절도사 정기택(鄭騏澤)의 선정을 기리는 비. 병마절도사 정기택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1888년(고종 25)에 고을 사람들이 세웠다. 1973년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 비석군(碑石群)으로 옮겨졌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94㎝, 폭 32㎝, 두께 2㎝의 철제(鐵製) 비신(碑身)과 높이 33㎝, 폭 44㎝, 두께 2㎝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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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사상(士相), 호는 반곡(盤谷). 효자 정보(鄭堡)의 장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정내의(鄭乃毅)는 효성이 하늘에서 타고나서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기며 부모의 뜻에 순응하여 어김이 없었다. 이미 자라서는 집안에서 배운 대로 몸소 행실을 삼가고 학문에 힘써 문학이 일찍부터 이루어져 여러 번 향해(鄕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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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국장(國章), 호는 해사(海史). 허재(虛齋) 정지탁(鄭志倬)의 후손이다. 용모가 크고 기우가 헌양하여 장자의 도장이 있었다. 일찍이 월촌 하달홍(河達弘),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있었으며, 족형(族兄) 운파(雲坡) 정한균(鄭漢均)과 더불어 수학하였다. 유집으로 『해사선생문집(海史先生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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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 자는 여신(汝信). 효자 정경량(鄭慶良)의 손자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다.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으며, 선무원종 2등의 공훈을 기록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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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장기(長鬐). 자는 중상(仲祥). 일찍부터 문명이 있었으나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남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정성으로써 하였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공평하게 하였다. 강심(姜深), 신점(申霑)과 더불어 요역(徭役)시행을 시정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며 진양(晋陽)의 삼로(三老)라고 일렀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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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자유(子), 호는 애일당(愛日堂). 할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문정공(文定公) 정이오(鄭以吾)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세종 4)년부터 1438년까지 사간원헌납, 함길도경차관, 승정원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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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복여(福如), 호는 운파(雲坡).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천성이 영민(穎敏)하고 재예(才藝)가 남들보다 출중하였다. 김단계(金端磎), 박만성(朴晩醒)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였다. 고려 말 문신이었던 정온이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우곡정(隅谷亭)[경상남도 진주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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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신화(愼和), 호는 모헌(慕軒). 은렬공(殷烈公) 정신령(鄭臣嶺)의 후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성품이 본래부터 효우(孝友)스러웠고 심학(心學)에 전념하였다. 이광악(李光岳)의 문하에 있으면서 정온(鄭蘊), 허목(許穆), 하홍도(河弘度) 제현으로 더불어 도의를 서로 연마하였다. 청계사((淸溪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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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晋陽). 영조 대 무신란(戊申亂)에서의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기록되고 가선동지중추부사(嘉善同知中樞府事)를 추증 받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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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정경량(鄭慶良)이다. 1592년에 아우 정명극(鄭明極)과 함께 의병을 불러 일으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달려가니 아버지 정경량(鄭慶良)이 훈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나는 염려하지 말고 난을 이기어 공을 세워 너 아비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아우 정명극은 차원(車院)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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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 출신으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인. 본관은 진양(晋陽). 1822년 10월 13일 아버지 정서곤과 어머니 울산 김씨(金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안토니오이다. 1822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정찬문은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닌 인물로 전해진다. 정찬문은 천주교 신자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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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명지(明之), 호는 정암(整菴)·창재(暢齋). 아버지는 증호조판서 정설(鄭舌)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晋州姜氏)로 산원(散員) 강우(姜祐)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41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세종대에서 세조대에 걸쳐 지승문원사,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공조·호조·예조의 참의, 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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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낙붕(樂朋), 호는 운곡(雲谷).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예이다. 머리가 매우 좋고 총명하여 일찍이 이름이 있었다. 또한 학문에도 조예가 있었다. 문장을 지을 때의 기교가 매우 뛰어나 사람들이 감탄하였으며, 필력(筆力)이 좋아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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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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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행위.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갖는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에서 기인한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고 믿는 절대자에게 의탁하여 현세에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추구하고, 사후세계에서는 구원을 희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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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쇄록』에 수록되어 있는 경상남도 진주시에 관련된 이야기. 『소문쇄록』에는 ‘진양은 옛 제왕의 도읍이라 한다.’는 『파한집』의 기록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한집』에 ‘진양은 옛 제왕의 도읍이라 한다.’ 이인로가 어디에 근거하여 말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한시대에 진주에 세운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단지 얼마 안 되는 고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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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를 마주 세워 싸우게 하고 이를 즐기는, 진주지역에 전래된 전통 민속놀이. 진주 소싸움에 관하여는 여러 곳에 그 기록이 전해지고 사진자료들도 많이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2권 〈소싸움〉항목에서는 “경상남도 지방에서 주로 성행하였으며……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남강의 모랫벌에서 소싸움을 해왔으나…… ”라고 적고 있다. 같은 책 제21권의 〈진주시〉 항목의 민속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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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가 진주의 풍수를 읽어 지맥을 끊었다는 풍수 설화. 풍수 설화는 풍수설 또는 풍수 관념을 바탕으로 삶의 한 면을 이야기하는 설화이다. 풍수 설화는 민간 신앙적 차원의 변용된 의식을 드러내는 바, ‘명당, 절맥, 방진, 왕도 예언, 명풍수’ 이야기를 비롯하여 가짜 풍수가 나타나는 사기담까지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군이다. 조선을 새로 건국하고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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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강씨(姜氏)는 하씨(河氏)·정씨(鄭氏)씨와 더불어 진주·진양의 3대 성으로, 진주 지방의 토성(土姓)이다.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 100여 본이 전하나, 확실한 것은 진주·금천·안동·배천·해미·동복·광주 등 7본이다. 모두 진주의 지파로 오늘날 모든 강씨가 진주의 유일본을 내세우고 있어, 진주강씨의 도시조(都始祖) 강이식(姜以式)이 모든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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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진주 행정구역 명칭. 진주는 고려 초기 청주(菁州)라 하였다가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83년(성종 2) 2월 주제(州制)를 목(牧)으로 개혁하면서 진주는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성종 14년(995) 9월 처음으로 전국에 10도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산남도(山南道)가 설치되어 10주 37현을 통할했다. 현종 9년(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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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대표하는 명승지. 진주성(晋州城)은 남성동과 본성동에 위치하며, 촉석성(矗石城) 혹은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린다. 조선시대 진주성의 내성과 그 주변 지역 176,804㎡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촉석루(矗石樓)는 남강 가 돌벼랑 위에 세워진 우뚝한 누각으로, 남강 가 뾰족뾰족한 돌의 모양을 따서‘촉석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진주성의 남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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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풍류를 지닌 진주 기생들의 생활 모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문화상. 진주의 논개(論介), 평양의 계월향(桂月香)으로 인해 ‘남 진주, 북 평양’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張志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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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와 성씨들이 대성을 이루어 모여 사는 마을. 진주는 신라시대 구주의 하나로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항상 영남의 계수관으로 그 위치를 지켜왔으며 토성세력도 강성하였다. 진주의 성씨는 정(鄭), 하(河), 강(姜), 류(柳), 소(蘇), 임(任), 강(康), 김(金), 박(朴)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진주목(晉州牧) 조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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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진주지구 내 북한군을 격퇴시킨 전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1950년 7월 29일 미 제25사단 ‘칸’ 기동부대가 진주지구에 쳐들어온 북한군 제6사단과 제9사단 병력을 격퇴시킨 전승을 기리기 위해 1958년(단기 4291년) 7월 10일 육군 제1206 건설공병단에서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진주지구 전승비에 기록된 비문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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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진주성 촉석루, 남강 의암, 뒤벼리, 새벼리, 망진산 봉수대, 비봉산의 봄, 월아산 해돋이, 진양호 노을 등 여덟 곳의 비경. 진주는 예로부터 산과 들과 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고을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형승조(形勝條)」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인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지은『파한집(破閑潗)』의 내용을 인용하여 “진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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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경주(景周).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複)의 후예로서 장령(掌令) 하계부(河季溥)의 손자이다. 일찍이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수련하였는데, 여러 가지 문장 중에서 특히 시(詩)에 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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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공극(公極), 호는 동야(東野). 각재(覺齋) 하항(河沆)의 아들이다. 가풍을 이어받아 언행이 깨끗하고 단정하며 예학(禮學)이 깊었다고 한다. 사조(思潮) 오장(吳長), 유덕룡(柳德龍)과 더불어 벗으로 지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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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유중(孺仲), 호는 고재(顧齋).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둘째 아들이다. 일찍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평상시에도 옷을 끄르고 있거나 책상다리를 하고 편히 있지 않았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성리의 학문에 종사하더니 우산(愚山)에서 글을 읽으면서 역병에 걸렸다. 정종로가 날마다 두 번씩 병을 묻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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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추약(追若), 호는 옥봉(玉峯). 송강(松岡) 하항(河恒)의 후손이다. 부인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보이는 박인호(朴寅浩)의 딸 밀양박씨이다. 평생 독서하기를 즐겼다.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과 우애가 돈독하여 함께 만수당(晩修堂)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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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호는 태촌(台村). 대사간(大司諫)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성품이 강건하고 청고하여 스스로 수양에 힘썼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문을 사숙하였으며 임진왜란 뒤에 향교를 증수하고 덕천서원을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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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청언(淸彦)이고, 호는 국헌(菊軒)이다. 학식이 매우 넓고 뛰어나며 정의감이 투철하고 절개가 곧았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고, 또한 집안을 다스릴 때 항상 바른 가르침으로 다스리려고 노력하였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도량(度量)이 넓고 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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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혼원(混源), 호는 구이당(具邇堂). 진사 하협(河悏)의 아들이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순수하며, 맑고 곧고 바른 주장을 펼치고, 그 주장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독실하였다고 한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찰방(察訪) 권극경(權克經), 상사(上舍) 안시진(安時進)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을 나누었다. 하달영이 세상을 떠나자 겸재가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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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백원(伯源). 죽헌(竹軒) 하성(河惺)의 아들이며, 영모정(永慕亭) 하진보(河晋寶)의 손자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고 한다.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발랐으며 학업이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약관(弱冠, 스무 살)에 동계(東溪) 권도(權濤)의 신주(神主)를 썼는데 원근의 사림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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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관부(寬夫), 호는 괴와(愧窩).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증손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행실이 깨끗하고 발랐다고 한다. 학문을 추구할 때는 깊고 세부적인 부분에도 신경을 썼다. 글재주가 뛰어나고 시문을 잘 지어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일찍부터 『속주지(續州誌)』를 찬수(纂修, 문서를 모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음)하였으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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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진숙(晉叔), 호는 한계(寒溪). 설창(雪窓) 하철(河澈)의 손자이다.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나고 문장과 필법으로 당시 선비들 가운데 이름이 났다. 약관(弱冠, 스무 살)의 나이에 향교의 교육과정을 마쳤고, 성리학에 깊이 통달했으며, 또 예학(禮學)을 밝게 익혀서 원근의 선비들이 찾아와서 물을 정도였다. 『진양속지(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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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신여(愼汝), 호는 사와(士窩).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다섯째 아들이다. 부친의 성품이 엄준하여 어릴 때부터 범절이 몸에 배어서 덕기가 어른 못지않았으며 차차 자라가면서 힘써 문사를 배워서 다듬었고 주자학 공부에 전념하여 주자서 읽기를 자신의 말을 외우는 것과 같이 하였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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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도경(道卿). 설창(雪窓) 하철(河澈)의 셋째 아들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1702년(숙종 28)에 무과에 올라 네 고을에 두루 역임하면서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무로써 드러났다 하더라도 부귀영달에 뜻을 삼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형 양정재(養正齋) 하덕망(河德望)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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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길보(吉甫), 호는 단사(丹砂). 치와(癡窩) 하응명(河應命)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슬기로우며 문장이 뛰어나 여러 번 향시에서 합격하였으나 부모상을 당하여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써 그 문하에서 학문을 이룬 사람이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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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유학자. 본관은 진양. 자는 여해(汝海), 호는 관료(寬寮). 현재(顯齋) 하경현(河景賢)의 현손이다. 영민하고 학업에 자질을 보였다. 삼종숙인 조선 말기의 유학자 회봉(晦峯) 하겸진(河兼鎭)의 문하에서 학업을 받고,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문집으로 관료선생문집(寬寮先生文集)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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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강중(康仲), 호는 예암(豫菴). 석계(石溪) 하세희(河世熙)의 현손이다. 나이 31살에 죽었으나 당시에 작은 안자(顔子)라고 칭할 정도로 학덕이 높았다. 후산(后山) 허유(許愈)가 그 묘에 표(表)하여 이르기를 ‘천자(天資)가 수미(粹美, 순수하게 아름답다)하여 등이(等夷)에서 훨씬 뛰어났고 여기에 조예가 정심한 것을 더했으며 행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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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택후(澤厚), 호는 인재(忍齋). 하호(河灝)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하윤관(河潤寬)은 일곱 살 때부터 뜻이 맑고 깨끗하며 고상하고, 품은 뜻과 행실이 발라 글을 읽을 때에도 이해가 바르고 총명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찍부터 과거는 포기하고 다만 향시에 급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가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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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이보(履甫), 호는 죽와(竹窩). 하윤관(河潤寬)의 손자이며 하응회(河應會)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하일호(河一浩)는 타고난 자질이 너그럽고 후하며 마음이 넓고 깊어 사람들이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아니했다고 평하였다고 한다. 만년에는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으며 학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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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의윤(義允), 호는 동료(東寮).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경운(河慶運)이며 어머니는 은진임씨(恩津林氏)로 임찬원(林纘源)의 딸이다. 부인은 진양정씨로 정주빈(鄭周贇)의 딸이다. 1830년(순조 30)에 출생하여 8세에 친상을 당하고 15세 때는 조부인 부용담(芙蓉潭) 하필룡(河弼龍)의 상을 당하면서도 법도에 한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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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백규(伯逵)이다. 선조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관직이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이 되어 모든 일을 사리에 밝고 엄하게 다스렸으므로 아랫사람들과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때마침 광해군이 모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사건이 일어나자 눈물을 흘려 탄식하면서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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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진백(晉伯), 호는 태계(台溪). 대사간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에 급제하였고, 163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부모봉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상주지방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성태동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효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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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하진(河溍)의 상소문. 하진은 호가 태계(台溪)이고, 본관은 진양이다. 이 상소문은 하진[1597~1658]이 나라에 올린 상소문으로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간절한 심정이 담긴 고문서이다. 하진 상소문에는 사회 상황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의 사회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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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자추(子樞), 호는 국담(菊潭). 죽와(竹窩) 하일호(河一浩)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랐다. 소년시절에는 문충공 하륜(河崙)의 재실인 오방재(梧坊齋)에서 글을 읽으며 포부를 키워나갔다. 부모가 병이 났을 때는 5개월 동안 탕약을 받들면서 한 치도 예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부모가 살아있을 때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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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찬언(贊彦), 호는 행정(杏亭)이다. 생원 하락(河洛)의 현손이며, 하재악(河載岳)의 아들이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9세 때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조희맹(趙希孟)에게 수학하다가 19세 때 스승에게 울면서 어머니 봉양을 위해 돌아갈 것을 고하고 돌아와서는 50년 동안 하루같이 노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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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사중(師仲), 호는 용와(容窩).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종형인 예암공 하우현(河愚顯)을 따라 글을 읽다가, 부친의 명으로 남계(南溪) 이갑용(李甲龍)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여러 번 서울로 과거를 보러갔으나 담당자가 뇌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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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내윤(乃潤), 호는 사연(舍淵). 하자호(河自灝)의 현손이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고 글을 읽었다.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극히 하였다. 만년에는 방장산(方丈山) 가운데에 살면서 학문에 진력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선비의 본분인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몸소 실천한 진주의 대표적인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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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사흘(士屹)이고 호는 사고헌(四顧軒)이다. 습정재(習靜齋) 하응운(河應運)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성품이 강직하여 선행(善行)에 앞장섰다고 한다. 일찍이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찍이 이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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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천기(千期), 호는 태와(台窩). 진사 지명당(知命堂) 하세응(河世應)의 아들이다. 1738년(영조 14)에 38세로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 주부, 직장 등의 벼슬을 지내고 승문원정자 벼슬로 승진을 했으며, 외직으로는 찰방 등의 벼슬을 지냈다. 당시 조정은 당쟁으로 시끄러웠다. 일찍이 부친인 지명당 하세응은 장희빈의 신원을 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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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유학자 하겸진의 문집. 하겸진(河謙鎭)[1870~1946]의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峯) 또는 외재(畏齋)이다. 아버지는 하재익(河載翼)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이고 본관은 진양(晋陽)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3세에 사서와 오경을 익혔고, 곽종석(郭鍾錫)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이승희(李承熙), 장석영(張錫英) 등과 교우했다. 안동·선산·성주와 전국의...